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해란강

두만강 천리길은 전설의 천리길이다. 마을마다 골마다 산마다 그리고 강마다에 전설이 있다. 전설의 내용은 각이해도 구조는 동일해 행복한 마을에 흑운이 휘몰아쳤는데 힘장수가 그것을 이겨 어떻게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이다.

나는 두만강 천리 전설속을 뻐스를 타기도 하고 도보로 걷기도 했다. 마을에 이르면 촌장이나 서기를 찾아 현황조사를 하고는 부득부득 로인들이 계시는 집에 기거를 했다. 술병과 통조림, 과자 등속을 사들고 들어가서 술을 부어올리고는 밤가는 줄을 모르고 이야기를 들었다.

룡정시 백금향 소재지에서 20리 상거에 재미내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해마다 명절이면 색다른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었고 누가 산짐승, 들짐승을 잡으면 집집의 솥에서는 구수한 고기냄새가 풍겼다. 온 마을이 한집식구처럼 정답게 살아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동해 룡왕은 그 허실을 실증하려고 사자를 보내여 어른을 데려오라고 했다. 사자가 이르러 룡왕의 뜻을 전하자 마을사람들은 잡아가는줄로 알고 공포에 빠졌다. 부락장은 생사를 가늠할수 없는 길이라 존장으로서 자기가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목수가 지존이 떠나시는것은 부당하오니 자기가 가는것이 옳다 하고 토기군은 농사군이 농사를 짓자면 쟁기가 으뜸이니 자기가 가야 한다고 했다. 서로 위험을 맡아나서는데 결국 처녀가 억지다짐으로 떠나갔다. 룡왕은 자초지종을 듣고 열두 보물상자를 지상에 보냈다. 그래서 먹을것, 입을것, 근심걱정없이 재미나게 산다고 해서 이 마을이 재미내골이 되였다는 전설이다.

내가 기거한 집들에서는 마치도 반가운 친척이나 맞듯 극진히 대접했다. 도시처럼 료리가 푸짐하지는 못했어도 배추김치, 깍두기를 한입 뚝 떼여 우걱우걱 씹으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재미가 도글도글했다. 마치도 20년전 고향농촌에서 훗훗한 인정에 살던 그 세월로 돌아간듯한 기분이였다.

내 고향 북대촌은 해란강이 흐르는 평강벌이다. 해란강을 료금시기엔 갈라(曷懶), 명나라 때엔 합란하(合蘭河)라 했다. 만족어로는 해란비라(海蘭必攬), 그 뜻은 유수하(楡樹河)로서 느릅나무숲으로 흐른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란다.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남강산맥과 액령산맥의 분기점인 증봉산, 계관라즈산에서 발원한 해란강은 화룡시의 부흥향, 토산향, 서성진, 룡수향, 투도진, 동성향, 룡정시의 동성용향, 석정향, 연길시의 장백향을 경유하면서 장장 147km의 흐름길에 봉밀하(蜂蜜河), 장인하(長仁河), 복동하(福洞河) 등 20여개 강을 받아안고 부르하통하에 합류하며 그 류역면적은 2936㎢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한여름이면 해란강이 불어 물에 빠져죽는 일들이 푸술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살을 할려고 해도 겨우 무릎을 치는 개울이라 머리가 잠기질 않는다. 수량이 많던 강이 실개천으로 되여 봄날 모철이면 관개수때문에 이웃간에 삿대질을 하기가 일쑤라고 한다.

그리고 해란강으로 지은 평강벌의 벼는 강물의 오염때문에 건강식품행렬에 들수 없다고 한다. 그만치 해란강의 오염이 심각하다는 이야기이다. 해란강의 오염은 주요하게 룡정시구역에서의 공업페수(95% 농약과 화학비료 등 오염포함)와 생활페수(5%)이다. 룡정시 시내구역에는 제지(造紙), 제혁, 화학공업, 발전(發電), 제약 등 오염조성이 비교적 엄중한 기업이 10여개소, 해마다 570만톤의 페수를 해란강에 배출하고있다.

연변의 자랑이고 상징인 해란강이 기름이 둥둥 뜨고 썩은내가 물큰물큰 나는 오염물이 되여 두만강에 흘러들어 다시 두만강을 오염시키고있다. 해란강의 원래의 모습은 그러하지 않았다.

리해승선생이 쓴 <<망각의 해란강>>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원래 지형이 복잡하고 험준한데다가 삼림 또한 거대하므로 그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물줄기는 산골마다 경지를 살찌게 하였고 일찌기 령락민이 정착하여 풍요한 곡창이 되도록 만들어놓은 해란강이야말로 간도인들에게 다시없는 샘이며 생명의 젖줄인것이다. 해란강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여기저기에서 초가마을을 볼수 있다.

류동(柳洞―원명은 버들골), 부동(釜洞―원명은 가마골), 서짝동, 청산리 등 마을이름도 그렇거니와 용수골, 통수골, 매바위골 등 산골의 이름도 한국적인 지명이 많다. ―

백여년전만해도 평강벌은 무연한 진펄이고 해란강 량안에는 몇호의 집들이 띄염띄염 살고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어느 한 집에 해와 란이라는 오누이가 있었는데 오누이는 조선 삼남에 있는 외가에 놀러 갔다가 벼씨를 갖고 와서 논농사를 하게 되였단다. 그래서 발해국이 멸망한이래 처음으로 벼꽃이 피게 되였단다. 사료에 의하면 연변에서 벼재배를 다시 시작한것은 1900년경 해란강류역인 룡정시교 부근 동량하리사(東良下里社) 대교동(大敎洞)이라고 하니 전설도 무근거한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해와 란이라는 오누이가 벼농사에 성공했다고 해서 강의 이름이 해란강이 되였고 해란강류역에는 이주민들이 점차 늘고 마을이 서서 <<은하 장장 천심(天心)에 별이 종종 류역에는 아리아리 인연이 종종>>(윤해영 작 <<해란강>>에서)하였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숲에서 산짐승을 잡아 고기국에 새하얀 이밥을 말아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던 그 어느해 갑자기 악마가 나타나 <<천하의 땅은 모두 내것이노라>>라며 행패를 부렸다. 악마는 량식과 고기를 모두 털어가고 사람들을 랍치해갔다. 사람들은 도탄속에 허덕이게 되였단다. ― ―

내가 두달여의 답사길에 들린 마을은 적어도 30개는 되고도 남는다. 듣는 이야기들은 모두가 해란강 전설처럼 행복한 마을에 악마가 덮쳐들어 불행이 덮씌워진 그런 가슴 찢기는 한으로 눈물이 솟는다.

내가 처음으로 발길을 멈춘 마을은 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촌이다. 주숙을 정했던 교두려관의 주인 김인룡(金仁龍―48세)은 외지 태생이고 숭선으로 온지가 몇해 되지 않아서 그곳 력사를 잘 모르지만 들은 풍월은 곧잘 외웠다.

<<강건너 조선 부락이 량강도 대홍단군 삼장리구 이곳은 고성리 아닙니까. 옛날 여기에 성이 있었다는 얘기는 못들었습니다마는 어쨌든 당초에 이곳 개척민이 조선이주민이였음은 말해주는거 아니겠습니까. 조선에는 쌔코버렸지만 중국에 리(里)자 붙은 마을이 있습니까? 없다구요. 토성리(土城里―도문시 수남촌)요, 저 유명한 청산리요 하는것 다가 우리 민족이 처음 들어와 자리 잡았다는 근거가 되는거지 뭡니까. >>

연변의 지명은 거의 모두가 우리 민족의 이름이다. 그것은 이 땅의 개척자가 우리 조선족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지명은 이주사와 련계되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밟고 지난 두만강역 마을 이름들만 짚어보노라면 이주초기의 생활상이 주마등마냥 눈앞에 화면으로 그려진다.

남부녀대하고 고향을 떠난 이주민들은 두만강을 건너 대안의 밀림을 헤치고 골짜기를 따라 오다가 막을 짓고 살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골짜기들은 청나라 시기 만족들이 원나라 몽골족들의 습관을 본받아서 붙인 이름들이 있었다. 나의 고향은 이도구(二道溝), 30리 동으로 가면 투도구(頭道溝) 즉 일도구라는 뜻이고 화룡의 원이름은 삼도구(三道溝), 앞장에서 짚고 지났듯이 룡정의 원 이름은 륙도구(六道溝)이다. 처음 인적이 드물 때만 해도 골이름 그대로 불러도 되였지만 범위가 상당히 넓은 도구로 똑같은 이름을 쓰려니 자연 헛갈리게 되였다. 그래서 세호동네(오늘의 도문시 월청향 삼툰자)니, 과부골이니, 어랑골(오늘의 화룡시 룡문향 어랑촌―함경북도 어랑면 사람들이 처음 와서 발붙인 고장이라서 생긴 이름)이니 하고 부르게 되였다. 연변은 골이 많아 동(洞)자 붙은 마을 이름이 많다.

1994년 11월 5일 로과진 죽림촌에서 취재를 마치고 로과로 돌아오니 오후 2시라 짧은 겨울해가 지려도 퍼그나 시간이 있었다. 숭선의 교두려관주인과 동서간이 된다는 로과 량식려관 주인은 로과일대의 력사를 알려면 조창렬로인을 찾아가야 한다고 했다. 년세가 85세이지만 아주 정정하고 기억도 좋다는것이였다.

나는 려관주인의 인도를 받아 그 집으로 찾아갔다.

부락 동켠에 자리잡은 로인의 집은 광복전 로과일대에서 제일 잘사는 지주집이였다고 한다. 팔간 초가에 뜰이 넓고 컸다. 광복 착전에 지었다고 가정해도 벌써 50년도 더 되는 집이였지만 초가로는 금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요즘 세월에 벽돌집들이 많이 앉아서 보기에 궁색스러웠지만 생각을 바꾸어 민속으로 곬을 타면 한결 고풍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인간 팔십이면 쌀벌레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조창렬로인은 나이에 비해 여간 정정한것이 아니였다. 한창 나이엔 쌀마대를 힝힝 메고 다녔을것처럼 느껴지는 장대한 체구가 굽지도 않았고 살도 별로 빠지지 않아서 60을 갓 넘었다는 아들과 비하면 부자간이라기 보다 형제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로인님은 노루가죽을 깔고 앉아 증조부 때부터 물려왔다는 화로의 불을 되작이며 이야기했다.

<<나는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봉파동 태생이우다. 나서 일곱달만에 업혀서 들어왔으니 꼭 85년이 되우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곳엔 늪천지였다구요. 그래서 이곳 이름이 원래는 늪골이라우. >>

봉금이후로 수백년동안 인적이 없었던 곳이라 연변은 수림이 우거지고 사득판이였다. 호미밖에 가진것 없는 이주민들은 맨손으로 나무를 베고 화전을 일구고 늪을 메우고 밭과 논을 풀었다. 현재 로과촌에서 늪자리엔 밭과 논이 앉았다.

근로한 이주민들은 화전을 일구며 부지런히 일했고 땅 또한 비옥해서 씨만 뿌렸다 하면 대풍이였다. 조이대가 참대같이 굵었다고 해서 로과진 죽림촌의 이름이 생겨난것이다.

처음 이주민들이 이사짐을 풀어헤친 고장은 대개 락엽이 쌓이고 썩은 물이 고인 지대라 수토병이 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보짐을 싸들고 강과 샘을 찾아갔다. 그래서 해란강과 가야하가 합쳐서 구불구불 흘러가는 도문시 곡수(曲水)는 일명 합수평(合水坪)이고 원명은 모두미이다. 천평(泉坪), 천수평(泉水坪), 청수동(淸水洞), 청천(淸泉), 약수동(葯水洞) 등은 물과 샘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사람들은 농사도 짓고 소도 키웠다. 바로 룡정시 대소과수농장 부락과 그 아래 마을의 원명은 대우동(大牛洞), 소우동(小牛洞)이란다.

처음 한가정은 한곳에 정착하여 살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자식이 불었는데 아들만 낳는다고 해서 아들골, 차자를 동안 뜬 곳에 세간을 냈다고 애끼골(아기골의 함경도 방언―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과 제동임)이다.

나라와 고향과 조상산소를 버리고 떠나온 그들의 의지는 오직 민족전통의 신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성황당을 세웠다. 마을 가까이거나 산언덕 고목을 국사당 나무로 정하고 신령께서 자비심을 베풀어 개간이 순리롭고 해마다 어거리대풍이 깃들고 자손이 번성하기를 기원했다. 룡정시 덕신향 덕신촌에서 제동으로 가는 령마루에 국사당이 있었다고 해서 그 령 이름이 국사령이다. 그리고 나의 고향에서 10여리 상거에 돌국사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것은 돌로 지은 국사당이 있은데서 유래된다.

농사를 짓거나 방목을 하거나 사냥을 하거나 제마끔 장끼대로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물물교환이나 돈주고 사거나 물건을 교환하는 곳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저자거리가 생겨났는데 바로 나의 할아버지 진사 류제명(柳濟明)께서 세 아들 원상(元相), 민상(民相), 인상(仁相)을 거느리고 강원도 춘천군 남면 후동리를 떠나 두만강을 건너 처음 자리잡은 곳인 질땅이 옛날 장거리였다. 5일장을 보았는데 비가 오면 땅이 몹시 질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지명에서 우리는 이주민들의 당시 개발정황과 생활모습이며 민속 등을 볼수 있고 또한 그 이름들의 변화과정을 통해 민족수난의 력사를 펼쳐보일수도 있다.

1890년부터 1895년사이 청나라 정부는 봉금령을 해제한 뒤를 이어 두만강류역의 지명과 호적을 등록하였다.

조창렬로인은 이야기한다.

<<늪골이 어떻게 되여 로과로 변했는지 아십니까?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우. 옛날 이 곳에 산동에서 이사를 온 한 한족선비가 있었는데 고향에 편지를 쓰면서 마을 이름을 비슷한 발음을 골라 루궈(蘆菓)라고 적었다지 뭡니까. 그후 관리들이 내려와 지명을 등록하면서 그것을 따랐지우. 그 다음부터 늪골이 로과로 되였다우. >>

당시 한족들은 대개 지명을 발음을 따거나 그 뜻에 좇아 등록했다. 화룡시 덕화진 소재지 남평은 원래 잔언더기(낮은 언덕이라는 뜻)였다. 지명 등록자들이 아무리 머리를 써도 이름을 적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음을 따라 장무더지(章木德基)라고 했다. 후에 그 지대가 남향받이 언덕이라고 남평(南坪)이라고 다시 고쳐 올렸다. 골이 든 이름은 막밀어서 동(洞)으로 고쳤는데 그래서 아들골은 자동(子洞), 애끼골은 동생이 세간난 곳이라고 해서 제동(弟洞), 모두미는 합수(合水), 돌국사는 석국(石國)이 되였다. 요즘 연길시로 광천수를 팔러 다니는 차에 제법 민족 고유어를 쓰노라고 애쓴 흔적은 보여 가상히 여겨지도록 <<돌나라물>>이라고 씌여있는데 물의 출처는 석국이 분명할지라도 지명유래에 대한 무지의 표현이다. (음도 뜻도 파악할수 없는것을 아예 음과 뜻을 총동원시켰다. (국사당이 있는 언덕이라고 해서 국시당묵데기(국사당언덕이라는 말의 함경도 방언)는 궈쓰링(國師嶺), 동짝골(동쪽골의 함경도 방언)과 서짝골(서쪽골의 함경도 방언)은 동쭤동(東作洞), 서쭤동(西作洞), 질땅은 앞의 질은 근사하게 지(吉)로 뒤의 땅은 뜻을 따서 따지의 지(地)로 했는데 지금은 그대로 길지로 불린다. 대우동, 소우동 역시 크다의 대(大)와 작다의 소(小)자를 앞에 놓고 중간의 소 우(牛)는 번거롭게 음을 따서 소(蘇)로 하고 다시 골은 동으로 고쳤다. 그래서 대소, 소소가 되여 지명유래를 캐지 않고는 도저히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다. 훈춘시 경신진의 유리동(玻璃洞)의 원 이름은 벌등―벌에 있는 더기라는 뜻인데 한어로 류사음을 따서 적은것이 그만 류리동이 되였다. 화룡시 용화향 상화촌에는 차돌령이 있다. 원래 산성이 있다고 해서 산성령(山城岭)이라고 하기도 했으나 그 고개를 넘자면 발부리로 돌을 차면서 걸을 정도로 돌이 많다. 그래서 돌차개령이라고 원망조로 부르다가 차돌령으로 굳어졌는데 그 뜻을 무시해 백석령(白石岭)이라고 하는데 찬다는 뜻을 차돌로 오역을 했던것이다.

조창렬로인은 말씀하셨다.

<<지명을 등록하면서 호적을 올렸다우. 치발역복이라고 청국사람처럼 앞머리를 깎고 길게 외태를 드리우고 호복을 입어야만 입적을 시키고 땅을 가질수가 있었다는거우다. 만족들이 청국을 세우고 행한 <류두불류발, 류발불류두(留頭不留發, 留發不留頭)>라는것과 같다우. >>

로인은 잠시 말을 끊고 연필로 공책에다가 한자를 적어보였다. 어릴 때 구학을 배운 로인은 아주 유식했다.

<<그때 이곳엔 대부분 조선족이였고 한족도 더러 살았다우. 모두가 같은 운명이였지유. 하지만 한족들은 청국사람이라서 치발역복을 쉽게 받아들였으나 조선족은 죽기보다 더한 모욕이였다우.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강을 건너갔지유. 어떤 곳에서는 총각을 내세워서 치발역복을 시키고 그의 이름으로 호적을 올리고 땅문서를 가졌다우. 어차피 총각은 상투가 아니라 머리태를 늘였으니 피장파장이 아니겠수? >>

청조정부에서는 재정수입을 늘이려고 봉금했던 관황지(官荒地) 또는 황산지(皇産地) 등을 방매했다. 그때 관청의 세력을 업고 광활한 황무지를 헐값으로 점령하여 일약 대지주로 된 지방의 관리, 상인, 부자들은 점산호(占山戶)가 되고 피땀으로 개간한 땅을 점산호에게 략탈당한 사람들은 포산호(包山戶)가 되여 빈털터리로 나앉았다.

<<길림성방황규칙(吉林省放荒規則)>>의 내용은 이러하다. 관황지를 대단(大斷)으로 획분하였는데 1단은 1정(一井)이라고도 했다. 그 면적은 36방(方―, 방은 45헥타르)이였다. 관부에서는 1정내의 적당한 지역에 2정을 떼여 촌락기지(屯基地)로 하고 지세를 면제했다. 황지를 점유하는 사람들은 대개 한 소겨리에 4방의 면적을 점유할수 있었다. 그리고 지방관료들이 합자로 꾸리는 <<토지개간회사>> 등은 면적을 제한하지 않았다. 토지가격은 아주 쌌는바 상등지 1헥타르가 2원, 중등지는 1. 50원, 하등지는 1원이였다. 황무지 점유자는 5년내에 전부 개간해야 했고 만약 개간하지 못하면 몰수했다. 관료, 군벌, 상인들은 청장(淸丈) 인원들을 매수하여 광활한 황지를 점유했다. 말을 타고 다니면서 황지의 사면에 말뚝을 박고 토지를 점유했는데 이것을 <<포마권지(跑馬圈地)>>라 했다. <<점산호>>들의 토지증명서엔 <<동은 수림, 서는 강, 남은 수림, 북은 개울>>식으로 되여있어서 토지면적은 훨씬 많았다. 바로 그속에 땅을 개간하고 살던 이주민들은 하루 아침새에 점산호의 소작인으로 되여버렸다. 말하자면 포산호가 된것이다. 당시 유명한 점산호들로는 연길현 (지금의 룡정시) 세린하의 손영명, 화룡현의 무수훈, 국자가의 한추정 등이였다.

<<훈춘현의 대지주 한희삼은 경신 소하전 사람이였수다. 낯판대기가 박박 얽어서 곰보딱지라고 불렸지우. 1904년에 포대촌 채건숙부농의 품팔이로 살았다우다. 자식 못생기긴 했어도 체대가 좋아 일을 잘한 덕에 주인집의 사위가 됐다지 뭡니까. 잘될 놈은 뭐가 아홉쪽이라고 하더니―귀화입적을 한데다 밥술이나 들게 되자 조선 종성군 삼봉동에 사는 주창기라는 사람과 함께 해삼위에 나들면서 소장사를 했지유. 주창기가 소를 사보내면 해삼위에 가서 팔았는데 소를 몰고 가다가 빼앗겼다느니, 잃어버렸다느니, 밑졌다느니 하는 식으로 칠백마리나 떼먹었다우다. 그래서 5년새에 벼락부자가 되여 천칠백무의 땅을 차지했다지 뭐유. >>

훈춘시 경신향 옥천동의 김광익(金光翼―74세 경신진 권하촌 태생)로인이 들려준 말이다.

조창렬로인도 화룡의 유명한 지주 리영춘의 치부사를 이야기한다.

<<리영춘은 함경북도 온성군 훈융면 사람이구 나보다 열다섯살 이상이니 1896년생이라우. 아버지는 외자 이름으로 문(文)인데 1906년 길지에 와서 한족 류(劉)가 집에서 목수를 했고 영춘이는 돼지를 몰았다우. 글은 한자도 모르나 중국말은 청산류수였다우. 후에 중국정부에서 조선인들을 입적시킬 때 먼저 입적한 영춘이는 이주민들을 동원하여 입적을 시키면서 입적비를 떼먹었다더구만. 1919년 리영춘의 녀동생 춘화가 화룡보안퇀 사련장(史連長)의 첩으로 되고 영춘이는 매부덕에 화룡현 명신사 사장이 되였지우. 그자는 대상으로 1, 600여헥타르 토지를 가진 대지주가 되였지라우. >>

피땀으로 일군 땅을 빼앗기고도 개간민들은 하소할 곳조차 없었다. 당시 부패정도가 얼마나 한심했으면 길지의 한사람은 대낮에 덕화에 있는 관청으로 초롱불을 켜들고 들어갔겠는가? 관리가 까닭을 물으니 <<하도 세상이 어두워 길을 볼수가 없다>>고 대답했단다. 하루 아침새에 땅의 주인으로부터 소작농으로 된 사람들의 생활형편은 이루 형언할수 없었다.

연변일보에 실린 한희삼 죄행에 대한 공소문에서 하나만 실례를 들어보자.

―소작료는 처음에 4:6제였고 후에는 5:5제였다. 한희삼은 해마다 탈곡철이 돌아오면 탈곡장에 사람을 보내여 농민들이 죽건 살건 낟알 한알 곯을세라 재촉하여 소작료를 실어가군 했다. 이렇게 혹독하게 긁어가다보니 어떤 농민은 일년내내 뼈빠지게 벌어도 가을 가서 이것저것 다 떼우고나면 빈주먹밖에 남지 않아 호구지책이 막연하였다. 1921년 음력 8월 빈궁한 농민 강명남이 경신으로부터 포대촌에 이사하여 한희삼의 땅 150무를 부쳐 가을에 140마대의 량식을 거두었는데 소작료로 67마대를 바치고 75마대가 남았으나 봄에 꾼 종자, 식량과 소변리를 치르고보니 오히려 3마대가 모자랐다. ―

동족이고 같은 이주민지주가 이러했으니 타민족 지주의 소작농으로 탈락한 당시 사람들의 처지가 어떠했으리라는것은 더 말치 않아도 알수 있을것이다.

조창렬로인은 계속 말했다.

<<땅의 주인으로부터 지주의 노예로 된 사람들의 처지는 우마보다 나을것이 없었수다. 게다가 지주무장과 마적들의 시달림까지 받아야 했지우. ―>>

작가 리기영은 <<두만강>>에서 이렇게 썼다.

―동북지방은 옥토뿐만 아니라 또한 희유의 금은 산지였다. 그리고 도처의 밀림속에는 산삼이 많이 나고 사슴이 떼를 지어 다니여서 수렵지대로도 유명했다.

이 모든것은 중국인민들에게도 호기심을 야기시켰다. 특히 과잉인구를 가진 중국본토의 산동, 하북성과 산서성의 빈민들은 극형을 당할줄 알면서도 모험적으로 잡입하여 산삼과 금광을 잠채하였다.

그들이 이 지대로 들어오는것만도 범죄행위로 처벌을 받게 되는데 산삼과 금을 캐는것은 더 큰 죄를 짓는것이였다. 하건만 그들은 범죄를 직업으로 삼는 법외지인(法外之人)이기때문에 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후에 <<금캐는 도적(金匪)>>과 <<삼캐는 도적(參匪)>>이 생기였다. 금비와 삼비는 금은과 산삼산지로 유명한 곳에서 집단적 활동을 하였다. 수십명 혹은 수백명씩 작당한 그들에게는 당자르(當家兒)라는 두목이 있어서 무장을 들고 방위태세를 취하였다. 그들은 만청정부의 지방 관리들과 토호의 습격을 방비하기 위하여 무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산림지대에는 아편을 많이 심었는데 그에 따라 연비(烟匪)가 생기였다. 동북지방이 차차 개척됨에 따라서 목재업이 성행하였다. 그것은 또한 목비(木匪)가 생기게 하였다. 여기에 금전을 강탈할 목적밑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는 인비(人匪)까지 합친다면 동북지방은 가위 <<5비(五匪)>>가 발호하는 광활한 무대를 펼쳐놓은 셈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말을 타고 다녔기때문에 속칭 <<마적>>이라고 불러왔다.

림원춘선생은 <<분투자의 발자욱>>에서 당시 마적들이 살판치던 사정을 이야기했다.

―덜커덕하고 룡규네 집 정지문이 열렸다. ―놈들은 홰불을 들고 집안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헌 이불 한채에 발을 묻고 해살처럼 둥그렇게 누운 잔밥들, 헌 구들깔개 한잎, 도적이 들어왔다가 되려 제 저고리라도 벗어놓고 갈 가난으로 꽉 찬 집안이였다. 인정 사정 두지 않는다는 마적들이였으나 집안에 하도 가난기가 서렸던지 놈들은 구들에 올라올념도 움직일념도 않았다.

<<타마디 쪼우바(제길할 가자). >>

―그들이 어찌 알았으랴? 동량리경찰서와 너페토비가 한바지를 입고 한가마밥을 먹는다는것을. 간밤의 용천골 봉변도 토비들과 경찰서가 짜고 한짓이였던것이다.

그날 저녁녘에 용천골에 희한한 소문이 돌았다. 돈 30원과 좁쌀 한섬을 갖고 너페 아무아무 곳에 와서 리갑장네 동생을 찾아가라는것, 사흘내에 약속한 지점에 가져오지 않으면 동생을 죽여버린다는것이였다.

―그들 일행은 늦은 점심때가 되여서야 약속한 지점, 너페로 올리뻗은 오솔길 바위굽에 이르렀다. ―리갑장은 후둘후둘 떨면서 가슴에 품었던 지페를 들고 대장이듯한 권총 쥔 녀석에게 바쳤다. 그놈은 손가락을 입에 넣더니 <<휙―>>하는 휘파람소리를 내는것이였다. 그러자 소나무숲속에서 눈을 싸매이고 결박당한 사람이 토비를 따라 나타났다.

리갑장의 동생이였다. ―

조창렬로인은 이야기했다.

<<당시 여기 늪골에는 왕퀴(王魁)라는 한족지주가 있었는데 50여명 사병(私兵)을 기르면서 이주민들을 털기도 하고 강을 건너가서 조선마을들을 략탈하기도 했다우. 한번은 무산진위대에서 흥암(오늘의 삼장)으로 통신을 떠난 병졸 둘이 치마대로 강을 건너 삼장으로 가다가 실종되였지우. 무산에서 삼장까지는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아흔아홉굽이라 옹근 사흘길이라우. 그런데 강을 건너 늪골로 해서 질땅을 지나 강변을 따라 가면 하루길밖에 안되니 아마 그들이 걸음을 덜려고 한것 같수다. 당시 무산진위대에서는 로일전쟁이 금시 끝난 후라 화성대, 퉁포, 활, 창을 버리고 로씨야군의 외발백이 총으로 무장을 바꾸었다우. 그것을 욕심낸 왕퀴의 졸병들이 그들을 죽여서 두만강에 처넣고 총을 빼앗았던거지우. 통신을 떠난 사람은 하나는 무산태생인 박자문의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남선 사람이였다우. 마침 시체를 강에 처넣는것을 본 이주민이 무산진위대에 달려가서 고발을 했수다.

무산진위대 대장은 라하성(羅河成)참위였다우. 진노한 그는 병졸 백명을 뽑아 돈 5섯냥과 광목 여섯자씩 나누어주고 술판을 벌렸지우. 저녁들을 푸짐히 먹고 그들은 짚신 감발을 하고 나루배에 앉아 강을 건너 치마대와 개미골로 두길로 해서 늪골 왕퀴집을 포위했다우다. 그런데 높은 토성을 하고 그속에 있는지라 쉽게 공략할수가 없었다우. 뒤산등성이에 매복하여 사격을 들이댄다해도 거리가 멀어 눈먼 총질밖에 안되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공격을 한다면 총구멍으로 쏘아오는 탄알에 사상자가 많이 날것이였다우. 게다가 고요한 밤이라 총소리가 수십리까지 전해질것이라 30리 상거 질땅에 주둔한 청군이 증원이라도 온다면 랑패가 클것이였다우다. 라참위는 화공을 들이대기로 했지우. 그런데 모두 아라사 총으로 무장을 했으니 활이 없었지 뭐겠수. 마침 강건너 남촌에 무산진위대 출신 리연풍이 살고있었는데 그한테 활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지우. 그래서 병졸을 보내 리연풍을 불러왔다우. 리연풍은 류엽전(柳葉箭)에 궁초를 멕여서 류황을 발라 화살을 날렸지우. 단 세살을 쏘았는데 한참 있을라니 토성안에서 화광이 충천하고 <불이야!>하고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성밖으로 달려나왔다우. 그때 몰사격을 하면서 공격을 들이댔지우. 왕퀴는 아편을 먹고 집에서 타죽고 사람들은 전멸을 당했다우. 겨우 한사람이 살았는데 조선 독소리에까지 도망을 간것을 리언배라는 사람이 석달동안이나 피신을 시켜주었다지 뭡니까. 후에 그 사람이 목숨을 살려준 은공으로 대상 열흘갈이 밭을 주어서 광복이 날 때까지 리언배는 여기 늪골에서 손꼽는 지주였다우다. >>

두만강은 피의 강이였다. 답사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마을사람들과 한담을 펼라치면 장수바위요 장수발자욱이요 하는 전설이 담긴 절벽과 바위가 아무곳에 있다기도 하고 마을 어데에서 백골이며 화살이며가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들을 수없이 털어놓았다. 1994년 11월 8일 남평에서 룡연으로 가는 걸음에 뻐스를 갈아 타려고 류신(柳信)에서 두시간 다리쉼을 하는 사이에 울바자를 하는 길옆 집사람과 이야기를 했다. 산비탈에 30여호 초가가 앉은 이 마을은 예전엔 백만호목재회사의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라서 꽤나 번화한 고장이였다고 한다. 백만호목재회사는 화룡에서 유명한 지주인 리영춘이 일본인과 합작으로 세운 회사로서 목재를 해서는 류동하(流東河)에 띄워 여기까지 와서는 떼목을 무어 두만강으로 해서 운반을 했단다. 그때 이 마을엔 려관, 음식점도 있었고 회사의 직원이였던 일본인 두호도 살았다고 한다. 이곳의 토지는 대개 맞은쪽 강건너 조선 아양리 허송과 한성봉의 차지였단다. 그래서 겨울 강이 얼면 두지주는 우차를 가지고 강을 건너와서 소작료를 받아가군 했다는것이다. 마을뒤는 경사가 급한 산인데 그 산에 장수바위굴이 있고 작두날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날에 글이 새겨있더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아래 두만강역엔 늪이 있었고 늪자리에서 숱한 백골과 화살촉이며 창이며를 발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내속은 모두 몰랐다.

그날 저녁 룡연일대에서 유명한 이야기군이고 학식가인 현송원(玄松元 67세 룡연 태생)로인 집에서 주숙을 하면서 그 까닭을 물었다.

밤중에 술상을 챙겨놓고 한잔을 하면서 로인은 마치도 자기가 겪기라도 한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쳤다.

<<룡연은 룡이 승천했다는 고장이요. 크고 깊은 늪이 많았다오. 지금은 다 말라버렸지만―룡연의 력사는 백년도 넘소. 제일 처음 여기에 자리를 잡은 사람은 김수문장이였다오. 수문장이란 서울 왕궁에서 궐문을 지키던 군의 책임자를 이름이라오. 리조말엽 왕궁수위장으로 있다가 죄를 짓고 락향해서 함경북도 경성군으로 왔던 그는 가족과 농군들을 거느리고 여기에 와서 집을 짓고 땅을 일구고 살았다는구만. 그런데 류신 파십령에 마적들이 둥지를 틀고있으면서 쩍하면 마을에 들어와서 소를 가져간다, 쌀을 빼앗는다 늘 로략질이라 한시도 속 편한 날이 없었다지 뭐요. 새파란 대낮에도 강을 건너 아양, 냉굽이 등 마을을 침노했다오. 결국 김수문장은 무산 진위대에 가서 구원을 요청했지. 같은 피를 나눈 동포들이 간도땅에서 피해를 당한다는 소리를 듣고 참을수가 없은 진위대는 20명을 파견했다오. 책임자까지 하면 21명이였다나 하더구만. 그날 냉굽이에 와서 점심들을 먹었는데 밥상에 오른 수절이 20개라 꼭 한개가 모자랐다오. <이보소, 주인 아낙네야, 나한텐 어째 수절이 없소? 손으로 먹으라는건가?> 그 사람이 꽤 불만이 섞인 소리를 해서야 주인 마누라는 사죄를 하고 수절을 챙겨주었다누만. 당금 싸움터로 나갈 판인데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기도 했지비. 식사를 마치고 병졸들은 강을 건너서 파십령을 진공하기 시작했다오. 대승을 했는데 그날 아군은 한사람이 죽었는데 공교롭게도 수절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라 하더만 그래. ―

그후 진위대가 돌아간후 마적들은 대보복을 했다오. 당시 룡연에 40여호가 있었는데 마적들은 평산대 당반에 까마귀떼처럼 달려들어 돌연습격을 해서 마을을 재더미로 만들었다오. 다행이 사람들은 미리 알고 강을 건너 피난을 했으니 목숨은 겨우 건졌다지만 그 손실이 대단히 컸다 그거요. 그후 다시 건너와서 초막을 짓고 다시 마을을 세웠다는구만. 마적이 아무리 무서워도 농사군은 밭을 따라 오게 돼있다오.

작가선생도 아시겠지만 리범윤이가 북간도 관리사로 룡정에 와서 사포대를 조직했지 않았소. 개척민들의 자주정신과 자치활동을 조직하고 지도하면서 실력을 키웠다오. 지금은 우리가 지나간 일을 한담으로 되뇌이지만 이루 형언할수 없는 비참한 처경이였다우. >>

해란강전설은 정길운선생의 필끝에서 이렇게 적혀갔다.

― ―

이듬해 가을이 돌아오자 포악한 악마는 또 달려와서 량식과 미녀를 빼앗아갔다. ―마침내 농민들은 호미를 들고 어부는 노를 들고 일떠났고 힘장사 해는 서슬푸른 장검을 비껴들고 사람들의 앞장에 섰다.

어느날 악마는 또 천근짜리 장도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용감한 해는 뛰여나와 대성질호하며 악마에게로 달려들었다. ―해의 칼이 번쩍하더니 악마의 대가리가 털썩 하고 강가에 떨어졌다. ―그러나 떨어진 놈의 대가리는 또 인차 되붙었다. ―순간 해의 장검이 번쩍하고 악마의 모가지를 잘랐다. 악마의 대가리가 또다시 붙으려고 풀떡풀떡 뛰는 위기일발의 찰나에 란이 나는듯이 달려와 치마폭에 싼 매운 재를 악마의 모가지에다 확 쳤다. ―그러자 마을사람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악마의 시체를 강물속에 처넣어버렸다.

―용감한 해와 총명한 란이여, 해란이여!

그제부터 이 강 이름도 해란강이라 불리여졌다고 한다.

해란강전설의 물결에 동년의 꿈을 띄우며 해란강의 물을 먹으며 자란 나는 전설의 후손이다.

나의 할아버지세대가 피눈물로 엮은 전설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이다. 그들은 가슴 찢기는 전설의 주인공이였다. 필경 나의 생애 역시 장차 후손들의 구담에 오르는 전설로 될것이다. 하다면 나의 오늘의 답사가 한토막 애환의 전설로 남지 말기를 바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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