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의 장편답사기

제7장

일 송정


룡정에서 서남으로 4km 떨어진 곳에 비암산(琵岩山)이 있다. 비암산은 평강벌과 세전이벌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이 비암산에 올라서면 동으로 툭 터진 세전이벌과 산아래 즐비하게 고층건물들이 일떠선 룡정시가지가 굽어보이고 서쪽으로는 한줄기 해란강과 평강벌이 한눈에 안겨온다. 그리고 멀리 북쪽 연길방향에 우뚝 솟은 모아산이 기분좋게 몸가까이 다가와 선다.

57년전까지만 해도 비암산 코숭이 바위벼랑우에 두아름도 넘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흡사 돌기둥에 푸른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같았다는 말도 있다. 전설에는 정자를 닮은 소나무때문에 이곳 이름이 일송정(一松亭)이라고 부르지만 기실 그것은 절반 사실에 불과하다. 바로 소나무옆에 나무정자가 있어서 한그루 소나무, 하나의 정자라는 뜻이 어린 일송정이라고 불려졌다는것이다.

일송정, 그것은 당시 룡정일대 열혈청년들의 항일구국의 요람이고 독립된 나라와 해방받은 민족의 미래를 위한 활무대이기도 했다. 연분홍 진달래가 비암산에 곱게 피는 봄이나 단풍잎으로 산이 통째로 활활 불타는 가을이면 룡정의 애국적 사생들은 여기로 원족을 와서 반일구국의 뜻을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청승맞을 왜놈들이 정자옆의 소나무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작약으로 폭파해버렸다고도 하고 다른 일설에 의하면 소나무에 약을 넣어 죽어버리게 하였다고도 한다. 정자는 광복전에 낡아서 무너졌다고도 하고 일제 령사관놈들이 무너버렸다고도 한다. 좌우지간 어찌됐든 일송정은 당시 연변의 항일투사의 상징이였던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30년대 류행된 항일가요 <<룡정경치가>>는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오니 간도성 룡정이로다. 굽이굽이 감도는 해란강변에 층암절벽 기암이요 일송정이라. >>라고 시작된다.

내가 일송정에 처음 오른것은 1991년 11월이였다. 젊은 력사연구자들인 박청산, 안화춘씨와 동행으로 항일전적지 답사코스의 하나였다.

그 전해 한국의 어느 한 단체가 룡정시정부의 협력으로 일송정을 수건하고 그옆에 소나무 한그루를 떠다 옮겼었다. 그리고 정자로 올라가는 길 입구인 정자 남쪽에 거대한 <<선구자탑(先驅者塔)>>을 세웠었다.

키넘는 높이에 둘레의 길이가 10m도 훨씬 더 되는 웅장한 세멘트를 부어서 만든 기석우에는 십여메터의 거대한 대리석탑이 거연히 솟아있었다. 섬섬한 보검마냥 하늘을 꿰뚫고 선 탑에는 한자로 <<선구자탑>>이라는 네글자가 세로 새겨져있었다. 탑 전체를 배경으로 하고 사진을 찍으려고 그옆에 서는 순간 웅장한 탑에 비해 너무나도 왜소한 체구도 그러하련마는 그보다도 이 땅의 선구자로 싸워온 선렬들의 위대한 정신적 힘이 전신을 눌러주어 너무나 보잘것 없는 자기의 삶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탑의 기석우에는 십여메터 높이의 거대한 대리석탑이 세워져있었다. 그리고 기석에는 삼면에 대리석을 붙이고 글을 새겼었다. <<선구자노래>>와 그 노래의 유래, 그리고 탑을 세운 유지인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노래의 유래는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선구자노래>>는 1942년에 창작되여 룡정일대와 만주대륙에 널리 퍼지여 반일독립운동의 불길을 지펴올렸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있었다.

우리 일행은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심정으로 탑을 마주하고 서서 약속이나 한듯 <<선구자노래>>를 불렀다.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 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거친 새겨두었네

조국을 찾겠다고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깊은 꿈이 깊었나


순간 우리 셋은 가사의 비극적 서사성이 그대로 받아지면서 장중한 선률에 가슴이 메여왔다. 그리고 당시 애국지사들이 여기 이 자리에서 눈물을 휘뿌리며 격앙된 목소리로 읊조리던 즉흥시와 반일애국노래가 방불히 들려오는듯한 환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후 1992년 봄에 다시 일송정을 찾았을 때는 탑도 글도 없고 뻔뻔한 기석만이 쓸쓸히 맞아주었었다. 선구자탑은 명령에 의해 폭파를 당했던것이다. 선구자탑을 어루만지며 한가슴 뿌듯한 자호감에 눈아래 굽어보이는 산야가 한없이 정답기만 하던 감정이 사그라져 이젠 탑이 없는 기석에 올라서서 고향벌과 룡정시를 바라보노라면 쓸쓸한 기분이 한가슴 채워왔다. 그것은 탑이 없는 기석에서 오는 허탈감뿐이 아니였다. 그제날 항일전쟁시기 우리 민족의 투쟁정신을 분발시키는 노래였고 오늘 세계 방방곡곡에 사는 조선민족이면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애창하는 민족의 노래로 된 <<선구자노래>>에 대한 회의에서 오는 실락감이 더 컸기때문이였다.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라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이제까지 마음속에 고이 간직했던 노래에 깃든 아름다운 이야기가 허황한 꿈으로 되지 않았나 하는 슬픈 생각을 가져보지 않을수 없었다.

답사기를 책으로 펴낼 림박인 1999년 6월 7일 나는 일송정에 갔다가 놀라운 격동을 받았다. 기석우에 <<일송정>>이라고 새긴 돌이 올려져있었고 오른손켠에 <<선구자노래>>가사가 적힌 돌이 있고 왼손켠에는 <<고향의 봄>>의 가사가 새겨져있었다. 세상은 많이 바뀐 셈이다. 이 일송정과 <<선구자노래>>와 <<고향의 봄>> 가사비를 세운 사람은 한국 거제시 해금강 조경, 룡정시 명예시보 윤종환(尹鍾煥)씨가 1998년 9월 3일에 세운것이라고 비석뒤밑에 새겨있었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는 기석 하나를 두고도 매인 5원씩 돈을 받을 때는 불만이 마음을 그득 채우더니만 이제는 5원이 아깝다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더구나 사진을 찍으려고 할 때 황둥개 한마리가 달려와서 우리들 품에 안기는것이였다. 짖지도 않고 아주 숙련된 동작으로 손님을 반겨 맞아서 사진을 함께 박는것이 그놈의 <<직책>>인듯 싶었다. 귀엽기가 한량 없었다. 그런데 주당위원회 차대에서 일하는 문학문(門學文 40세)기사의 말에 의하면 그놈의 개가 용케 조선족이나 한국사람, 그리고 지방사람을 알아본다는것이였다. 남방 한족이 오면 사납게 짖는다는것이다. 아마 개가 령물이니 말을 알아듣는가 보다. 그런데 20여일후 다시 일송정을 찾았을 때 그 령물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 아가씨의 말에 의하면 도적을 맞혔다는것이다. 사흘전 이른 아침 남자와 녀자가 찦차를 몰고 와서 훔쳐갔다고 한다. 개가 너무 용해 빠져서 잡혀가면서도 짖지를 않았는가보다. 참으로 애석할 일이였다. 주인아가씨는 <<개를 훔쳐간 사람은 비명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거얘요!>>라고 했다.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선구자노래>>는 한국에서는 만주 룡정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를 노래한것으로 알려져있고 중국조선족들도 대개 그렇게 믿어왔다. 작곡가 조두남선생은 21세의 열혈청년으로 목단강(오늘의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윤해영의 가사에 곡을 붙였다고 알려졌다. <<선구자노래>>는 1932년 <<원망의 대지, 만주땅을 누비며 민족의 한을 전신으로 저항하며 겨레의 숙원을 대변한 절창(絶唱)>>(오양호 <<윤해영의 <선구자>와 친일시 <락토만주>>>에서)이였다고 이야기한다.

오양호교수는 글 첫머리를 작곡가 조두남선생이 이 노래(<<선구자노래>>)의 가사를 쓴 윤해영에 대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는것으로 장식했다.


1932년 내가 만주 하얼빈에 살고있을 때 나를 찾아왔다. 키가 작고 마른 체격에 함경도 말씨를 쓰는 그는 시 한편을 내놓으며 곡을 붙여달라고 하고는 표연히 사라져버렸다. 그가 그 노래를 곧 찾으러 오겠다고 했기에 나는 작곡을 해놓고 기다렸으나 그 청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주고 간 시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독립군이였던것으로 보이며 나에게 왔다 간뒤 어쩌면 어디에선가 전사했을것이다.


조두남의 이야기같아서는 <<선구자노래>>가 1932년에 창작되였고 조두남은 윤해영과 잠간 만나 통성명이나 한 정도의 초면이고 한번 만난 뒤로는 다시는 상봉하지 못했다는것이다. 그리고 작사자 윤해영은 독립군이라는 추측으로 아름답고 비장한 회억을 가진다.

이 노래는 창작되여서 40년이 지난 1963년 12월 3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바리톤 김학근이 독창하여 유명해졌다고 하고 그뒤로 기독교방송국에서 <<정든 우리 가곡>>의 시그널 뮤직으로 7년간 방송함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바가 되였다고 한다. 노래와 함께 더욱 유명해진 조두남선생은 1975년 이 곡명을 따서 <<선구자>>라는 수필집을 낸바 있다고 한다.

참으로 민족적자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전설적이야기라 하겠다. 이 모든것을 력사의 진실로 고스란히 받아 안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력사는 무정한바 사실을 떠난 욕망으로 진실을 대체할수 없다. 필자는 조두남선생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그것이 력사의 진실이였으면 하는 다행한 심리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근근히 우리 나름대로의 욕망이 될수도 있다는 슬픈 마음으로 이 글을 쓰지 않을수 없는 현실에 슬픔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1990년 룡정에서 선구자탑을 세운다고 했을 때 연변 음악계의 원로이신 김종화(金種華 1921년 12월 3일 화룡현 룡문향 태생)선생이 연변대학 민족연구소의 박창욱교수를 찾아 오래동안 마음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인즉 음악가의 량심으로 <<선구자노래>>의 실사를 밝히는것이였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1995년 5월 2일 김종화선생을 만나 취재를 했다.

선생은 연길시 흥안향 흥안촌에 잠시 세집을 맞고 계셨다. 원래 들어있던 집이 허물리고 그 자리에 아빠트를 짓는데 오라지 않아 분여받을 집 열쇠를 가진다는것이였다.

김종화선생은 1947년 흑룡강성 녕안현 신안진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여서부터 상지사범, 연길시2중, 연변사범, 화룡현 투도 제2고급중학교 등에서 음악교원으로 전전하다가 1983년에 퇴직을 한 분이였다. 중국조선족 음악사업에 공로가 있는 분이라 중국음악가협회 회원이고 연변음악가협회 명예리사이시지만 투도를 떠나 연길로 오신 다음의 생활은 별로 락관할바가 못되는가 보았다. 그런데다가 지난해에 자전거를 타고 연길시를 다녀오다가 엉덩이 박죽뼈를 상해서 두번이나 대수술을 받은 선생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운신을 하면서도 각별히 반겨 맞아주었다.

당시의 취재기록을 펼치면 아래와 같다.


취재자:박청산(연변인민출판사 정치문교편집부 력사편집), 류연산(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 소설편집)

피취재자:김종화(리직교원, 음악가)

동석자:김금선(金錦仙 1930년 함경북도 명천군 다기동 태생, 퇴직교원, 김종화선생의 부인)

시간:1995년 5월 2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문:신안진으로 언제 이사를 갔습니까?

답:1937년 이른 봄이였답니다. 원래 왕청현 량수천자(지금의 도문시 량수진)에서 사진, 촌공소, 사타자세관 등에서 일을 하다가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부친과 함께 일곱식솔을 거느리고 이사를 갔지요. 신안진은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7, 80리 상거에 있는데 당시 주소지로는 목단강성 녕안현 신안진이랍니다. 신안진은 60리 넓은 벌에 위치해있고 주변에 18개의 큰 부락과 목재판이 있어서 반도시, 반농촌이였답니다. 한족부락 몇개와 일본인 개척단부락도 있었지요. 이곳은 우리 민족의 잡거구라 백성들이 돈을 대고 지은 20여개 교실을 가진 2층 벽돌집으로 된 소학교가 신안진에 있고 주변 마을에도 10여개의 소학교가 있었답니다. 40년도에는 성립 농업중학교까지 설립했었답니다. 그리고 신안진에는 병원이 세개, 사진관도 내가 꾸린 동양사진관까지 합해서 다섯개나 되였답니다. 벌 복판을 꿰질러 흐르는 해랑강(海浪江)으로 떼목을 띄워서 해림을 거쳐 목단강으로 운송했으므로 떼목군들이 많아서 신안진에는 려관이며 식당이며 그리고 기생집들이 수두룩했습니다.

문:선생님께서 신안진에서 사진업 외에 음악활동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답:소학교때부터 음악이 소원이였더랬지요. 신안진에서 사진관을 벌리기전에 얼마간 목단강에서 예술사진관에서 사진을 배운적이 있는데요, 그때 그 사진관에 기타가 있었거든요. 얼마나 갖고싶었는지 몰라요. 신안진에 동양사진관을 꾸린 때와 거의 동시에 아끼다(秋田)개척단이 와서 자리잡았어요. 나는 일본어를 잘했으므로 사진기를 메고 개척단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구요. 그런데 그 개척단에 기타를 가진 사람이 있어서 25원에 흥정을 하고 선불 10원을 주고 내것으로 만들었답니다. 기타를 사고나니 온 세상을 독차지한 그런 기분이더군요. 만척회사의 일본인한테서 기타를 배웠고 작곡이며 화성학이며를 책을 사서 자학으로 익혔답니다. 내가 음악활동을 시작하게 된것은 전적으로 안의사의 덕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1941년 봄에 안의사(일본창씨 야스다)가 신안진에 와서 안전병원이란 간판을 걸었답니다. 원장인 안의사댁에 가면 책장보다도 훨씬 더 큰 레코―트장이 시선을 끌었지요. 클래식 음악을 즐겨 감상하시는 분이였습니다. 그 병원 의사들중에도 기타를 즐기는 조춘기라는 사람이 있었거니와 안원장의 처조카 남편 서씨(일본창씨 도시가와)는 기타를 쥔지 근 십년이 되여 독주훈련을 하는 중이였거든요. 하여 신안진에서 음악을 한다 하는 젊은이들은 병원집에 나들었답니다. 그후 안의사의 후원으로 몇차례의 연주회도 가졌더랬습니다. 성원들중에는 조선가극 초창기에 있었던 <<라이온 오페라>>에서 악장질을 했던 정씨(일본창씨 오오가와)를 비롯하여 직업 악사출신도 몇사람 있었지요. 일제의 <<대동아전쟁>>이 폭발하자 <<조선악극단>>, <<반도가극단>>, <<황금좌>> 등 예술단체들도 어려움을 겪는 때인지라 기울어가는 흥행단체에 몸담고있던 악사들은 직업을 구해주고 안치시키기만 하면 미련없이 흥행단체에서 빠져나왔지요. 그래서 안원장은 재간있는 음악인들을 신안진에 붙들어 둘수 있었답니다.

문:조두남선생과는 언제 만났습니까?

답:1942년 겨울이였습니다. 자그마한 류랑극단이 신안진으로 공연을 왔대서 <<라이온 오페라>>에서 악장질을 했던 정씨하고 함께 구경을 갔댔습니다. 그들의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것은 나보다 키가 조금 클사한 거쿨진 사내가 손풍금을 타면서 4, 5명 악사를 지휘하여 연주하는 음악프로였습니다. 강마른 얼굴의 손풍금연주가가 타는 탱고―<<라, 콤바르씨타>>, 룸바 <<마리네나>>는 대조적으로 이채로왔습니다. 주제와 화려한 바레션의 대조, 오른손의 주선률과 왼손의 대위선률의 통일, 룸바의 선률과 리듬의 배합, <<양산도>>에서의 비쁘라트처리 등 모두가 나를 매혹시켰습니다. 특히 정서처리가 아주 섬세했답니다. 정서전환구에 이르러 실죽 웃는 표정과 회전의자에서 빙그르 도는 멋진 몸동작―그대로 옹근 몸에서 음악이 흘러나왔지요. 내가 저분이 누구인가고 묻자 정씨는 조두남선생이라고 알려주더군요. 그런데 그의 왼손에는 붕대가 감겨져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며칠후 안원장댁에서 드디여 의심을 풀게 되였답니다. 그는 약침쟁이였던것입니다.

조두남선생은 나보다 아홉살이상이였습니다. 평양 태생이고 평양 건재(한약재)무역상을 하는 친구가 꾸린 악단 <<kw쇼―>>에서 활약했답니다. 이 악단의 명칭은 조두남선생의 원명―조계원의 영문표기를 따른것이라 하데요. 그때부터 그는 자기의 천부적인 음악재질을 펴기 시작했다는거예요. 영화삽곡도 하고 가요, 가극, 기악곡 등을 창작하고 피아노연주와 손풍금에도 소문났답니다. 그는 클래식풍의 가요, 신민요, 쟈즈음악도 썼는데 그래도 클래식풍이 짙다고 할것 같애요. 작품은 서정이 깊고 정서가 섬세한 등 특점과 아름다운 민족선률과 멋진 장단을 생신하게 도입했다고 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락관할바가 못되였나 보더군요. 부친이 페결핵에 걸려 당금 돌아가시게 되자 전도사였던 할머니께서 혼처를 마련해놓고 부친 생전에 성가를 시킨다고 억지 결혼을 시켰다는겁니다. 그래서 집을 뛰쳐나오고 술과 마약에 재미를 붙였던가 봅니다. 그 세월에 한다하는 사람은 마약이 그 어떤 행세품이기도 했지마는―<<라이온 오페라>> 정씨와 친구사이였던지라 정씨의 소개로 조두남선생은 안원장댁에서 묵으면서 치료를 받게 되였답니다. 음악을 생명처럼 사랑한 안원장은 조두남선생의 천재를 귀중히 여겨 방 한칸을 전용으로 내여주고 치료, 식사, 의복에 이르기까지 속속 보살폈지요. 약침을 맞을 때만 하면 코물을 줄줄 흘리면서 당금 죽어가듯 기골을 못추었는데 그럴 때면 안원장은 증류수를 주사하기도 했고 약담배 대신 술을 대접하기도 했답니다. 두달여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아서 드디여 건강을 회복한 조두남선생은 아예 신안진에 물앉아 음악활동을 했고 나 또한 그를 선생으로 모시고 열심히 배웠어요.

문:그럼 조두남선생과 음악활동을 얼마동안 같이하셨습니까?

답:광복까지이니깐 해수로는 3년입니다. 함께 무대공연에 나간것은 1943년 가을 목단강 유락극장에서 가진 <<동만총성추계민족예술제>>였습니다. 그때 신안진악단이 중심이 되여 출연하게 되였습니다. 출연한 프로로는 모두가 조두남선생의 작곡이였는데 자기의 새 출발을 주제로 한 기악조곡 <<한 사나이의 반평생>>, <<농촌의 사시절>>, 남성독창 <<고향생각>> 등 여러수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고향생각>>은 남수억이 불렀는데 지금 그는 팔가자(화룡시 팔가자진)에 생존해있습니다.

그런데 출하때라 경찰서의 허가가 없이 공연에 참가한 <<죄>>로 우리 모두가 호출을 받았습니다. 일제는 전선에 군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가을 출하시기이면 <<흥농사>>의 관리들과 순사들을 내몰아 야단법석을 떨었지요. 만일 출하시간을 단 하루라도 늦추면 구타히기도 하고 중하면 가두어넣었답니다. (당시 연길현 조양천 동구에 사는 전재홍이란 지주는 출하를 제때에 하지 못했다는 리유때문에 순사한테 모진 매를 맞고 며칠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필자 주) 안원장은 물론 바이올린수 조창학(국수집을 경영), 나팔수 권녕일, 그리고 나까지였습니다. 영업간판을 떼겠다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시말서(始末書)를 쓰고서야 놓여나왔습니다. 조두남선생은 소문을 듣고 아예 목단강에 물앉아버렸답니다.

문:윤해영선생은 언제 알게 되였습니까?

답:1944년 봄이랍니다. 목단강에 살던 조두남선생이 우리 집으로 와서 녕안에서 자기가 <<신곡발표공연>>을 하니 기타연주를 해달라고 청을 하더군요. 그래서 갔어요. 나는 기타연주를 맡고 새 악사들의 연습도 도왔답니다. 그번 녕안의 어느 려관에서 나는 조두남선생의 소개로 <<룡정의 노래>> 작사자인 윤해영선생을 뵙게 되였습니다. 조두남선생보다는 두세살 우이고 키가 작고 친절한 사람이였습니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녕안 협화회에서 일을 본다고 하데요. 그번 <<신곡발표공연>>에서 처음으로 <<룡정의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외에 또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목단강의 노래>>, <<산>>, <<흥안령마루에 서운이 핀다>> 등도 발표되였고 그 전해 가을에 목단강 <<동만총성추계민족예술절>>에서 발표했던 <<고향생각>>과 <<한 사나이의 반평생>> 등도 다시 선을 보였습니다.

문:<<룡정의 노래>>란 바로 지금의 <<선구자노래>>라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답:네. 그러합니다. 뒤에 자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번에 공연이 끝난 다음 우리는 윤해영선생의 집에서 소박한 피로연을 가졌습니다. 윤선생의 집은 한족집 구조를 가졌는데 캉(온돌) 면적이 한 20㎡쯤 될것 같아요. 그날 피로연의 마지막에 모두들 <<목단강의 노래>>를 합창했는데 그만 그것이 실수였다구요. 글쎄 윤해영선생이 벽에 걸려있던 사진액틀을 벗겨서 품에 안고 흐느껴 우는 바람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졌지요. 사진액틀엔 아이를 안은 한 녀인의 사진이 들어있었는데 윤해영선생의 부인의 유상이였던겁니다. 부인이 얼마전에 별세하고 그래서 추모의 심정으로 쓴 가사가 <<목단강의 노래>>였는데 하필 그걸 합창했으니 락루를 하시지 않고 어쩌겠어요.

문:그후 조두남선생과 윤해영선생은 어떻게 되였습니까?

답:그후 조두남선생은 평양으로 갔어요. 편지왕래가 있었지요. 1944년 여름이였을겁니다. 뜻밖으로 조두남선생께서 평양에서 편지를 보내왔더군요. <<성보악극단>>을 조직하는데 레코트회사 전속악단에서 연주하던 악사들이 여럿 있으니 나올 준비를 하라는것이였습니다. 뒤미처 또 평양에서 아까다마 소녀가극단을 새로 조직하고 련습중이니 나오지 말고 이제 목단강으로 갈터이니 거기에서 만나자는 내용의 편지가 왔더군요. 그해 겨울이였습니다. 조두남선생이 신안진으로 오셨댔습니다. 내가 조두남선생의 집으로 놀러가니 새로 맞은 부인을 소개하는데 키가 늘씬하고 말씨를 들어보아 서울녀성같습데다. 원래 결혼했던 본처는 남편이 소식도 없이 밖으로만 나돌자 재가를 해갔더라는것입니다. 조두남선생은 당시 목단강에 와서 극단을 조직하고있었습니다. 태평양레코트회사의 전속 가수였던 서태림 등도 참가했었습니다. 손풍금수로는 21살 나어린 안향락이였는데 조두남선생의 제자였습니다. 나하고 같이 가자고 했지만 집식구 모두가 나의 사진관에 매달려 호구하는 처지라 따라갈수가 없었습니다. 1945년도에 조두남선생은 또 안향락을 데리고 신안진으로 왔었습니다. 그때 나하고 안원장 그리고 조두남선생 셋이서 기념사진을 찍었더랬습니다. 그후 광복이 났고 다음으로 조두남선생을 만나지 못했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당시까지 보관했었답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심입되면서 내가 <<감옥>>에 갇혀 투쟁을 맞게 되고 홍위병들이 집수색을 하게 되자 로친이 태워버렸답니다. 아쉬운 일이긴 했어도 그때 그 사진이 탄로가 났더라면 한국간첩이라는 루명을 쓰고 맞아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랍니다.

문:<<동북인민행진곡>>과 <<동북인민자위군송가>>는 김선생님께서 윤해영선생의 가사에 곡을 단것이 아닙니까?

답:그렇습니다. 윤선생님과 합작을 하게 된것은 광복후인 1945년 9월부터였습니다. 윤해영선생은 신안진 대성백화점 김광호의 녀동생을 후처로 맞았답니다. 김광호 녀동생은 소학교선생이였습니다. 처가에 왔을 때 내가 초청받아 갔어요. 그때 <<해저문 마을>> 등 동요 두수를 나한테 주면서 작곡을 부탁하고 앞으로 합작을 약속했더랬습니다. 나는 그해 10월에 이 가사에 곡을 붙였던것입니다. <<해저문 마을>>은 이러합니다. <<딸라당 방울소리 들려옵니다/해저문 산길에서 들려옵니다/꼴 베러 간 오빠가 타고 오시는/송아지 목에 달린 내 방울이지요//울줄루 피리소리 들려옵니다/해저문 샘터에서 들려옵니다/물길러 간 언니가 꺾어서 부는/샘터에 늘어진 버들피리죠>>(김종화선생은 노래를 불러주었다. )

그후 광복과 함께 신안진에서는 고려인회를 조직하고 고려악극단을 내왔답니다. 첫공연에서 내가 신문에서 본 윤해영선생의 작사 <<동북인민행진곡>>에 곡을 붙인 노래가 처음으로 발표되였습니다. <<동북의 새벽하늘 동이 트는 대지우에/새로운 력사싣고 종소리는 울린다/모여라 동북인민 우리들의 일터로/희망의 아침이다 새 기발을 날리자//무도한 제국주의 침략자의 쇠사슬/인류의 적이란다 우리들의 원쑤다/피압박 약소민족 자유해방 위하여/정의의 칼을 들고 너도나도 싸우자//선구인 혁명자의 원한 서린 붉은 피/저녁 노을 지평선에 송화강도 붉었다/잊으랴 경신토벌 9. 18의 혈채를/복수의 날이 왔다 백년 한을 갚으리//흥안령 부는 바람 흐린 안개 가셔서/흑룡강 힘찬 줄기 나갈 길이 보인다/새로운 민주주의 우리들의 로선에/발맞춰 건설하자 아세아의 평화를>> 이 노래는 그후 중국 조선족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습니다. 당시를 살아온 사람으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였거든요.

뒤미처 또 신문에 발표된 윤해영선생의 글에 곡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동북인민자위군 송가>>였습니다. <<흥안령 높이 솟아 우리들의 새 기상/송화강 힘찬 줄기 우리들의 뜻일가/손잡고 너도 나도 달려 모인 동지들/맹세도 장하구나 동북인민자위군//빛나는 청천 백일 대지에 붉은데/황하수 남북하늘 로선리념 다르다/새로운 민주주의 자유평등 기발아래/이 한몸 혁명 위해 붉은 피도 바치리//동북은 우리의 터 우리들이 지키여/중국의 완전해방 실현하기 위하여/칼 들고 싸워 갈길 검산도수 험해도/막을자 그 누구냐 정의용사 우리들//새 세기 부는 바람 오대양은 끓는다/장성을 넘어넘어 두만강을 건너서/침략자 내적외구 한칼로 베고/아세아 하늘가에 평화종을 울리다>>(김종화선생은 격동된 심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1946년 7월 목단강 서장안 공영회관에서 부대의 위문공연을 했는데 2일간 걸렸어요. 끝나는 날 윤해영선생이 공연을 관람하고 나를 만나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조두남선생이 이미 조선으로 가고 없어 윤해영의 다른 친구 두세분과 함께 자리를 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상봉이였습니다. 그후 우리 악극단이 도문에 이르러 공연을 할 때 극단의 사람들이 윤해영선생이 떡국대장사를 하는지 어느 식당에서 나오는것을 보았다고 합데다. 그가 재취한 후처가 잔치해서 일곱달만에 해산을 했는데 윤해영선생의 아이가 아니였답니다. 그래서 리혼을 하고 떠돌다가 조선으로 건너갔지요. 1949년 16절지 석판인쇄로 된 조선 노래집에서 윤해영선생의 가사로 되여있는 <<분여받은 땅>>인지 하는 노래를 보았어요. 가사 내용은 대개 <<장군님 주신 땅에 밭갈이 하세>>라는 뜻이였습니다. 그후론 소식을 몰라요. (윤해영선생은 조선에서 1956년에 별세했다고 한다. ―필자 주)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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