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거주, 암보스 문도스 호텔 511호>

▲  헤밍웨이가 살던 암보스 문도스 호텔
헤밍웨이가 쿠바에 처음으로 간 것은 1928년이다. 낚시 여행이었는데 그것이 그를 쿠바에서 살게 붙들어 놓았다. 무엇이 그랬을까? 그의 말처럼 쿠바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어서일까? 궁금증은 그가 맨 처음 살았던 집에서 얼마간 풀려질 것 같다.

헤밍웨이는 1899년 미국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18세의 나이에 신문사 기자가 되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전선에 운전병으로 자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훈장도 받았다.

전후에 특파원이 되어 1921년에 파리에 정착하였다. 거기서 그는 에즈라 파운드 등 여러 문인들과 친교하면서 작품을 썼는데, 1964년에 출간한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첫 작품 『3편의 단편과 10편의 시』(1923), 단편소설집 『우리 시대옐(1925) 등을 써냈다. 1926년에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가 출판되면서 그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1928년에 미국으로 귀국하였는데, 그 해에 쿠바로 낚시 여행을 갔던 것이다.

헤밍웨이가 쿠바에서 맨 처음 살았던 집은 암보스 문도스 호텔(Ambos Mundos) 511호이다. 거기서 『무기여 잘 있거라』(1929)를 출판하여 전쟁문학의 걸작이다, 천년만의 작가라는 말을 들으며 이름을 떨쳤다. 그 뒤에 그는 아바나에 정착하여 1940년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냈고, 1952년에 『노인과 바다』를 간행하여 그 해의 퓰리처상과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암보스 문도스 호텔은 5층짜리 ㄱ자형 건물이다. 아바나 시의 번화가인 오비스포 거리에 있다. 이 거리는 큰 식당들이 연달아 있는데, 식사 때면 몇 명의 악대가 식당과 식탁마다 옮겨 다니며 연주해 주고 돈을 받는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음악과 춤을 동반한 가장행렬도 거리를 누빈다. 우리 일행이 점심을 먹는 때에도 가장행렬이 지나갔다. 그들은 무릎 이상의 높은 막대기 신을 신고서 뚜벅뚜벅 걸었다. 가죽북과 쇠통을 두드리며 원색의 옷자락을 날리며 춤도 추었다. 그 주변에서 몇 사람이 모자를 들고 돈을 받고, 그들은 그렇게 하여 살아간단다.

호텔 앞 거리의 가장행렬(2008)

헤밍웨이가 살았던 호텔은 식당 골목길로 100여m쯤 걸어가니 나왔다. 5층의 붉은 벽돌집이다. 1층으로 들어서니 바로 소문난 카페 플로리디따이다. 맞은편 벽면에는 양쪽으로 헤밍웨이 관련 사진들 30여장이 게시되어 있다. 그 중간에 가파른 나사형 계단과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다.

승강기는 5층까지 오르내리는데 1인당 2.5달러씩 받는다. 5층에서 내리니 앞쪽 벽에 헤밍웨이의 얼굴 부조와 명판과 함께 옆에 511이란 호실판이 보였다. 10여명씩 교대로 입장을 시켰다.

헤밍웨이의 방은 ㄱ자로 된 중장의 한 칸이다. 중간의 각진 부분은 꺾어서 벽면을 만들었는데, 3방향으로 보이는 전망이 매우 좋다. 창밖 건물들의 지붕 너머로 멀리 산줄기들이 보이고, 창 아래로는 식당 길이 내려다보인다. 중심가에 이렇게 전망이 좋으니 살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은 넓지는 않다. 들어선 오른쪽 벽 앞에 이곳에서 집필한 책들을 중심으로 한 책장이 있다. 다른 벽면에는 투우와 관한 사진들이 많았는데 이 기간 특선 전시라 한다. 농장과 기타 연주 등의 그림은 그린 것이 아니라 헤밍웨이가 수집한 것이라 한다. 안쪽에 화장대와 거울, 침대가 놓여 있다. 벽에는 헤밍웨이와 부인, 바다낚시 모습, 손님과 찍은 사진 등도 걸려 있다.

방의 중간 자리에 헤밍웨이가 애용하던 타자기가 책상 위 유리상자 안에 놓여 있다. 타자한 것과 친필로 적은 종이 두어 장도 함께 놓여 있다. 문득 타자기 앞 작은 의자에 앉아 헤밍웨이를 상상하는데 동료가 사진을 찍어 준다. 해설하던 여직원이 빙긋이 웃으면서, 여기서 6년을 살면서 『무기여 잘 있거라』『노인과 바다』등을 집필했다고 설명한다. 투우를 다룬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 1932)과 아프리카 사냥을 쓴 『아프리카의 푸른 산들』(Green Hills of Africa, 1935)도 그 시기로 보아 이곳에서 쓴 것 같다.

창작은 좋은 환경과 여유로운 생활이 받침이 되어야 하나 보다. 전망 좋은 방, 먹고 마시기 편리한 식당가, 즐길거리가 많은 번화가와 가까운 부두, 그런 곳에서 헤밍웨이는 삶을 즐기며 좋은 작품을 써낸 것이다.

방 밖으로 나오니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1층의 바에도 사진을 찍거나 대기중인 사람들로 붐비다. 관광 수입이 국고의 30~40%를 차지한다는 쿠바로서는 헤밍웨이가 아주 큰 수입원이다.

암보스 문도스 호텔 5층방 앞에서
헤밍웨이는 1937년에 핀카 비히아 집으로 이사하여 1960년에 카스트로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살았다. 그가 사들여 장원으로 만든 핑카 비히아를 코히마르의 친구 푸엔테스에게 주고 떠날 때의 그 심정은 어떠하였겠는가. 자신을 ‘쿠바인’이라 생각하고, 쿠바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산 헤밍웨이, 쿠바에서 살면서 우수한 작품들을 써내서 영화와 출판 이익으로 쿠바를 도우며 여유롭게 살던 작가, 그는 미국으로 돌아온 2년 동안 두 차례나 입원하여 전기쇼크 치료를 받고, 끝내는 아이다호의 케첨에서 엽총으로 자살했으니…, 아무래도 정신적 심리적인 요인이 가장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카스트로 쿠바 수상은 지금 병상에 누워 있다. 이제는 그도 헤밍웨이를 고마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살고 있을 때는 물론 그가 쫓겨나고 죽은 뒤에도, 그를 찾아 해마다 200여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와 쿠바에 막대한 관광 수익을 안겨주게 하고 있는 헤밍웨이. 위대한 예술가들은 사상이나 정치적 논리로 너무 몰아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쿠바의 헤밍웨이를 통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월간 『문학공간』 7월호 통권 224호 게재, 2008.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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