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인력공단 수기공모 우수작

  ▲ 오른째 첫번째 홍정의 수상
나는 지난해 까지만도 중국심양에서 한국회사에 출근하였었다. 법률전업으로 대학공부까지 마쳤지만 나의 월급은 한화로 50만원좌우밖에 안되었으니 내 나이40이 다 되어가도록 집 한 칸 없이 결혼도 못한 나의 생활이란 암담하기만 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이란 운운할 여지도 없었다. 이렇듯 번민의 나날들을 반복하던 중 어느 날 우연하게 신문에서 한국법무부에서 외국동포들을 대상으로 제정한 ‘무연고동포 한국방문취업제도’가 실시된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 특대 희소식은 등대마냥 나에게 한 가닥의 새 희망을 안겨주었다.

우울하던 나의 얼굴은 금시로 수심이 가셔지고 기쁨이 넘실거렸다. 나는 서둘러 수험신청을 하여놓고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이 다가와 나는 끝내 수험을 치렀고 추첨의 행운까지 지니게 되였다. 희소식에 접한 나는 너무도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나이 40세에 오매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게 되였고 또 고국에 계시는 친인들도 만나 뵐 것이며 열심히 벌어서 나의 아름다운 미래도 개척 할 수 있게 되였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청도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발급받은 나는 몇 번이고 그 비자에다 입을 맞추었다. 2007년 12월 27일 나는 드디어 위해공항에서 비행기 편으로 오매불망 그려오던 한국의 인천공항에 발을 내렸다. 인천공항은 나의 생각을 초월하여 어마하게 큰 공항으로서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여객들로 붐비어 중국을 반나마 돌다시피 한 나로서도 어리둥절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나는 인차 취업교유부터 받은 후 나의 학벌과 특장, 취미에 따라 중국어 강사나 번역 따위의 직업들을 찾아보려고 인터넷과 소개소 등 여러 곳에 이력서를 많이 보내 보았건만 내가 보낸 이력서는 한강에 돌 던진 격으로 감감 무소식 이였다. 내가 소원하는 이상적인 업종들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고 때는 구정도 임박하는지라 수중에 돈도 없으니 마음은 안타까워만 졌다. 하여 나는 친척의 소개로 천안에서 내키지 않는 대로 건축자재를 임대하는 일을 하였다.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엄청 무거운 철판들을 옮기며 거기에 묻은 콩크리트를 긁고, 털고 하는 일로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난생처음으로 당해보는 고역인지라 며칠을 하니 나의 코에서는 피가 툭툭 터졌다. 하지만 나는 적응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사장님은 내가 하는 일이 눈에 안 들어 하며 끊임없이 잔소리를 거듭 하는 것이었다. 결국 일을 시작하여 12일 만에 나는 무참히 짤리고 말았다.

그 나마의 일자리마저도 떼워 버리고만 나는 며칠간 방구석에 붙박혀 있노라니 마치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듯 속이 불안하고 괴로워났다.

하여 나는 매일 인터넷에 몰두하는 한편 <벼룩시장>,<교차로>등의 구인정보란들을 열심히 뒤지며 찾고 찾았다. 많은 일자리들이 있긴 하였지만 나에게 합당한 일자리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교차로>를 통해 수원에 있는<착한전복> 집의 주방보조로 들어갔다. <착한 전복> 집은 금방 오픈한 집으로서 자그마한 2층집 이였는데 아래는 주차장이고 2층은 식당이었다.

출근하던 첫 날, 나는 지각이라도 할새라 아침 일찍 서둘러 성균관대역에서 전철을 타고수원역에 간 후 또 버스를 갈아타고 나의 사업터ㅡ<착한 전복>집에 도착하였다. 너무 일찍 온 터라 문은 잠겨있었고 이른 봄의 삭풍이 내 몸을 엄습해 오싹, 오싹 떨려났다. 하지만 너무 이른 아침이라 어데 은신할 곳도 없어 나는 그냥 문밖에서 오돌오돌 떨고만 있었다.

10시가 되자 직원들이 하나둘씩 출근하였다. 30여세 되는 주방장이 내가 해야 할 모든 일과 방법들을 차근히 가르쳐 주었다. 내가 해아할 일들로는 설걷이가 위주이고 그밖에 해물을 세팅하고 짬을 버리고 야채, 해물박스 등 무거운 짐들을 입출고하며 또 매일 나오는 쓰레기들을 분류하여 버리는 등 아주 힘들고 어지러운 일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몇 달간의 경험을 통해 한국에선 ‘내가 소원하는 이상적인 일자리가 없다’는 것을 감안할 때 기한이 찰 때 까지 ‘맡은바 사업에서 최선을 다하리라’는 일념으로 마음을 굳혔다.

나는 이튿날부터는 주방누나가 가르쳐 주는 데로 마을버스를 타고 출퇴근하였었는데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었다. 나는 출근시간을 엄수하는 한편 하루빨리 업무를 익히기 위해 신경을 썼다. 하여 출근하는 즉시로 정상적인 영업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해물을 세팅한 후 다른 일거리들을 찾아하군 하였다.

설걷이 일은 얼핏 생각하면 아주 간단한 것 같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처음해보는 일인지라 손을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놀렸지만 내 앞의 그릇들은 줄기는커녕 점점 더 쌓여만 졌고 나중엔 대처하기 조차 힘들어 나의 손과 마음은 당혹감에 떨려났다. 그럴 때면 누구든지 와서 좀씩 거들어주어야만 하였는데 그때면 나는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세척기에서 끄집어 낸 그릇들은 또 커다란 바구니에 듬뿍 담아서 홀에 넘겨주어야하였는데 그릇들이란 원체 사기들로 된 것들이어서 혼자 그 큰 바구니들을 들어 옮기기가 무척 힘들어 그걸 몇 번이나 들어 옮기고 나면 허리뼈가 시큰 거려 등도 바로 펼 수가 없었다. <착한전복>집은 오픈이래로 시종 손님들로 초만원을 이뤘는데 토요일과 일요일, 특히 명절까지 끼이면 경기가 더 호황을 이루어 그때면 파출부를 부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후엔 삼계탕과 서비스 죽에 넣을 쌀 볶는 일까지 내가하여야 했는데 쌀 볶기란 설걷이 보다 더 조심스러운 일이다. 무더위에 뜨거운 불가마 앞에서 불을 조종해가며 눈으로 줄곧 지켜보고 저으며 근 반시간 가량이나 불가마를 안고 있노라면 나의 목과 가슴패기로는 마치 벌레라도 기어 내리는듯 땀이 줄ㅡ줄ㅡ흘러내렸고 자칫하다간 가마 전에 팔을 데우기가 일쑤였다. 나는 그 일이 무척 하기 싫고 귀찮았지만 나를 제외하고는 그 일을 대신할 사람이 더 이상 없는지라 쌀 볶기는 내가 독차지 한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이 <착한 전복>집에서 일한지도 벌써 반년이 지나 이젠 설걷이도 퍽 숙달이 되었다. 하지만 늘 홀에 초만원을 이룬 손님 외에도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로 북적거리고들 있으니 나의 하루 일과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날엔 나는 설걷이를 하는 외에도 삼계탕을 들여오고 무거운 짬을 버리고 해야 했는데 얄궂은 세척기에서 확확 뿜어내는 열기는 나의 몸에서 구슬땀을 무한정 짜내어 나로 하여금 후줄근한 ‘물주머니’로 만들어 놓군 하였다. 에이콘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으련만. 갓 개업한 탓인지? 주방에는 아직 에이콘이 없다. 나는 매일 개미 채바퀴 돌듯 드바삐 돌아치고 있지만 고객들은 나를 아랑곳도 않은 채 한사코 밀려들기만 한다. 어쩌면 손님들이 이다지도 많을까?!

<착한 전복>집의 사장님 내외분께선 모두가 마음이 후하시고 직원들을 심히 사랑하셨는 바 언제 한번 잔소리를 하거나 불쾌한 인상을 지으신 적이 없으셨다. 사장님은 경영방식 또한 출중하셔 당일 매출 550만원을 초과하면 당일로 매인당 만원씩을 장려하여 주셨고 월말에 흑자가 나면 이윤의15%를 직원들에게 성과금으로 돌리셨다. 하여 우리는 로임 외에 매달 20여만원의 상여금이 차례지니 비록 육신은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일한만큼 알아 살펴주시는 사장님의 그 따뜻한 사랑을 생각하면 피곤은 가신듯 사라지고 감사한 마음에 또다시 새 힘이 솟군 한다.

<착한 전복>집은 직원들 모두가 기쁨으로 봉사하고 있으니 서비스도 좋아 <착한 전복>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명성이 바람타고 널리 퍼져 <착한 전복>집은 갓 개업하였건만 찾아오는 단골손님과 차량들은 날로 더 많아 경기가 호황을 이루고 매출액은 날로 높아져 어버이날엔 천만원선에 오르더니 웬걸 초복날엔 1300만원을 초월하였단다. 그런 날에는 사장님께서는 우리들이 수고했다고 매 직원들에게 2만원씩 장려금을 주신 외에도 맛 나는 치킨이며 수박 등 여러 가지 음식들과 음료들을 많이 사다주셔서 우리 직원들의 달아오른 몸과 마음을 후련하게 식혀주곤 하신다.

사랑은 힘을 기르고, 힘은 풍만한 결실을 맺는 법이다. 우리 <착한 전복>집의 직원들은 사장님의 그 사랑에 감화되어 한결같이 열심을 다하고 있으니 어찌 성과가 이룩되지 않으랴?!

나는 <착한 전복>집에서 일하는 반년동안 많은 일들을 숙달하였고 대인관계, 사업비결 등 나의 앞날에 필요한 진귀한 지식들을 많이 습득하였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로 피로한 육신을 씻고 자리에 누우면 나는 금시 태평한 세계와 달콤한 꿈나라로 들어가 버린다.

날이 새면 나는 또다시 서둘러 출근길에 오른다. 그 길은 비록 고달픈 길이지만 ‘젊어서 고생은 천금 주고도 못 바꾼다’고 나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요행 얻어진 이 인생수업의 길을 드팀없이 열심히 걸어가련다.

나의 푸른 꿈을 무르 익히고 희망찬 미래를 아름답게 단장하기위하여, 나에게 행운을 안겨준 H-2비자여!!

나는 우리 동포들에게 혜택을 베푸신 한국정부에 심심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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