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길우의 수필 111>

 

申 吉 雨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skc663@hanmail.net

 

메꽃에 대한 나의 상념은 매우 정감적이다. 그리고 그 정감은 일시적이고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신선하고 수수한 데에서 오는 따스하고 그윽한 정감이다. 또한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오래 동안 쌓여진 것이어서 지금도 어쩌다가 메꽃을 발견하게 되면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 동안을 바라보게 되곤 한다.

메꽃에 대한 이러한 나의 애착은 물론 그 꽃이 화려하거나 소담스러워서도 아니고, 특별히 향기가 진해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잎이나 줄기 같은 다른 부분이 좋아서도 아니다. 어찌 보면 아주 연약하고 볼품없는 모습이어서 평범에도 이르지 못하는 느낌이 드는, 어쩌면 시시하게 여겨지기까지도 하는 그런 정도의 꽃일 뿐이다.

그러나, 한여름의 이른 아침에 시골 마을을 거닐어 보라. 그러다가, 한적한 울타리나 잡풀이 무성한 밭뚝에서 막 퍼지는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맑은 이슬을 머금고 피어 있는 남빛의 메꽃을 바라보라. 그 가녀리면서도 청순한 모습에 저절로 발걸음이 멈추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가늘디가는 넝쿨 사이에서 어긋나기로 띄엄띄엄 난 자루 달린 잎들을 비집고 가늘게 꽃대를 내어 한두 송이씩 나팔 모양을 하고 피어 있는 쪽빛 모습은 마치 목소리를 듣고 엉금엉금 기어 나와 머리로 문을 조금 밀치고는 밖에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한두 살짜리의 귀여운 아가의 얼굴 같게도 보인다. 때로는 시집갔다가 시골 친정집을 찾아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대문을 막 들어서는 신행 오는 누나의 밝은 모습 같다는 생각도 든다.

메꽃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앳된 모습을 지니었고, 가냘프면서도 신선한 맛을 풍겨주는 꽃이다. 막상 눈에 띄어 바라보면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돌아서고 보면 그 산뜻한 인상에 다시 고개를 돌려 보고 싶게 되는 꽃이다. 가만히 바라보면 볼수록 귀엽고 은근하며, 보잘것없는 듯하면서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윽한 맛을 점점 느끼게 하여 주는 꽃이다. 따라서, 이 꽃은 도시의 꽃이라기보다는 시골에 어울리는 꽃이요, 부자가 감상하기보다는 가난한 서민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꽃이라 하겠다.

메꽃은 학명이 파르비티스 닐 (pharbitis nil)이다. 속명 ‘파르비티스’는 ‘빛깔’이라는 그리스말 ‘파르베(pharbe)’에서 온 것이고, 종명 ‘닐’은 ‘남빛’이라는 뜻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꽃이 나팔 모양이라 해서 나팔꽃이라고 부른다. 꽃이 피어 있는 시간이 짧아서 순(瞬)이라고도 하고, 햇살이 퍼지기 전 아침에만 환하게 피어 있다고 해서 일본에서는 조안화(朝顔花)라 부르며, 영국에서는 ‘모닝 글로리(morning glory : 아침의 영광)’ 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이 씨앗을 우차에 싣고 팔았기에 견우화(牽牛花)라고도 하고, 서양에서는 씨가 단단하다고 해서 ‘인디안 탄환’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명칭들에서 우리는 메꽃이 그 빛깔이나 생김새의 특징뿐만 아니라 개화 시간이나 기간이라든지 그 꽃에서 느껴지는 강한 인상까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또한 메꽃이 동서고금에 걸쳐 얼마나 많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었는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메꽃은 메밀꽃과 한해살이 덩굴풀로 아시아가 원산지인데 주로 열대에서 많이 자라며, 지금 세계에는 60여종이 있다고 한다. 줄기는 덩굴로 길게 벋는데 다른 것을 지주 삼아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면서 자라며, 생장력이 강해서 2,3미터쯤 큰다.

꽃은 잎겨드랑이에서 꽃대가 길게 벋어 나와 그 끝에서 한두세 송이가 피는데, 5개의 꽃잎들이 서로 모여 밖을 향해 나팔 모양으로 펼쳐진다. 꽃은 오후 4시경에 피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햇살이 퍼지면서 시들어 오물아 들며, 향기는 없어서 벌 나비들도 찾지 않아 스스로 가루받이를 한다.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는 시간은 비록 짧지만,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잎겨드랑이마다에서 계속하여 피워내기 때문에 꽃을 볼 수 있는 기간은 긴 편이다.

이와 같은 메꽃의 특성은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실 가닥처럼 가느다랗고 연약한 줄기로도 몇 갈래 가지까지 쳐 가며 2, 3미터나 자라나니 그 강한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초여름부터 서리가 내릴 때까지 마디마디마다 계속 꽃을 피워내니 그 끈기와 굳셈이 가상하며, 스스로 가루받이를 해서 씨를 단단히 잘 맺으면서 해마다 색다른 꽃을 피워 보이니 그 정성이 갸륵하고, 어느 것이나 모두 왼쪽으로만 감아 올라가니 그 뜻이 곧고 바르며, 또한 꼬불꼬불 오르는 가느다란 상순의 모습은 마치 아기의 손 같이 귀엽고, 거기에 나사못처럼 골이 져 말려 있는 꽃봉오리는 애교스러워서 가히 집안에 심어 그를 골고루 본받고 즐길 만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메꽃에는 다음과 같은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가 얽혀 있어 더욱 애틋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옛날 중국에 한 이름난 화가가 있었는데 그의 부인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고을 수령이 이 소문을 듣고 그 부인을 데려가서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성의 꼭대기 방에다 가두어 버렸다.

화가는 부인 생각만 하다가 그만 미쳐 버렸다. 미친 화가는 며칠 동안 그림 한 장을 그리더니 그것을 부인이 갇혀 있는 성 밑에다 묻고는 죽었다. 얼마 뒤 부인은 매일 아침마다 꿈을 꾸었는데, 꿈에 남편이 나타나서 밤에는 당신을 찾아오지만 해가 뜨면 당신이 잠을 깨므로 또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매일 똑같은 꿈을 꾸므로 이상하게 여긴 부인은 철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덩굴꽃이 피어 있었다. 부인은 그 꽃이 자기 남편의 넋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 꽃이 바로 메꽃이었는데, 그래서 지금도 나팔꽃 덩굴은 위로 잘 오르고, 꽃도 해가 질 무렵부터 다음날 다시 뜨는 아침까지만 핀다고 한다.

메꽃의 꽃말이 애정․기쁨․사랑의 희열이면서 또한 박명․덧없는 사랑인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한낱 허황되지만은 않은 것 같은 생각도 들어, 한편 가슴을 아프게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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