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의 역사이야기

[육삼 인사말: 여름방학에 잠깐 소풍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뵙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용 바랍니다.]

제3절 1931-1945년 조선인의 농업

벼농사는 높은 수익으로 만주농업에서 날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중국인지주와 중국당국에서는 벼농사를 제창하였고 고무하는 조치를 내왔다. 위만주국에서는 1935년에 《알곡관리법》, 1943년에 《수리조합설립요강》을 반포하였다. 이는 만주 벼농사의 발전에 일정한 추진 역활을 놀았다.

국제시장도 벼 생산을 발전시키는데 아주 유리했다. 1차 대전 기간 유럽의 농업수확고는 절반가량 줄어들었는데 국제시장의 입쌀이 폭등하여 벼농사가 농작물재배가운데서 이윤이 제일 높았다. 만주의 부자들은 앞다투어 땅을 사가지고 조선농민을 고용하여 대대적으로 수전을 개간했다.

1938년 이후 만선척식에서 수전개척을 직접 경영했다. 1940년 통계에 따르면 8개 수전공사를 벌렸는데 공정비용은 242만 6000원에 달하였고 실제 경작면적은 1만 3600 정이었다.

만선이 시도한 또 한 가지 공사는 위통화성 유하현 고산자가에 건축비용 47만 원을 가지고 만주의 최초 저수지를 건설한 것이며 이것으로 700정보의 수전을 가꿀 수 있었다.
1936년 만주의 수전면적은 11만 3943정이고 쌀 수확고는 254만 5483석이며 앞으로 수전이 가능한 면적은 35만 정으로 예상된다.

당시 수전이 발달된 지역은 장춘, 봉천, 무순, 안동, 개원, 송수, 해성, 영구, 해림부근과 간도지역이다.

1936년 재만 조선인의 한전경작면적은 19만 336정이다. 경작지면적으로 보면 콩, 옥수수, 보리, 수수 등 작물들이 주된다. 간도에서는 수박, 줄당콩, 남새, 돌피, 삼 등 작물도 재배하였다. 간도는 조선인의 가장 중요한 농작물 경작 지대였다. 만주 한전경작지의 85%가 간도에 있다는 사실이 이 점을 말해준다.


제4절 조선농민의 부업

만주의 겨울은 결빙기가 길기에 조선농민에게 있어서는 부업의 가장 좋은 시기이다. 또 농사일에만 의거하면 근근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형편에서 부업은 생존의 또 중요한 방법이다.

1. 아마천 제조 조선농민은 중국인에 비해 아마를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베천 짜는 기계로 매 10호에 3-4대 지어 7-8대를 갖고 있는 지방도 있다. 1917년 당시 간도 내 베천 짜는 기계는 1만 3700대에 달하는 사실은 그 보급정도를 알 수 있으며 1914년 이전의 물가로 1.70-2.00원 정도면 한대를 만들 수 있었다. 짠 베천의 절반은 집에서 쓰고 나머지 절반은 시장에서 팔았다. 당시 베천 총 판매액은 14.15만 원에 달하였으며 대개 원산, 종성, 무산 등지의 조선 상인들이 천 또는 기타 물품으로 바꾸어 갔다. 베천은 대체로 가을이 끝난 겨울에 실을 뽑고 이듬해 4,5월에 천을 짯다. 베천은 가는베와 굵은베로 나누며 가는베는 1자 2촌 내지 1자 3촌 폭에 19자 내지 23자 길이로서 가격은 1-2원이다. 굵은베는 1자 좌우 폭에 35자내지 37자 길이로 가격은 1.50-3.40원이다.

2. 누에사양 간도의 누에사양은 이도구 부근의 조선농민 리환 씨가 첫 시작을 뗐다. 시험재배는 1925년에 있었고 이듬해는 156석의 산량을 올렸다.

북간도에 있어서 누에 사양호는 1925년에는 322호, 1926년에는 679로 두 배 장성을 보였다. 누에재배인구는 1194명이다.

3. 농업노동 지주의 경우 해마다 노동자를 고용하나 중농 이하는 파종, 제초, 수확 등 농망시기에는 노동력을 고용하기에 기타 시기에는 노력이 남아도는 상황이었다. 조선 농민은 대개 날품(日傭)으로 임시 수요에 응했다.

1917년 9월 간도지역조사에 의하면 일로임은 0.20-0.30원이고 월로임은 5.00-5.80원 이며 년 로임은 30-45원이다. 상부지는 일로임이 0.40원, 월로임이 8.87원, 년 로임이 68.75원이다. 상부지역에 있어서는 로임만 주지만 상부지 외 지역에 있어서는 식사도 책임지는 것이 통례이다.

4. 가축사양 봄에서 가을까지는 방목하고 밤과 겨울에는 가두어 사양했다. 사료는 주로 풀, 곡식, 깍대기, 두병 등이었다. 1926년 간도지역은 소는 호당 한 마리, 말은 4호당 한 마리, 양은 백호당 4마리, 염소는 백호당 2마리, 돼지는 호당 2마리, 닭은 호당 3마리, 당나귀는 10호당 약 1마리, 노새는 백호당 3마리였다. 1936년 6월 현재, 만주조선인이 갖고 있는 소는 4만 4391마리, 말은 7836마리, 돼지는 7만 5004마리, 개는 4622마리, 닭은 16만 7103마리였다.

1930년, 201호 조선농민에 대한 이훈구씨의 조사연구결과에 따르면 연초에 가축을 사들이면 호당 7.08원, 연중에 사들이면 호당 5.95원, 연말에 사들이면 호당 9.4원이었다. 가축노동으로 인한 수입은 호당 19.42원이다. (가축은 소, 말, 당나귀, 노새만을 포함) 가축사양으로 얻은 201호의 수입은 알류 741.45원, 털 23.70원, 피혁 115.55원, 기타 89.20원으로써 합계는 969.90원이다. (이상은 부여, 아성, 쌍성, 하얼빈, 주하, 녕안 등 6개 현을 포함)


제7장 조선인교육

재만 조선인에게 있어서 교육은 생존 다음으로 가는 기본요소로 되었다. 정착이 이루어진 다음 마을이 생기면 잇따라 가는 것이 곧바로 글공부였다. 학교는 글을 가르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애국과 반일사상을 고취하는 민족주의의 진영이었으며 자체의 민족을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였고 나아가서는 반일활동을 하는 음폐물이거나 중요한 장소로 되었다. 조선인의 교육 역시 일제의 문화침략을 막는 최후의 싸움터였다.


제1절 《한일합병》전 조선인교육

만주이주 초기, 조선인의 교육이란 주로 집거한 마을에 서당을 꾸려놓고 훈장을 모셔다가 《천자문》, 《통감》, 《명심보감》, 《맹자》등 한문과 한학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에 접어들어서는 간도지방에 신학교운동과 더불어 근대학교가 창립되기 시작하였다. 1904년 간도의 첫 공립학교인 연길북산중학당(현 북산소학교)이 세워졌다. (1901년 10월 21일에 창립 되였는데 처음에는 《학무서원(学务书院))이라 불렀다는 일설이 있다) 《연길현지·교육》에는 《연길청 무민동지(抚民同知) 진작언(陈作彦)의 창의에 의하여 창립》되었다고 씌여있다. 학제는 5년이며 보통반 과목은 수신 (《양정 유규》, 《종정유훈》 등), 독경 (《좌전》, 《주례》 등 유가의 경전로작), 중국문학, 역사, 지리, 산수, 박물, 물리, 화학 등이었다.

1908년에는 연길변무방판 오록정이 이 학당을 시찰하고 나서 《학당이 날로 헐망해 가는 형편에 비추어 자금을 지불하여 규모를 개변시켜 다소 완비하게 했다.》 (《연길현지·교육》) 이리하여 1909년 11월에 이르러서는 초급반학생이 30명이고 고급반학생이 40명인 비교적 큰 규모를 갖추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조선인들의 신학교육 운동은 점차 활기를 띠였다. 조선의 반일 문화 계몽운동의 영향을 직접 받은 일부 지식인과 애국지사들은 교육이 불흥하면 민족생존이 불가능하다면서 반드시 신학 교육운동을 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당시 교육을 지배하는 주류적 사상이었다. 즉 이 시기 조선인교육은 민족의 자주와 독립, 해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신학교육의 내용은 내수외학(內修外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내수외학이란 안으로는 자주적 체계를 정비강화하며 밖으로는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대중에게 보급하는 것이다.

중국조선인근대학교교육의 시원으로 되는 학교는 1904년 4월 16일 훈춘현 흑정자 옥천동(현 경신향)에 당지 기독교교회에서 설립한 동광(東光)학교이다. 설립초기, 교육과정은 조선어, 산수, 체육, 창가와 성경이였고 교재는 자편하였다. 교사는 교회당이였는데 일요일예배 외의 6일간은 학교의 교실로 사용하였다. 학생들은 통학하거나 기숙하였는데 한때 학생이 150여 명에 달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후 독립지사 이춘(李春)이 학교를 이용하여 반일민족교육을 진행하였다. 1920년 후, 동광학교는 훈춘보통학교의 분교로 되었으며 경영권도 조선인민회로 넘어가고 교수내용도 보통학교와 같게 되었다. 1938년, 교명을 옥천동국민우급학교로 개칭하고 1944년에 이도포로 옮긴 후 흑정자국민우급학교라 하였다.

중국조선인근대학교 중에서 대표성을 띤 학교의 하나가 바로 서전서숙 (瑞甸書塾)이다. 창립자는 이조말엽 고종 년간의 우국충신 이상설(李相卨)이다.

이상설의 자는 순오이고 호는 보재, 1871년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리의 한 양반가문에서 태여났다. 1894년 식년(式年)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그때부터 여러 요직을 거쳐 1904년에 법부협판이 되고 1905년에는 의정부참찬으로 있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튿날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가 투옥되었고 1906년 봄에 석방되자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다가 그해 여름에 간도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창립하였다. 이때 이상설은 《리당》이란 별명을 썼다. 1907년 4월 고종황제의 밀사로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고저 헤그에 갔다가 실패하자 해외망명생활을 시작했다. 1910년 류인석 등과 함께 울라지브스또크에서 《성명회(声呜会)》를 조직하였고 1912년에는 이동휘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기관보 《권업보》를 꾸렸다. 1917년 봄 러시아 연해주에서 각혈증에 걸려 4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906년 여름, 이상설은 이동녕李东宁,李良), 여조현(呂祖铉), 정순만(郑 淳万,王昌东), 박정서(朴正瑞,朴茂林), 김우용(金禹容,金东灿), 황달영(黄 达永,田共达) 등과 협상 끝에 자기의 개인재산으로 용정촌기독교회장 최병익의 집을 사서 서전서숙을 세웠다. 운영경비 역시 이상설의 개인재산으로 해결하였다.

설립초기 숙장은 이상설이였고 교원은 이상설, 여조현, 김우용, 황달영이었으며 정순만, 이동녕이 서숙운영을 맡았다. 서숙에서는 각 지역에서 온 학생 22명을 받아들여 신학교육을 진행하면서 반일사상을 주입하였다.

동척에서 간행한 《간도사정》에는 아래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당시 통감부는 한국정부와 협동하여 간도조선인보호책을 내정하고 1907년 봄에 육군중좌 사이또와 사무관 등을 파견, 밀행케 하여 간도파출소의 예정지 및 기타의 상황을 조사케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행은 용정촌에 도착하여 서전서숙의 주무자(主务者)를 방문 하였을 때 마침 이상설은 산보를 하려고 문을 나서려하다가 이자들의 래의를 묻게 하였는데 일행은 상업관찰 도중에 들렸다 하고 때는 정심시간이였으므로 지니고 온 도시락을 먹기 위해 온수와 식기를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동교위원들은 빌려줄 수 없다하여 랭랭이 이를 거절하고 이상설의 경우는 일언반구의 질문도 없이 출타하였기 때문에 일행은 할 수 없이 강변에 가서 강물로 목을 축여가며 식사를 끝냈다. 당시 이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오만하였나 알 수 있는 일이다.》

1907년 5월, 이상설이 헤그밀사로 떠나자 숙장에 려조현이 추대되었다. 그해 8월 용정촌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세워지고 일제의 통제, 유인과 탄압으로 8월에 서숙은 부득이 문을 닫았다. 서전서숙의 교직원들은 일부 학생을 거느리고 훈춘 탑두구 부근으로 옮겨가서 서전서숙을 회복하고 학생을 더 모집하여 1년간의 수업을 거쳐 3개 반 학생 74명을 졸업시키고 해산하였다.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양정학당, 창동강습소, 명동강습소, 광성강습소, 정동 서숙이 꾸려졌고 1912년 후에는 창동, 명동, 광성, 정동 등 4개 강습소가 중학교로 발전 되었다.

양정학당(养正学堂)은 월간신동(越垦绅董) 이동춘(李同春)이 1907년 3월 광제욕(현 용정시 광개향 광소촌)에 세웠는데 이듬해 3월에 관립학당으로 넘었다. 1910년 화룡현이 설치되자 관립 제2학당으로 되고 그 후 또 현립 제2학교로 되었다.

이동춘은 지난 세기 초 조선이민 중 걸출한 교육가이며 민주혁명운동의 선구자이다. 조선 회령사람으로서 1883년에 태여났다. 일찍 중국에 이주하였고 경찰학당에 다녔으며 중국어를 정통하였다. 조선 서울주재 청나라 허대신의 통역관으로 있으면서 《파총(把总)》이란 관직을 표창 받았다. 중국에 돌아온 후 녕원보 광제욕 광소사에서 교육사업에 열중하였다. 그는 일찍 중국국적에 가입하여 치발역복하였다. 이동춘은 지방관청의 지지 밑에 마을사람들이 기부한 돈으로 양정학당을 세웠다. 마을의 공유지역에 중국식 초가 14칸을 지었는데 몸채 3칸은 교실로 쓰고 동, 서 사랑 6칸은 숙사로 쓰며 5칸은 주방과 식당으로 썼다. 초기 학생은 60명이었다. 학과목은 중문, 중어, 일어, 산학, 체조 등 5가지였고 교원은 이동춘과 피원경이었다. 관립으로 된 후에는 중국인교원 2명을 두었다. 학생들은 흰 천 조련복을 입었으며 교과서와 지필묵 등 학용품은 학당에서 무료로 제공하였다.

양정학당의 취지는 《학생들을 양성하여 근본을 바로 닦고 사상을 단정하게 하는》것이다. 양정학당교사는 1931년 9.18사변 때 소각되었다.

창동(昌东)의숙은 조선유지인사들인 오상근(吴常根), 이병휘(李炳微), 남성우(南性佑, 본명은 남인상) 등이 연길현 와룡동(현 연길시 소영향 민흥촌)에 1907년에 세운 것이다. 이듬해에 창동학교로 개칭했고 1910년에 중학부를 설치하고 창동학원이라 일렀다. 원장은 오상근, 부원장은 이병휘와 남인상, 교원 7명, 학생 100여 명, 그중 중학생이 80여 명으로서 그들 대부분이 학교에 기숙하였으며 경비는 학교후원회에서 부담했다. 중학부에서는 군사훈련과를 설치하였다.

1920년《15만 탈취사건》에 이 학교 졸업생 최봉설 등이 이었고 이 학원의 교원 지봉하는 1930년에 와룡동에 중공지부가 건립되면서 제1임지부서기로 임했였다.

그 후 일제가 학원의 교사를 강점하고 군경을 주둔시키려 하자 상급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학교에 불을 놓아 태워버렸다. 1935년 마을사람들이 새 교사(초가집)를 짓고 창동학교를 회복하였고 1935년 9월 12일에 《사은기념비》를 세웠다. 미구하여 창동학교는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으로 재차 폐교당했다가 1945년 10월 해방을 맞아 제2차로 창동학교를 회복하였다.

명동(明东)서숙은 1908년 4월 27일 개설되었다. 전신은 김약연이 1901년에 세운 규암재(圭岩渊)라는 서당이다.

김약연의 호는 규암이고 1868년 9월 12일 조선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여났다. 1899년 화룡현 지신사 명동촌에 이주, 1907년 연변교민회 회장을 맡았고 1909년에는 이동춘과 함께 간도 간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직에 취임했다. 1912년 북간도 국민회 회장으로서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1918년 여준, 정안립 등 39인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다. 1923년에는 간도조선인의 재산과 생명보호를 위한 자치권획득을 위하여 전력했고 만년에는 목사로 되었다.

용정의 서전서숙이 폐교되자 일부 교원과 학생들이 명동에 와서 김약연과 상의 끝에 세워진 것이 신학교육을 실시하는 명동서숙이다. 김약연이 숙장, 박무림(서전서숙의 창설자의 한사람)이 명예숙장으로 되었다.

창립된 첫해에 학생 42명을 모집하였고 이듬해 4월에 사립명동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10년에는 중학부를 증설하였고 1911년에는 이동휘의 권고로 여학부를 내왔다. 여학부의 교원은 이의순(이동휘의 딸), 정신태(정병태의 누이동생), 우봉운 등이었다. 학생은 중학부에 114명, 중학 여학부에 46명, 소학부 보통과에 53명, 고등과에 12명이었다. 수업료는 1-3학년은 4.80원이고 4학년 이상은 그 외에 좁쌀 6말을 더 받으며 학생들에게서 약간의 땔나무를 거두었다. 소학부과정은 국어(조선어), 성경, 수신, 한문, 산수, 주산, 리과, 작문, 습자, 창가, 체조, 지리, 동국역사였고 중학부과정은 국어(조선어), 수신, 역사, 지지(地志), 법학, 지문(地文), 박물, 생리, 수공, 신한독립사, 위생, 식물, 사범교육학, 농림학, 광물학, 외교통역, 대한문전(文典), 신약전서, 중국어, 작문, 습자, 산수, 대수, 기하, 창가, 체조(군사체육) 등이다. 여학부에는 재봉과를 첨가했다. 교학의 중점은 배일, 민족독립의식을 가진 인재양성에 두었다.

명동학교는 20세기 10년대 말 반일민족교육의 선봉이었다. 1920년 명동학교 교사는 일제에 의해 소각되었고 1923년 벽돌로 교사를 다시 지었다. 당시 학생 수는 322명이었다. 주덕해를 혁명의 길로 인도한 공산주의자 김광진, 저항시인 윤동주, 애국적 영화인 나운규, 통일의 화신 문익환 목사 등은 명동학교 출신이다.

광성(光成)서숙은 이동춘이 김립, 김하석, 윤해, 계봉우, 장기영 등 유지인사들의 협력하에 1908년 연길현 소영자촌(현 연길시 소영향)에 세운 것이다. 1911년에 학생이 106명이었다. 1912년에 중학부를 증설하고 광성중학으로 개칭하고 이동휘가 교장직을 맡았다.

이동휘(李东辉)는 조선의 조기공산주의자이며 신문화교육활동가이다. 호는 성재 (诚斋), 1873년(고종 10년)에 조선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여났다. 무관학교를 졸업 하고 국군참령의 벼슬을 했고 강화도 진위대 대대장직을 맡았었다. 1907년에 《신민회》에 참여했고 《서북학회》의 중견인물로 활약했다. 1910년 러시아 연해주와 간도 등 지역에서 활약했다. 간도 교육사업에 열중했고 1914년 왕청현 라자구에 사관학교를 꾸렸다. 1916년에는 연해주에서 《한국사회당》을 조직했으며 1920년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1921년 시비리야에서 조선인청년들을 동원하여 적기련대(赤旗团)를 건립, 1928년 병고하였다.

이동휘는 국어, 조선역사, 조선지리 등 사립학교 교과서를 편찬하였는데 짙은 애국, 반일사상이 담겨있었다. 《경신년대토벌》 때 일본군이 광성학교에 불을 질렀다. 이로서 학교는 폐교되었다.

정동(正东)서숙은 반일민족지사 강백규(姜伯奎), 강희헌(姜羲轩), 유한풍(俞汉丰) 등이 1908년 10월 28일 개운사 자동툰 후저동(현 용정시 광개향 자동촌 제6촌민조)에서 농가 한 채를 사고 학생 20여 명을 모집하여 꾸린 것이다. 창립의식에 500여 명 군중이 모아 성황리를 이루었다. 초대숙장에 강백규였다.

1912년 여름, 새 교사를 짓고 이듬해 3월에 신학5년제를 실시하면서 교명을 《정동학교》로 고쳤다. 학생은 80여 명이었다. 수업과목은 조선어, 산수, 역사, 지리, 리과, 체육, 음악 등이었으며 학교 내에서의 종교의식을 폐지하였다.

1914년 8월 10일, 여학부를 증설하고 처음으로 여학생 25명을 모집하고 박에스컬 (박SKL)을 여교원으로 초빙하였다. 1918년 4월에 중학부를 증설하고 중학부교사를 증축하였다. 물리, 화학실험기구와 생물, 광물표본이 갖추어진 실험실까지 꾸렸다. 중학부과목은 기하, 역사, 지리, 영어, 물리, 화학, 생물, 체육, 음악 등이다.

3.13반일시위에 정동학교의 80여 명 교원과 학생이 참가하였으며 1920년 10월 19일 일본토벌대가 학교에 불을 질러 학교는 잠시 문을 닫았다.

1922년 3월 1일 다시 복교했고 학교 내에 중공지하당조직이 건립되고 1930년경에는 《토요일강연회》, 《사회문명퇴캠, 《시장방곡(市场防谷)》, 《통신연락》 등 조직이 비밀리에 무어졌다. 1932년 6월 15일 일제는 백주에 자동마을에 덮쳐들어 20여 명 무고한 주민을 살상하고 정동학교에 불을 질렀다. 그 후 8.15를 맞아 복교하였다.

정동서숙은 창립된 그날부터 광개중학교로 교명을 고치게 된 그날(1950년 2월 24일)까지 15회에 걸쳐 486명의 졸업생을 육성해냈다.

이 시기 간도 외 지방에도 조선인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1907년 안동의 협동학교, 1910년 이동녕이 통화현 하니하에 세운 신흥학교, 1908년 녕안현의 고안촌(高安村)소학당 등이 그 예로 된다.

일본인들은 조선인학교를 말살하고 불사르는 동시에 자신들도 학교를 급급히 꾸리였다.

서전서숙이 폐숙 된 뒤 이상설의 동료들이 뒤처리를 하였다. 사이또 소장은 최서기관을 시켜 서전서숙의 교원과 운영자에게 매달 20원 보조금을 내줄터이니 계속 서숙을 꾸려라고 《권고》하였다. 이들이 이에 응하지 않고 교사를 팔아버리니 《간도파출소》의 일본인들은 그 서숙집을 사가지고 1908년에 서전서숙 자리에다 《간도보통학교》를 꾸리였다. 또 국자가, 배초구, 투도구, 훈춘 등 지역에도 조선인 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고 노예화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또 1908년 7월 1일에 용정에 조선통감부 함경북도 도립간도중앙학교를 세우고 무료교육을 실시하였으나 교원이 17명이나 되는 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54명밖에 안되었다. 1910년 이 학교를 지방학교로 개칭하고 일본총영사관에 귀속시켜 관할하였는데 졸업생들의 취직을 책임진다는 우월한 조건으로 780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노화교육을 실시하였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