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 북안초등학교 김채옥 교사

5.1절 연휴를 어떻게 보낼가 궁리하다가 우리 부부는 고국의 명산인 칠보산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칠보산을 여행하면서  조선은 산수가 참으로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느낌이 새록새록 들면서  미처 다녀오지 못한 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자신이 그간 보고 듣고 느낀 감수를 생각나는대로 정리하여 보았다.

 여행첫날: 5월 2일

아침 일곱시반, 나와 남편은 각지에서 모여온 20여명의 여행객들과 함께 뻐스에  몸을 실었다. 우리팀에는 가족단위의 여행객들이  특히 많았는데 여행객들의 얼굴마다에는 모두 기대와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기다리던 삼박사일간의 칠보산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아침의 나라 조선, 시원하게 펼쳐진 삼합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안에서 보이는 조선은 운무속에 잠기여 있었고 산들이 엷은 면사포를 쓰고 살며시 머리를 내민것이 여간 아름답지 않았다. 아마 두만강이 부리는 조화때문이리라. 수천년이란 세월을 두고 흘렀을 강, 오늘은 두나라의 변계가 되여 다리가 있어도 마음대로 건늘수 없는 경계의 강으로 되고 있다. 중국측에서의 검사는 신분증명과 통행증에 대한 간단한 검사로 모든 수속이 마무리 되였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회령 해관에 이르렀다. 회령해관의 모습은 겉장식이 조금 새롭게 변하였을뿐 예나 조금도 다름이 없는것 같았다. 조선해관에서의 검사는 아주 까근히 진행하였다. 같은 말과 글을 쓰는 한민족이면서도 어쩐지 엄숙한 분위기는 외국이라는것이 실감이 나도록 느껴졌다. 해관에서의 검사가 끝나자 우리는 조선여행사에서 마련한 차에 앉아 여행지점으로 출발하였다.

 회령에서 우리는 김정숙동지의 동상, 고향집과 사적관등을 참관하고 기념촬영을 하고는 회령시가지의 한모퉁이에 자리한 은덕원에서 풍성한 점심식사를 하였다. 돼지고기와 물고기가 모두 올랐으니 산해진미라 해야겠다. 돼지고기도 중국의 조합사료를 먹고 자란 고기돼지와는 틀리게 아주 고소하였다. 그외 고사리 도라지 등 민속음식들로 차려져서 맛나게 먹었던것 같다. 여행사의 세심한 배려로 한가족씩 한자리에서 나누는 맛나는 점심이였다. 식당이름이 은덕원이라고 붙여진것도 김일성장군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것이라도 하니  조선인민들이 김일성주석에 대한 숭배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 같았다.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는 또다시 차에 앉아 목적지로 향했다. 회령시가지를 조금 벗어나니 대덕리, 예전에는 올망졸망한 집들이 가득 했었는데 지금은 전부 새롭게 지은 문화주택들이여서 아주 보기좋았다. 조선도 변하기에 노력하고 있었고 조금씩 그 변화를 보이고 있는것 같았다. 대덕리에서 조금 더 달리니 풍산리였는데 바람과 산이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풍산리는 회령군의 막바지로서 부령군과 회령군의 경계이다. 부령군은 회령군과 이웃한 군이지만 날씨가 좀더 온화한것 같았고 나무잎들도 확연히 더 많이 파릇파릇 돋아나 있어 해양성기후의 영향임을 시사하고 있었다.

다음 우리의 도착지점은 청진시가지—인구 80만을 가진 비교적 큰 중형공업도시라고 한다. 우리는 청진시에서 유치원어린이들의 공연을 관람하기로 하였다. 유치원에는 3살부터 6살까지의 어린이들이 있었는데  애들이 중국의 어린이들보다 퍽 왜소해보였다. 허나 애들마다 한가지 악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이 어린이들이라고 믿기지 않을정도 였다. 애들의 공연을 보면서 교양원과 어린이들이 들인 노력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가히 짐작할수 있었다. 공연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어린이들의 손에 끌려  조선의 어린이들과 함께 덩실덩실 춤도 추었다. 어린이들의 고사리손을 쥐니 동심의 추억속으로 빠져드는것 같아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서글픈 마음도 드는것이 참으로 묘한 기분이였다. 공연을 본후 우리는 청진관광려관에서 려장을 풀었다. 처음으로 와보는 청진시가지의 이모저모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안내원이 마음대로 행차하는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기에 방에 죽치고 앉아 려로의 피로를 풀수 밖에 없었다…

20여년만에 다시 디뎌보는 땅 조선, 강산도 두번이나 변했을 긴 시간이건만 내가 다시 찾은 조선땅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것이 없는것 같았다. 허나 중국과 확연히 다른점은 있었던것 같다. 우리 연변은 아직 백양나무가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인데 여기 청진시가지는 나무잎들이 파랗게 돋아나 완연한 봄임을 알리고 있었다. 오는 길도 내내 비포장도로여서 차가 어찌나 들추는지 차에서 내린 지금까지도 계속 차에 앉아 달리는 느낌이 든다. 하여 여직까지 차멀미란 모른다고 자호하던 나였지만 울렁이는 속을 달랠길이 없는것 같다.

창문을 젖히고 저멀리 청진시가지를 바라보았다. 낮다란 집들에서 희미하게 새여나오는 불빛들이 여기가 인가임을 알려줄뿐 온   시가지가 고요속에 잠긴것이 어쩌면 촌부락을 련상케 하였다. 오로지 사처에서 들려오는 개짖는 소리들만이 시끄럽게 밤의 고요를 깨고 있을뿐이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보다도 더 큰 시가지임에도 불구하고 명멸하는 등불빛도 시끄러운 차들의 경적소리도 사람들을 유혹하는 노래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 연길을 깨여있는 도시라고 한다면 여기는 잠든 도시라고 하는것이 맞는 표현인것 같다.

오늘 여행하면서 느낀점이라면 지난 시간들속으로 려행하는 느낌이 다분히 든다는점이다. 사람도 도시도 어쩌면 30년전의 우리의 모습인것 같아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래일의 여행은 어떠할지 피곤하지만 기대가 된다. 래일은 아침 다섯시반에 식사한다니 출발이 조금 이르것 같다.

조선에서의 첫날밤은 이렇게 고요속에서 흘러간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