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단편소설>

《씨팔, 이 새끼, 또 잠수타버렸네.》

광일이의 휴대폰으로 분명 신호가 기운차게 전해져가고 있건만 광일이란 작자는 야속하게도 좀처럼 전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슬슬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겨우 억누르며 전화 걸기 시도를 몇번 하다가 더 이상 귀찮아진 지섭이는 휴대폰을 침대위에 홱 던져버리고는 자신도 벌러덩 침대에 몸을 던져버렸다. 본시 보기 좋게 파아란 색을 띠였을 벽지는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이제는 누르끼레 하게 변해있고, 천정에 달랑 매달려 있는 전등은 꼴보기 싫게 구식이다.

광일 놈에게 며칠 전에 처먹인 4만원 호프값이 슬슬 아까워온다. 자기가 일하는, 건물에 돌을 붙이는 일을 오야지에게 말해서 일자리를 얻어주겠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에 호프 한번 거하게 쏘았더니만, 뭐? 이삼일만 기다리면 여의도에서 돌 붙이는 공사를 시작하는데 오야지에게 이미 이야기 해놨다고 뻥뻥 큰소리치더니만 지금은 전화도 안 받고 쥐처럼 어딘가에 처박혀있다.

《너만 와, 그 주영걸 놈은 부르지도 말어. 애가 어찌나 정신이 수선스러운지 그앨 데리고 일하러 가면 쪽팔려.》

언녕부터 신의를 지킬줄 모르는 빵점짜리 자식인줄 알고 있지만 자신한테까지 이렇게 야비한 수단을 부릴 줄이야. 하여튼 인간은 쉽사리 믿을게 못돼.

그나저나 일을 구해야 하는데… 겨울인지라 노가다 일자리가 뚝 끊겼다. 철근만 쭈욱 해왔는데, 다른 일을 어디서 구하지? 다른 일을 못해봐서 그 바닥 사람들과 인맥도 별로 없는데… 아무리 한국이 좁아터졌다고 하지만 일을 구하는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직업소개소? 헛소리 치지 말라고 해. 직업소개소것들은 모두 사기꾼이고 날강도야. 직업 하나 소개해주면 월급의 10%를 수수료로 내야 하는데, 정작 일을 시작해보면 영 말과는 딴판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루를 하고 때려치우고 소개소에 와서 환불해달라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 납부한 수수료는 주지를 않고 시간만 끌고, 또 쓰잘데없이 멍청한 인간취급이나 하면서 엉뚱한 일자리나 소개해준다. 가보면 또 그 모양의 연속일 뿐. 그래서 직업소개소의 말이라면 중국 수도가 북경이라도 해도 믿을 수가 없다.

지섭이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온다. 마을 동네의 구석구석에 널린 구인구직 신문들… 벼룩시장, 가로수, 교차로… 별의별 구인구직신문을 모두 집으로 끌어들이고 세월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초라한 방바닥에 앉아 뒤적거려 본다.

《중국 교포 아가씨들을 모십니다. 한 가족처럼 좋은 분위기속에서 일하실 분, 고수입 보장해드립니다. 다방 주인도 중국 조선족입니다.》

젠장, 한국 남정네에게 시집온 몇몇 조선족 녀인네들이 다방을 차려놓고 열심히 뼈다구 놀려 일하지 않고 돈만 무지 벌려는 조선족 여자들을 모아놓고 외로운 동포 남정네들의 돈이나 뜯어먹고 있으니…

어쩌다 친구들한테 묻혀 다방 한번 가보았더니 정말 난리부르스 그 자체였다. 남정네가 앉기 바쁘게 조선족 아가씨들이 한 사람 곁에 한명씩 들러붙어 앉아가지고는 커피 한잔이라도 더 팔아 주인에게 잘 보일려고 쓴 커피를 쭉쭉 들이킨다. 저렇게 커피를 속에 부어놓고도 밤에 잠이 잘 오는지 살짝 궁금해졌다. 그리고는 《오빠, 나 맥주 마시고 싶어.》하고 바보같은 남정네들을 꼬시고 있다. 여름이면 노가다판에서 햇볕에 그을리고, 겨울이면 추위에 부들부들 떨면서 번 뼈돈을 그런데서는 대범하게 척척 내미는 얼간이들… 하여튼 녀자의 눈웃음과 애교는 천하무적이다.

화딱지 나게 만드는 광고를 건너뛰어 배달, 철근, 형틀목수… 이런저런 남정네들이 할 수 있는 구인광고를 보다가 홱 던져버린다. 비행기 창으로 내려다본 시가지의 건물마냥 닥지닥지 신문에 들어앉은 광고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게 보이질 않는다. 모두가 사기같다. 가서 일하고도 재수 없으면 돈 받기도 영 힘들다. 아는 사람이 소개하는 일자리면 그래도 믿음이 가는데 말야. 쌩판 모르는 사람을 오야지라고 믿고 따라다니며 일을 하다가 그 놈이 돈을 안 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든 나중에야 돈을 받기야 하겠지만 그 받는 과정에 열 받을 걸 생각하면 선뜻 전화를 걸어 일자리 문의하기도 귀찮아진다.

이런 겨울에 마누라가 나가서 한푼이라도 벌어오면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약간이라도 가볍게 느껴질련만…마누라는 애를 낳고 요즘 몸이 부실해서 쉬고 있다. 약한 팔목을 보면 어디 식당가서 그릇이나 제대로 나를 수나 있겠는지… 여태껏 공부만 하고 힘든 일을 못해본 마누라니 식당에서 홀서빙 하고 목욕탕 가서 때밀이하라고 차마 말할 수도 없다. 몇 달 전 귀여운 딸래미를 낳고 생각보다 건강하게 잘 지낸다 했더니 요즘 따라 부쩍 팔목이 아프오, 배가 아프오 하고 병치례만 한다.

그 귀여운 딸을 생각하면 그래도 마누라의 모든게 용서가 된다. 그나저나 딸이 보고싶다. 한국에서 애 하나 키우는게 돈이 왕창 들어가기 때문에 생후 30일되는, 정말 안아보기도 주저되는 물아기를 아시아나 비행기에 태워 중국 마누라의 친정집에 보냈는데… 그나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니 한가닥 위안이나마 된다.

Maria, Ave Maria

거친 파도따윈 상관없이

휴대폰 벨소리 한번 희한하다. 마누라가 요즘 류행하는 노래라고 다운해서 휴대폰에 벨소리로 지정해놓았던 것이다. 고함지르는듯한 가수의 목소리에 지섭은 잠시잠깐 화다닥 놀랐다. 액정에는 주씨라고 적혀져 있다. 주영걸이었다.

《뭐하오?》

주씨는 늘 변함없이 이런식이다. 연구대상임에 틀림없다.

《뭐하긴 집 구석에서…》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주씨는 시원스런 목소리로 기분좋게 지껄인다.

《우리 집에 놀러오. 내 꿔보러우, 찡쨩러우쓰, 마풔뚸푸 해놓았소. 빨리 먹으러 오오.》

가겠다는 말을 하지도 못했는데 그쪽에서 휘리릭 하니 휴대폰을 끊어버린다. 짜아식, 뭐 그래, 좋아. 속도 이리저리 뒤집히는데 가서 실컷 먹고 광일이 욕이나 두둑히 하다가 와야지.

《여보, 돈 좀 주오.》

지갑에 댕그랑 동전 한푼 없다. 빈손에 가긴 무엇하고, 술 한병이라도 들고 가야 남자 체면이 구겨지지 않지.

흘깃 지섭을 쳐다보더니 마누라는 옷장을 열고 제 가방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낸다. 은행카드며, 현금이며 모두가 마누라 소관이다.

《돈 아껴 써요.》

달랑 만원 한 장 건네준다. 그래도 지섭이는 아무 불평없이 받아서 호주머니에 넣는다. 허구헌날 돈 아껴쓰라는 말이다. 물론 지섭이는 교통비와 담배값 내놓고는 일전한푼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일하러 다닐때에도 허름한 작은 지갑에는 교통카드하고, 현금 몇천원만 달랑 넣고 다닌다. 공사장 현장에서 지갑을 잃어버려 돈 2만원을 잃은 후 더더욱 현금은 지니고 다니지를 않는다.

말없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옷 대충 걸치고, 그리고 신발을 꿰신고는 문을 나선다. 보증금 100만에 월세 18만원의 허름한 다세대 단독 주택의 고장난 검은색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날씨 한번 따스하다. 부담스럽게 따스한 겨울날씨다.

가는 길에 약국, 슈퍼, 은행, 우체국, 사진관, 금은방, 세탁소, 가스 보일러, 감자탕 집, 돈가스 집, 모텔… 온갖 간판들이 닥지작지, 줄줄이 늘어서있다. 완전 간판 천국이다. 눈동자가 피곤하다. 도로에서는 자가용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나름대로 부지런히들 달린다. 기름 한방울 안 나는 구석에 뭔 차가 이리도 많은지,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은 월급 얼마나 받는지, 참으로 의뭉스럽다. 물론, 집 없어도 차 있는게 한국인들 아닌가. 차 수량을 절반만 줄이면 교통사고도 줄고 환경오염도 줄이고 외국에 막 퍼주는 기름값도 엄청 줄일텐데 말이다. 지하철, 버스, 택시 등 교통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데 뭔 급한 일이 있다고 차를 끌고 다니는지… 양식에 필요한 것만큼 쓰는데 익숙한 인간들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도대체 몇대의 차량이 있단 말인가? 이 지구에는 도대체 몇 개의 도시가 있단 말인가? 쓰잘데없고 허망한 생각을 굴리며 지섭이는 담배 한 대를 입에 문다. 집에서는 마누라가 하도 담배를 끊으라고 닥달하는 바람에 담배도 제대로 피우지를 못한다. 허구헌날손바닥만한 주방 한구석에서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에 쭈크리고 앉아 담배를 홀짝이는게 고작이다. 물론 문은 굳게 닫고 말이다. 근데 겨울이라 그런지 찬바람이 주방에 새어들어 살짝 춥기도 하다. 뭐, 마누라는 맨날 호주가 건강해야 식구들이 평안하다고 구슬린다. 물론 내가 건강해야지, 내가 일 생기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여운 딸내미는 누굴 믿고 살가? 딸내미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지난다. 제발 건강하고 총명하게만 커다오. 널 청화대학이나 북경대학에 보내는게 내 꿈이다. 지섭이는 비록 공부를 많이 못했지만 무슨 일을 할 때 머리 나쁜 건 못 참아주는 편이었다.

주영걸의 집으로 이 몇년 동안 몇백번 왔다갔다 했는지도 모르겠다. 눈 감고도 훤하다. 얼핏 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인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어정쩡 서있고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훨씬 젊어보이는데, 할아버지의 팔을 껴안고 있다.

《늙었지만 그래도 행복해 보이네.》

지섭이는 혼잣말로 구시렁거린다. 늘그막에는 자식보다 악처라도 처가 낫다더니 맞는 말인가보다. 한참 더 걷다가 돌아보니 그 로부부의 뒷모습이, 아기자기한 로년 사랑이 가슴에 와 닿는다.

씨엉씨엉 걷는데 웬 할머니 한분이 앞을 막아선다. 길을 묻는 줄 알고 지섭이는 일단 가던길을 스톱했다.

《저기 이쁜 아가씨 있어. 그리고 비디오도 볼 수 있는데…》

아, 이거 벌건 대낮에 또 뭔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 이 노인네 대체 나의 어느 구석을 보고 이런 허접스런 호객행위를 벌린단 말인가. 아무리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하늘이라지만 이건 좀 황당한 거 아닌가? 상황파악을 얼른 끝낸 지섭이는 귀찮은 듯, 쓰거운 듯 그 할머니를 스쳐지나버렸다. 참, 한국 경제가 어렵다고 하더니 어렵긴 어렵나보다.

허름하고 루추한 슈퍼에 들려 소주 두병과 맥주를 큰 병으로 하나 골라잡았다. 주씨는 소주 체질이니까. 계산하고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 담배를 한 갑 샀다. 호주머니속에 남아있던 담배로는 주영걸이와의 수다를 다 끝내기에는 판판 부족일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영걸의 좋은 손맛을 자랑하려는 듯 달콤하고 고소하고 쌉싸름한 냄새가 주방에서 물씬 풍겨온다.

《왔구먼.》

시물시물, 언제나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주영걸은 오늘 따라 반갑게 맞아준다. 며칠동안 집에서 곰팡이 끼게 푹 쉬더니 사람 냄새가 그리웠나?

작지만 아담한 주영걸의 집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씨는 어느새 상을 펴고 위에 음식 그릇들을 차려놓는다. 그 옆에 주영걸의 고향친구라는 종호가 앉아있다. 두어번 만났으나 이미 그 소문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일당이 적소, 일하는 시간이 너무 오래오 하면서 회사 생산직 일은 때려치운지 오래되고, 노가다는 힘들다고 안하고 매일 피시방으로 출근해 게임 삼매경에 푹 빠져있는 작자다. 흑룡강성의 沙虎가 고향인 놈이다. 새벽 4,5시에 일어나 피시방으로 가서는 점심에 들어와 밥 대충 먹고 꽁지 빠지게 또 나가고, 늦은 저녁에야 방구석으로 기어들어온다니 참 기가 막혀 고혈압이 쑤욱 올라갈 노릇이다.

《광일이 전화 왔소?》

술 한잔 들어가자 주씨는 다짜고짜 광일 소식부터 묻는다.

《전화 받지도 않는데 뭘…》

《눈이 놀란 것처럼 커다래 가지고는 헛소리만 줴치고 다니면서 제 노릇도 못하니, 참. 저번에 나에게 돌 붙이는 일 알아봐준다고 하더니 전화 한통 없소.》

설마하고 광일이를 믿었던 주씨는 믿은 자신이 괘씸한지 투덜거리며 고기 한 점을 입에 밀어넣더니 이내 즐거운 목소리로 말을 바꾼다. .

《어제 내 방을 빌려줘서 마작을 치게 하고 돈 40만 벌었소.》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속 마작판의 이야기를 주절거린다. 지섭이는 무관심하게 료리나 집어먹고 있다. 종호란 작자는 가끔 게임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리니지인지 라니지인지, 들어도 도통 감이 가지를 않고 관심도 없다.

《너 한국에 돈 벌러 왔지 게임하러 왔냐?》

주씨는 종호에게 면박을 준다.

《게임 놀아서 번 사이버머니를 팔면 돈 버오.》

종호는 자기 앞 변명을 한다.

《하여튼 광일이는 알콜중독에 사기꾼, 종호 니놈은 게임중독자야.》

늘 타인의 기분을 생각지 않고 말을 슝슝 날리는 주씨다. 이런 화제에 끼어들어봤자 좋은 게 하나도 없는 걸 잘 알고 있는 지섭이는 가만히 듣기만 한다.

《저 돼지 저금통에 돈 얼마나 들어있니.》

언뜻 눈에 비치는 빠알간 돼지저금통을 보며 지섭이는 십전짜리 노오란 동전을 돼지저금통에 넣던 마누라가 생각나 아무생각 없이 묻는다.

《아, 왜 꼭 아픈 상처를 건드리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씨는 엉금엉금 무릎 걸음으로 텔레비곁으로 다가가더니 옆에 놓여있는 저금통을 쥐여다가 지섭에게 보여준다. 저금통 밑바닥이 뻥하니 뚫려져 있다.

《돈 없어서 동전마저 긁어 썼니?》

지섭이는 농담을 던졌다.

《아, 아무리 굶어죽기로니 얼마나 한다고 저금통을 다 째겠소. 그 힘이 있으면 누나한테 달려가서 한 입 얻어먹는게 낫지.》

주씨에게는 한국 남자한테 시집온 누나가 두 명이나 있다. 현재 큰 누나는 서울 독산동의 중국인 거리에서 식당을 꾸리고 있는데 꽤 돈벌이가 잘 되고 있는 모양이다.

《내 정말 살다살다 별의별 년을 다 보았지.》

뭔 소린지 몰라 지섭이와 종호는 주씨의 입만 쳐다본다.

《연화가 한 짓이오.》

연화라면, 광일이가 주영걸에게 소개해준 녀자가 아니던가. 처녀라고 속이고 주영걸과 결혼이라도 할듯이 동거를 했었던 녀자다. 지방으로 휘감긴 몸매는 하마같이 부러터졌던데.

《글쎄 그년이 유부녀지 않소. 중국에 한족 남편과 딸이 있다오. 그것도 모르고 속은 내가 바보지.》

생각만 하면 화가 치밀어올라 머리카락이 쭈빗 일어서기라도 하듯 주씨는 벌컥 소주를 들이킨다. 작은 쇼크가 밀려오는 모양이다.

《연화 한족 남편이 얼마 전에 한국에 들어왔다오. 그러니 이 년이 더는 나와 못 있겠으니 글쎄 내 은행카드 두 개나 도적질해갔지 않소. 하나는 300만, 다른 하나는 50만원이 들어있었는데 다행히 50만원만 출금해서 도망쳤소, 300만짜리는 비밀번호를 몰라서 못 꺼내간거고. 근데 난 그것도 모르고 웬 도적이 내 집을 방문했나 했지. 원 더러워서.》

웃지 말아야 하는 상황인데도 왠지 지섭이는 웃음이 자꾸 터질려고 한다.

《근데 더 치사한건 내가 없는 사이 내 집에 들어와 새로 산 다리미까지 홀라당 가져갔고. 이 돼지저금통안의 동전마저 끌어갔다오. 그것도 칼로 돼지저금통 밑부분을 째고 말이오. 하, 진짜 인간 믿을게 못되오. 내 그냥 혼내줄려다가 그런 인간말종하고는 입방아 찧기도 귀찮아서 가만 두었소.》

연화란 여자를 지섭이는 몇 번 본 적 있었고 술자리도 둬번 같이 했었다. 몸은 기막히게 건장하면서도 식당에서 홀서빙도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편하게 돈이나 얻어낼까 궁리하는 여자중의 한명이었다. 맨날 눈 뜨면 마작이나 치고 돈이나 팔러 다니고…근데 마작 하나는 눈치 빠르게 척척 잘 놀아 늘 돈을 땄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광일이는 주영걸한테 소개해줬고 주영걸은 36살의 나이인지라 더운밥 찬밥 가릴 신세가 못 되는지라 사람이 괜찮아보이는 듯해서 동거까지 했고, 새 텔레비, 새 가구, 새 침대를 장만했다. 또한 누나는 이제 좀만 기다렸다가 몇천만원짜리 전세까지 얻어준다고 했는데…

그동안 손가락 까딱하지 않은 연화를 벌어먹였던거 생각하면 자신이 바보라는 생각을 던져버릴 수가 없어 주씨는 또 울화가 울컥울컥 치민다.

《요즘 일해야 하는데, 집구석에서 며칠씩이고 죽치고 노니까 영 재미없소. 하루 일하면 버는 돈이 얼만데. 그렇지 형님?》

주씨는 생긴 외모하고는 틀리게 알뜰하다. 돈 하나는 착실하게 잘 번다. 단지 말할 때 머리로 한번 더 생각을 하고 입밖으로 내뱉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서 여자들한테는 약간 바보스럽게 보여 인기가 없는것뿐이다.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소리, 노가다판에서 겪은 경험들을 슬쩍슬쩍 중간에 섞어가며 한바탕 웃고 술도 꽤 제법 비우고나서야 지섭이가 집으로 돌아가자 종호란 놈은 피곤한지 침대에 올라가더니 털썩 누워버리더니 드렁드렁 코부터 골아댄다. 스산하게 변해버린 술상을 치우기 귀찮아 위에 신문지를 덮어놓고 구석쪽에 쭈욱 밀어놓고 주영걸도 자리에 들어누워버렸다. 머릿속에 지렁이가 꿈틀거리듯 신경이 팔딱팔딱 뜀질하며 도대체 잠이 오지를 않는다.

머리를 돌리니 아무렇게나 구석쪽에 처박혀있는 화제의 돼지저금통이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저금통 위로 연화의 얼굴이 떠오른다. 또 조금 후 다른 한 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원정애였다. 연화와 원정애의 공통한 점이라면 둘 모두 주영걸의 은행통장을 들고 어디론가 튀었다는 것. 다른 점이라면 원정애는 한국 녀인네라는 것, 그것도 나이가 주영걸보다 꽤 많은, 아이도 못 낳는 여자라는 것 뿐이다.

스리슬쩍 명치끝이 아려온다. 녀자운이 없어도 지지리도 더럽게, 그리고 궁상스럽게 없다. 담배 한 대를 입에 건들건들 물고는 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였다. 허망한 인생같은 연기속으로 그녀가 떠오른다.

90년 대 초, 한국에 들어와서 돈도 잘 벌었던 시기, 주영걸은 우연히 원정애란, 호프집에서 일하는 한국 녀인네를 알게 되었고, 둘은 결혼까지 약속했었다. 우직했던 주영걸은 돈을 버는 족족 원정애가 관리하도록 했다. 어느 날, 원정애의 아버지가 몸이 편찮아 병원에 입웠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복을 쭉 빼입은 영걸은 꽤 값이 나가는 중국술을 들고 병문안을 갔다. 근데, 그 로인네가 어찌나 무식하게 주영걸이를 거부하는지 그 노인네 얼굴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병원문을 빠져나왔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원정애는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글 몇자도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물론 통장도 함께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 뼈아픈 추억이 이젠 가물가물 해지는듯 싶었는데, 이렇게 또 연화가 기억창고에서 먼지 냄새가 풀풀 나는 추억 한 조각을 꺼내어 마음 아프게 만들다니…

씨팔, 젠장, 뒈질것, 치사한 놈, 개새끼, 머저리 같은 놈… 광일이는 40년 살면서 그동안 머릿속에 축적해놓았던 모든 욕을 명길이한테 날려보내고 싶다. 근데, 재수없게 그 명길이란 작자는 지금 중국에서 버젓이 오토바이나 달리면서 있을 것이니.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놈이다.

고속렬차같은 속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광일이는 큰 형네 집 바닥에 드러누워 끙끙 앓는다. 며칠전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영 불편스럽다. 아니,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다.

《김명길이란 중국 교포를 아시죠.》

금천구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다. 시간이 된다면 경찰서에 나와 달란다. 헉~ 미쳤다고 제 발로 경찰서에 기어들어갈까. 그나저나 자꾸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일할때도 전화를 꺼놓고 모르는 전화번호면 일체로 받지 않는 중이다.

(그 명길자슥 때문에 내 인생이 까딱 잘못하다간 조지게 생겼어.)

불안한 마음의 광일이는 몇달전에 명길이와 함께 저질렀던 일을 떠올린다.

명길이는 한국에 10년간 거주했었던 불법체류자였다. 어느 꽃게탕집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는데 그 식당에 있는 한국 아줌마와 사이가 버성거리게 됐고, 식당 주인은 그래도 주방장을 남기는 게 장사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해서 그 아줌마를 해고시켰다. 근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 아줌마는 출입국관리국에 불법체류자인 명길이를 신고했고, 어느날 출입국관리국 직원이 명길이를 단속하러 꽃게탕집으로 나왔다. 근데 천만다행으로 그날따라 몸이 아파 명길이는 출근을 하지 않았던 터였다. 운이 좋게 간신히 빠질수 있었던 것이다. 신고한것이 실패하자 그 아줌마는 그냥 포기하고 말거지 화를 자초했다. 이번에는 남편을 시켜 명길이를 미행하게 했던 것이다. 명길이 집이 어딘지 대충 아는 그 아줌마였지만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집요한 복수심 때문에 사달이 터졌던 것이다.

그날 저녁도 여느때와 같이 술이 잘 된 명길이와 광일이는 명길의 집으로 향했다.

《야, 그 여자 삼삼하더라.》

《내가 찜 했으니 넌 손떼.》

《흐흐…》

둘은 바보같은 소리만 지껄이며 기분이 알딸딸해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근데, 골목길에서 누군가 미행하고 있는듯 해서 뒤를 돌아다보니 누군가 차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둘 다 불법체류자인지라 술이 확 깬 명길이와 광일이는 골목길을 에돌아 구석쪽에 몸을 숨겼다. 그것도 모르고 미행하던 남자는 드디어 그들 둘에게 붙잡혔다. 빼빼 마른 아저씨, 어디 살집이라곤 잡히지 않았다. 홧김에 명길이와 광일이는 그 아저씨를 패기 시작했다. 근데, 사람을 좀 보고 팼어야 했는데, 술이 잘 된 명길이는 아예 옷을 벗어 거기에 돌을 싸서 그 아저씨를 때렸다. 광일이는 명길이가 너무한 것 같아 말리려고 했지만 미쳐 날뛰는 명길이를 제지하지 못했다. 그때 말렸어야 했는데…

그 후 며칠 안 있어 명길이는 자진신고 기간이라 중국으로 휙하니 날아가버렸다. 자신이 쓰던 휴대폰을 훌러덩 광일이에게 넘겨주고. 근데, 그 아저씨가 많이 상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경찰서에서 슬슬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 머릿속에서 폭탄이 펑, 펑 터지고 있다.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이야. 근데 이것들이 진짜 쌍으로 엿 먹이고 있네.》

팔을 베개삼아 몸뚱아리 돌리기에 여념 없는 광일이는 낮에 있었던 또 다른 일에 더욱 열을 받고 있었다. 아니, 열을 받았다기보다는 같지도 않은 상처를 입었다. 낮에 삼성 홈플러스 앞에서 마누라를 보았다. 작은 키의 마누라는 자기의 언니와 함께 어디론가 종종종 가고 있었다. 근데, 슬픈건 자기 마누라를 보고도 《여보》라고 부르지 못하고 멀거니 사라져가는 그 뒷모습만 쳐다보았던 것이다. 인생이 완전 실패덩어리다. 마누라 볼 면목이 없어 마누라를 마누라라 부를수 없으니…

《근데, 이 놈의 녀편네》

생각할수록 슬슬 기분 나쁘다 한국에 나온다는 말 한마디 없더니 덜컥 나오고도 연락 한번 안하다니… 아무리 지 남편이 돈을 팍팍, 팡팡 잘 써대고, 다른 여자를 좀 만났기로서니 독하게 부부의 정마저 끊는다니… 이국타향에서 홀로 몇년 있으면서 여자 몇 명 만난게 그리 용서못할 죄란 말인가. 하여튼 요즘 세상에는 녀편네들이 더 무섭다니까. 그나저나 리혼만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래도 조강지처하고 사는게 좋은데, <<집에서 오성붉은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밖에는 채색기가 휘날린다고 (家里红旗不倒,外面彩旗飘扬)>>했는데… 무릎 꿇고 마누라에게 싹싹 빌어? 에잇, 마누라 앞에서 자존심 빼면 난 시체나 마찬가지인데. 근데 빌어서 설령 리혼을 막는다고 해도 같이 살 방이라도 한칸 있어야 하는데. 엑, 내가 머저리지. 뭔 돈을 노래방에 처넣었지. 근데 통 자제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술 약간 들어가면 자꾸 노래방에 가서 풍챠풍챠 뛰놀고 싶으니 내가 후레자식이지. 뭔 술을 마시면 무박삼일을 마셔대고, 그리고 새벽까지 노래방에서 몇십만원씩 휘날리면서 놀아댔으니…

《그래, 내가 구제불능이지.》

화나는 것을 포기하려는 듯 일어섰다. 그런데 관자놀이에 묵직하니 고여 있던 지난 밤 폭음의 찌꺼기가 채 사라지지 않아 머리와 몸을 일으키기가 귀찮아진다. 냉장고 문을 열고는 광천수병을 꺼내들고 입안에 벌컥벌컥 물을 마구마구 쏟아넣는다. 몇달전에 수화기를 타고 흘러오던, 리혼하겠다고 냉정하게 내뱉던 마누라의 언어들이 하나하나 가시가 되어 떡하니 마음에 찔려온다.

며칠후 영등포역, 대전행 기차표 들고 지섭이는 간이의자에 앉아 승차시간을 기다린다. 엉뚱하게도 주씨가 일자리를 소개해줘서 둘이 같이 대전으로 가기로 하고 영등포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은 왜 아직도 안 오는거야.》

시간개념을 어느 흙탕물에다 완전 던져버렸는지 모를 주영걸이를 기다리다가 지섭이는 훌 일어난다. 배가 출출하다.

작은 컵라면 하나와 삼각김밥 두개 사들고 정수기앞으로 터벅터벅 다가가 라면컵에 물을 받는다.

《형님,》

꾸역꾸역 라면물에 김밥을 먹고 있는데 주씨의 목소리가 저쪽에서부터 들려온다. 공중 예의라고는 아예 없는 놈이다. 머리를 돌려 보니 거침없이 떠도는 들개마냥 풍덩풍덩, 불편한 한쪽 다리로 뛰어오는데 왠지 안발란스하다.

《뭔 불알 빠지게 바쁜 일이 있다고 이제야 오니.》

면박도 타박도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주씨는 씨이익 웃는다.

《돈 좀 주세요. 배가 고파서.》

누군가 다가오더니 지섭에게 손을 내민다. 푸수수한 머리, 씻지도 않은 얼굴… 아까 라면사고 남은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호주머니에 있다는게 생각나자 지섭이는 말없이 꺼내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두어차례 순서없이 하고는 주춤주춤 그 인간은 또 어디론가 향한다.

《돈도 많소. 그 돈 날 주고 말지.》

짠돌이 아니랄가봐 돈이라면 오죽을 못쓰는 영걸이를 외면한채 지섭이는 나머니 김밥을 마저 입안에 밀어넣고 우물우물 넘기고는 휴지를 꺼내 입을 닦는다. 대전으로 가는 무궁화호 기차를 탈 승객들은 8번 출구로 나가라고 방송이 울린다. 영걸이는 제 먼저 앞장선다. 그 놈 뒤를 따라서 출구로 향하다다 우연히 머리를 돌렸다. 왼쪽 기둥아래서 성인 남자 세명이 17살이 될까말까한 어린 소녀하고 맨땅에 앉은 채 종이컵으로 소주를 들이키고 있다. 그 어린것도 제법 잘 마신다. 부랑자, 정신병자, 로숙자… 누군가 무심코 지어준 그 이름을 등에 진채 패배한 자들의 삶의 공간으로 인식된 그 외진 구석에서 소주를 홀짝이는 그 어린 녀자애를 보며 지섭이는 괜히 씁쓸해진다. 갑자기 마누라가 며칠전에 긁적거려서 어느 인터넷신문에 올렸던 시가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시제도 《영등포역》이였던것 같다.

시끌벅적…

롯데리아, 구내서점, 스토리웨이, 구내약국, 아가페…

이리저리 구겨져 포기한 인생마저

뒤돌아볼 엄두가 없는,

그래서 락오자로 찍혀지고 삶을 포기한 사람들,

현실을 버티기 힘들어 결국은 마음에 금이 간 사람들…

꿈처럼 아름다운 상품이 진열된 롯데백화점의 쇼윈도

먹고 살기 고단한 무리들이 엘리베이터에서도 멈추지를 않고

자꾸, 자꾸 뛰어오른다, 그 끝이 어딘지도 망각한채

락오자에게 냉랭한 시선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바쁜 기계들의 몸짓들,

열정을 쏟아부어도 다가오는 것은 벽뿐,

덩그러니 저 머~얼리의 일탈을 꿈꾸는 760331-6180592

이 땅에서 나는 외국인등록번호로 호명된다

생활보다 생존

자비보다 리기가 냉랭한 대리석 바닥을 헤맨다

좀 도와주십시오

대낮부터 알코올에 젖은

빠알간, 땟물이 흐르는 파카를 대충 걸친 아낙네

삐죽삐죽 흐트러진 머리칼

소주 냄새가 새어나오는 입

빠진 이 사이로 발음이 슝슝 흩어진다

500원, 아니, 100원짜리 동전 한잎 선뜻 꺼내지 않고

슬슬 곁을 비켜가는

따뜻한 외투에 몸을 숨긴 몸집들

현실의 물질에만 매달리는 삶의 허약성들

보랏빛 천원짜리 지폐 한 장 꺼내들고

알콜 녀인네에게 다가가 손에 쥐여주는

세월의 기억만큼 흰 머리의 할머니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스산한 풍경속에서도

설은 곧 오려나보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흥겨운 노래가락

인파에 파묻혀

760331-6180592은 플랫트홈으로 나간다

마누라도 지금의 나같은 심정이었을까? 문득 지섭이는 이 공간이 그토록 낯설어보였다. 왠지 사람을 쓸쓸해지게 만드는 공간이다. 생기와 활력으로 넘치기는 하나, 또한 생기와 활력과는 담을 쌓은, 현실의 벽에 부딪쳐 되돌아가는 길을 포기한채, 아니 망각한채로 화려한 이 공간의 어느 구석에 초라하고 가난하게, 그리고 누추하게 주저앉아버린 무리들을 보며 지섭이는 플랫트홈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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