제5장

용드레촌

 

유구한 력사를 두고 길이길이 조선민족의 피와 땀이 슴배인 3천리 강토는 대대로 자손들의 무궁무진한 번영을 위해 몸부림쳤던 조상들의 뼈가 묻힌 땅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세대는 그 고국을 버리고 타국으로 살길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렇다고 이국산천에 생활의 꿈과 희망이 묻혀있는것도 아니였다.

리기영은 <<두만강>>에 썼다.

―장포수(장태오)의 부모도 목숨을 내걸고 두만강을 밤중에 남몰래 건넜다. 월강을 무사히 하였으나 겨울이 닥쳐오는데, 더구나 타국에 가서 어린 자식들과 적수공권으로 어떻게 살겠는가? 그들은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한동안 전전걸식을 하며 정처없이 헤매였다. 나중에는 구걸도 할수 없게 되자 큰 아들을 무후한 청국사람에게 내주었다.

그 집에서는 사의를 표하기 위하여 좁쌀 두말을 내주었다.

청인은 아들 겸 꼴머슴으로 그를 아주 제자식을 만들려고 한것이였다. 그뒤에 그들은 할수없이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였는데 마지막으로 만나볼겸 그 아들이 사는 집으로 찾아갔었다.

과연 그는 청국사람처럼 뒤머리를 땋고 청복을 입었다. 그리고 성명까지 왕모(王某)로 고쳤다는것이였다.

장포수는 지금도 그때 자기 어머니가 청복을 입은 형의 긴 옷소매를 붙잡고 흘흘 느껴 울던 모양이 눈에 선하였다.

아들까지 남에게 주고도 그들은 종내 살곳을 찾지 못했다. ―

하지만 삶의 앞길이 절벽에 막힌 그들은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식으로 정처없는 류랑의 길에 올랐다. 봉금이 풀려서 목숨을 내걸고 강을 건너지 않아도 되였으니 북방 6진의 화전민들은 고삐를 풀어놓은 말처럼 떼무리로 이국타향길에 올랐다.

당시 이주민들은 사판오판으로 온 가정이 떠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집을 두고 혼자서 고향과 <<잠시>> 리별했다. 강을 건너면 살길이 열린다는 풍설에 매달려서 내친 걸음이라 식구들을 끌고 적수공권으로 타국에 갔다가 혹시 장래 일이 비틀어질가 두려운 불안에서였다. 남정들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놓고 가족을 데려가려는 타산이였다.

당시 이주민들의 걸음은 대개 고향과 가까운 강건너를 택했다. 두만강 상류 무산쪽에서는 백두산 지대로, 두만강 중류 회령과 종성에서는 남강(南岡―오늘의 연길)으로, 하류의 경흥 등에서는 곧장 훈춘과 훈춘 가까이 로령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주로선은 천갈래 만갈래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길은 회령―게사처(오늘의 룡정시 삼합진 삼합촌)―달라자―명동―룡정에 이르는 길이였다.

내가 선조들의 이주의 발자취를 더듬어 삼합에 이른 때는 찬바람이 귀뿌리를 때리는 11월말이였다.

삼합의 원명은 게사처이다. 일제 때 무덕툰(오늘의 북흥), 사백사(오늘의 대소), 사대사(게사처) 이 세개의 마을을 합쳐 집단부락을 만들면서 삼합(三合)이라고 불렀다. 지도에서 보면 삼합은 룡정에서 남쪽으로 41km 상거한 작은 진이다. 두만강을 마주한 산비탈에 209호의 인가가 곧게 난 길 량켠에 정연히 들어앉은 아담한 촌락이다. 거기에 대면 맞은쪽 조선의 함경북도 회령시는 번화한 도시임을 한눈에 볼수 있다. 회령은 고층건물이 서고 공장굴뚝이 즐비한 산업도시였다. 회령시에는 유선, 학포 등 몇개의 크고 작은 탄광과 사업소, 기계공장, 회령식품련합공사, 회령제지공장 그리고 세멘트 등 건축재료, 가구, 일용필수품 등 30여개 중앙과 시급 공장과 광산기업소들이 있단다.

삼합촌에서 2리정도 떨어진 강역 산언덕에 2층으로 된 해관건물이 있었다. 벌써 1930년도에 이 자리에 통상검사소가 설치되였고 1949년부터는 삼합촌관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바로 해관건물앞을 흐르는 두만강우에 국경다리가 놓여있었다. 1941년 7월에 개통된 이 국경다리의 길이는 300m, 너비는 6m, 24m의 일정한 간격을 두고 14개의 다리보가 다리를 받들고있었다. 다리 밑부분은 중력식교각이고 웃부분은 <<I>>자형 철가름대가 놓여있었는데 다리 높이는 9m라고 한다. 다리우의 량켠에는 1m 높이의 란간이 있고 적재등급은 <<자동차―10톤>>이란다.

다리우로 무시로 짐을 만재한 트럭들이 오갔다. 숭선이나 남평해관으로는 목재를 실은 차들이 많이 건너왔으나 여기 삼합으로는 별로였다. 해관장의 말에 따르면 수입화물은 대개 명태, 마른 명태, 해삼 등 해산물과 홍삼, 강재가 대부분이고 목재도 있지만 갈수록 약재와 수산물이란다. 반면에 수출화물은 옥수수, 콩기름, 복장류, 휘발유, 재봉침 등이였으나 점차 밀가루와 입쌀, 옥수수 등 량곡으로 단일해진다고 했다. 길림성내에서 도문, 집안 다음으로 출입경이 다사한 삼합통상구는 1988년에 제일 호황기로서 수출입 화물량이 6만 5천톤, 출입경인원수가 연인수로 5만 8천여명이였다고 한다. 두번째 호황기였던 1993년의 수출입화물량은 4만 2천톤, 출입경수는 연인수로 5만 4천여명이였으나 이듬해부터는 하강선을 그어갔다고 한다. (1996년 수출입화물량은 겨우 1만 5968톤인데 그중 수입화물통과량이 4751톤, 출입경인원수도 연인수로 겨우 2만 2718명이란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바로 삼합을 통한 관광객수가 늘어서 1996년 한해동안 중국에서 조선으로 간 관광객수는 2천여명이란다. )

나는 삼합해관을 지나 백양나무가 숲을 이룬 뚝안 중국쪽 섬에서 10여메터밖에 안되는 강폭을 사이두고 회령을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 조선쪽 뚝 너머는 김정숙사적지이다. 푸른 소나무가 질서정연하게 렬을 지어선 속에 두개의 거대한 기념탑이 우뚝 섰는데 하나는 김정숙의 거폭의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글을 새긴것인데 동안이 떠서 내용을 파악할수 없었다. 강북언저리에는 항일시기 김정숙이 타고 두만강을 건너다녔다는 쪽배가 놓여있었다.

회령은 유구한 력사를 가진 도시이다. 멀리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의 기세 사나운 진공에 북방 6진은 물먹은 담벽처럼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그러자 겁을 먹은 경성의 국세필, 명천의 말수, 회령의 국경인 등은 왜놈에게 투항했다. 국경인은 회령까지 피난온 두 왕자 순화군과 림해군을 붙잡아 왜놈한테 바치기까지 했다.

당년 27살 피끓는 사나이 정문부는 북평사로 여기에 이르러 백두산에서 고경진 등 흩어진 의병을 묶어 의거했다. <<임진록>>은 이렇게 썼다.

―군기를 수습해서 회령에 들어가니 왜장 경감뇌가 듣고 미처 군사를 모으지 못하여 제 혼자 말을 타고 나올 때 백성들이 달려들어 경감뇌를 쳐죽이고 정문부를 맞이하거늘 문부가 회령을 회복한후 각 고을에 격문을 전했으니 글에 쓰기를 의병장 정문부는 충의지사들을 거느리고 함경도일대를 회복하고 도적을 소멸하여 나라를 받들고자 하나니 격문이 이르는 날 때를 놓치지 말고 이에 응하라 하였더라―

그리하여 정문부의 의병대는 도처에서 적들을 소탕하면서 9월말에는 경성을 장악하고 반역자들인 국세필, 국경인 등을 처단하였다. 정문부의 지휘밑에 의병부대는 그해 10월 말 길주, 장평 돌고개에서 800여명의 적을 소멸하고 림명과 쌍포에서도 수백명의 왜적을 소탕하였다.

정문부의 의병에 가담하여 관북일대에서 2만여 가등청정의 왜적을 무찌른 의병과 후손들은 임진왜란후 지켜 싸운 나라를 떠나 목숨을 살리지 않으면 안되였으니 우리 민족의 력사는 정녕 피눈물로 얼룩졌다 하리.

눈앞의 두만강은 겨우 신다리를 칠만큼 깊었다. 두만강 코숭이인 화룡시 숭선(崇善) 맞은쪽 조선 삼장리아래에서 조선에서 흐르는 서두수(西頭水)수위가 대폭 낮아진데다가 요 몇십년사이 무질서한 개발로 물이 줄어서 여기 두만강중류도 간신히 개울신세를 벗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100여년전엔 물이 깊고 물살이 세서 이주민들은 대개 겨울 얼음을 타고 건넜다고 한다.

1877년 조선 평안북도 김언삼(金彦三), 함경북도 회령의 장인석(張仁碩), 박윤언(朴允彦) 등 14호 리재민들이 회령에서 강을 건너 게사처에서 밤을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 오랑캐령에 매달렸단다.

나는 이 두가정의 눈물로 고인 이주의 발자국을 더듬어 삼합에서 룡정으로 가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려객을 만재한 뻐스는 두만강을 따라 승적을 지나 북흥촌에 이르러 강을 등지고 가파로운 오랑캐령을 탔다.

아직 겨울 입구에 이른 철이라 눈이 오지 않았는데도 뻐스는 달구지마냥 숨가쁘게 엉기적 엉기적 령길을 톺아갔다.

원래 오랑캐령이라는것은 숭선에서 도문까지의 250km 먼먼 남강산맥(南崗山脈)을 이른 말이였다고도 하고 덕신령과 삼합령을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삼합령 하나에 그 이름이 고착되였다. 그렇게 된 리유는 무엇이였던가?

류원무선생은 <<오랑캐령>>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옛날 중국에서는 주변의 민족들을 4이(四夷), 오랑캐라고 했다. 4이에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 망라되였는데 북적은 녀진족이다. 고려나 조선조에서도 북적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다. ―두만강을 건너서면 그 <<오랑캐>>들이 차지한 땅이였다. 청조시기 우리 민족들은 강을 건너 남강산맥을 넘게 되면서부터 오랑캐령이라고 불렀다. 조선간민들이 그중 많이 넘은 령이 덕신령이였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오랑캐령>>이란 말이 멸시의 뜻이 바래여지고 고향을 등지고 이국땅에 들어선 한(恨)으로 전의(轉意)되여 갔다. 그렇게 되면서 밖에서 오르며 20리, 안으로 내리며 15리―아흔아홉굽이 험난한 삼합령이 그중 신고스러워 오랑캐령 이름을 혼자 가진것이라 생각된다.

오랑캐령은 아흔아홉굽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흔두굽이라고 한다. 고개너머 달라즈에 이르기까지 늘찬 고개길은 숲에 묻혀있고 주변엔 인가라곤 없다. 그래도 지금은 하루 두번 왕복 뻐스가 있어서 호사지만 길도 없는 눈보라 숲길을 허기진 배를 부등켜 안고 한발한발 조여갔을 이주민들의 고충은 어떠했으랴?

이 글을 쓰는 나의 책상앞에는 림원춘선생이 쓴 류룡규일가의 이주의 걸음을 적은 <<분투자의 발자욱>> 제2장이 펼쳐있다.

―한숨과 한탄으로 부풀어오른 오랑캐령, 헐벗고 굶주린 겨레들의 굽빠진 초신짝과 동강난 나막신으로 높아만지는 오랑캐령, 오랑캐령은 리별의 고개, 고생의 고개, 죽음의 고개였다.

―바위도 얼어튀고 솔뿌리도 얼어터진다는 북간도의 혹한이다. 이런 날씨엔 산짐승도 자취를 감추건만 굽이굽이 아흔아홉굽이를 자으며 잔밥들을 거느린 한 가정이 힘겨웁게 오랑캐령을 톱고있다. 류룡규네 가정이다.

<<엄마, 발―발―>>

세살잡이 병섭이가 어머니등에 꼭 붙은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발이 시리다고 울상이다.

―등에 업힌 제 자식마저 살았는지 죽었는지 미처 돌볼새없이 숨이 턱에 닿아 령길로 톺던 공녀는 막동이의 <<발 시리다>>는 그 소리가 되려 고맙게만 들려왔다. 주리고 지친 그 가냘프고 얄팍한 허리에 막동이를 업은데다 머리에 망짝같은 짐을 인 그녀로서는 촌보가 그립고 허기찼다.

―룡규 역시 그러했다. 가마짝이며 호구지책에 쓸 잡동사니를 지게에 멘 그는 사정없이 육신을 내리누르는 무게도 무게겠지만 두루마기 앞섶을 헤치고 안은 막동딸 금선이에 대한 근심이 더 컸다. 골바람이 눈보라를 안아다 사정없이 귀뺨을 빡빡 긁을 때마다 두루마기의 섶을 꼭꼭 여미군 하던 그였다. 그때마다 딸년은 춥다는 소리 한마디 없이 아버지 가슴팍에 꼭 붙은채 숨만 할싹거리고있었다.

―그네들 일행이 오랑캐령 령마루에 올라섰을 때였다.

<<아버지, 저봐!>>

―병일이가 가리키는 눈무지엔 얼어죽은 시체가 눈무지속에서 반나마 드러나있었다. 초신에 감발한 두다리가 눈속에서 비죽이 내밀고 눈보라에 두루마기 기슭이 기폭처럼 펄럭이고있었다. 살길을 찾아 떠났던 한 생령이 오랑캐령에 한을 묻고 누워있었던것이다. 저 시체도 부모처자가 있었으련만 얼어붙은 땅이라 흙 한줌 덮어보지 못하고 흰눈만 덮어쓰고있었다. 불쌍한 족속, 살아 산 보람 없고 죽어 죽은 꼬리 남기지 못하고 이역땅 눈무지속에 누워있다니?―

봄이 오고 눈이 녹으면 얼었던 시체도 녹아 썩어갔을것이다. 무더운 여름 진물러진 시체에는 구데기가 끼고 파리떼가 달라붙어 윙윙거렸을것이다. 성도 이름도 고향도 모르는 시체를 지나가던 이주민들이 가긍히 여겨 흙을 덮어 풍상이나 가려주었다면 다행이였으리!

오랑캐령을 넘어서자 산곡간에 큰 부락이 자리잡고있었다. 룡정시 지신향(智新鄕) 소재지인 달라자(大砬子)이다. 원래 이곳은 화룡욕(和龍峪)인데 만족어로 골짜기라는 뜻이다. 사료에 의하면 이 마을엔 현재 331호, 1407명이 살고있는데 조선족이 556명, 회족이 6명, 그외는 한족이 살고있다고 한다.

룡정과 18km 떨어진 이 곳은 게사처에서 엄동설한 오랑캐령 눈보라속을 넘어오면 꼭 하루길이다. 여기에 이르면 노루꼬리만한 짧은 해가 숲속에 숨고 어둠이 깔린다. 그래서 이주초기 여기 달라즈에는 이주민들의 호주머니를 넘보고 장사속이 밝은 사람들이 주막과 음식점을 만들었다. 광서(光緖)10년(1884년)에 청정부는 여기에 월간국(越墾局), 통상국(通商局)을 세웠고 6년후에는 무간국(撫墾局)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때로부터 마을은 엄청나게 커서 기생집까지 세워졌다고 한다. 광복전까지 달라자는 화룡현 소재지였다.

1990년 10월 연변조선족문화연구회를 세우고 민족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취재길을 떠난 최홍일, 우광훈, 리혜선과 나까지 넷은 여기에서 하루밤을 묵었었다.

산촌의 고요가 깃든 그날 밤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주민들의 발길을 추적하여 저마끔 환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마 장인석, 박인언일행도 여기에 이르러 밤을 잤을거요. 길손을 반겨맞은 주인과 함께 화로불을 뒤적여 가루가 이는 감자를 먹으며 고국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앞으로의 일을 두고 자정이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을테지? 오늘밤 우리처럼말이요. >>

<<그러나 우리와 그분들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는걸 감안해야지 않겠소? 앞길이 막연한 그들의 이야기는 한숨의 고개를 톺는것이고 그분들의 지나온 력사를 더듬는 우리는 감회의 못속을 헤매는거지. 우리는 복받은 행운아인셈이지. >>

<<그때는 손님이 왔어도 바가지에 국과 밥을 담아 대접했을거얘요. 밥이래야 피낫이였을거고 시래기장국이 고작이였겠지요. 숟갈은 나무를 깎아만든것이고―>>

<<김립의 시에서처럼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밥을 한그릇에서 먹고 아버지와 아들이 출입할 땐 단벌옷을 바꿔입>으면서도 인정은 후더워서 멀건 죽대접을 받아도 객은 <물속에 거꾸로 비친 청산을 오히려 사랑>했을거요. >>

잠간 머물렀다가 떠나가는 뻐스에 앉아 지나간 일을 회상하니 감회가 새롭다.

박인언네 일행이 달라자에 이르러 하루밤 기거한 집은 달라자마을어구의 작은 움집이였단다. 주인의 본은 전주이고 성은 리씨였다. 워낙 마음씨가 비단같은 주인은 게딱지만한 움집에 자기들 식솔만도 차고 넘을 지경이였지만 마치도 오래동안 헤여져있던 혈육을 만난듯 반겨맞았다. 몇해전에 두만강을 건너온 그는 처자를 거느리고 륙도하를 따라 들어오다가 륙도하가 해란강과 합치는 합수목 충적평원 륙도구에 자리잡았다. 주위는 천년 묵은 옥토라서 농사가 잘되였다. 그리고 강에는 물고기가 흔하고 꿩이 저절로 솥에 날아들고 뜨락에서 몽둥이로 노루를 때려잡는 고장이였다.

<<하다면 존장께서는 어이하야 여기로 오셨나이까?>>

박인언이 물었다.

리씨가 한숨을 지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기 마련이 아닙니까.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은 없지만요 다만 흠이라면 우물이 없는것이였습니다. 2, 3리밖에 있는 륙도하의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답니다. >>

<<결국 물고생이 싫어서 자리를 떴다 그 말씀이나이까?>>

<<그것도 아니랍니다. 사실은 집터가 센것이였답니다. 한밤중만 하면 집주위에서 자취소리가 저벅저벅 나고 검은 그림자가 언뜰거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뭔가 덜컥덜컥 문을 잡아당겨 열기도 합데다요. 얼마간은 배심을 든든히 먹었지요. <내가 누군데, 정든 고향까지 버리고 온 사람이 너깟 놈들한테 져? 그 어데를 간대도 이보다 더 좋은 곳이 또 있을라구, 어림도 없지. >라고말이지요. 그런데 어느날 굳잠에 들었는데 뿔난 도깨비들이 집으로 들어오더니 다자고짜 나의 팔다리를 잡더니 <허차, 허차!―>하면서 허궁 들고 나가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라 깨여나며 <썩 물러가지 못해, 고얀 놈들!>라고 한소리 지르자 도깨비들은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을 놓더군요. 그 다음부터는 새파란 대낮에도 땅밑에서 소리가 웅웅 나면서 당장 집이 무너질듯이 흔들리는것이 아니겠습니까요. 집이 아니라 덫을 쓰고 사는 그런 기분이라 할수 없이 떠났지 뭡니까. >>

그들은 밤가는줄 모르고 한담을 했다.

이튿날 박씨는 달라자에 눌러앉으라고 억지다짐을 하다싶이 하는 리씨의 호의를 마다하고 륙도구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오후 4시 뻐스는 룡정에 이르렀다.

륙도하와 해란강 합수목에 자리잡은 룡정은 룡정시 소재지로서 7만여 인구를 가진 도시이다. 광복전까지 이곳은 북간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한국사람들은 연변은 몰라도 룡정이라는 이름만은 똑똑히 기억하고있다. 지금은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큰길들이 쭉쭉 가로세로 뻗어있어 번화한 모습이지만 장인석, 박인언 일행이 남부녀대하고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수림이 우거지고 백수(百獸)가 득실거리던 남황위장(南荒圍場)이였다.

바로 이곳이 리씨가 도깨비의 작간에 배기다 못해 자리를 뜨지 않으면 안되였다는 터가 센 륙도구이다. 전주 리씨보다 앞서 룡정땅에 개척자들이 나타난것은 청나라 동치(同治), 광서(光緖)년간이였다. 1858년 함경북도 유선(游仙)군 돌골 사람들인 방염삼(方永三), 리호철(李豪哲) 등이 해토무렵에 종자를 메고 두만강을 건너 70여리 밀림을 헤집고 들어와 농막을 짓고 밭을 일구었으며 늦가을에 타작한 낟알들을 지게에 지고 날라갔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밝은 박씨는 리씨가 버리고 간 오두막에 이르러 주위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거니, 여기가 왕후지지(王侯之地)도 울고 갈 명당이로다. 이 집밑에 룡이 누워있겠다. 룡의 꼬리우에 집을 지었으니 잠자던 룡이 불편을 느끼고 토지신을 시켜 쫓아버리게 한것이 아니겠는가. >>

박씨는 리씨 오두막에서 몇십장 떨어진 룡머리 앞에다가 터를 닦고 집을 짓고는 그가 붙이던 밭에 씨를 뿌렸다. 그해따라 어거리대풍이 들었다. 소문을 듣고 리씨도 다시 이사를 오고 또 다른 사람들도 묻어와서 오손도손 살게 되였다.

어느날 박로인은 호주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보게들, 하루, 이틀 사는것도 아닌데 장장 강물을 길어 먹고 살수도 없지를 않겠나. 안사람들이 말은 안해도 고생이 막심하이. 한즉 내가 우물자리를 보아두었으니 파면 틀림없이 룡수가 나오이. 룡수를 마시면 장수를 낳는다고 했은즉 장차 이 마을을 지킬 장수를 봐야 할게 아닌가. >>

<<존장님 말씀 천만지당하옵니다. >>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찬동했다.

그 이튿날 사람들은 소를 잡고 떡을 치고 술을 빚어 제물을 푸짐히 차리고는 천지신명께 제를 지내고나서 우물을 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파고 파니 샘물이 콸콸 솟는데 한바가지 푹 떠서 마시니 물맛이 좋고 배속아래까지 시원해 장수힘이 솟는것 같았다. 우물이 깊어서 사람들은 용드레를 앉혔다.

그로부터 3년후 박로인은 세상을 떴다. 생전에 우물에서 승천하는 룡을 보지 못한것이 한이였단다. 얼마 후 리로인도 아들을 보고 언젠가는 꼭 룡이 하늘로 올라갈것이니 명심하라는 부탁을 남기고 타계했다. 그 이듬해 귀제날 제사를 마친 리로인의 아들은 밖으로 나오다가 그만 아연해지고말았다. 우물에서 서기가 비쳐나오면서 사방은 일광단을 펼친듯 백주처럼 환해지더니만 뒤미처 무지개가 우물에 비끼고 하늘땅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우물속으로부터 룡 한마리가 꿈틀거리면서 훨훨 날아오르는것이였다.

<<룡이 날아올랐소! 어서 나와 보시오!>>

아들은 환성을 질렀다.

모두들 밖으로 달려나왔다. 밤은 대낮같이 환하고 무지개도 그대로 있었으나 룡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이튿날 온 마을 사람들은 돼지잡고 소를 잡고 우물에서 룡제를 지내면서 후세에 장수가 나고 행복과 행운이 깃들기를 빌었다.

그리고 우물가에 수양버들을 심고 석비를 세워 아무해 아무날 아무시에 누가 우물가에서 룡이 승천하는것을 보았다고 글을 새기였다고 한다.

이 우물에 대한 다른 한 전설은 로맨틱한 사랑이 깃들어있다.

해란강 기슭에 초가를 쓰고 사는 한 모녀가 있었는데 하루는 삯빨래를 이고 강으로 나간 처녀는 아이들이 뱀을 잡아가지고 오는것을 보고 돈을 주고 사서 놓아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뱀이 동해 룡왕의 아들이더라는것이다. 둘은 사랑을 하게 되였고 석달 열흘이 지나서 만나 백년가약을 맺을것을 맹세했다. 그런데 마을의 부자는 빚대신 처녀를 첩으로 가져가려 했고 또한 룡왕은 인간의 처녀를 며느리로 맞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백날이 되던 날 처녀는 우물에 빠져 자결을 했고 마침 그때 룡왕의 아들은 철창을 부시고 나와 우물에 뛰여들어 처녀를 구해 업고 룡왕과 지상 인간이 모르는 곳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뻐스에서 내린 나는 곧추 아름다운 전설을 낳은 용드레우물을 찾았다. 시내 한복판 큰길옆에 버드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속에 한장도 나마되는 비석이 세워져있었다. 돌비석에는 <<룡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세로 새겨져있었다. 비석밑에는 세멘트로 둥글게 우물머리를 했는데 그 우에는 커다란 뚜껑을 해덮고 주먹만한 자물쇠를 잠그었다.

력사기재에 따르면 1886년 봄 정준(鄭俊)이라는 총각이 밭갈이를 하다가 돌각담에 파묻힌 이 우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먼 옛날 녀진족들이 판 우물이고 오래동안 쓰지 않아 돌벽이 무너졌고 이끼가 낀 돌우에는 잡초들이 무성했다. 그들은 무너진 돌벽을 다시 쌓고 우물안을 가셔냈다. 우물은 꽤나 깊었는데 물을 마시니 맛도 별맛이고 이발이 찡 하고 저려났다.

룡정은 조선사람들이 회령과 무산으로부터 연길, 왕청, 훈춘, 화룡일대로 들어가는 교통요충지였다. 회령에서 룡정까지는 건장한 청장년의 걸음으로는 하루길이고 부녀자의 걸음으로는 하루반이였다. 그래서 이주민들은 이곳에서 하루밤을 묵거나 점심을 먹기가 마련이였다. 오가는 길손들은 보짐을 풀어놓고 우물의 물을 마시고 얼굴과 팔다리를 씻고 로고를 풀었다. 길손들은 드레박을 빌어서 썼으므로 여간 시끄럽지 않았다. 게다가 우물이 깊어서 불편하기도 했다. 어느해엔가 이곳에 이사온 한족사람 충(忠)씨가 우물곁에 말뚝을 박고 드레박을 단 용드레를 비끌어맸다. 그때로부터 이 한촌을 용드레촌이라고 불렀다. 용드레촌을 한자로는 부득이 <<룡정촌(龍井村)>>이라고밖에 달리 표기할수 없은데서 오늘의 룡정이 된것이라고 한다.

1934년 회령사람 리기섭(李基燮)은 명성이 높은 이 우물과 우물에 깃든 전설을 기리는 뜻에서 우물옆에다가 <<룡정지명기원지우물>>이라는 비석을 해 세웠다. 그런데 그 돌비석은 문화대혁명 란리판에 잃어졌다. 근간에 누군가 김치움을 덮었던것을 찾아냈는데 지금 룡정시 민속박물관 마당에 놓여있다. 부석처럼 구멍이 숭숭한 돌비석은 허리가 뭉청 끊어지고 글도 몇자가 부서진 돌과 함께 잃어지고 없다면서 박물관장은 애석해했다. 지금 우물터에 있는 비석은 80년대에 정부에서 세운것이다.

여직 력사의 견증자로 유일무이하게 남아있는것은 한그루 수양버들이다. 1989년 마을사람들이 우물가에 네귀바른 정방형의 틀을 짜놓고 수양버들 두그루를 심었다는데 한그루만 용케 살아남은것이다. 나이를 따지면 백살도 훨씬 더 된다.

나는 이미 락엽이 져서 벌거숭이 아지만이 앙상한 나무밑에 서서 터덜터덜 거친 나무줄기에 손을 문대였다.

정녕 너는 보았으리. 얼마나 많은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세대가 정처없는 류랑의 길을 떠나 여기에 이르러 갈한 목 추기며 너의 그늘밑에서 다리쉼을 했는지를!

정녕 너는 보았으리. 살길을 찾아왔다가 다시 고향이 그리워 귀향길에 오른 사람들이 너의 그늘밑에서 한숨을 톺던 가긍한 처지를!

세월이 가고 그 사람들도 갔지만 오늘도 묵묵히 력사를 지켜보고있는 버드나무를 시인 김동진은 아래와 같이 읊조렸다.

용드레우물가/ 늙은 버드나무/ 흘러간 노래 드리우고/

푸른 상념에 잠기였다// 그 많은 비바람에/ 꺾이지 아니한 검질김은/ 흰 두루마기의 힘줄과/ 토스레치마의 내강(內强)이/ 뿌리로 내렸기때문일거야// 할배할매 모두 가고/ 구름처럼 스쳐간 백년세월/ 드레박으로 퍼올린 해와 달이/ 보이지 않는 나이테를 감았구나//아, 당금이라도/ 도화 한가지 접목하면/ 천도복숭아가 주렁져내릴듯/ 기인 머리 풀어헤친/ 용드레우물가 늙은 버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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