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현실진단과 미래가치 평가] 곽승지 저

0. 한민족의 연변이주

. 조선족 명칭의 유래와 현재적 의미

조선족은 오늘날 중국국민으로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민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조선족을 약칭하여 선족(鮮族)으로도 부른다. 그러니까 조선족이란 명칭은 한민족의 관점이 아니라 철저히 중국의 국가정책을 반영하여 사용되는 말이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1945년 일제가 항복한 이후 중국공산당이 동북지역에 살고 있던 우리민족의 지위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정식화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사람’ 또는 ‘조선에서 온 사람’ 등의 뜻으로서 조선인 등으로 불리던 것을 다민족사회인 중국사회가 이들을 중국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수용함에 따라 하나의 소수민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구체화되는 과정은 조선인이 중국 내의 여타 민족들과 동등한 정치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사회 내부는 물론 주변정세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과정을 거쳐 조선족의 지위를 얻게 된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이 지역 내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수십 년 간 일제로부터 억압받으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조선인들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역내 질서 속에서 조선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겪었을 어려움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들에게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주체는 중국공산당이다.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이전인 1946년 무렵부터 그 구체적 작업이 시작됐다. 당시 일제가 항복하고 빠져나간 연변지역은 중국의 국민당정부와 공산당이 맞서 싸우고 있었으며 그 틈바구니에서 러시아가 세력을 뻗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인들이 조선족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이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지하여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인을 조선족으로 자리메김하기 위한 구체적 움직임은 1946년 12월 열린 중국공산당 길림성위 공작위원회 회의에서 였다.(임계순, 2003) 동북민주연합군 부사령관 겸 길림성주석 주보중이 “중국 내의 여러 민족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 모택동의 어록을 언급하는 가운데 조선인이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임을 강조하며 조선인의 이중국적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즉 조선인은 조선의 백성이지만 또한 중국 내에 살고 있음으로 여타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이들과 같이 국민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조선인이 중국 공민으로서 모든 권리를 향유할 수 있고 나아가서 중국내전에 참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 외적의 침략을 당할 때 그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조선 공민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8년 12월 중국공산당 연변지구 위원회는 연변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승인하고 이들을 중국국민의 일원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조선인을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승인하여 중국국민으로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나서야 구체화됐다.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정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하자 조선인들의 신분문제가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를 반영하듯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950년 12월 6일 “중국 동북 경내의 조선 민족” 제하의 논설을 통해 “조선인민은 중국 경내 소수민족의 자격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1952년 9월 연변지역에 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됐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구체화된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황유복, 2002) 그러나 조선족의 법적지위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1957년에 이르러서다. 산해관(山海館)을 기준으로 이북지역에 살던 사람은 조선족으로서 중국국민으로, 이남지역에 살던 사람은 조교라는 명칭으로 북한공민으로서 북한국적을 부여한 것이다. 산해관 이남의 조선인에게 북한국적을 부여한 것은 냉전체제하에서 중국과 한국이 적대관계가 있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국가들, 즉 독립국가연합에 살고 있는 한민족을 지칭해 고려인으로 부르는 것이나 일본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자이니찌로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은 다르지만 이러한 명칭은 오늘날 모두 보통명사화 되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민족이 어디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존재하는 것은 그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역정과 현재의 위상에 차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와 같이 한민족이란 보편적 명칭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20세기 우리민족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가 낳은 산물이다.

해외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이러한 단어들은 한국사회에서 적지 않은 경우 차별화의 기제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각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명칭에 불필요한 감정을 개입시키기보다 그 연원을 살펴 객관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선족동포들은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다.

. 광복 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들

만주국이 1940년에 행한 한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조선인은 약 1백45만 명이었다. 이를 근거로 계산해 보면 광복 무렵 이 지역의 조선인은 216만 여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 2천5백만 명의 10%에 육박하는 수치이다.(동북아역사재단, 2007) 그러나 일제의 항복 이후 절반 정도가 한반도로 귀국하고 1940년대 말 중국거주 조선인은 대략 1백11만 여명으로 집계됐다.(이재달, 2004) 연변조선족자치주 통계연감은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해인 1949년 연변지역의 조선족 인구를 52만9천2백58명으로 적고 있다. 전체 조선인의 절반정도가 연변지역에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된 1952년에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조선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 남은 이유는 다양하다.(임계순, 2003) 확실한 결심을 하지 못한 채 망설이다 기회를 놓친 사람, 토지개혁을 통해 경작지를 재분배하고 조선인을 소수민족으로 우대하는 중국공산당의 정책을 받아들여 중국에 남는 것을 새로운 기회로 인식한 사람, 중국에서 이미 생활기반을 갖춘 이주 2세대들과 같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필요를 못 느낀 사람, 고향에 돌아갔을 때 겪게 될지도 모르는 어려움과 불확실성 등등.... 결국 오늘날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해방 후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 남은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이 조선인을 조선족으로 대우하며 국적을 부여하고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정착하게 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시점은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변하는시간적 기준이 된다. 즉 해방 이전은 중국에서 살지만 조선인으로서 생활했다면 그 이후에는 일정한 과도기를 거쳐 중국의 국민으로서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동포들은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간의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원하여 공산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항미원조(抗美援助) 보국위민(保國爲民)’의 기치아래 중공군을 도와 한국전에도 참전했다. 그리고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심화되면서 한국과는 단절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1990년대 들어 탈냉전시대가 도래하면서 곧이어 한중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조선족동포들은 다시 한국과 새로운 관계맺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 연고가 있는 조선족동포들은 친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고 또 한국국적을 회복하여 한국인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성격이 변하였다면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이루어진 조선족의 한국국적 취득은 조선족이 한국인으로 그 성격을 복원할 수 있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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