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주 50돌 맞은 옌볜 조선족 上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가 다음달 3일로 창설 50돌을 맞는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민족운동의 본거지였고 1952년 자치주 창설 이후에는 중국 내 200만 조선족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했던 옌볜은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의 한 상징이다. 이민족에 의한 박해와 탄압, 이주와 유랑의 역사가 지금도 살아 숨쉬는 곳이다. 옌볜은 그 격랑의 세월 속에서도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지켜 왔다. 한중수교 10년 만에 한국 기업이 중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데에는 옌볜 조선족의 힘이 컸다. 그러나 요즘 옌볜은 급속히 변하고 있다. 조선족 인구는 갈수록 줄고 문화의 기반마저 무너져 공동체 해체 위기론까지 나올 정도다. 자치주 50돌을 맞는 옌볜에 가 보았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은 옌볜에선 없어진 지 오래지요. 애 딸린 과부도 이곳에만 오면 큰소리치고 살 수 있을 정도니까. 총각도 드물지만 처녀는 총각 20∼30명에 한 명 꼴이나 될까….”

옌지(延吉)시에서 북쪽으로 차를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이란(依蘭)진 타이옌(台岩)촌. 마침 비가 오는 날이라 농사일을 제쳐두고 노인정(노인활동실)에서 화투를 치고 있던 60, 70대의 할머니들은 “이제 농촌에서는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처녀구경을 할 수가 없다”며 한숨을 내쉰다.

할머니들은 한국에서 온 손님이라는 말에 가까운 밭에서 따온 옥수수를노인정에 있는 가마솥에 쪄내 점심을 대접한다. 4개를 먹었는데도 3개는더 먹어야 속이 든든하다며 한사코 권하더니 돌아갈 때는 찐 옥수수를 한아름 안겨준다. 도시화의 찬 바람도 이곳 시골의 넉넉한 인심은 아직 비켜간 느낌이다.

▽조선족 지청(知靑)들의 고향〓논농사는 짓지 않고 옥수수와 콩을 재배해 근근이 생활을 꾸려나가는 타이옌촌은 문화대혁명(1966∼1976) 때 옌볜과 상하이(上海)의 지식청년(지청)들이 3∼10년간 하방(下放) 당해 노동을 한 곳.

당시 3000호에 가까웠던 마을은 25∼35호(戶)씩으로 나눠 11개 생산대가 조직됐다. 200여명의 지청들은 노인활동실 자리에 대대본부를 지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농민들과 함께 사상 단련’을 했다. 11개 생산대 가운데 조선족 생산대는 7개고 한족은 4개.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생산대는 13개로 늘어났지만 조선족 생산대는 단 2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생산대 가구 수도 15호 정도로 줄었다.

“젊은 사람들은 전부 중국의 큰 도시나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가고 농촌에는 노인과 애들만 남았지요. 우리 땅을 한족들이 다 차지했어요. 우리도 이제 중국말을 조금씩 할 줄 압니다.”

김씨 할머니(69)는 “옛날 조선족끼리 생산대를 만들었을 땐 중국말이 필요없었는데 이제 중국말을 모르면 같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코리안 드림의 역풍〓“중국이 민족자치구역을 만들 때 소수민족 구성이 25%를 넘는가를 기준으로 했습니다. 1996년부터 조선족 인구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어요. 한 조선족 학자는 2010년 옌볜의 조선족 비율이 20%대, 2020년 10%대로 떨어지고 2030년이면 8.7% 밖에 안될 것이라고추정했습니다.”

중국 중앙민족대학 한국학연구소측은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신생아 출산수는 1999년말 현재 3800명으로 1989년과 비교하면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최근 10년간의 출산감소율을 감안하면 2009년 2000명, 2019년 500명, 2029년에 31명, 2049년에는 한 명도 남지 않는 다는 것.

옌볜 조선족 사회는 이주 140년사에 있어 가장 큰 해체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는 한중 수교가 몰고온 역풍도 큰 작용을 하고 있다.

“신생아 출산이 4000명 이하로 급감한데 비해 매년 한국으로 시집가는조선족 처녀는 6000∼1만명에 달해 한중 수교 이듬해인 93년부터 따지면6만명이 넘습니다. 아이를 낳고 조선족 공동체를 이뤄야 할 20, 30대 여성 3명 중 1명이 한국으로 갔다고 봐야 합니다.”

▽고유문화 고사 위기〓옌지에서 만난 한 작가(55)는 현재의 조선족 상황을 ‘물 먹은 담’에 비유했다.

“조선족 인구가 25% 밑으로 떨어지면 자치주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중국사람 3명과 조선사람 1명이 어울려 사는 셈인데 중국말과 글을 쓰지 조선어를 쓰지는 않습니다. 한족에 동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죠. 사람이 없는데 조선족 학교나 언론, 출판물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스탈린처럼 강제 이주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물 먹은 담처럼 서서히 무너지는 것이지요.”

조선족 초등학생들이 비교적 많았던 타이옌소학(小學)도 올 3월 문을 닫았다. 10∼20년 전만 해도 한 학년에 30∼50명이던 학생 수가 최근 수년간 5∼8명으로 급격히 줄었기 때문. 이 학교는 마을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한족 초등학교인 진청(錦城)소학과 통폐합됐다.

조선족 인구의 대량 유출과 출산율 급감에 따라 조선족 학교의 폐교는 옌볜지역에서는 이미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조선어 출판물도 위기를 겪고 있다. 옌볜작가협회가 출판하는 유명한 순문학 월간지 ‘연변문학’은 1982∼85년 8만부까지 팔렸으나 지금은 400부 정도로 뚝 떨어졌다고 한다. 조선말과 글을 쓰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드는 만큼 언론과 출판 등을 기반으로 한 ‘조선어 문화시장’도 고사(枯死)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자치주 50돌 잔치준비 한창▼

옌지(延吉)시에도 서울처럼 강북과 강남이 있다. 90년대 들어 시를 가로지르는 부얼하퉁허(布爾哈通河)를 기준으로 하북과 하남으로 행정구역을 나눈 것. 시민들은 발전된 고국 서울을 본떴다고 한다.

옌지의 행정기관과 주요 시설은 대부분 하북에 몰려 있다. 하남은 1994년 한국기업 유치를 목표로 경제개발구로 지정됐으나 지난해 기반시설이 겨우 갖춰져 막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다.

최근 옌지공항에 내린 사람은 부얼하퉁허를 따라 시내로 들어가는 넓게포장된 고속화 도로를 보고 깜짝 놀란다. 지난해 완공된 이 길은 관광과투자유치 등 옌지의 경제발전을 위한 것이지만 옌볜자치주 창설 50돌을 맞아 손님맞이용으로 새 단장을 했다. 옌지시는 올 들어 대대적인 가로 보수와 건축물 도색 등 환경정비작업을 벌였다.

옌볜자치주 정부는 지난해 7월부터 1년 넘게 50돌 경축행사 준비를 해왔다. 특히 8월부터는 준비위원회 요원 300여명이 아예 주청사 인근 민족호텔을 통째로 빌려 마지막 점검작업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축제기간에선보일 행사는 20가지가 넘는다. 개폐막식의 체육행사와 카드섹션은 물론 농악과 사물놀이 등 민속가무, 민속복장쇼, 민속혼례, 민속음식, 국제조선민족축구대회, 백두산등반대회, 두만강문화제, 노래자랑대회, 두만강지역 국제투자무역 상담회 등. 행사에는 자치주에 속한 8개 시현(市縣)에서 1만3000여명이 동원된다.

개폐막식과 투자무역상담회가 공식행사라면 ‘옌볜조선족 민속문화관광제’라는 이름으로 벌어질 각종 민속행사는 민간 성격이 강하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민속문화관광제를 총괄하는 옌볜자치주 관광국의 박경식(朴京植·47) 부국장은 “이번 50돌 행사는 옌볜자치주는 물론 중국 전체 조선족의 경축행사”라면서 “자치주의 발전상과 조선족 문화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행사 대부분이 자치주 자체예산 만으로 치러져 재정적 어려움이크다. 박 부국장은 “50년만의 큰 행사인 만큼 솔직히 한국기업의 후원을 기대했으나 기업들이 월드컵과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 경비를 다 썼다며 난색을 표했다”며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이버/옌지〓황유성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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