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길우의 수필 108>

 

 

申 吉 雨   skc663@hanmail.net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모든 생물들은 다른 생물들에 대하여 나름대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마음이 각각 있는 것 같다. 어떤 것과는 매우 잘 어울리면서 지내지만, 어떤 것과는 싫어할 뿐만 아니라 배척하기도 한다. 이러한 호오반응(好惡反應)은 식물이나 동물의 경우를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서 발견된다고 한다.

실제로, 식물들은 같은 종류의 것끼리는 사방으로 가지를 뻗으면서 서로 잘 어울려 사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모여 사는 군생(群生) 식물과 군집(群集) 동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암수가 다른 식물들은 햇빛과는 상관없이 서로 이성(異性)이 있는 쪽으로 가지를 많이 뻗기도 한다.

그러나, 싫어하는 식물끼리는 함께 더불어 살려 하지 않는다. 가지도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무성하고, 마주한 쪽으로는 잎새들도 별로 많지 않으며 싱싱하지도 못하다. 공격적인 경우에는 싫어하는 냄새를 풍기거나, 가지나 줄기들이 상대방이 있는 곳으로 마구 뻗어 나가 결국에는 그 종의 식물이 쇠진하여져 못 살게 하기도 한다.

집에서 기르는 초화(草花)들의 경우에도 이런 호오 현상이 발견된다. 매일 접하면서 잎새에 쌓인 먼지도 닦아 주고, 새로 나온 순이나 싹들을 바라보면서 가족들과 기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꽃이 핀 것을 보고 반가와 하면서 꽃향기도 맡아 보며 좋아해 주면, 그 식물은 확실히 탈도 없이 싱싱하며 꽃도 잘 피운다. 그러나, 가끔 가다가 물이나 주면서 이것은 왜 이렇게 시원찮은가, 볼품도 없다, 꽃이 피기는 틀렸다 등등 좋지 않은 말만 늘어놓으면, 그것은 실제로 그렇게 되어지고 꽃을 못 피우는 것은 물론 죽어버리기도 한다. 물론 그에 따른 사람들의 정성의 유무가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 그런 태도와 말들이 어찌 식물들에게 영향이 있으랴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이와 같은 호오 반응은 동물들의 경우에 더 잘 나타난다. 개나 거위들이 아는 이에게는 잘 따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마구 짓고 울어대며 덤벼들기도 한다. 기르는 이에게는 잘 따르고 반기지만 남에게는 피하거나 공격적이 된다. 호랑이나 사자, 곰 같은 맹수의 경우에도 어릴 때부터 길러 주면 친근하게 되고 비폭력적이 되며, 상어 같은 맹어들도 처음에는 공격적이지만 친숙해진 뒤에는 함께 지내도 비공격적이 된다고 한다. 이런 반응은 그들 자신의 생명 보호의 차원이 아닌, 심정적인 경우로도 잘 나타난다. 개는 주인이 화가 나 있으면 피신하고, 팔아 버리거나 잡으려 하는 경우에는 도망치려 한다. 소도 장에 나가 팔려 하면 그날 아침죽은 먹으려 들지 않는다. 모두가 그 주인의 마음을 읽고서 행동하는 듯한 생각이 드는 일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막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동물들을 무척 좋아해서 조그마한 어항에다 금붕어를 몇 마리 기르게 한 적이 있었다. 막내는 좋아라고 아침저녁으로 먹이를 주었고, 학교에 가고 올 적에는 물론, 심심하면 가서는 잘 있었느냐고 마치 사람들에게 하듯이 다정하게 말을 하곤 하였다. 그런데, 몇 달 뒤부터는 그 애가 어항에 다가가기만 하면 금붕어들이 모여들곤 하는 것이었다. 다른 식구들은 말할 것도 없이, 가끔씩 먹이를 주기도 하는 내가 다가가도 그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생물체의 호오 반응이 무서우리만큼 정확하고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다. 산에 갔다가 우연히 주먹만한 산토끼 새끼 한 마리를 잡았다. 신기하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막내가 기르겠다고 기어이 집으로 가져와서, 별수없이 나무 상자로 집을 만들어 기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틀을 두고도 토끼는 아무 것도 먹지를 않았다. 무 배추 잎새는 물론, 고구마 밤 같은 것도 일체 먹지를 않는 것이었다. 새와 다람쥐를 기르는 곳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산토끼는 절대로 먹이를 먹지 않으며 기를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기르기는 그만두고 이대로 죽이는 것만 같아서, 아이가 먹는 우유를 강제로 입을 벌리고 몇 모금 먹였다. 그리고는 접시에 조금 담아 주었더니 한참 만에 먹는 것이었다. 인제 죽이지는 않겠다는 안도감과 기어이 길러 보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에서, 이것저것 먹을 만한 것을 잘게 썰어 먼저 강제로 먹인 뒤 놓아 주곤 하였다. 몇 날이 지나고서는 무잎도 배추잎도 고구마도 잘도 먹었다. 막내는 재미가 나서 자기방 책상 옆에다 갖다 놓고 먹이도 주고 대화도 하면서 지냈다. 때로는 방안에 풀어 놓고 함께 놀기도 하고, 안아 주고 쓰다듬기는 물론, 두 달이 넘어서는 먹이를 대기가 힘들 만큼 큰 어미 토끼가 되어 버렸다. 절대로 기를 수가 없다는 산토끼를 드디어 길러낸 것이었다. 그 놀라운 적응력과 친밀감을 지켜보면서 생물들의 호오 반응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호오 반응은 진솔하지를 못하다. 사람들은 감정을 자제할 줄도 알고 거짓으로 꾸며낼 줄도 아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뻐도 기뻐하지 않으며, 슬퍼도 슬퍼하지 않기도 하고, 미운 마음을 숨기고 웃기도 하며, 속으로는 좋으면서도 겉으로는 기분 나빠 할 줄도 안다. 이것은 사람들이 너무 간교해서 일까, 아니면 약삭빠른 삶의 지혜일까?

그런데, 이와 같은 사람들의 호오 반응의 비순수성은 도리어 인간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너무 간교하고 지나치게 지혜로워서 오히려 함께 살기가 힘드는 것은 아닐까? 비교적 순수성이 높은 어린 아이들에게서는 그들이 호오 반응의 몰이해나 착각에서 오는 괴로움이 없다. 도리어 그 천진스러운 순수성에서 우리들은 쉽게 감동하곤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인간의 호오 반응의 비순수성이 우리들의 삶을 더 괴롭고 힘들게 하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런 호오 반응의 비순수성은, 인간이 인간을 교육하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난처하고 괴롭게 하기도 한다.

정성을 들여도 반응이 없고, 매정해도 오히려 따르기도 하며, 평범한 말 한 마디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자기 삶을 전환하기도 하고, 애정에서 나온 한두 마디 꾸중이 가슴에 맺혀 미움으로 일생 동안 괴로워하기도 한다. 줄 사람과 받은 사람 사이에 호오 반응의 순수성이 없었기에 대부분 이들 경우에는 서로의 마음의 상태를 알지 못하며, 따라서 미워하고 괴로워하기까지도 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 ‘농사나 가축은 정성을 들인 만큼 거두지만, 사람은 가르친 만큼 길러지지 않으며 때로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긴다’는 말도 있게 되었나 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호오 반응은 차라리 다른 생물들처럼 순수한 것이 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의 비순수성이 설령 높은 교양이나 훌륭한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거짓은 설령 선(善)이나 옳은 것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직의 덕목이 강조되고 마음의 진실성이 높게 평가받는 세상이라면, 순수한 호오 반응도 그 가치가 클 것으로 생각된다. ‘심혈을 기울여 쏟아도 배반감을 갖게 하는 것은 사람의 경우 뿐’이라는 어느 노인의 말씀에서, 우리는 지혜에 앞서 호오 반응에서의 순수성의 가치와 중요성을 다시 깊게 인식해야 할 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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