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1910-1931년 조선인 교육

제2절 1910-1931년 조선인 교육

1. 개론

《한일합병》은 만주조선인교육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되었다. 간도 등 지역에 이미 형성된 조선인집거구와 망국의 신세가 된 조선반일지사들이 만주로 대량 몰려들어 새로운 반일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함은 만주조선인근대교육에 근본적인 동력을 주입하였다. 근대교육은 반일조국광복의 필요한 수단으로 채용되였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이미 일어난 애국 문화계몽운동으로 인해 일어난 사립학교의 대폭적인 설립은 간도지역의 사립학교 창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였다.

서전서숙이 페숙 된 후 그 불씨는 요원의 불길로 타번졌다. 녕안현에 고안학교, 환인현에 동창학교, 유하현에 신흥학교, 밀산현에 한흥학교, 연길현 리화동에 광진학교, 유하현에 광종학교, 용정촌 명신학교, 유하현 삼원포에 삼성여학교 등이 일떠섰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1916년 12월까지 동북3성에 설립된 조선인사립학교는 도합 238 개소, 학생은 6만 3000여 명이었다.(《현대사자료》(27) 《조선》(3)강덕상 편)

이 시기 여성교육이 주목받고 있었다. 1910년에 증설된 화룡현 대립자 명동촌의 명동학교 여학부, 1914년에 설립된 용정촌 명신여학교, 1920년에 설립된 화룡현 명신사 삼도구 충신향의 삼명여학교, 1921년에 설립된 화룡현 삼개사 만진기의 정신여학교, 유하현 삼원포 삼성여학교, 연길현 용진사 대교동의 교향여학교 등이 있었다.

이 시기 조선인의 신식교육기관이 많이 설립되었고 근대교육이 조선인들에게 점차 접수되었으며 교육의 방향은 뚜렸한 반일민족주의에로 돌려졌다. 1920년 경신년토벌을 계기로 조선인사립학교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압제가 본격화되었으며 위만주국의 설립을 기준으로 통제단계에 들어섰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반포한 1928년도 재만 조선인학교 조사에 따르면 조선인학교는 363개소이다.

1923년 이후부터 조기 마레주의자들은 동양학원과 노동학원을 세웠다. 북만과 남만의 민족주의단체와 종교계의 인사들도 적극 사립학교를 꾸렸다. 화전의 화성 (华成) 의숙, 신빈의 화흥(华兴)중학교, 남만(南满)학원, 통화의 양진(养真)학교 등이 예로 된다. 1931년 동북의 조선인반일지사와 민중이 꾸린 학교는 280여 개소이며 학생은 7070여 명이다. 종교계에서 꾸린 학교는 108개소이고 학생은 6433명이었다.

2. 조선인학교 종류

조선인사립학교에 대하여 사회 각파는 부동한 입장과 이익에서 설립에 나섰다. 하기에 학교설립자의 신분은 극히 복잡하였다. 조선인사립학교의 종류는 대체로 아래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민중에 의해 꾸려진 학교

이러한 학교는 농민에 의해 설립, 운영된 학교들이 절대다수이다. 학교라기보다 개량식 서당이거나 사숙의 형태로 된 것이 적지 않았다. 1911년에 설립된 화룡현 덕신사 영암촌의 덕흥의숙의 연비용은 200원인데 전부가 학부형들이 푼동을 모은 것이며 개태사 호천포의 청호(清湖)학교는 1912년 9월에 설립되였는데 운영비용 364원도 학부형들이 부담했다. 이밖에 대성학교, 연길현 용신사의 제동(济东)학교, 지송사 유신촌의 영실 (英实)학교, 상의향의 영생(永生)학교 등과 집안현의 흥룡학교, 신성학교, 통화현의 신흥학교, 무송현의 구산(勾山)학교, 동녕현의 광진(光震)학교 등은 농민들로부터 의연금 혹은 의연곡식을 모아서 꾸려진 학교이다.

《재만조선인 사정》(민정부 총무사 조사과 편)의 기재에 의하면 1928년 말, 민중에 의해 설립된 학교는 225개소, 교원은 372명, 학생은 7076명이다. 그중 소학교가 115개소, 사당이 108개소, 유아원이 1개소, 중학교가 1개소이다.

학교의 유지비용은 각이하나 모두 학부형들이 부담하고 있으며 서당은 교실 하나에 한명의 교원을 사용하는 제도를 이어오며 자식에 대한 교육열정이 극히 높아 거의 매개 부락마다에 서당이 있었다. 북만지방의 201호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교육비용은 이민의 생활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 되는바 총 교육비용은 4194원으로서 호당평균 20원, 이민 매인당 3.90원이다.

오지에 있어서는 농산물을 교육비용으로 제공하는 것도 많았다.


종교단체에 의해 꾸려진 학교

이 시기 조선인사립학교는 대체로 조선인종교단체가 그 인사들에 의해 설립, 운영 된 것과 구미선교사들에 의해 설립, 운영된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유명했던 화룡현 장동의 장동(彰洞)학교, 대립자의 명동학교, 국자가 와룡동 (卧龙洞)의 창동학원, 용정의 명신학교 등은 예수교에서 꾸렸으며 화룡현의 광동(光东) 학교, 연길현의 흥동(兴东)학교, 의란구의 신흥학교, 용정의 상정(尚贞)여자학교 등은 천주교계통에 의해 세워졌다. 화룡현의 청일학교, 환인현의 동창학교, 무송현의 백산학교, 녕안현 동경성의 대종학원, 밀산현의 한흥의숙, 상해의 박달학원 등은 대종교계통에 의해 세워졌다. 연길현 수신향 대팔포강의 인일학교, 연길현 수신향 하내성의 경신학교, 연길현 수신향 평강의 건원학교, 농대학원, 녕안현의 소래학교 등은 원종교에서 꾸렸다.

《재만조선인 사정》 (민정부 총무사 조사과 편)에 따르면 1928년경 조선민족 종교단체와 그 인사들에 의해 설립, 운영된 사립학교는 만주에 102개소가 있으며 교원은 243명, 학생은 4795명(여학생 1405명)이었다. 학교의 운영경비는 확실한 숫자는 불가능 하나 대체로 종교기관의 보조금, 기부금, 수업료, 소유재산에서 얻은 수입 등 몇 가지로 이루어졌다.

연변에 들어온 외국선교사들로는 카나다 장로파, 독일 천주교파, 영국 기독교파 등이 있다. 외국선교사들은 《조선인으로 일본인을 제한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인의 반일운동 을 동정하고 나아가서는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고 반일지사들은 외국선교사의 힘을 빌어 《종교혁명》 혹은 치외법권과 종교불간섭정책을 이용한데서 종교형식을 많이 취하였다. 이리하여 외국선교사가 설립하고 조선인과 공동 관리하는 사립학교가 형성되었다.

1914년 6월 영국 기독교선교사 박걸이 용정에 명신(明信)여학교를 세웠고 1917년 카나다 장로교선교사 스코트와 부트가 은진중학교를 세웠으며 1921년 3월 영국목사 배례사가 1920년에 《경신토벌》로 하여 잠시 정지되였던 은진중학교를 회복하였다. 1920년 6월 영국전도부인 기애스가 명신여중학교를 세웠고 1928년 4월에 동산 예배당에 동산유치원을 세웠다. 1921년 8월 독일천주교 신부 임석충과 한흥렬은 용정에 해성소학교 를 꾸렸고 1929년 10월에 또 해성 여학부를 꾸렸다. 1933년 5월에는 해성유치원을 설립 하였다.

《재만조선인 사정》 (민정부 총무사 조사과 편)에 따르면 1928년경 외국인선교사에 의하여 설립, 운영된 종교소학교는 17개소, 교원 36명, 학생 879명이다.


반일민족단체에 의해 꾸려진 학교

1925년에 이르러 만주에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 세 개부가 있게 되었다. 이들은 민족자치를 실시하는 민정기관과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관찰하는 군정기관을 겸하여 갖춘 것들이다. 9.18사변 전에는 상당한 세력을 갖추었으며 저마다 하나의 독립정권으로서 학교를 운영하였다. 정의부에서는 흥경현 화흥중학, 남원학원, 유하현의 동명 학교, 화전현의 화성의숙 등 22개 학교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교원이 33명, 학생이 883명, 경영비용은 1만 1982원이였고 참의부에서는 환인현의 횡도천 예비학교와 환인예비학교 2개 학교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교원 6명, 학생 49명, 경영비용은 1666원이었다. 신민부에서는 아성현의 개신학교, 녕안현의 동명학교, 해림의 신창학교 등 10개 학교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교원인수는 18명, 학생은 286명, 운영비용은 2000원이었다. 이런 학교들은 대개가 일제의 세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개척지의 변연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학교들에서는 일본어를 전혀 가르치지 않고 반일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상의 통계숫자는 일본측 조사에 따른 것이며 실제 수는 최소한 2-3배에 도달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학교 중 남만에 널리 알려진 학교는 정의부 남만교육회회장인 한경희 씨에 의하여 1922년에 설립된 유하현 삼원포의 동명중학교, 정의부에서 1924년에 세운 흥경현 왕청문의 화흥중학교와 남만학원 등이 있다.

한경희 씨는 반일민족지사이며 민족교육활동가이며 기독교목사이다. 1881년 11월 5일 평안북도 의주군 영광면 소정리에서 한숭주의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23살부터 예배당에 다니기 시작하여 25살(1905년)에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었다. 1907년 7월에 창신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6개월 만에 졸업했고 1908년 용천군 제6교회의 대리도사를 시작했고 창신학교교장으로 일했다. 1910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14년 5월 15일에 졸업 하고 중국 동북 중동선에서 일년간 선교활동을 했다. 1914년 삼원포에 이사 왔고 삼원포 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은양학교 교장을 겸했다. 1922년 사립 동명중학교를 설립한 뒤를 이어 삼성여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교장직을 맡고 민족교육사업에 헌신했다. 설립초기에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청년교원을 초빙하여 왔다. 친일교재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군사교육을 강화함으로써 반일민족주의 골간을 수많이 양성하였다.

1929년 3월 19일 일경에 체포되었고 조선총독부의 교과서를 쓰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3년 징역형을 받았다. 1932년 1월 29일 출옥 후 창성 평노동우교회 목사로 있었고 1932년말 북만 밀산현에 도착해 평양진에 자리를 잡았다. 1935년 1월 4일, 말파리를 타고 우수리강을 따라 무림동으로 향하던 도중 원 중화민국 지방 잔패군, 안전련 토비부대들에게 의해 살해되었다. 한경희 목사의 셋째아들 한진옥은 연변대학에서 퇴직하였다.


실업단체 또는 선각자들의 개인자산에 의해 꾸려진 학교

실업단체에서 꾸린 학교로서는 근동실업회사에서 출자하여 건립한 10여 개 소의 학교가 있는데 그중 반일성격이 강한 학교들로는 장백현 17도구의 창동학교, 육도구의 육영(育英)학교, 18도구의 협신(协新)학교 등이다.
선각자의 개인재산에 의해 설립된 학교는 1910년 이동녕 등이 통화현 하니하에 신흥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리고 왕청현 라자구의 태흥학교(泰兴学校) 등이 예로 된다.
일본 측에 의해 꾸려진 학교

일본 측에서 꾸린 학교는 조선총독부, 만철회사, 《보조학교》, 일본이민회사 등에서 꾸린 학교들이 있다. 1928년 5월 현재 통계에 따르면 공립보통학교가 5개 소, 교원은 48명, 학생은 2270명이고 만철회사에서 꾸린 학교는 12개 소, 교원은 68명이고 학생은 2488명이며 보조학교는 82개 소, 교원은 239명이고 학생은 6481명이다. 이민회사에서 꾸린 학교는 4개 소, 교원은 10명이고 학생은 254명이었다.

이외에 간도지방에 함경북도도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학교 4개소가 있는데 교원 43명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 2312명, 그중 여학생이 747명이다. 안동현 하류지방에 평안북도에서 직접 관리하는 서당이 2개소가 있으며 교원은 3명, 학생은 150명 좌우였다. 운영경비는 도지방경비와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으로 해결되었다.


3.조선인사립학교의 이념과 특점

조선인사립학교는 근대성과 강렬한 반일성격을 띠고 있다. 이들의 최고이념은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위해 믿음직한 투사를 육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인사립학교는 배일사상의 중심지로, 사회여론의 발원지로, 반일운동의 책원지로 되여 반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에 정신적, 대중적 토대를 갖추어주게 되었다.

흥경성 왕청문 삼성학교(三成学校) 등 많은 학교에서 실시한 《소학교준칙》에서 교수과목설치를 찾아볼 수 있다. 소학교고급학년에는 성경, 수신, 국어, 산수, 한문, 동국역사, 지지(地志), 이과, 도화, 습자, 창가, 체조 등이고 여학생들에게는 재봉과를 첨가하였다.

화룡현 대립자 명동중학교에서는 역사, 지지, 법학, 지문, 박물, 리화, 생리, 수신, 수공, 신한독립사, 위생, 식물, 사범교육학, 농림학, 광물학, 외교, 통역, 한어, 작문, 습작, 산수, 체조, 창가 등 교수과목을 설치하였다. 여기에서 조선인사립학교는 봉건서당과는 완전히 다른 근대성을 띤 신형학교라는 점을 찾아낼 수 있다. 학교교육에서 민족적 자주입장을 견지하였으며 조선어, 민족역사 등에 각별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20세기 초, 조선인사립학교의 반일성격은 음악교육, 체조과목에서도 반영된다. 체조 교수는 주로 병식체조와 군사훈련이 상당한 비례를 차지하였다.

사립학교는 마레주의를 전파하는 기지로 되었다. 사립 동흥중학교, 사립 대성학교는 《공산주의 온상》으로 불리워져 일제마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립조선인학교의 또 하나의 특점은 학교가 종교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1927년 4월,
용정은진중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대표적인 일례가 된다.


4. 지방별 조선인사립학교

관동주 내 관동주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극히 적은바 1928년 7월 현재 1225명이었다. 하기에 이들 자제에 대한 학교는 특별히 설치하지 않았으며 대체로 일본 측의 소학교에서 공학하였다.

만철 부속지 경내의 조선인교육은 1914년 안동소학교의 설치로 그 시작을 보았다. 잇따라 철령, 봉천 등 지역에 학교가 설립되었다. 1919년 7월, 만철은 철령 육영학교에 보조금을 주었고 이듬해는 봉천보통학교에 보조금을 주었다. 후에는 장춘, 안동, 무순, 개원 등 지역의 보통학교에 보조금을 주었으며 이런 학교를 조선인민회에 넘겨 경영하게 하였다. 1927년 6월 조선총독부와의 협정에 따라 연선 주요지역의 조선인교육은 만철경영에 귀속되었으며 만철은 이듬해에 무순, 개원, 할빈 등 3개소 학교에 교장(만철직원)을 파견하였다. 1928년 7월 조사에 의하면 초등학교 7 개소, 학생 수는 1798명이었다. 보통학교는 조선총독부에서 설립하였다. 육영학교는 조선총독부에서 설립한 것이지만 만철의 보조를 받았다. 기타는 조선교민회에서 설립한 것이다. 조선인학교가 없는 지방의 조선인 어린이는 대체로 일본소학교에 입학하였다. 1928년 5월, 소학교에 다니는 조선아동은 312명이고 중등학교에는 61명 조선인학생이 있었다.

일본영사관내(1928년 5월 1일)

할빈 관내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는 사립학교 3개소, 조선인회에서 1개소를 설립, 학생은 238명이다.

장춘관내 조선교민회에서 1개소 학교를 설립, 학생은 224명이다. 사립학교는 5개소로서 학생은 361명이다.

안동관내 조선총독부에서 보조하는 사숙 6개소, 아동 수는 272명이였고 보통 학교 1개소, 학생은 540명이었다. 이밖에 사립야학교 2개소가 있으며 학생은 220명이다.

봉천관내 조선총독부의 보조를 받는 학교가 9개소, 학생은 382명이다. 동아권업회사의 보조를 받는 학교가 2개소, 학생은 169명이다. 총독부 및 동아권업 회사에서 보조하는 학교는 4개소, 학생은 204명이며 총독부 및 만철에서 보조하는 학교 는 1개소, 학생은 327명이다. 교민회에서 설립한 학교는 3개소이며 학생은 101명이고 총독부, 만철, 교민회에서 공동 보조하는 학교는 1개소, 학생은 288명이다. 이밖에 개인 이 경영하는 사숙이 각 지역에 산재해 있는데 매개 사숙의 학생은 20명 좌우이다.

철령관내 사립학교 5개소, 학생은 518명이다. 교회에서 꾸린 학교는 7개소, 학생은 1173명이다.

정가툰 관내 동아권업회사에서 경영하는 학교 1개소, 학생은 72명이다. 대창조화흥 (大仓组华兴)회사에서 경영하는 학교 1개소, 학생은 69명이다. 기타 사숙이 2개소인데 학생은 65명이다.

길림관내 1918년 길림현 신안툰에 학교를 설립하였고 이듬해에 화전현 밀산 심하(什哈)에 1개소를 설립하였다. 길림에는 1922년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으로 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925년 현재 관내에 소학정도의 학교 6개소, 개량식 서당학교 15개소이나 설비가 완전하지 못하였다. 조선인자제가 중국인의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는 수십 명에 달하였다.

치치할관내 조직이 건전한 학교는 없고 서당식의 학교가 4개소, 학생은 165명이다.


간도지방

일본 측이 설립한 조선인학교는 60개소, 그 중 조선총독부에서 경영하는 학교는 5개 소, 학생은 2312명이다. (1929년 5월) 기타 학교는 총독부와 교민회가 보조, 가장이 부담 등 형식으로 경영되었다. 지역별로 볼때 연길현에 31개소, 화룡현에 9개소, 왕청현에 15개소, 훈춘현에 5개소, 학생 수는 5293명이다.

용정촌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사립학교(영신소학교, 학생 수는 345명, 영신중학교, 학생 수는 236명, 광명여자학교, 학생 수는 78명, 광명외국어학교)가 있었다. 조선인이 경영 하는 사립초등학교는 3개소, 학생은 836명이다. 그외 중국측 학교가 167개소가 있는데 학생 수는 1만 1600명, 그중 조선인학생이 7529명이다. 외국인이 경영하는 사립학교는 중학교 개소를 포함하여 19개소, 학생은 1019명이며 모두 기독교계통에서 설립한 것이다.

흑룡강성에는 조선인학교가 거의 없다싶이 되다가 1918년에 조선인서당 1개소를 꾸렸는데 학생은 10명 좌우이다. 1930년에 조선총독부와 만철의 보조로 학교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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