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봇나무가 봇나무이듯 모든 한민족은 한민족이다

 
백두산에 갈 때마다 나의 눈길을 유난히 끌어잡고 나의 마음을 지극히 울리는 것은 백발을 날리는 듯한 장엄한 주봉이 아니다. 명경같이 맑고 하늘같이 푸른 천지도 아니고 사철 변함이 없이 흰 띠를 드리운 듯한 폭포의 모습도 아니다. 운산나무 전나무 낙엽송… 그리고 이름 모를 수종들이 콱 우거져서 어둡고 습한 태고연한 숲도 아니다. 폭포가 내를 이루어 흐르는 백하(白河)의 골짜기와 천지로 올라가는 높은 언덕 잡목림이 끝나는 곳을 하얗게 덮은 봇나무(자작나무) 숲에 나는 혼이 나간다.

한반도와 만주와 시베리아 대지 어디로 가든 하얀 자태로 맞아주는 봇나무는 은빛으로 마냥 고와 자고로 눈같이 하얀 복장을 즐겨 입는 우리 민족의 표상이 되어 왔다. 그래서 이 몸이 봇나무 숲에 잠기면 고운 봇나무는 미녀의 하얀 살결처럼 이 내 마음을 현혹한다. 백두산 상상봉 봇나무 수림 속을 헤치며 굽이굽이 올라간 길을 톺아가노라면 나는 하얀 꿈속, 하얀 시속을 거니는 듯한 애수에 젖는 마음을 달랠 길이 바이없다.

박종은 '백두산 기행'에서 봇나무 숲을 '마치도 저잣거리에 사람들이 모여 어깨를 비비고 소매를 스치면서 호상 왕래하는 것과 같았다'고 썼다. 그는 서울, 개성, 평양, 무산에서 살아가는 한민족을 염두에 두고 봇나무를 묘사하였던 것이다. 조선족 시인 조룡남은 백두산의 봇나무를 '뿌리 박을 돌틈마저 없는 곳에 버림받아 모대기는 자연의 이붓자식'에 비유했다. 그는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국의 조선족을 염두에 두고 봇나무를 읊었다.

이상은 200여 년의 시간적인 거리를 둔 백두산 봇나무에 대한 시각적 차이다. 그제나 지금이나 봇나무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나 이같이 다른 표현은 두 분의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분들을 동행하여 백두산에 가게 되면 봇나무를 두고 박종과 조룡남의 시각적 차이를 느끼게 된다. 모진 추위와 세찬 바람을 용케 이기고 살아가는 봇나무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은 끈질긴 대자연의 생명에 대한 예찬에 생각을 고정할 뿐이다. "대단해.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니…"

하지만 나는 신화 속에 나오는 신령님이 짚고 선 요술 지팡이마냥 꼬불꼬불 타래진 봇나무, 허리가 굽고 머리가 눌려 땅에 닿을 듯 말 듯 잔뜩 쓰러진 봇나무를 통해 잔포한 바람에 체구가 비틀어지고 혹독한 추위에 살갗이 얼어 가무잡잡해진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의 모습으로 비껴온다. 한반도에서 보는 굵고 곧게 높이 자란 은빛의 봇나무가 본토에 사는 한민족이라고 하면 백두산 봇나무는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라 하겠다. 같은 수종이고 하나의 씨앗이나 뿌리박은 터가 다른 것일 뿐이다.

조상의 산소가 있고 자신의 태를 묻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산 설고 물 선 타국타향으로 떠나왔던 할아버지, 할머니… 그들 세대의 연장으로 오늘날 조선족의 군체가 이루어졌다. 백두산 정상에서 바람의 세례를 용케 이겨가면서 숲을 이룬 봇나무처럼.

세계의 모든 봇나무가 봇나무인 것처럼 세상의 모든 한민족은 하나이다. 하지만 한반도 시베리아 백두산의 봇나무가 모양이 다르듯이 한반도와 기타 나라에 사는 한민족도 다르다. 그리고 봇나무를 두고 자작나무라고도 하고 사스레나무라고도 하듯이 우리 민족에 대한 호칭 또한 다르다. 남한은 한족(韓族), 북한은 조선민족, 재일 조선인, 재미 한인(韓人), 러시아 코리아, 중국 조선족…

봇나무를 마주하고 나는 조선족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구태여 중국이라는 규정어를 붙이지 않아도 조선족 이름 속에 깃들어 있는 정치적인 귀속은 분명하고 구태여 한민족이라는 규정어를 붙이지 않아도 혈연적인 연관성을 잘 말해주고 있음을 본다.

백두산의 봇나무는 예리한 칼로 반쪽을 낸듯 바람받이쪽 가지들이 부러지고 한쪽으로 쓸려 있다. 마치도 앞머리만 무성하고 뒷머리는 홀랑 까진 카이로스신을 닮았다. 정치적 귀속(조국)과 혈연적 귀속(모국)의 조화를 이루어가는 지혜를 지닌 영원한 카이로스신이다. 그러나 어깨와 발에 날개가 돋혀서 앞에서 잡지 않으면 날아가 버린다는 카이로스신과는 달리 백두산의 봇나무는 전신에 날개와 같은 가지가 있어도 도망가지 않는다.

백두산의 겨울은 길고 춥다. 해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눈속에 쓰러진 봇나무 가지에도 푸른 잎이 돋는다.

옌볜대 교수·작가/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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