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인력공단 수기공모 가작

나도  예전에는 산 좋고 물 맑은 중국의 한 농촌에서 덩실한 기와집 지어놓고 태산같이 믿던 남편에 귀여운 아들딸들을 거느리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며 근심걱정 없이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때는 부부간에 자기의 밭에서 달갑게 땀 흘리며 맞들고 벌어 가정살림 늘여나가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최대의 낙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딸 하나 아들 하나 오붓하게 네 식구 살아가는 우리 가정을 모두 부러워했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 한국과 중국 간에 국교가 정식 건립되고 한국 내왕에 문이 열리게 되자 마치 한국 나가야 살길이 생기는 것처럼 중국 조선족사회에는 한국 나가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도 앞장서면 섰지 뒤질 수 없었다. 선참으로 집에 있는 돈을 몽땅 긁어모아 남편을 내 보냈다. 나는 아이를 키워야 하므로 나가지 않았다.

떠나기 전날 밤 나는 내일의 작별이 너무 아쉬워 그렇게도 일생을 함께 살려고 그렇게 굳게 믿어왔던 남편의 품에 꼭 안겨 오래오래 눈물을 흘렸다. 사랑이 깨 쏟듯 하는 35세의 한창 꽃나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근심마, 내가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올거야, 그때 우리 또 잘 살아보아야지, 안그래!…”

남편의 대장부다운 헌헌한 말은 나에게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충만되게 하였으며 작별로 아쉬운 마음에 어느 정도 위안이 되게 하였다.

이튿날 나는 하얼빈 공항까지 나갔다. 우리는 오래오래 서로 손을 꼭 잡고 놓지를 않았다. 나는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 않아다. 아니, 말보다도 서로 초점을 같이한 눈빛만으로도 그 사랑으로 얽힌 마음을 읽고도 남음이 있었다.

비행기는 이륙하여 하늘로 날아오른다. 나는 오래오래 지켜 서서 비행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정녕 돈이란 무엇인지, 꼭 작별해야 하는 이유를 나로서도 그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이 떠나서 1년 남짓이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전화가 오고 달마다 돈을 부쳐 보내더니 2년째 잡으면서 전화도 뜸해지고 돈도 제때에 부쳐 보내주지 않았다. 3년 남짓이 되더니 완전히 두절되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전화가 와도 옛날에는 1-2시간 끊을 줄 모르던 것이 한두 마디면 그만이고, 짜증내는 말이 아니면 생트집 잡는 말뿐이었다. 나는 남편의 이런 변화가 못내 안타깝기만 했다. 집에서 남편의 보내주는 돈을 쪼개 쓰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자기를 알아주지 못하는 남편이 못내 안타깝기만 했다.

(한국 가면 모두 애인을 한다던데 남편이 애인이나 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럴 수 없어 그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자기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부정할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지나는 사이 어느덧 아이들도 커서 능히 자립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더는 이렇게 고독하게 지낼 것이 아니라 한국으로 가리라 마음먹었다. 국적까지 취득한 오빠의 초청으로 한국으로 나왔다.

내가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남편은 시골 현장에 가서 일하고 있다는 구실로 나오지 않고 오빠만 나를 영접해 주었다. 그날 밤 나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니가 직접 목격하면 놀랄 수도 있는데 한국 오면 남자들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홀로 나와 거의 10년을 있는다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다.”

오빠의 말은 나에게 숱한 의문부호를 던져 주었다.

정녕 애인까지 하고 생활한단 말인가, 우리가 결혼 할 때에도 나의 부모들과 친척들이 견결히 반대하는 것도 그이가 너무 따르기에 할 수없이 내가 적극적으로 동의해 나서서 성사시켰는데 그때 나를 절대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던… 영원히 변하지 않겠다던… 그 맹세는 헌신짝 버리듯이 내 동댕이쳤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눈물이 비오 듯 쏟아졌다.

그 이튿날에도 오지 않았다. 20여일 후에 어쩌다 한번 왔는데 그는 나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저에 대해 어찌나 냉담한지 별로 할 말도 없고 겨우 하룻밤 자고 갔는데 우리는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아무리 눈물을 흘린들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나는 실컷 울었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 그저 울고만 싶었다.

한 마을에 있던 친구들을 통해 알았는데 그는 내장목수 일에서 사람들도 거느리고 일하면서 돈도 적지 않게 벌었고 자기보다 10여살 어린 여자와 집 잡고 생활하고 있단다.

나는 더는 그이에게 미련을 두고 그이만을 생각하며 실망감과 절망감에 자기를 휩싸이게 할 수 없다고 결단을 내리고 일자리를 찾기로 작심했다. 주위의 직업소개소를 빗질하다시피 하여 월급도 괜찮은 한식집 주방에 들어갔다. 주방장이며 홀 써빙을 하는 사람들이며 모두 한국 사람들이었는데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달리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고 지어는 옷 견지며 생활 용품마저도 가져다주는 것은 보통이었다.

나는 그들과 인차 익숙해져 서로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었다. 나의 부모들 모두 원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어서 어릴 때부터 생활습관과 음식습관이 굳어왔기에 거부감이 없었다. 불과 2년 남짓하니 주방보조로부터 다시 주방장으로 승급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려나갈 즈음에 나에게 생각지 않던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한번은 밤늦게 퇴근하다가 부주의로 길 건너오는 오토바이에 부딪친 것이다. 내가 정신 차렸을 때에는 오른쪽 다리가 특별히 무겁고 머리가 흐리터분하여 들 수 없었다. 나의 침대 옆에는 나의 오빠 그리고 한 사람 더 있었는데 바로 그 한식집 사장님이시었다. 그들은 나를 3일간이나 옆에서 지켜주었다는 것이었다.

나의 한쪽다리는 절골 되었고 머리는 강한 충격으로 타박상을 입은 것이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굴러 떨어져 비개를 적셨다. 3개월 남짓이 입원해 있는 사이 책임지고 치료를 맡아준 의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시종여일 저를 관심해주고 보살펴준 그 한식집 사장님을 비롯해 전체 분들 더없이 고마웠다.

나는 최근 10여년 간 받아보지 못 따뜻한 사랑, 즉 진정한 인간애와 동포애를 가슴 뜨겁게 깊이깊이 받았다. 내가 퇴원할 때 이렇게 치료가 잘 된 것은 기적적이라며 책임진 의사들 간호사들은 모두 문 앞까지 나를 전송하여 주었다.

내가 출근하던 한식집에서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계속하여 주방장으로 자리를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사장님을 비롯해 두 손 모아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지금 나는 음식점 일을 마치 자기의 집일처럼 참답고 열심히 해나가고 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기보다 사람들이 나에게 돌리는 그 사랑의 마음이 너무너무 고마워 실제 행동으로 보답한다고 해야겠다.

나의 메마른 가슴에 단비를 내려준 것도 바로 고국인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나는 진정 사랑을 되찾은 느낌이다. 나는 지금 문명하고 발전된 민주적인 국가에서 마음껏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오늘의 일터를 소중히 여길 것이며 오늘의 사랑을 소중히 여길 것이며 오늘의 행복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또한 그 어느 때엔가는 나도 한국 사람들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갈 것이다.

2008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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