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현실진단과 미래가치 평가]

0. 민족문제와 역사의 동시성

역사는 시공을 초월하여 관통한다. 어느 한 시점에 어느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일지라도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누구에게도 유사한 형태로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사실도 과거사로 치부하거나 나와 무관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역사는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되풀이될 수 있는 보편적 사건일 뿐이다. 이른바 역사의 ‘동시성’의 문제이다.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시기, 우리 민족은 서구화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 조상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또는 먹고살 길을 찾아 조국을 등지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넜다. 연변은 우리 선조들이 그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구어낸 땅이다. 조선족 동포들은 그들의 피를 이어받아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질곡의 세월을 버텨온 인간승리의 장본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견뎌야 했던 혹독한 세월이 쌓아놓은 삶의 무게는 여전히 그들을 힘겹게 하고 있다. 식민시대에는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했으며, 한국전쟁 시기에는 아무 이유도 모른 채 ‘항미원조(抗美援助) 보국위민(保國爲民)’이라는 붉은 구호 아래 의용군의 이름으로 북한을 도와 남한과 싸워야 했다.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에는 소수민족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으며 눈부신 발전을 꾀하며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개혁개방 시대에도 그들은 중국 동북지역에 위치한 변방의 한계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잘사는 모국이 있어 기뻐하며 그곳에서 부족한 것을 채워 지난 세월의 설움을 한방에 날려 보내려 하나 이것 역시 그들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아픔이 되고 있다. 모국이 있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고 피를 나눈 형제들이 있어도 따뜻하게 반겨주지 않으니 마음에 병이 도지고 있는 것이다.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과거에 겪었던 슬픈 역사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업보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새로운 소통의 시대에 같은 동포인 우리들마저 여전히 그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 책임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몫이다. 연변과 조선족동포의 역사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함께 우리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처럼, 21세기의 희망찬 미래 또한 그들과 함께 만들어 가야한다. 그 일은 모국에서 상대적으로 잘 살고 있는 우리가 그들의 고단함을 삭여주고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역사의 동시성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현재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아픔은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새로운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서 재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앞에 항상 겸허해야 하며 남이 겪는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그 연원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닌 우리민족 모두의 문제이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혹은 살길을 찾아 불가피하게 선택한 결과였기에 우리민족 모두가 함께 극복해야할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오늘 우리가 그곳에 사는 그들을 외면하고, 우리 다음세대에서 다시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옥토를 일구어 낼 수 있을까. 그들이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참담한 세월을 당당하게 버텨 낼 수 있을까. 대답은 자명하다. 희망이 없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이며 가치 없는 일은 그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0. 연변의 탈영역화에 이은 재영역화

일본 동경대학의 강상중 교수는 탈냉전적 상황과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현상 속에서 세계는 필연적으로 경제적‧이데올로기적 탈영역화를 겪게 되고 이는 다시 지정학적 혼란을 거쳐 재영역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강상중‧이경덕, 2002) 즉 경제적‧이데올로기적 탈영역화와 국가 간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적 공간의 세 가지 요소인 주권국가, 영토적 통합, 공동체적 동일성에서 안정성이 흔들리게 됨으로써 ‘지정학적 혼란’이 야기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상황을 만들기 위한 재영역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강교수는 또 재영역화 과정은 탈영역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고 말한다. 탈영역화는 분열된 구질서의 신조나 관습, 실천이나 이야기의 단편을 활용하여 질서의 재영역화를 위한 조건을 생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21세기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 나아가게 되면서 이른바 재영역화라는 형태로 새로운 관계맺기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새로운 질서를 위한 재영역화는 구질서에서 경험한 다양한 조건들이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강상중교수의 주장을 빌리면 연변은 현재 탈영역화의 도정에 있다. 냉전체제하에서 철저하게 사회주의진영 내의 중국 영역에 갇혀 있었던 연변이 탈냉전에 따른 한중수교 등 이 지역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짐에 따라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조선족동포들도 다시 민족적 감정을 되살려 모국에 있는 친지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넘나들고 있다.

연변의 이러한 탈영역화는 연변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에 한국과 연변,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에 특별한 관계를 상상하는 성급한 기대마저 낳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탈영역화가 탈 중국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연변에서의 탈영역화가 경제적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연변에서의 변화를 지나치게 한국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또 연변의 탈 중국화가 반드시 우리 민족과 동북아시아의 미래에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재영역화 과정에서 핵심적 사안은 조선족이 어떤 정체성을 갖느냐가 될 것이다. 조선족이 중국국민으로서의 현실적‧정치적 정체성을 선호할 것인가 아니면 같은 민족으로서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에 더 많은 의미를 둘 것인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과 조선족사회 간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판단할 때 상황은 결코 한국에게 유리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연변과 조선족사회가 탈영역화에 이어 재영역화를 추구하며 관계를 넓혀 갈 때 우리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한국과의 관계는 물론 동북아시아공동체를 형성하는데도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조선족사회가 함께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데 앞장설 수 있도록 재영역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야 한다. 21세기의 트렌드를 감안할 때 재영역화가 이루어질 경우 냉전시대와 같이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결과가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바램 이다. 그러한 바램은 조선족동포들이 우리와의 감정적 교류가 원활히 이루어질 때만 유효하다.

연변지역의 재영역화가 보다 보편적 질서를 수용하는 형태로 발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동북아시아공동체라는 새로운 질서 형성에 순기능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적 트렌드는 소통의 시대를 형성하는 것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은 치열한 기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연변과 조선족이 동북아시아의 미래와 관련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어느 쪽도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과 한국이 모두 조선족에 대해 한가지 결정적인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는 요인이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이 연변과 조선족을 공동의 이익을 위한 연결고리로 인식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즉, 한국과 중국이 이 문제를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라 넌 제로섬(non zero-sum)게임의 차원에서 동북아시아지역의 공존공영을 위한 상생의 무대 및 행위자로 인식하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연변지역의 재영역화는 그러한 과정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0. 민족주의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공존공영

민족주의와 세계화는 병존할 수 없는가.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이 논리들이 오늘날 동북아시아를 짓누르고 있다. 탈냉전적 상황에서 각국은 한편으로는 21세기의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기 위해 세계화를 지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민족주의의 기치를 드높이고 있다. 탈냉전체제하에서 소통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이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나 양자가 꼭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사고를 확장한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불이사상(不二思想)도 하나의 대안이다. 불이사상이란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또 이것과 저것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뜻하는, 즉 세상만사 모든 것이 어느 하나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중용의 도(道)이다. 이에 따르면 민족주의와 세계화가 결코 상반된 둘이 아니다. 이 두 가지 상충되어 보이는 논리들도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병존이 가능하다. 따라서 민족문제를 고민하면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말하는 것의 부조화를 불이사상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민족주의자이며 동시에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동포주의)의 입장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불이사상 때문이다. 우리민족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민족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지만 인류는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하며 21세기 역사가 그러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기에 세계동포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연변과 조선족동포를 얘기하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동북아시아 공존공영의 세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동북아시아 공존공영의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여할 과제로서 연변과 조선족동포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민족문제로서 연변과 조선족동포에 대한 관심은 세계화의 한 방편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역 간 연대의 형태로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인 셈이다.

또한 여기서 민족문제를 말하는 것은 지난 세기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아픔을 온전히 털어냄으로써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성숙된 조건을 만들기 위함이다. 우리민족은 어느 민족보다 참담한 20세기를 살아왔다. 그리고 세계적인 탈냉전적 화해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반목과 갈등의 세월을 살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남북한 간의 갈등은 남남갈등으로 이어지고 외국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까지도 편 가르기를 강요하고 있다. 20세기 우리민족이 감당해야 했던 슬픈 역사가 아직까지 우리민족을 억누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으로 21세기의 새로운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민족 내부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단순히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보다 근본적인 과제이다.

이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민족이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동북아시아시대를 열어가고 나아가 세계동포주의를 앞장서 실천하기 위해 당장은 우리민족 모두 민족주의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동북아시아시대를 열어나가고 세계동포주의를 실천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당장은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비치지만 이는 더 큰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현시점에서 우리 민족의 내부문제 해결을 위해 민족적 차원의 주제를 제기하는 것은 시대상황에 배치하는 것일까. 최근 한국사회에서 민족문화적 현상을 민족주의로 표현하며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볼 때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족주의가 표출된 적이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일부 논자들은 한국민족주의의 태동을 동학혁명에서 찾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할 때 이는 민족주의라기 보다 사회내부에서 일어난 변혁운동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판단은 엇갈릴 수 있다. 또 작금에 우리사회에서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성향을 지적하며 이를 폐쇄적 민족주의로 부르고 있는데 이 역시 민족주의로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는 민족주의라기 보다는 단일민족의 오랜 전통을 강조해온 관성에 따른, 이른바 ‘우리의식’을 강조하거나 민족우월의식을 표현하려는 문화적 현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폐쇄적 민족주의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은 진정한 의미의 민족주의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다른 민족은 경험하지도 못한 복잡하고도 어려운 민족문제로 끙끙거리며 지난 세기를 달려왔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역설적으로 우리민족 스스로 당면한 민족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민족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타민족을 배척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난 역사의 상흔으로부터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재외동포들을 끌어안고 이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려는 차원에서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하여야 한다. 우리민족의 문제를 다른 민족이 해결할 수도 없으며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시대상황에 적합지 않은,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이해하는 것 또한 적절치 않다. 현실적으로 동북아시아 역내 국가들은 물론 대부분의 국가들이 민족주의 이념을 사회발전의 중요한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민족만이 민족주의를 터부시해서도 곤란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배타적 차원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면 굳이 이를 문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민족주의와 세계화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할 수 있는, 나아가서 서로 상통하여야 하는 가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현실적으로 민족주의를 외면할 수 없고 또 인류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면 양자관계를 배타적인 것으로 보기보다 이들이 서로 조화롭게 화합할 수 있는 논리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보다 중요할 것이다. 조화와 원융의 세계를 추구하는 불이사상(不二思想)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족문제는 영토문제와 함께 근대 국민국가 간에 이루어진 갈등의 핵심 요소이다. 국제정치에 대한 현실주의적 시각이 기본적으로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고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국민과 영토 그리고 주권을 중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들어 각 국가들이 패권을 추구하며 전쟁을 불사했던 것도 민족 또는 국민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영토를 확대하려는 생각이 가져온 결과다. 오늘날 중국이 새로운 역사해석을 꾀하고 있는 것이나 동북아시아국가들 간의 역사갈등 및 영토갈등 역시 이러한 20세기적 사고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역내 국가들이 이와 같은 20세기적 사고를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

동북아시아공동체를 이야기하면서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주목하는 것도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심 고리로서 이들이 지닌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중심지역으로서 연변지역과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중국과 한국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조선족동포들이야말로 지정학적 및 지문화적 차원에서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을 위한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한국과 중국이 동북아시아의 공존공영의 미래를 기대한다면 연변지역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미래 공간으로 만들고 조선족동포들을 그 공간의 주역으로 삼아야 한다. 동북아시아공동체의 미래는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이냐에 달려있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조선족동포들이 우리와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조선족동포들은 중국국민으로서 중국의 정치적 영향 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연변과 조선족동포를 얘기하는 것은 결코 민족주의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더 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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