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의 장편답사기>

제 8 장
밝아오는 동이

룡정에서 륙도하를 거슬러 남으로 가노라면 지신향 신동골 어구에 예전엔 세개의 큰 바위산이 우중충 솟아있었다. 봄이면 바위우에는 진달래꽃이 붉게 피여 바위산이 한결 장려했단다. 이 바위산을 사람들은 선바위라고 부른다.

선바위는 전설의 바위다. 옛날 해마다 장마철이면 오랑캐령에 도사리고있는 괴물이 행패를 부려서 선바위아래 마을 집과 밭은 늘 재난속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푸짐한 제상을 차려놓고 제를 지냈지만 액운을 피면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차 한 풍수가 <<오랑캐령 괴물한테 소녀 셋을 제물로 바쳐야 재난을 면하리오. >>라고 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리하여 마을의 세 처녀가 마을의 행복을 위해 제물이 되기를 자진했다. 부역에 나갔다가 이 소식을 접한 이 세 처녀의 약혼한 총각들은 미혼처를 구하려고 부랴부랴 마을로 떠났다. 도중에 그들은 백발로인이 주는 장검을 받았다. 그들은 그 장검을 비껴들고 괴물과 생사결단 싸웠다. 열흘동안 쉬지 않고 싸워온 세 총각은 지쳐서 바위로 굳어지고 괴물은 홍수를 타고 덮쳐오다가 바위에 부딪쳐 박산이 났고 홍수도 바위에 길이 막혀 머리를 돌렸단다. 세 총각의 변신인 바위산우에는 세 처녀의 고운 사랑이 진달래로 핀다는것이다.

전설과 같이 선바위는 우리 민족 투사의 상징이다. 이주민들이 개척한 복지를 지켜 싸운 열혈지사들의 장한 모습이다.
청국인 대지주 동한이 이곳 땅을 차지하였을 때만 해도 선바위는 비둘기바위라고 불렸다. 깎아지른 바위벼랑에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비롯된 이름이였다. 하지만 1899년 2월 18일 두만강을 건넌 김약연, 김영학, 문치정, 강백규 등 회령에서 소문난 네 량반가문 대소 22집, 141명이 바위아래에 이르러 터를 잡아서부터 선바위로 이름이 바뀌였단다. 지주 동한이 죽자 그 가족들은 회령이주민들에게 땅을 팔고 고향 산동으로 돌아갔다.
김약연(金躍淵 1868년―1942년)의사는 이곳에 자리를 잡자 일제의 말발굽에 짓밟혀 풍전등화의 운명직전에 이른 조선을 구하려는 교육구국의 뜻을 펴고 1901년 규암재(圭岩齎)라는 서당을 꾸리고 한학을 전수하였다. 그후 1906년 룡정 <<서전서숙(瑞甸書塾)>>의 창립자이며 숙장인 리상설(李相卨)의사가 고종의 위임을 받고 리준, 리위종과 함께 헤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로 참가하고저 룡정을 떠났고 또한 일제놈들의 무리한 간섭과 탄압으로 <<서전서숙>>이 페지되자 사생들이 김약연을 찾아오게 되였다. 김약연은 1908년 4월 27일 규암재를 그만두고 신학교육을 실시하는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창립했다. 그때로부터 마을 이름도 명동(明東)이라고 불리였단다. 밝아오는 동이(東夷)라는 뜻이였다. <<명동은 선각자들의 목적성있는 구국인재양성실천에 의해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해갔다. >>(리혜선 작 <<선바위밑 윤동주 생가터 복원>>에서)

나는 룡정에서 명동으로 가는 길에 숭엄한 심정으로 선바위를 바라보았다. 그제날엔 세개의 바위산이 가지런히 솟아있었다는데 지금은 하나의 산이 외홀로 하늘을 떠받든 기둥마냥 힘겹게 치솟아있었다. 돌을 까서 길을 닦노라고 남포질에 두개의 산이 거덜이 난것이다. 바위산이 있었던 흔적인 돌너덜은 마치도 전쟁의 창상마냥 참혹하게 안겨왔다.
그랬으면서도 거대한 탑마냥 하늘 공중에 우뚝 솟은 외로운 선바위는 장검을 비껴든 전설의 영웅으로 변하여 나의 시야로 달려왔다. 그것은 다시 애국지사들의 장한 모습으로 뒤바뀌기도 했다. 그러면서 괴물과 맞받아 싸우는 전설의 영웅들이 휘두르는 장검이 몰아오는 폭풍속에서 27세 열혈 애국지사 김약연의 말이 화음으로 귀청을 쩡쩡 울려왔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제를 조선 본토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러자면 두만강을 건너가야 한다. >>
선바위가 초병마냥 지켜선 골짜기로 들어가면 문암동(門岩洞)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1907년 안중근(安重根)의사는 근 두달간 이 마을에 기거하면서 김약연 등 지사들과 항일구국의 장구책을 세우면서 멸적의 총격술을 익히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골바람에 묻어서 길게 여운을 그으며 귀가를 스치는 총성을 분명 들었다. 마파리에 앉은 일제의 <<경비호송대>> 다섯이 가슴을 안고 몸을 비탈며 버둥댄다. <<철혈광복단>>의 다섯용사가 날파람있게 달려와 철궤를 제끼고 15만원을 마대에 넣어 말등에 싣고 동흥마을쪽으로 바람처럼 사라진다. ―
나는 반일지사들의 그림자가 비껴있는 산야를 훑어보았다. 선바위아래로 한갈래 내물이 졸졸 흐르고있었다. 전설에 홍수를 몰고와서 재난을 덮씌웠다는 강이다. 이 강이 저기 남쪽의 륙도구에서 흘러내린다고 해서 륙도하이다. 백여년전만 해도 륙도하는 배를 타고 건너는 큰 강이였다. 선바위를 중심으로 강 북쪽엔 성교촌, 중영촌, 명동촌, 장재촌이 있고 강남에는 소룡동, 대룡동, 풍락동, 화전동(지금은 마을이 없다) 등 마을이 손바닥만한 개활지를 이루며 뻗어간 낮다란 산언덕에 자리잡고있다. 지금 이곳 마을들은 모두가 룡정시 지신향에 소속을 두고있지만 광복전엔 화룡현 명동지구에 속해있었다.

화룡현 소재지였던 달라자와 십리 상거한 <<명동촌은 남향한 언덕우에 위치하였다. 전면으로는 오봉산이 건너다 보이고 그 어간에 습지와 진펄이 분지처럼 놓여있다. 진펄앞의 큰 개울은 해란강으로 흘러들어간다. 그 당시 이주민들은 부락 량쪽에 있는 황무지를 밭으로 개간하였다. 오봉산에는 가둑나무수풀이 울밀하고 잡초가 무성하던 이 통안에 농촌으로 개척되면서부터 마을의 풍경도 일변하였다. 봄에 파종을 하면 여름동안에 곡식 싹들이 청청히 커오르다가 가을이면 꼬량(高粱)과 조이삭들이 탐스럽게 모개미를 숙였다. 그것은 지난날에는 볼수 없던 곡창이 한곳 새로 생기게 하였다. >>
이는 리기영 작 <<두만강>>에서 주인공 씨동이가 명동으로 오면서 본 정경이였다.
당시 씨동이가 아침 일찍 룡정에서 길을 떠나 한낮에 가닿은 명동을 1991년 마가을 우리(최홍일, 우광훈, 리혜선과 나)는 뻐스로 잠간새에 도착했다. 그전의 습지와 진펄은 논으로 개답되여 논둑에는 벼하지들이 촘촘히 일어섰고 가둑나무수풀이 울밀했던 산은 민둥산으로 까밝아졌고 꼬량과 조이삭들이 모개미를 숙였던 밭에는 잎을 떼운 앙상한 담배대들이 처량하게 줄지어서있었다. 그제날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아 종다래끼에 담아 강역에 나와 쟁개비에 끓여 먹었다는 큰 강이 이제는 겨우 발목을 잠글 정도의 시내물이 되였다. 예전의 깊고 사나운 강물의 기세를 자갈판과 모래불과 그우에 가로놓인 기다란 나무다리가 비쳐보인다. 당시엔 마을 이름이 적힌 표말 하나 없었으나 1998년 9월 3일후엔 큰길옆에 거대한 돌에 <<명동>>, <<윤동주생가>>라고 새겨서 세웠었다. 역시 일송정에 <<선구자노래>>석비를 세운 윤종환선생이 세운것이다.

마을 입구 오른손켠에 있는 휘넓은 담배밭이 마을 송덕섭(宋德燮 당시 70세)로인의 말에 의하면 바로 명동학교 터자리란다. 명동서숙 창립날을 맞아 바로 여기에서 성대한 행사를 가졌을것이다. 숙장 김약연, 명예숙장 박무림, 재무 문치정, 그리고 김학연(김약연의 4촌 동생, 서전서숙 출신), 남위연(서전서숙 출신), 김하규, 려준 등 교원들이 42명의 학생들과 부근에서 모여온 유지들과 마을사람들과 함께 격동된 심정으로 학교창립을 선포했을것이다.

1995년 4월 27일 학교 터자리에는 자그마한 비석이 세워졌다. 비석에는 <<항일운동유적지>>라는 글이 새겨있고 1908년 4월 27일 여기에 명동학교를 세웠었다는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1909년 4월 명동서숙은 사립명동학교로 개칭되고 서울 상동청년학관 출신인 정재면이 교원으로 초빙되여오면서 김약연은 기독교를 신앙하고 성경과를 설치하였다. 이듬해 명동학교에는 중학부를 증설, 그 다음해는 녀학부까지 내왔다. 박태항, 최기학, 송창희, 황의돈, 박무림, 박태식, 장지연, 김철, 김성환, 김승근 등 남자교원과 정신태, 리의순(리동휘의 딸), 리봉운 등 녀교원이 있었고 학생은 무려 420명, 그중에 녀학생 수는 111명이였다. 학교는 갈수록 명성이 높아져서 당지는 물론 동북 각지와 조선, 쏘련 연해주에서까지도 류학을 왔다. 소학부 과목으로는 국어, 성경, 수신, 한문, 산수, 주산, 리과, 작문, 습자, 창가, 체조, 지리, 동국력사였고 중학부 과목으로는 국어, 수신, 력사, 지지(地志), 법학, 지문(地文), 박물, 생리, 수공, <<신한독립사>>, 위생, 식물, 사범교육학, 농림학, 광물학, 외교통역, <<대한문전(大韓文典)>>, 신약전서, 지나어, 작문, 습자, 산술, 대수, 기하, 창가, 체조(군사체육) 등이였다. 교학의 치중점을 배일민족독립의식을 가진 인재양성에 두었다. 민족독립운동의 선구자 리동휘도 자주 학교에 와서 강의를 했다. 교장 김약연은 한학자로서 한문과 작문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의 작문에 <<애국>>과 <<반일>>이란 말을 쓰지 않으면 점수를 매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약연은 공부할수 없는 동포들을 계몽시키기 위하여 명동, 장동, 신동 등 여섯개 마을에 야학교를 꾸리고 청, 장년 사내들에게는 신문화를 전수하였고 녀성들에게는 양잠, 양봉을 가르쳐 농사와 살림에 도움을 주었다. 리기영은 <<두만강>>에서 당시 명동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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