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의 장편답사기>

―명동촌을 중심으로 부근에는 농촌 부락들이 산재해있었다. 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5리 상거에 장골이 있고 거기에서 10여리쯤 가면 화전자가 나선다. 동남편으로는 천주교촌과 서편으로는 장재촌이 있다. 북쪽으로는 연길, 훈춘으로 가는 큰길이 있으며 통로는 투도구와 왕청으로도 련하였다. 이 모든 부락과 도시들에는 조선이주민들이 많이 살고있다. ―그들은 대부분 함경 남북도와 경상도 등지에서 <<합방>>이후에 더욱 살수가 없게 되여 쫓겨난 빈농민과 화전민들이였다.

―이주민들은 가는 곳마다 학교를 꾸렸다. ―이것은 왜놈에게 고국을 쫓겨나온 철천지한이 그들의 뼈속에 사무치게 한 까닭이였다. 실력을 양성하자! 그리고 인재를 배양하자!
그들이 살길을 찾아서 타국으로 류랑하여 왔지마는 그러나 그들은 단지 눈앞의 호구지책을 강구하려는 고식적 구명도생만이 목적일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늘 조선인민의 민족적 불행을 면하려면 하루속히 조국을 광복해야만 되겠다는 애국심에서 우선 실력을 양성하지 않고서는 왜놈들과 판가리싸움을 할수 없다는것과 그 결의밑에 교육사업과 신문화운동을 합류시키게 한것이다. ―
간도의 의병운동은 여기에 근원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이주민들의 집단적 군중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였다.

홍범도부대와 련결을 맺고있는 안무일파는 국민회를 조직하고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화룡현일대에 세력범위를 확장하였다. ―
이주농민들은 해마다 농사철이 돌아오면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가족의 생계만을 위하여 살지는 않았다. 여유곡물은 학교유지비와 의병활동의 군자금으로 자진하여 내놓았다. ―
학생들이 모연공작을 나가면 농촌부락사람들은 남녀로소 없이 그들을 환영하였다. 마을의 학생들은 나팔을 불고 대렬을 지어 나와서 그들을 맞아들이였다. 녀인들은 음식을 만들어서 귀중한 손님처럼 그들에게 대접하였다. 또한 부락의 청년들은 자원하여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녀인들은 집집이 천을 모아서 재봉침으로 군복을 만들었다. 그것은 광목에 단풍나무 껍질로 물을 들인 고동색이였다. 촌부락의 학교에서도 머리가 큰 학생들은 군사교련을 받았다. 그것은 동리의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사기를 고무시켰다. 조무래기들도 말타기와 총쏘는 전쟁유희를 하고 놀았다. ―
명동학교에로 조선내에서는 물론 멀리 로령의 연해주에서까지 류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상급학생들은 부근 농촌에서 보내온 제복―고동색 군복을 일제히 입었다.
목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군사교련을 받을 때나 나팔수를 선두에 세우고 행진을 할 때라든가 다음과 같은 독립가를 높이 부르며 발을 맞추어 나갈 때 그들의 름름한 기상은 하늘을 찌를듯 자못 장쾌했다.

하늘은 미워한다 왜적들아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3천리 강산에 열혈이 끓어
분연히 독립군은 일떠섰다

백두산 찬바람은 거세게 불고
압록강 빙상에 은월이 밝아
고국에서 전해오는 피어린 소식
아깝고 절통쿠나 우리 동포야

락엽진 마가을 쓸쓸한 담배밭속에 서서 비장한 회억에 잠겨있노라니 그제날 명동학교 터전에 슴배인 선인들의 정열이 전신에 감쳐온다.
송덕섭로인은 이야기했다.
<<그때 수업료는 1학년에서 3학년까지 학생마다 한해에 4원 80전이였고 4학년이상은 4원 80전 외에 좁쌀 6말을 더 냈습니다. 그리고 학생마다 땔나무를 가져오게 했지요. 선생님들에게는 로임이 따로 없었답니다. 독신교원들은 돌림차례로 한집에 한달씩 하숙을 하거나 한집을 정해놓고 주숙하면서 나무와 쌀을 학부형들한테서 거두어 하숙집에 들여놓았답니다. 가족이 있는 선생님들에게는 학전(學田)을 적당히 떼주어 붙이게 했구요. 선생님들의 옷도 학부형들이 쌀을 거두어 판 돈으로 해결했답니다. 학교운영경비는 학생들의 월사금, 학전수입, 기부금과 의연금으로 지탱해갔어요. 명동학교에서는 창설되여서 만 10년동안에 모은 돈 8천원으로 여기에다 새 교사를 지었답니다. 그게 아마 1917년이라고 하데요. 그런데 일본놈들이 경신년 대토벌 때 명동학교 운동장에 수백명 사람들을 모아놓고 독립운동가를 내놓으라고 위협했지요. 헛물을 켜자 악에 받친 놈들은 학교를 불태워버렸답니다. 그후 1922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꼭 2년동안 다시 자금을 들여서 교실 다섯칸을 갖춘 교사를 짓게 되였답니다. >>


우리는 송로인의 인도를 받아 김약연목사가 성도들을 설교하던 교회당을 찾아갔다. 교회당은 마을의 맨 서쪽켠에 있는 흙벽에 기와를 얹은 집이였다. 다행이 건물은 그대로 있으나 당시로는 정미소였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정숙하게 앉아 기도를 드리던 성당은 천정이며 벽이며가 먼지가 올라 뿌옇고 디룽디룽 매달린 검댕이가 당금 떨어져내릴듯 흔들거렸다. 교회당 건물의 동쪽켠 아름 벋는 고목의 비술나무아래에 자연석으로 된 <<김약연공덕비>>가 세워져있었다. 김약연목사가 사망한후에 그의 공덕을 기리여 사회유지들과 마을사람들이 세운 비석이였단다. 그런데 해방후 김약연일가가 지주로 성분을 받은 연고로 지주의 비석은 <<청산>>을 받아 기석에서 뿌리가 뽑혀 마을앞 개울의 징검다리로 씌였다. 80년대 요행 흙무지속에서 <<구원>>하여 사람들은 다시 원자리에 복원하였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에 돌에 새긴 글이 희미해져 뜯어보기가 어려웠고 웃머리 한귀퉁이가 떨어져나가버렸다. 1995년 2월에 다시 공덕비를 찾았을 때는 거기에 정자도 해세웠고 교회당도 깨끗이 원상태를 회복했었다. 다만 마을에 신도가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예전처럼 례배당으로 씌이지 못하고있을뿐이였다.


그리고 1999년에 다시 명동을 찾았을 때 교회당앞마당에 <<창의선렬위령비(倡義先烈慰零碑)>>가 한국 거제시장승포청년회의소에 의해 1998년 9월 3일에 세워졌었다. 위령비 뒤면에는 <<금수강산을 찾고 저 이역의 거친 땅에서 온갖 풍상고초를 다 겪으며 헌신한 무명투사 그 얼마이던가! 속절없이 사라진 하얀… 이슬과 이슬… 겨레의 한가슴… 별처럼 돋아나 영원토록 빛뿌려가리!>>라는 의미심장한 시구가 새겨있었다.
김약연공덕비에 새긴 글은 떨어져나가고 다슬어서 희미해졌지만 의사의 력사공적은 사책에 너무나 똑똑히 기록되였다.
1907년 김약연은 조선민족의 비밀단체인 교민회를 조직했고 1909년에는 리동춘 등과 함께 국자가에 <<간민교육회>>를 세웠다. 1913년 리동휘가 명동촌으로 온후 교민회를 해산하고 <<간민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되였다. 그는 조선인들이 <<귀화입적>>함으로써 일제의 반동적통치의 기반에서 벗어나며 문화계몽운동을 벌릴것을 주장하고 실천에 옮겼다. 1918년 <<대한독립선언서>>가 동북에서 작성되자 려군과 김약연 등 39명 해외교포들이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초 연해주에 가서 리동휘, 려운형 등을 만나 련합전선을 결성할 명제를 토론, 가석하게도 민족독립단체 내부의 종파주의로 말미암아 실패했다. <<3. 13>>운동 소식을 접하고 돌아온 그는 일본헌병의 검거를 피해 한동안 은거, 그후 <<대한민국림시정부>>의 요청을 받고 상해로 떠날즈음 중국 경찰에 잡혀 2년간 옥고를 겪었다. 1928년 명동학교에서 반종교투쟁이 벌어진후 김약연은 교장직무를 그만두고 룡정에 옮겨가 살다가 1942년에 별세했다.


우리는 김약연목사의 발자국이 찍혔던 길을 따라 명동촌을 떠나 장재촌으로 갔다. 명동에서 서쪽으로 2리 상거에 있는 장재촌은 남으로 동실한 봉우리들이 다섯 녀인같이 옹기종기 서있는 오봉산을 바라보며 사자산 자락에 자리잡았다. 저기 선바위쪽으로부터 뻗어내려 명동을 지나 지신아래로 줄창 흘러간 사자산은 장재촌에서 보면 한마리 용맹한 사자가 휘우듬히 허리를 꼬며 돌아앉은 형국이기도 하고 선바위를 건뜻 치여든 룡머리라고 한다면 한마리 거대한 룡이 뛰여가는듯한 형국이기도 하다.
장재촌의 리종순(1991년 당시 67세)로인의 말에 의하면 사자가 돌아앉아서 금똥을 눈다는것이다. 그래서 풍수지리를 따지면 사자나 룡같은 영웅과 인재가 우후죽순마냥 솟아날 명당이란다. 바로 여기에 김약연의 자택이 있었다. 원래 동한의 집을 사고 들었다는 김약연의사의 집은 이미 오래전에 허물리고 그 자리에 일떠선 팔간초가엔 명동학교 퇴직교원 조광춘(趙光春 당시 65세)선생이 살고있었다. 가둑나무를 쪼개서 친 울바자옆에 나무로 테를 두른 우물만이 옛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우리는 드레박으로 우물을 퍼서 갈한 목을 추겼다. 쩡하게 심벽을 적시며 기운을 돋구어주는 물은 랭장고에서 금방 꺼낸 광천수 맛이다. 도시에서는 도저히 맛볼수 없는 이 우물 물은 약수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더구나 당시 김약연의사가 독립운동가이시고 지사이시였으니 말하자면 애국장수와 충실한 신도를 키우는 장수샘이요 성수였을것이다.
동한지주의 땅을 사고 여기에 마을을 앉힐 때 김약연의사는 마을의 형태를 조선반도를 본따서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궁화 꽃씨를 자기 집 뜨락에 심었단다. 리종순로인은 어렸을 때 빨갛게 핀 무궁화꽃을 보았다면서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김약연목사님은 언제나 조용하신 분이였습니다. 천둥이 쳐도 끄떡하지 않을 그런 분이시였어요. 언제나 한복차림을 정히 하고 넙적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구변과 웅변에 능하셨고 사리가 밝고 인정스러운 분이시였답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들을 따라 교회에 나갔는데요, 목사님이 나를 업어주었어요. 목사님은 남을 욕하는 법이란 없었답니다. 그분이 교장으로 계실 때 강의를 하시다가도 누구든지 강의에 집중하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고 자기의 종아리를 쳤다고 하데요. 학생을 책망할 대신 자기가 강의를 잘못했기때문이라고 스스로 자책을 했다는겁니다. 정말 하나님처럼 선량한 분이시였지요. >>


명동학교 교장으로 계시다가 퇴직하신 김재현(金在賢―당시 66세)선생님은 말씀했다.
<<갑자년(1924년)에 대흉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경비난에 빠진 명동학교는 부득불 중학부를 취소하기에 이르렀지요. 중학부 교원으로서 연변교육계에서 이름이 높던 림계학 등 여러 진보적 교원들이 명동을 떠났고 학생들도 룡정의 각 학교로 전학을 했답니다. 그후 명동학교는 교회에서 경영하면서 남녀 공학하는 학교로 되였습니다. 그때는 이미 독립군부대가 연변을 떠나 북만과 남만, 그리고 로씨야 연해주로 간지가 2, 3년 되였고 연변에서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저조기에 처한 때였습니다. 그 대신 사회주의 새 사조가 연변에 싹트기 시작했지요. 1924년 조선의 유명한 사회주의자인 김사국이 명동에 체류했고 명동학교 8기 졸업생 송산우도 연해주로부터 명동에 와서 조선공산당 지하활동을 벌렸답니다. 그들은 학교에서 반종교투쟁을 일으켰답니다. 그리하여 1928년 김약연은 교장을 사퇴하고 룡정으로 떠나갔어요. 오을룡선생이 교장으로 되였고 학교에서는 교회의 운영을 취소하고 다시 사립학교로 되였답니다. 그때로부터 명동학교는 사회주의 혁명자를 배양하는 곳으로 되였답니다. >>
통계에 따르면 명동학교는 성립되여서부터 1925년까지 무려 1, 000여명의 청년학생이 졸업하였다. 그중 많은 학생들은 반일 민족독립운동과 공산주의혁명운동에 참가하여 유명한 애국지사, 혁명자, 문학가, 예술가로 활약하였다. 애국적 영화인 라운규, 반일독립 저항시인 윤동주, 공산주의자 김광진 등은 사책에 길이 남아있다.
리종순로인은 말했다.


<<김약연목사님의 장례날에 수백명의 상객들이 모여왔습니다. 가족과 제자들은 물론 애국인사들이 장례에 참가했을뿐만 아니라 목사님을 숭배하는 일본인들도 있었구요. 그날 룡정 총령사관 령사는 헌병과 순사들을 거느리고 왔댔답니다. 아마 그날 추모활동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가 두려웠던가 보지요. >>
우리는 경건한 심정을 안고 김약연의사의 산소를 찾았다. 장재촌마을의 서쪽 산언덕 아늑한 곳에 세개의 봉분이 봉긋이 솟아있었다. 김약연의사와 부인 안연녀사, 그리고 두분의 장자의 묘소였다.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묵도를 드리고나서 묘비옆에 앉아 담배를 붙였다. 일행중 풍수지리에 관한 책을 읽었고 일찍 지질대에서 일해온 우광훈형이 아주 정색해서 말했다.
<<우리 민족은 재래로 <머리는 북, 발은 남>으로 산을 쓰는것이 법이라오. 근데 김약연의사의 시신은 동서로 누워계시는데 이건 무엇때문인지 알겠소?>>
그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설명을 덧붙였다.
<<풍수지리설에 보면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라는 말이 있소. 저 마을에서 보면 이 사자산이 선바위와 붙었는데 선바위가 틀림없는 룡의 상이고 좌측이 되는거요. 이 자리가 선바위산의 등성이니 이 묘소는 좌청룡이라 할수 있겠소. 다시 말하면 룡의 머리가 김약연의사를 받쳐준다 이거지. 그리고 의사님이 바라보시는 방향은 정동이라 바로 조선지도를 본따 선 장재촌인거요. 저세상에서도 고향과 조국을 그리는 김약연의사의 애국심을 볼수 있는거요. 명동이란 이름 자체가 바로 <밝아오는 동이>이니 그 명동을 굽어보시는 의사의 뜻은 분명한거 아니겠소. >>
<<그런데 우백호는 어디를 짚어야 하오?>>
나의 물음에 우광훈형은 말했다.
<<사자와 범은 다가 동물지왕이라 사자산을 백호로 보아도 랑패는 없겠소마는 그보다도 저기 바라보이는 오봉산이 깊은 의미를 가질수 있소. 오봉산은 오복을 뜻하는거요. 그런즉 조선을 뜻하는 명동에 국화가 만발하는 날, 다시 말하면 나라의 독립이 실현되는 날이면 우리 민족한테는 하늘에서 오복이 뚝뚝 떨어지는 행복한 세상이 도래한다는 뜻이 아니겠소. 바로 이것이 김약연의사의 생전 소망이였고 그분의 일생을 장식한 투쟁의 목적이였소. >>
우광훈형의 말은 풍수지리설로도 확실한 근거를 갖추지 못했다. 그랬으면서도 의심할나위 없는 설복력을 가지고있었다.


이 명당자리엔 이민 1세의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위용을 떨쳤던 김약연의사가 누워계신다. 그분의 소망이자 곧 우리 할아버지세대들의 숙망이였다. 그들은 숙망의 실현을 위하여 피어린 투쟁을 하였다. 생명의 대가로 끝내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들이 바랐던 진정한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해방은 오늘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하고있다.
우리 민족한테 다재다난했던 20세기가 바야흐로 저물어가고 조선의 남북량단의 군사분계선도 무너지는 운명에 놓인 1994년 8월 29일 김약연, 윤동주 유적복원행사가 명동에서 열렸다.
그날은 유난히 잠풍하고 따스한 날씨였다.
명동촌은 명절기분에 한껏 부풀어있었다. 대풍을 맞은 논에는 무겁게 고개를 숙인 벼이삭들이 노오랗게 익어서 황금파도를 이루었고 명동학교자리의 담배밭에는 호박잎같이 크고 살찐 토초 담배잎이 새끼줄에 촘촘히 꼬여서 빨래줄같이 줄줄이 널려있었다. 큰길에서부터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비자루자리가 나게 청소되여있고 마을의 집들도 새로 회칠들을 해서 한결 깨끗해보였다. 명절 옷차림을 한 마을 남녀로소가 웅기중기 모여서서 수군대며 손님을 만재한 차량들을 반가운 눈길로 영접했다.
이날의 행사가 이룩되기까지 로심초사를 하신 분은 한국 해외문제연구소의 리윤기박사였다. 연변대학 조선연구센터와 협의를 하고 명동촌 사적지복원내용을 확정, 룡정시 정부의 비준을 받아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동아일보의 협찬으로 1992년 10월 윤동주시비를 세우기도 했고 금성출판사 김낙준회장의 경비지원을 받아 대성중학교복원와 력사전시관 건립공사를 착공시켰던것이다.
이날 리윤기박사와 김낙준회장께서도 명동에 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러가지 원인으로 기념의식은 생략되였다.
소설가 리혜선은 그날의 정경을 이렇게 묘사하고있다.

―차가 멈춘 곳은 커다란 공지였는데 원래는 마을의 정미소마당이였다. 정미소는 동향의 커다란 기와집으로 변모했다. 옛날에는 있었다고 하는 교회당 종각의 십자가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85년전의 옛모습을 한, 새로 복원된 교회당이였다.
―교회당에 들어서기 앞서 교회당의 문과 옆모습으로 마주앉은 김약연목사 공덕비앞에 잠시 멈추어섰다. ―(공덕비는) 마침내 명동사적지 복원을 맞아 기와비각속에 모셔지게 되였다. 든든한 바위돌로 밑판을 다지고 세멘트로 성경책이 펼쳐진 모양의 커다란 기석을 굳혀서 그우에 상처입은 석비를 모셨다. 참으로 명동의 처절했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석비였다.
―교회 서북쪽 길에 접어들자 회칠을 하얗게 들쓰고 눈부시게 둘레를 잡은 운동장같은 넓은 뜰안에 륙간대청의 기와집이 남향작으로 앉아있었다.
룡이 승천하여 낳았다는 한민족의 저항시인 윤동주의 생가였다.
울타리문으로부터 기와집 퇴마루로 향한 길은 무늬간 콩크리트였고 길가녘엔 옛식으로 벽돌을 삼각이 나게 박아 빨간 레이스가 흐른것 같았다. 기와집 동쪽에는 아담한 용드레우물이 있었다.
윤동주의사의 녀동생 윤혜원(한국 거주)녀사는 드레박으로 우물을 퍼서 마시고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누구에게라없이 말했다.
<<광주(윤동주의 동생)가 세살인가 할 때일겁니다. 글쎄 이 우물터우에 올라섰어요. 어머니가 집문을 나서다가 보시고 사색이 되였지요. 어머니는 소리를 치지 않고 진정을 하시고 <얘야, 엄마 고운 새 잡았다. 이리 오렴. > 광주가 새라는 말에 우물틀에서 내렸지요. 그제야 어머니는 광주를 끌어안고 우시였답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들을 아끼고 사랑하셨어요. 그런데 동주오빠가 일본 후꾸가와형무소에서 인체실험으로 돌아가셨다고 하시니 기혼을 하셨어요. >>

윤녀사는 목이 메여 뒤말을 잇지 못하시였다.
뜰안에서는 산뜻한 치마저고리 차림에 머리도 곱게 빗은 마을녀인들이 농사일 짬짬을 타서 련습했을 상싶은 춤을 장구소리에 맞춰 흥겹게 추고있었다.


삼합에 가서 똑같이 생긴 집을 사서 허물어다가 원자리에 복원했다는 윤동주생가는 함경도식의 집이였는데 봉당과 부엌이 같이 딸린 정주가 복판방이고 서로 향해 남쪽에 두칸, 북쪽에 두칸이고 동으로 한칸이 있었다. 하얀 백지를 눈이 시게 바르고 문살을 네모칸이 촘촘하도록 댄 지게문이 잔치날을 맞아 환하게 열렸는데 그리로 시인의 하얀 넋같이 눈부신 해살이 흰 비단필마냥 흘러들었다. 쉽게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쩍하면 눈가에 눈물이 핑 돌곤 했다는 아동의 윤동주, 손수 재봉을 돌려 교복도 허리가 잘룩하게, 바지도 나팔바지를 해서 입었다는 멋쟁이 소년 윤동주, 시에 애정을 쏟았다는 청년 시인 윤동주, 저항시인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끝내는 젊은 생명을 바쳤던 투사 윤동주, 륙간대청의 올올한 돗자리를 섬세히 느끼며 문설주를 쓰다듬어 시인의 손길을 느끼며 시인이 기거했고 말했고 웃었고 기침했던 방의 공기를 피부에 느끼며 우리는 육신을 떠나 자유로이 배회할 시인의 넋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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