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의 장편인물전기

1974년 우경번안풍(右傾?案風)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등소평이 국무원 부총리로 재임하여 경제건설을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강구하자 자본주의 복벽을 꿈꾼다는 죄명을 씌워서 투쟁을 하는 운동이었다. 당시에 그것을 계급투쟁의 새로운 동향이라고 표현했다.

수곡의 당조직에서는 계급의 적들의 복벽을 방지하기 위하여 우파분자이고 역사반혁명 분자이며 반동적 민족주의 분자이며 일본간첩이며 남조선 간첩인 박재호에 대한 투쟁의 공세를 새롭게 일으켰다. 하루도 아니고 연속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투쟁이 연장되어가자 거의 20여 년을 참고 참았던 박재호의 인내심이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목에 건 푯말을 벗어 내치고

<<나는 죄가 없다. 모든 것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라고 외쳤다.

그러자 당서기가 단에 올라서서

<<우리의 가장 경애하는 수령이신 모주석께서는 <일체 반동적인 것은 치지 않으면 거꾸러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박재호 놈의 이러한 작태가 바로 모주석의 영명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놈은 감옥에 처넣어야 합니다.>>

라고 연설을 하고 나서 민병들을 시켜 박재호를 결박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공사(公社; 현재의 향) 파출소에 긴급 전화를 하였다. 얼마 후 경찰들이 와서 수인 차에 박재호를 싣고 갔다.

그리고 그 이튿날 수진이와 경진이를 포박하여 현으로 압송했다. 이미 장성한 자식들이라 아버지를 위해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겉에 드러난 구실은 그들 형제가 마을 청년들을 시켜서 대대의 간부들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청년 몇이 증명을 서기도 했다. 순전한 모함이었다.

그들 삼부자는 서란현 공안국 미결수 감방에 갇혀 있었다. 아버지는 앞 건물에, 두 아들은 뒷 건물에 갇혀 있었다. 박재호는 정치범이고 중범이라고 해서 족쇄며 수쇠며 채웠고 두 아들은 일반 잡범들과 함께 가두었다.

<<영감을 만나러 감옥에 가면 저 먼 데서부터 족쇄와 수쇠소리가 절그럭 절그럭 울려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제는 끝장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났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허연 간수가 당신 남편은 큰 죄가 없으니 시름을 놓으라고 안위를 주데요. 역사반혁명이며 우파 등등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고 현행죄가 없는 한 도형에 떨구지는 못할 것이라고 합데다. 그리고 영감은 영감대로 대대에 있을 때보다 감옥에 있는 편이 낫다고 합데다. 투쟁도 받지 않고 강제 노동도 시키지 않고 오히려 심심해서 죽겠다는 겁니다. 하긴 나를 위안해서 하는 말이긴 했어도 사실 영감한테는 감옥 보다 사회가 더 무서운 감옥이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부인의 말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가 없었다.

여섯 중에 장정 셋이 감옥에 가고 나니 식구가 단번에 절반이 준 셈이었다. 아내는 또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거의 찌그러지는 초가에서 쓸쓸한 나날들을 보냈다.

장마철에 잡아들어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집 천정으로는 비가 낙수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뒷벽이 허물어져 내렸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에서 가냘픈 여인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하루라도 거를세라 일에 나가야 했고 쉼 시간이면 풀을 뜯어다가 돼지를 먹였다.

부자간에 감옥에서 돌아오면 잡아서 몸보신을 시킬 생각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이 조만 간에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아무리 하늘이 무정해도 죄 없는 사람을 도형에 떨구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꼭 2년만에야 남편과 수진이가 놓여 나왔다. 보통 돼지는 일년 정도 키우면 팔든지 잡든지 하는 데 그 번의 그 돼지의 수명은 그들의 감옥살이 시간 만치 명이 붙어있게 되었던 것이다.

억울하게 5년도형을 받았던 경진이마저 3년을 징역을 살고 돌아온 바로 그 해에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1979년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되면서 박수진과 그 자식들은 무죄선고를 받았다. 천추(千秋)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으로 꼭 21년을 살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사남 1여의 자식들 모두가 반동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지고 갖은 천대와 고생을 받으며 자라났다. 아들 박수진은 종신불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물론 부귀영화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가 광복된 이후 우리 집처럼 대를 이어 박해를 당해온 가정은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날을 회상하는 박수진씨의 눈에는 이슬같이 맑은 눈물이 금방 쏟아질 듯 그득 고여 있었다.

에 필 로 그

2005년 3월 나는 두 번째로 서란으로 갔다.

박수진의 안내를 받아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산다는 집을 찾아갔다.

단층 벽돌집인데 온돌은 두 분이 누우면 태질을 할 자리도 없이 좁았다. 지난 세기 70년대 말에 무죄를 선고받고 나서 서란현 조선족중학교에 복직되고도 썩 후에 직장에서 분배받은 집이란다. 이 콧구멍 만한 집에서 박재호는 아들딸들을 장가보내고 시집을 보냈다. 이제는 자식들이 저들 살림을 꾸리고 세간을 나가고 나니 손바닥만한 온돌이 영감노친의 차지가 되었다.

윗목에는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 요를 깔고 누워 있었다. 벌써 3년째 중풍을 맞고 누워서 사는 이 글의 주인공 박재호씨였다. 그는 말을 못했지만 정신은 바른 대로였다. 그런데 손 움직임마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어서 글을 쓰지 못했다. 생각은 불같은데 표현력을 잃은 안타까운 그의 심정을 성한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랴!

부인과 아들 수진과 딸 선교가 박재호씨가 중풍을 맞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해주었다.

중국 당국은 박재호의 지난 과거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일편단심 모든 것을 바쳐 나라의 광복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는데 죄가 아니라는 판결이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평가가 아닐 수 없었다. 오직 그의 역사에 대해서는 오직 한국만이 올바른 긍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재호는 <<길림신문>>에 박소진을 찾는 광고를 냈다.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사실에 대한 증인으로는 박소진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연길에 살았던 최성순 역시 문화대혁명 시기에 투쟁을 맞고 사망했던 것이다. 최성순은 생전에 자기의 자서전을 써서 남겨 두었었다.

신문에 광고가 나간 이튿날 교하에서 박소진의 친척들이 연락이 왔고 그들을 통해 박소진 역시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박소진의 일생을 쓴 <<어느 독립운동가의 일생>>이라는 책을 얻었다.

이 두 분 조선독립선봉대 총대장 한소진과 제2지대장 최성순의 생전 증언 문장을 얻자 박재호는 온 천하를 얻은 듯 기뻤다. 마치 당년에 한방이가 박재호를 얻고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다고 표현했듯이 박재호는 친구이자 동지였던 둘의 글을 얻고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한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신심에 벅찬 마음으로 한국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올렸다.

그때가 바로 2000년 2월 20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강에 돌을 던진 격이었다.

그리고 2002년 11월 2일 보훈처 회신에서는 <<고 최성순, 고 박문서 두분 자전서는 구체 작성기가 불분명하고 공적 내용 입증하는데 한계가 있어 입증자료로서 채택 안는다는 결과에 한하여 유감을 표합니다>>라는 아주 간단명료한 말로 한 독립운동가의 소원을 묵살해버렸다.

그 소식을 접한 박재호선생은 며칠동안 말이 없더니 갑자기 치매현상을 보였다. 오직 애국애족의 정의사업에 한 생을 바친 자신의 노력이 무시당한 그 충격을 끝내 이겨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21년 동안의 고난보다도 못지 않은 가혹한 판결이었다. 그는 드디어 자기의 모든 과거를 잊었고 그 어떤 욕망도 사라졌다.

그것이 자녀들한테는 또 다른 가슴의 상처로 박혔다.

그들은 2003년 2월 24일 한국 국가보훈처 심사위원회에 드리는 글에서 이렇게 마감했다.

팔십 평생을 타국 땅에서 오직 정의로 일하며 살아오신 주인공, 조국과 민족을 위한 성스러운 일생은 이제 잔년(殘年 여생)에 접어들어 꺼져 가는 촛불인양 희미한테 이미 늦었지만 오늘 다시 한 번 주인공의 후대들은 고국정부의 현명한 판단과 선처가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이제 한 애국애족지사인 주인공으로 하여금 두 눈감으시고 유감 없이 이 한 세상을 떠나가시도록 대한민국 새 정부에서 바른 처사를 해주실 것을 우리 모두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는 박재호 한 사람과 그 자녀들의 소망인 동시에 당시를 살아온 박재호와 같은 모든 분들과 전체 조선족의 소망이기도 하다.

2005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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