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박물관 ‘핀카 비히아’ <신길우 탐방기>

▲ 쿠바의 헤밍웨이 기념박물관 ‘핀카 비히아’
<핀카 비히아(Finca Vigia)>는 헤밍웨이가 쿠바를 떠날 때까지 20여년 동안 살던 집이다. 아바나 시에서 15㎞ 떨어진 샌프란시스코 파울라(Paula) 마을의 비히아 농장에 있다. ‘망루’, ‘전망 좋은 농장’이란 뜻을 가진 이곳에는 본채 말고도 망루 집필실과 별채 등 2채의 건물이 딸려 있다. 넓은 정원에는 키큰 나무들이 무성하고 풀장에는 애용하던 낚싯배도 전시되어 있다. 지금 이곳은 헤밍웨이 기념박물관(Museo Momerial Ernest Hemingway)이 되어 사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 집은 1886-7년에 건축가가 자신이 살 집으로 지은 것인데, 1937년에 셋째부인 마르타 겔호른이 세로 얻어 살다가, 3년 뒤에 헤밍웨이가 시내 호텔방에서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미국 파라마운트 영화사에 10만불 이상 받고 팔아서 4헥터의 정원까지 매입했다. 당시는 동물원이 가까이 있어서 값이 쌌다고 한다.

입구로 난 작은 길가에 매표소가 있다. 입장료 외에 카메라는 5달러, 비디오는 25달러를 받는다. 100여 미터쯤 들어가다 왼쪽으로 꺾어지자 숲속에 하얀 본채 건물이 나타났다.

본채는 앞으로 나온 아치형 기둥으로 된 사각 현관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3칸, 왼쪽에 6칸, 측면 3칸의 긴 단층집이다. 지붕도 흰색 스레이트인데 양쪽으로 경사를 이루었다. 현관 처마에 매달린 종은 긴 줄까지 있어 마치 초등학교 시절의 학교종을 보는 것 같았다.

방마다 직원들이 있는데, 건물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모두 열어놓은 3방면의 창과 문들을 통해서만 구경하고 촬영할 수 있게 한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내린 조치이니 따를 수밖에.

현관에서 들여다보니 바로 앞 건너편이 식당이다. 중앙에 4인조 식탁, 벽쪽에 키 낮은 찬장들, 벽면 위쪽에는 사슴뿔 머리 박제품들이 걸려 있다.

▲ 헤밍웨이 박물관 안의 응접실 모습
왼쪽에 자리한 응접실은 꽤 넓다. 안락의자와 흔들의자, 소파와 간이의자, 술병과 술잔, 여러 그릇들이 놓인 탁자가 놓였다. 벽에는 사냥과 투우 장면의 커다란 그림이 하나씩 걸렸다. 뿔 달린 사슴과 영양의 머리박제품도 같이 걸렸다. 자기 취향이 자랑스레 풍기는 방에서 술과 음식을 먹으며 호탕하게 환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옆의 전시실에는 상장과 메달, 타자기와 각종 술병과 잔과 그릇들과 함께 부인의 여러 장식품과 패물들, 하이힐과 작은 핸드백, 인물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다.

본채 뒤쪽의 서재에는 벽면마다 책들이 가득하다. 작은 도자기, 사진과 그림 액자들이 책장 위에 놓여 있다. 둥글게 휜 긴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책과 함께 왼쪽에 지구본, 오른쪽에 표범머리 박제가 놓여 있다. 옆 집필실에는 3단의 서랍이 달린 사각 책상이 있는데, 책상 위에는 돌로 만든 사자, 코끼리, 코뿔소, 하마, 말 등과 확대경, 안경집, 파이프, 망원경 등 일용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벽면의 3단짜리 책장들 위에도 그림과 사진 액자들이 놓여 있다.

침실에는 전등 탁자를 사이에 두고 싱글 침대 2개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데, 이곳만은 다른 방들과는 달리 사진 두어 개만 걸렸을 뿐이다. 더블침대가 놓인 또 하나의 방도 3단의 작은 책장이 놓였을 뿐 벽면이 깨끗하다. 그 밖에 욕실, 화장실, 세면대가 있는 작은 방들도 있다.

투우와 낚시는 물론 사냥을 좋아했던 헤밍웨이는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여러 동물들의 머리와 뿔과 상아, 그리고 동물 박제품들을 방마다 벽 장식품으로 걸어 놓았다. 산양 박제는 이탈리아의 무소리니가 백지수표를 주고 사려 했는데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벽에는 피카소가 선물한 조각, 카스트로와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 있다. 중국의 쌍학도와 투우 입장권도 있다.

▲ 헤밍웨이 부부 사진, 1940
책은 모두 9000여권이 있다는데 방마다 진열되어 있다. 심지어 화장실 변기 옆에도 책장이 있어, 그가 대단한 독서가였음을 실감하게 한다. 세계 여행 중에 모은 레코드도 900여 장이 보존되어 있다. 쾌활 호탕한 성격으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산 그가 집필실 책상 유리판 밑에 부인의 사진을 넣어둔 것은 사랑인가 섬세한 감성인가.

본채 옆의 3층집은 집필실 겸 전망대이다. 헤밍웨이가 이사온 뒤 증축한 것이라는데 아바나 항구와 카리브해까지 보이는 전망이 매우 좋다. 집필실에는 원목 책상과 안락의자 하나, 호랑이 가죽을 깐 것이 전부다. 헤밍웨이는 아침마다 선 채로 아름다운 창 밖 풍경을 내다보며 글을 썼다고 한다. 대작 창작도 책걸상이 놓일 만한 공간이면 충분하다는 말이 있지만, 역시 전망 좋은 환경은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채 오른쪽에 손님방인 2층 건물과 차고였던 단층 건물이 붙여져 있다. 단층집은 지금 관리소로 쓴다.

집 주변은 숲의 정원이다. 여러 종류의 많은 꽃과 나무들이 울창하다. 본채 앞의 아름드리 선인장, 특히 좋아했다는 큰키 대나무, ‘큐바의 나무’로 지정된 로얄 팜 트리(Royal Palm Tree),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야자수 등 갖가지 나무들의 훤칠한 모습은 참 시원스럽다. 나무둥치에 겨우살이처럼 매달려 예쁜 꽃을 피운 열대 난꽃과 이름 모를 꽃들은 정원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한다.

본채에서 숲길을 따라 100여 미터쯤 내려가니 작은 수영장이 나온다. 헤밍웨이가 낚싯배로 사용했던 40피트 길이의 배 ‘필라(Pilar)’가 있는데, 수리중인지 천으로 반은 덮어놓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필라를 타고 커다란 청새치를 낚아 파안대소하는 헤밍웨이, 2차대전때 쿠바 근처의 독일 잠수함을 추적하며 달리던 모습을 침묵으로 말해준다.

풀장 가가이에 커다란 벤자민과 수십 가닥의 줄기뿌리를 드러낸 고무나무가 위용을 과시한다.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살 때 네 마리의 개와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키웠다는데, 수영장 길가에 이름을 새긴 비석과 함께 4개의 개 무덤이 있다. 애완동물을 사랑한 그의 또 다른 따뜻한 면을 생각하게 한다.

헤밍웨이는 게리 쿠퍼 같은 영화배우를 비롯하여 투우사, 작가, 화가 등 각계의 유명 인사들을 이곳으로 초대하여 파티를 벌리곤 했다. 여배우 에바 가드너는 이 숲속 풀장에서 수영복도 입지 않은 채 수영을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혁명 전 쿠바는 가깝고 값싼 휴양지로 각광을 받아서 많은 미국인들이 오고, 헤밍웨이 집을 찾았다. 지금도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앞선 일행이 있었고, 나올 때도 대여섯명의 외국인들이 도착했다.

그런데, 헤밍웨이 박물관을 둘러본 마음은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커다란 집과 많은 가구들은 그의 명성으로 누릴 만하지만, 갖가지 장식물과 사냥 투우 낚시의 사진과 그림들은 호탕하고 적극적인 삶을 나타내면서 남달리 자기중심적이고 과시적이고 쾌락적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특히 코뿔소, 사슴, 영양, 사자, 표범 등 다수의 동물 박제품들은 그가 좋아한 사냥을 긍정하기보다 동물학대란 처연한 생각이 더 들었다.

▲ 박물관 안의 헤밍웨이 서재 모습
또한 훌륭한 저택에서 풍요롭게 살면서도, 전망대로 올라가고 망원경으로 더 먼 세계를 바라보며 그리워한 그의 삶이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작가적 명성과 경제적 여유, 자유분방한 생활이 어쩌면 군중 속의 고독감처럼 만족할 수 없었고, 우울증으로까지 번져 끝내는 자살로 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헤밍웨이는 가정적으로도 좋았다고 할 수 없다. 부인을 네 차례나 맞아야 했고, 3명의 자녀 중 첫 부인 소생인 죠는 플로리다에서 먼저 죽고, 뉴욕의 둘째부인 소생 그레고리는 자살했다. 아버지는 1930년에 권총 자살, 누나도 자살했다. 헤밍웨이도 당뇨병에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퇴원 2일만에 아이다호의 케첨 자택에서 1961년 7월 2일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았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죽었으나 패배한 것은 아니다. 작품으로 살아있고, 삶도 쿠바에 그대로 남아 있다. 『노인과 바다』의 마을 코히마르, 『무기여 잘 있거라』를 쓴 아바나 중심가의 암보스 문도스 호텔, 만년에 많은 친지들을 초대하며 살았던 저택 핀카 비히아, 그리고 자주 들렀던 술집 <테라자>와 <플로리디따> 등지에서 헤밍웨이는 아직도 건재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월간 『문학공간』 8월호 통권 225호 게재, 2008.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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