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현실진단과 미래가치 평가] 곽승지 저

. 백두산정계비의 진실; 조선과 청의 갈등

“대청국 오라총관 목극등은 황제의 명을 받아 변경을 조사하여 여기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으로는 압록(강)이고 동쪽으로는 토문(강)이다. 하여 강이 나누어지는 고개 위 돌에 새겨 기록한다 (大淸烏喇總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錄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백두산정계비에 쓰여 있는 글귀이다.

백두산정계비는 천지 남동쪽 4km, 해발 2200m 토문강과 압록강의 분수령위에 높이 72cm, 아랫부분 너비 55.5cm, 윗부분 너비 25cm의 크기로 세워졌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직전인 1931년 9월 28-29일 사이에 사라지고, 그 후 그 자리에는 대신 백두산 등산도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비석의 기록과 탁본, 사진 등이 남아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문제는 없다.

백두산정계비는 한중간 영토갈등의 중심에 있지만 이미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 간에도 이 정계비 내용을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었다. 이 비문의 핵심은 세가지다. 비석을 세운 주체가 청나라의 오라총관 목극등 이라는 점, 압록강과 토문강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으로 한다는 점, 비석이 서있는 자리가 압록강과 토문강이 갈라지는 지점이라는 점 등이다. 즉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정해 이를 표시하기 위해 두 강이 갈라지는 지점에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압록강-정계비-토퇴․석퇴-토문강이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이며 그 이남은 조선의 영토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비문에 적혀있는 토문에 대한 해석이다. 경계의 동쪽을 결정짓는 토문에 대해 한국은 정계비 부근에서 발원하여 만주의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중국은 두만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재야학계에서는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인식하면서 한국의 국경선을 토문강-송화강-흑룡강을 경계로 보려고 한다. 이 경우 한국의 영토는 러시아의 연해주를 포함하게 되는데 연해주는 1860년 베이징조약에 의해 이미 러시아에 할양됐다. 따라서 베이징조약은 청나라가 조선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처리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는 그 효력이 미치지 못하며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베이징조약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논의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가 이해관계를 달리할 수도 있다.

. 일본의 개입과 간도협약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갈등은 청나라가 봉금령을 해제한 이후 본격화됐다. 봉금지대가 중립지대로서 조선과 청나라간의 사실상의 경계로 기능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봉금령을 해제하고 이곳에 이주한 조선인을 귀환조치하려 하면서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봉금령 해제와 함께 두만강 북쪽지역에 살던 조선인을 귀환조치 하려는데 반발한 조선인 주민들이 직접 두만강 발원지를 탐사해 목극등이 정계비에 기록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지류임을 밝혔다. 즉 정계비가 있는 곳에서 발원하여 송화강으로 유입되는 것은 토문강이며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발원하여 동방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로써 정계비의 기록은 물론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에 근거하여 두만강 이북과 이서지역, 즉 간도라고 불렀던 지역이 조선영토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이같은 사실을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보고하고 동시에 조선인의 자격으로 이곳에 거주할 자격을 요청하였다. 조선관리들도 여러 차례 정계비와 분수령을 탐사하여 주민들의 주장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됨으로써 조선 조정은 도문강(두만강) 이북과 토문강 이남의 중간지대는 조선 영토임을 청나라 조정에 정식으로 통고하고 이의가 있으면 다시 국경을 조사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따라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선을 정하기 위해 1885년 9월부터 2개월간에 걸쳐 현지를 답사하고 여러 차례 회담을 개최했다. 그러나 양국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회담에서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협상을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써 양국은 이 지역에 대해 각기 독자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895년 청일전쟁일이 발발하고 청이 패배하여 조선에서 후퇴하게 되면서 조선은 자주 독립국으로서 청나라에 국경문제를 재론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세변화에 따라 양국 간 회담이 개최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조선은 독자적으로 이범윤을 간도에 관리사로 파견해 그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했다. 특히 이범윤은 조선인을 압박하는 청나라 관리와 군인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는 한편 대대적인 이민사업을 주도함으로써 간도 영유권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간도지역에 대한 조선과 청나라간의 영토갈등은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미 19세기 말 이후 중국대륙 진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까지 승리함에 따라 간도지역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05년 고종을 협박하여 맺은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이듬해 5월 만주문제협의회를 열어 “일본이 중국 동북지역 북부를 러시아의 세력범위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러시아가 장춘 이남을 일본의 세력범위로 승인할 것”임을 언급, 간도를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정하고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패권을 시도했다. 일본의 이러한 속내는 1907년 7월 일본과 러시아간의 이른바 러‧일밀약으로 이어졌다. 결국 간도지역의 영유권문제는 조선과 청나라간의 문제를 넘어 일본의 만주침략을 위한 주요한 이슈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조선과 청나라간의 국경문제를 조사하고 역사 지리 법률적 검토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조선과 청나라의 영토권은 미정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청나라의 간도영유권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이 지역을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일본이 간도지역의 영유권문제에 집착한 이유는 이 지역이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중국 동북지역 침략을 위한 요충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조선통감부는 “만약 간도를 점령하지 못하면 조선의 회령을 방어하지 못하게 될 것” 이라면서 “북부 조선에서 길림으로 진출하려면 우선 간도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조선의 고종 명의로 중국인보다 4배나 많은 5만세대의 조선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도록 청나라에 압력을 넣고 이를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1907년 8월 일본군을 용정촌에 파견하였다. 일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간도의 영토 소속문제는 미해결된 현안이다” “조선정부의 대외관계는 일본정부에 귀속되었으므로 통감부 관원이 간도에서 조선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구실로 용정에 조선통감부 간도 임시 파출소를 설치했다.

임시 파출소의 주요 업무는 간도 영유권문제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간도파출소는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을 답사하는 것은 물론 이와 관련된 사안들을 조사하고 관련된 인사들을 만나는 등 집중적인 조사를 펼쳐 <간도 경계문제에 관한 전말 및 의견>을 펴내고 이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제출했다. 이 조사의 결론은 간도가 조선영토이므로 청나라는 간도를 관할할 수 없고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에게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조선인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청나라 관헌이 발행하는 간도에 관한 모든 법령은 통감부 파출소가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같은 시기 청나라 역시 일본의 주장에 반발하며 이 지역이 청나라 영토임을 주장했다.

이 지역의 영유권과 관련한 일본과 청나라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의외로 쉽게 결말이 났다. 일본은 청나라에 대륙철도 건설권과 주요 지역의 탄광 채굴권 등 6개 안건을 제시하며 이에 대한 편의를 제공한다면 청나라의 간도영유권을 인정할 것이라고 제의했다. 그리고 청나라는 이를 즉각 받아들였다. 일본이 이 지역의 영유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영토를 확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륙침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청나라는 각각의 이해관계를 절충하여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과 청나라 대표는 1909년 9월 4일 북경에서 만나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 (간도협약/ 圖們江中韓界務條款)’을 체결했다. 결국 간도협약은 일본이 대륙침략을 도모하기 위해 연변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를 이용한 결과인 셈이다.

. 북한-중국 간 국경조약

일제가 항복하고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한반도와 중국을 나누는 경계는 1909년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한 간도협약에 의해 지배되었다. 협약 체결 주체가 없어짐에 따라 실제로는 그 효력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입장차이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선에서 묵시적 타협을 한 채 구체적인 입장을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과 중국 간 국경문제가 구체화되어 효력이 발효된 것은 1964년에 이르러서다. 1962년 10월 12일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수상이 평양에서 만나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하고 이 조약의 검토과정을 거쳐 1964년 3월 20일 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공식 발효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이 체결된 사실은 1999년 말에 이르러서야 확인됐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총 5조로 되어 있는 이 조약은 백두산과 천지, 압록강, 두만강 그리고 서해 영해의 국경선을 명확히 적고 있다.(연합뉴스, 1999.10.20/ 중앙일보, 2000.10.16) 이 조약에 따르면 백두산 천지의 경계선은 “백두산 위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마루 서남단 위에 있는 2520고지와 2664고지 사이의 안부의 중심을 기점으로, 동북 방향 직선으로 천지를 가로질러 대안의 산마루인 268고지와 2680고지 사이의 안부 중심까지다. 그 서북부는 중국에 속하고 동북부는 조선에 속한다”고 돼 있다.

조중변계조약 체결로, 일본과 청나라가 백두산 동남쪽 약 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발 2200m)하고 있는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하여 영토를 획정함에 따라 백두산일대와 천지가 한반도에서 분리됐었으나, 백두산 천지의 55%는 북한에, 45%는 중국에 속하게 되었다. 천지 수면에 대해서는 서로 공유키로 합의, 천지 안에서는 양측이 모두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조약은 또 백두산, 압록강과 두만강 상의 섬 및 사주(모래톱)의 귀속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고 있다. 백두산에는 압록강 최상류지역에서부터 천지주변을 거쳐 모두 21개의 국경표지비를 설치해 놓았다. 압록강과 두만강 상의 총 451개 섬과 사주 가운데 북한이 2백64개, 중국이 187개를 소유한다고 적고 있다.

북한과 중국 간에 국경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백두산주변의 국경문제는 정리됐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이 이 조약체결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왔다는 점에서 또 다른 문제의 소지는 있다.

0.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

. 역사 속에서 보는 지정학적 가치

연변은 근현대사에서 동북아 역내 국가들이 패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충돌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중국대륙의 변방에 위치해 있지만 반도국가인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힘의 교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이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웅변한다.

연변지역에서 주변 국가들 간의 갈등은 20세기 초 러일전쟁 만주사변 그리고 일제의 항복 이후 중국 내 국민당정부와 공산당세력간의 국공내전으로 이어진다. 연변지역 갈등의 역사에는 한국과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 일본까지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 한민족은 특히 이 지역의 역사성과 지리적 접근성으로 인해 이곳을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장소로 활용했다.

또한 일본 패망이후 이곳에 자리잡은 한민족들은 중국공산당을 도와 국민당정부와의 내전에 참여해 중국공산정권 수립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49년 10월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것은 북한지역에 공산정권이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한반도 분단과 동북아시아에 냉전체제가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60년대 중소분쟁이 격화되면서 소련과 중국은 이 지역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을 빚었다. 한 베이징 주재 미국기자에 의하면 1973년 소련은 세 차례에 걸쳐 동북지역 침입을 기도했으며 미국이 인공위성 관련 사진을 베이징에 제공하고 구소련에 압력을 가해 이러한 기도를 단념시켰다고 전한다. 소련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홍면기 박사는 “동북지방을 지배함으로써 신강‧몽골‧한반도를 지배하고 일본에 직접적 위협을 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핵심지대를 장악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예증”으로 설명한다.(홍면기, 2006)

지정학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근현대사에서 몇차례 힘의 공백상태에 있었다. 첫 번째는 청나라가 이 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해 무인지대화 했던 시기이다. 17세기부터 19세기 말엽까지로 이 지역은 사실상 청나라와 조선간의 국경지대로 기능했다. 이러한 힘의 공백상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한반도와 중국 산동성 등지에서 한민족과 한족 등이 이주하면서 변화를 맞았다. 이후 일제의 노골적인 한반도 침략으로 삶이 고단해지면서 한민족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연변지역으로 대거 이주했다. 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민족 월경이주자들은 1910년 무렵 십만 명에 이르게 됐는데 이로 인해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을 놓고 첨예한 대립을 벌였다.

두 번째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이후 한민족에 대한 치안을 명분으로 이 지역에 군대와 관료를 파견해 직간접 통치를 한 시기이다. 당시 중국당국은 국력이 쇠하여 변방인 연변지역에까지 통치력을 적절하게 행사하지 못한데다 일본이 만주침략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도협약도 이러한 상황에서 가능했다. 결국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이 지역을 점령, 만주국을 수립했다.

세 번째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일제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의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됨에 따라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물론 미국과 소련 등이 지정학적 요충지인 이곳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지원으로 이미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던 북한과 연변에 자리를 잡은 조선족동포들은 중국공산당을 지원해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결국 북한과 연변의 조선족은 20세기 중반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이 패권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 한민족 인적․물적 교류의 무대

연변에는 네 부류의 한민족이 살고 있다. 중국 국적의 조선족, 북한 국적의 조교, 한국 국적의 재외국민,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제3국 국적의 외국국적동포 등이다. 북한국적의 조교는 현재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는다. 한국국적의 재외국민 수는 2007년 말 현재 1만 여명에 이른다. 외국국적동포는 수백명정도이다. 연변지역이 한민족 교류의 새로운 무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한민족이 연변에 모여 살고 있는 것은 연변의 역사성과 함께 북한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지정학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남북한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여 철조망으로 단절되어 있어 왕래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연변지역에서는 제한적이지만 북한과의 직접 소통도 가능하다. 조선족동포나 북한국적자인 조교들은 비교적 간단한 절차만 갖추면 통행이 가능하며 제3국 국적의 외국국적동포들도 일정한 여건만 갖추면 어렵지 않게 통행할 수 있다.

연변은 남한과 북한간의 소통을 위한 교류의 장소가 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남한과 북한 사람이 만나는 데는 많은 제약이 있다. 어떤 유형의 만남이라도 과정과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다. 연변은 이러한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공간이다. 실제 연변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남북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학술교류도 한 예이다. 대체로 연변의 조선족 학자들이 중국측을 대표해 참여하는 남북한과 중국 간의 국제학술회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연변지역은 또한 1990년대 중후반 북한주민들이 기아로 허덕일 때 한국이나 제3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이 북한에 살고 있는 친인척을 만나는 재회의 장소였다. 이들이 꿈에도 그리던 부모형제자매를 아름아름 수소문하여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나 또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연변지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연변은 앞으로도 한민족이 이산의 아픔을 달래는 만남의 무대가 될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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