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의 장편답사기>

제9장
눈물젖은 두만강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굽이굽이 천리 두만강을 묻어가는 나는 가슴속 깊이 정회가 스며들며 마음은 애수에 젖는다. 늦가을 벌거벗은 산야는 허전한 마음에 시름만 꿍꿍 장져놓고 밤새 얼었던 강이 풀리며 물결따라 넘실대는 성에장은 갈기갈기 애간장을 짓찢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배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김정구선생의 흐느끼는 목소리에 얹혀 우리 민족 가슴가슴에 설음을 심어준 이 노래는 답사길에 오른 나의 가슴을 시종 허볐다. 이주민 3세인 젊은 심정이 이러할진대 당시 당사자들이 받은 감수를 구태여 말해서 무엇하랴!
1994년 11월 27일 룡정시 개산툰진에 도착하여 이틀간 체류하면서 취재를 마치고 29일 개산툰에서 20여리 상거한 선구촌(船口村)에 이르렀다.


꿈틀거리는 룡마냥 산곡간을 흐르던 한줄기 두만강이 떡돌같은 성에장을 떠싣고 두나라 제방뚝사이로 힘겹게 흘러가고있었다. 산을 등지고 누운 벌거벗은 쓸쓸한 천평벌에 자리잡은 선구촌, 집집의 굴뚝에서는 농한기를 맞은 농군들의 때늦은 아침 연기가 모락모락 한가로이 피여오르고있었다. 천평벌이 마주한 두만강은 50년대까지만 해도 두곬으로 흐르다가 합수되면서 길이 천여메터나 되는 섬을 이루었었다. 그래서 선구촌의 원 이름은 사이섬이란다. 천평벌의 상단 상천평벌(上天坪)에 있는 마을은 머리섬(지금의 선구촌 1―5촌민소조), 벌끝의 하천평벌(下天坪)에 옹송그리고 앉은 마을은 꼬리섬(지금의 선구촌 제6촌민소조)이라고 했단다.


바로 여기 꼬리섬이 두만강 천리구간에서 가장 유명했던 나루터였다.
<<이곳 이름이 어째 선구라 했는지 암둥?>>
선구촌의 박흥송(朴興松 72세)로인은 한마디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고는 후둘후둘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붙여 물었다. 실실이 피여오르는 담배연기는 민족의 고난사를 떠싣고 피여오르는듯 했다.
<<백삼십년전에 종성 하산봉의 리영수형제가 떼목을 타고 강을 건너와 이 천평벌에 괭이를 박았다고 합데다. 그 먼저 종성사람들은 저 뚝너머 사이섬에서 농살했지라우. 그래서 여기 벌농살 한 리영수형제도 월강죄가 무서워 사이섬에 가서 농사를 지었다고 거짓부렁일 했지 뭠둥. 그 다음부터 저기 산너머 석정골이며 연집골까지 들어갔으면서두 사이섬농사가 된거라꾸마. 그후 어윤중이 <월강죄불가진살>이라 한다음부터 사람들은 시름을 놓고 월강농살했고 리씨형제는 아주 이사를 해서 살았다지 뭠둥. 사람들은 떼를 타고 건너다가 차츰 배를 놓아 오갔으므로 이곳 이름이 선구가 된거 아임둥. >>


나는 로인의 배동을 받아 나루터로 나갔다. 나루터는 해빛에 반사되여 명경처럼 파아란 빛을 뿌리는 얼어붙은 자그마한 호수 이마전이였다. 예전엔 섬을 만들며 흐르던 두줄기 강이 여기에서 합수되면서 나루터로부터 저쪽 대안까지 푸른 물이 넘쳐 출렁이였다고 한다. 50년대부터 쌓기 시작한 강뚝이 이 자리에서 50여메터 앞으로 강을 한곬으로 몰아넣어 사이섬은 옛모습을 잃었다. 그제날 밭을 붙였던 뚝안 사이섬 자리에는 버들과 백양이 우거졌고 뚝밖 나루터 발치에는 골골에서 흘러드는 맑은 물을 담아 안은 호수가 이루어졌다. 흐르지 않는 죽은 호수라서 진작 물이 얼어서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썰매를 타고있었다.
호수면과 한메터정도 경사져 오른 논밭머리 쑥대속에 묻힌 서까래 절반만한 콩크리트땜이 옛날에 배를 대던 나루터자리라고 한다. 박로인의 말에 의하면 추석같은 때면 마을사람들은 페우를 끌어다 여기에서 잡는다고 한다. 수많은 행인들의 기가 슴배여 비장한 력사의 피눈물이 고인 이 땜이 소나 잡고 일을 하다가도 휴식의 한때를 한담으로 보내는 장소가 되여버린것이다.


애닯다, 그 옛날 선조들의 가슴에 리향의 서러움을 심어준 두만강 나루터여!
선구촌에서 사는 시인 심정호선생은 이 두만강나루터를 이렇게 읊조리고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쪽박을 차고/ 한숨을 띠웠다//
푸른 물결도/ 울분을 참지 못해/ 처절썩/ 배전만 때렸다// 배사공의 구슬픈 노래/ 물결따라 아득히 실려갔다//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오지 못할 길/ 영영 갔어도//
아 넋만은/ 오늘까지 살아서/ 두만강나루터에/ 햐얀 물보라를 뿌리고있다

강뚝을 넘어 숲속을 지나 강가에 이르니 겨우 20여메터 폭밖에 안되는 두만강이 발목을 잡았다. 대안에 높이 쌓은 강뚝이 시야를 막아 종성은 보이지 않고 종성시가지를 뒤받친 금산(金山)과 휘우둠한 금산의 좌우로 돼지형국의 돼지산과 뱀모양의 뱀산이 금시 눈앞에 다가와 섰다. 금을 탐한 뱀이 금산에 덮쳐들자 옥황상제께서 뱀을 성찬으로 하는 돼지를 내려보내여 금산을 지키게 했다는것이다. 전설을 들으면서 바라보니 뱀과 돼지가 금산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듯한 감이 들기도 했다.


자고로 가난에 허덕여 온 북방농민들이 돈이 그리워 금산이라고 했는지 아니면 옥황상제가 돼지를 지상에 보내기전에 악착한 뱀이 금을 모조리 파먹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강 하나를 사이 두고 남쪽은 척박한 땅이고 북쪽은 기름진 옥토였다. 지금도 천평벌의 벼는 앉은 자리에서 귀뺨을 치면서 시장가격을 받는다. 그만치 토질이 좋고 쌀맛이 좋다는 사실이다. 천평벌에서도 동으로 마을(선구촌 제3촌민소조)을 끼고 남서로 벌과 잇대여있는 천여평방의 뙈기논은 40년대초에 만주국 강덕황제(康德黃帝)의 어곡전(御谷田)이라서 별미라고 한다.
1941년전까지 이곳 벼농사는 산종이였다. 최학출이라는 사람이 그해 봄에 유지온상을 창안하여 모를 키워서 논에 냈더니 산종보다 산량도 많고 풀기가 좋아 쌀맛이 특별했다. 발없는 말 천리간다고 그의 농사법이 삽시간에 퍼지여 그는 만주국 중앙의 특별초청을 받고 신경(오늘의 장춘)에 가서 천원의 상금을 받았고 천평벌에서 상등전 천평방을 하사하여 어곡전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시인 심정호선생은 <<강덕황제의 어곡전>>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일매지게 자라서 일매지게 머리를 수그리고 일매지게 설레이며 사근대는 이삭들의 소리가 마음에 감미롭다. 논두렁을 밟으며 벼들의 속삭임을 듣노라니 <<어곡전>>을 다루던 풍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어곡전으로 짐승들이 나들지 말라고 뼁끼칠을 한 울바자를 둘렀다. 모철이면 하얀 버선을 신은 꽃같은 처녀들이 유리판처럼 써레질을 해놓은 논판에 들어서서 물차는 제비처럼 찰랑찰랑 모를 심는다. 가을도 가관이다. 새하얀 수갑을 낀 손들이 사락사락 한포기 한포기씩 벼를 베여 정성들여 묶은 다음 마당에 곱게곱게 낟가리를 앉힌다. 탈곡하면 앞목으로 마대에 넣었다가 쌀을 찧어낸다. 찧어낸 쌀은 마을의 고운 아가씨들이 모아들어 뉘와 귀떨어진 쌀알들을 골라내고 눈귀도 상하지 않은 통통한 쌀만 모아서 눈덩이같이 하얀 옥양목주머니에 넣어 절복한다. 그것도 검사에 통과하여야 강덕황제의 어곡합격증을 받는다.

어곡이 날 정도로 비옥했던 이 땅으로 실향민들은 나루배를 타고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박로인은 당시의 선구를 회상한다.
이쪽 나루터로부터 저쪽 대안나루터까지 물결우에 팽팽히 늘인 굵은 와이야줄에 배줄을 맨 나루배가 오갔었다. 석대의 곡식수레를 싣고도 20여명 행인을 실을만치 나루배는 컸다. 나루터옆엔 흙벽에 양철지붕을 얹은 세칸짜리 해관이 앉았었다. 선구해관과 강건너 종성세관은 당시 소문난 목수였던 박로인의 부친 박형규(朴亨奎 1890―1943년 종성 태생)가 지었는데 일을 맡은 일본인이 돈을 떼먹고 사라져서 삯전 한푼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해관옆으로 지금의 마을이 들어앉은 곳에는 세무소, 공안파출소, 학교, 상점, 료리집들이 일어서서 <<좋은 땅에 꽃이 피지 아니 하니 봄이 와도 봄같지 않던(好地无花草, 春來不似春)>> 이곳이 하나의 자그마한 도시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숱한 사람들이 이 나루터로 해서 만주땅에 들어왔다꾸마. 우리 마을 림로인(90세)네 로친도 열여덟에 시집을 와서 지금까지 살고있으꾸마. 광복전에 매일 강을 건너오는 사람떼가 량안 나루터에 새하얏댔지 뭠둥. 흉년이 들어 먹을걸 찾아왔구, 일본놈 등살에 못이겨 왔구, 혈육을 찾아왔구―>>
박로인은 종성 하늘가에 눈그루를 박고 당시 이주민들의 막연한 심정을 보여주는 노래를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흐르는 얼음장에 겨울 보내고
 시내가 개버들에 흰 꽃 피며는
 두만강 건너서는 이사군 배엔
 봄맞이 희망타령 높아집니다

실향민들의 한맺힌 발자국이 찍힌 콩크리트땜에 서서 가슴 적시는 부드러우면서도 구슬픈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니 심신은 그대로 피어린 력사속에 잠기여 헤여나지를 못한다.
어느해엔가 종성에서 한 젊은 녀인이 남편을 찾아 아이를 업고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한다. 선구에 이르러 등에 업은 아이를 내리고 보니 진작 굶어죽었더라니 그 가난이 여북했으랴! 만주에 와 남편을 만나면 잘살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왔던 녀인은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파묻고는 허탈에 빠져 료리집에 몸을 붙이고 기생업으로 살아갔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나타나 녀인을 불러내더니 다짜고짜 칼로 목을 찔러 죽이고 강을 건너가 종성경찰서에 자수를 했다는것이다. 사람으로 태여나 놀이개로 살거면 차라리 죽는것이 곱절 행복하다고 생각했던것이리라.
세월이 흘러 일제시기 세관도, 경찰서도 흔적을 감추고 나루터마저도 버림을 받아 한쪽 귀퉁이만 남아 력사의 눈물과 치욕, 분노와 항쟁을 묵묵히 지키고있을뿐이다. 하지만 강산이 남아있고 겨레의 발자국이 찍힌 나루터가 남아있고―이주민 1세는 타향의 원혼으로 땅에 묻히고 당시 개구쟁이가 할아버지, 할머니로 늙어 손군을 거느리고 맥을 이어가면서 선조의 한은 노래로 남아 지금도 후손들의 가슴에 메아리친다.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여 우는데
님잃은 그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닲은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30년대 김용호선생은 여기 종성에서 배에 올라 두만강 물결속에서 얼른거리는 불쌍한 흰 옷자락에서 시상을 더듬어 <<눈물젖은 두만강>>을 썼다는 이야기가 선구사람들의 구설에 오르고있다. 그것의 진실여부는 파악할수가 없다. 또한 구태여 파볼 필요를 나는 느끼지도 않았다. 아무려면 어떠리. 기약없는 타향살이로 떠나가던 겨레의 눈물로 얼룩진, 사랑하는 남편과 리별하는 아낙네의 오열이 그칠새 없었던 나루터였던것만은 사실이라 믿어도 좋을것이니말이다.


광복전 김정구선생이 연변공연차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르자 장내는 눈물바다로 번졌다. 그 이튿날 도문(圖們―오늘의 도문시)에서 세방에 몸을 붙이고 삯일로 연명하면서 기약도 없이 떠나간 남편을 무작정 기다리던 한 녀인이 두만강에 몸을 던져 한많고 지친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단다.


두만강 발원지에서 답사길을 시작해서 꼭 한달만인 12월 1일에 나는 그제날 수중고혼으로 사라진 이름 모를 녀인의 한이 못박힌 도문시에 이르렀다.
도문시는 연변에서 유일하게 두만강에 붙은 도시이다. 옛날의 이름은 회막동, 현재 도문시의 서남쪽에 있는 하나의 촌락 이름이였다. 하전자(下甸子) 혹은 애호전자(艾蒿甸子)라고도 했다. 한어로는 灰幕洞, 會幕洞, 檜幕洞, 海幕洞, 開幕洞 등 표기가 다양했다. 1933년 일제는 회막동 이름을 도문이라고 고쳤는데 두만강의 두만의 동음이역이다 보니 土們, 豆滿이라고 적기도 했다. 만족어로는 투먼싸이친(圖們色禽), 싸이친이란 강이라 그 뜻은 <<만수지원(万水之源)>>이 된다. 백여년전에 조개명(趙開銘)이라는 산동사람이 여기에 와서 첫 괭이를 박아서부터 강건너 조선 함경북도 남양군일대의 사람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1925년에 20여호, 1931년에 이르러 백여호의 인가를 가진 작은 촌락이였다는데 지금은 무려 10만을 헤아리는 인구를 가진 도시로 변모했다. 도문은 남으로 강을 사이두고 조선 남양시와 마주하고 북으로는 연변과 흑룡강성과 잇대여 있어서 군사요충지이고 교통의 인후이다. 현재 연변 각지와 장춘, 심양, 북경, 목단강 등으로 통하는 렬차는 도문이 시발점이고 두만강연안에서 륙로와 철도로 조선과 무역을 하는 제일 큰 해관이 여기에 있다.


그제날 그 녀인이 매일같이 남편을 기다리며 바쟁이였을 두만강 강변엔 높은 뚝이 일어서고 그 넓은 뚝길은 1983년 도문시민들의 강변공원으로 놀이터가 되였다. 너비가 12m, 길이가 1500m나 되는 유보도 량켠에는 41개의 가로등이 가설되여서 밤에도 대낮처럼 밝다. 1989년 도문시정부는 법적으로 두만강공원을 <<도문시 중점 풍경명승보호단위>>로 결정했다.
밝은 얼굴의 젊은 부부가 애를 안고 두만강을 등지고 서서 사진을 찍고있었다. 여름 한철이면 사진사의 렌즈속에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유람선이 잡혔을것이나 지금은 강역에 물과 함께 얼어붙었다.
어쩌면 력사는 한마당 숨박꼭질이 아닐가? 우리 민족의 피눈물이 엉켜있고 해골이 쌓여있는 저 강이 오늘은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놀이터가 되였으니―
<<아, 두만강 푸른 물이여>>라는 수필을 써서 가슴에 맺힌 한을 하소한 최명광선생한테 저 행복한 모습은 어떤 감회로 받아질가? 살아 생전에 두번 다시 두만강을 보지 않는다고 고향으로도 가지 않고 두만강 멀리 내지에서 한생을 살아가는 그분한테는 두만강이 원쑤의 강이였으니―
최명광선생은 수필에서 이렇게 썼다.

―몇해째 련속 찾아드는 재해와―본바닥에서 행세깨나 하는 지주나 서울에서 굴러온 구종이며 대감이며 하는 자들의 등살에 배겨내기가 어려웠다. (고향을 떠난 직접적 계기는) 요시오(良雄)라는 왜인이 내 안해의 얼굴에 반하여 별별 지랄을 다 부리는 그것이였다. ―
어느 하루 내가 솔골에 가서 나무를 해가지고 돌아오니 집에서는 심장이 갈갈이 찢어질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까지 드러내놓은 요시오가 몸부림치는 안해를 껴안고 저고리 고름을 풀려고 발광하는것이였다. ―
나는 몽둥이를 찾아쥐고 집안으로 뛰여들어값그놈을 늘어지게 패주었다. ―
안해건사도 변변히 하지 못할 이놈의 고장에서 어떻게 산담? 나는 속된 무리들이 우글거리는 속에서 시달리기보다 차라리 말없이 고요한 산골에서 자연에 안겨 살아볼 생각으로 <<천부지국>>이라고 일걷는 북간도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
<<아빠, 우리 가는데 떡이랑 많나?>>
철모르는 딸애 간난이는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떡이라면 울다가도 해시시해지는것인데 오늘 떡박골로 간다니 기뻐 날뛰며 이렇게 물었다. ―
우리가 두만강변에 이르렀을 때 벌써 한패의 난민들이 강을 다 건느고 강변은 휑뎅그렁했다. 이따금 강변을 순시하는 왜놈들이 왝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강물에 들어서서 한창 걸으니 옅은것 같던 물이 배꼽을 적셨다. ―물이 생각외로 깊어지자 나는 돌아서기로 맘먹었다.
<<배사공이 있을 때 배를 타고 건너기오. >>
안해와 말하고 돌아서는 찰나―바로 그 찰나였다. 안해가 기겁한 소리를 질렀다.
<<아, 왜인! 왜인!>>
요시오가 순시대를 이끌고 강변까지 쫓아왔던것이다. 우리는 창황히 돌따섰다. ―
땅땅땅―
총알이 귀청을 찢으며 스쳐 지나갔다. ―
갑자기 안해가 가냘픈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졌다. 나는 넘어지는 안해를 제꺽 껴안았다. 구멍이 펑 뚫린 안해의 면상으로 선지피가 콸콸 쏟아져나왔다. 나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안해를 불렀다.
<<아―악―여보! 여보!―>>
박산이 난 안해의 머리로부터 흐르는 피에 강물은 그대로 벌겋게 물들었다. 튕겨나온 눈알은 파란 신경이 달린채 물우에 둥둥 떠서 나를 쏘아보고있었다.
쪽지게에 앉은 간난이가 엄마를 부르며 악을 쓰고 울었다.
땅땅땅―
갑자기 나는 몸뚱이에 거센 강타를 받은것처럼 어깨박죽이 쩡해났다. 정신이 아찔했다. ―그 자리에 쓰러지고말았다. ―
정신을 차리고 보니 투레기옷을 걸친 벙어리 사공이 나의 상처를 싸매주고있었다. 쪽지게의 한쪽 끝만이 어깨에 덜렁덜렁 달려있었다. 누운채로 사위를 둘러보던 나는 벙어리 사공을 밀쳐버리고 화닥닥 일어섰다. 그리고는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여보, 어데 있소! 여보―>>
쏴―파도만 노호할뿐이였다.
<<간―난―아―>>
역시 파도소리뿐―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복창을 치며 통곡했다.
<<여보, 왜 이렇게 무정하게 떠난단말이요. 한번도 즐겁게 웃어도 못보고 이렇게―간난아, 불쌍한것아, 떡도 못먹고―이 벼락맞을 놈들, 이 씹어치울 놈들, 이 각을 뜯어도 씨원찮을 놈들, 이―>>
― ―
이렇게 나는 우리 민족의 수난의 년대에 두만강에서 안해와 딸애를 잃었다. 나는 세월이 유유히 흐른 지금도 총탄에 맞은 안해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앙상하게 여윈 간난이의 얼굴이 생각히울 때마다 피눈물이 나온다. 가슴이 오리오리 찢어진다. 하여 나는 두만강과 영결한다고, 살아 생전에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고 맹세하였다. ―

최명광선생의 안해와 딸의 생명을 앗아가고 또 김정구의 노래소리에 맺힌 한을 더욱 풀수가 없은 그 불쌍한 녀인의 가냘픈 몸을 수중고혼으로 만든 두만강 물결우엔 철길과 륙로다리가 길게 놓여있는데 다리목에 해관 관문이 소소리 높이 솟아있다. 관문우에 올라서면 강건너 남양시가 한눈에 굽어보인다. 이따금 물건을 만재한 차량들이 오가고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들이 밀차에 짐짝들을 싣고 건너가고 건너온다.


원래 도문세관은 훈춘세관의 하전자 분소이였다. 날이 감에따라 수출입 화물량이 대폭 늘어나면서 분잠으로는 그 엄청난 부하를 당해낼수가 없었다. 그래서 1933년 9월 21일에 도문세관이 정식으로 세워졌으며 훈춘세관은 도문세관에 귀속된 분세관으로 뒤바뀌였다. 1938년 도문역의 수출화물중계량이 61. 4만톤에 달하여 대련항의 버금으로 동북에서 두번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일본과 위만주국시기의 친척방문 려객들은 도문과 훈춘 국경역에서 기차를 타고 출입경하였다. 1942년 도문역에서 기차편으로 출입경한 려객은 매일 평균 8. 5만인차이고 도문 국경도로 다리를 거쳐 출입경한 려객은 매일 약 2만인차가량 되였다. 당시 출입경하는 려객들은 아무런 통행증건이 없이 자유롭게 래왕할수 있었다. 광복직후 도문세관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고 이듬해 3월 20일 연길시에 <<연변해관총관>>을 설립, 1948년 12월 <<연변관세국>>이 성립된 뒤를 이어 1949년 11월 <<도문해관>>으로 개칭되여 지금까지 련속되여왔다.
도문은 광복전에 겨우 인구가 3만여명이였지만 매일 류동인구가 2만을 헤아려서 아주 흥성했다. 그래서 조선의 흥행예술단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문에 와서 공연을 했다. 그중에서 극단 <<예원자>>의 공연이 일대 가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의 작가 최창호선생의 최근에 발표한 << <눈물젖은 두만강>과 그에 깃든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적고있다.

―1930년대 중엽(1936년 김춘광이 이끄는 극단―필자주)에 극단 <<예원자>>의 일행이 중국 동북지방인 룡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인 부락들을 찾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하다가 두만강대안의 자그마한 도시인 도문의 한 려관에 려장을 풀었다.
이 려관으로 말하면 조선사람이 경영하면서 겨우 명맥이나 이어가고있었는데 뒤마당에는 단풍나무가 두그루 서있었다. 때는 마침 가을이라 한나무는 누렇게 심황색 단풍이 물들었고 다른 한나무는 빨갛게 다홍색 단풍이 물들어 집떠난 나그네의 향수심을 안겨주었다.
작곡가 리시우(기타 연주자였음―필자주)를 비롯하여 몇몇 배우들이 이윽토록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저마끔 고향생각을 하고있는데 려관주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저 단풍나무는 내가 두만강을 건너올 때 떠가지고 와서 심은 나무입니다. 말하자면 고국땅의 나무웨다. 내가 고향을 떠나오던 때가 기미년(1919년) 팔월인데 년년이 그날을 잊지 말자고 두만강나루를 건너오면서 어린 단풍나무를 몇그루 떠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두그루만 저렇게 살아있습니다. ―>>
― ―
바로 이날 밤이였다. 작곡가는 밤이 깊도록 잠자리에 누워서 사색을 더듬고있을 때 옆방에서 난데없이 들려오는 녀인의 비통하고 처절한 울음소리에 놀랐다. ―리시우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려관주인을 통하여 오열하는 녀인에 대한 사연을 알아보았다.
녀인의 남편은 반일투쟁에 나선 사람이였는데 불행히도 체포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게 된 녀인은 간난신고하면서 두만강을 건너와 남편이 끌려간 형무소를 찾아갔으나 남편은 이미 일제에게 총살된 뒤였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다 남편까지 잃고 설음이 겹쌓인 녀인은 그날 밤이 바로 남편의 생일인지라 빈 방에서 조용히 술이나 한잔 부어놓고 생일제를 지내려 하였는데 려관집 주인이 이것을 알고 제물을 차려가지고 들어왔던것이다. 려관집주인과 그 녀인의 남편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날 밤 려관집주인이 차려준 제상에 술을 붇고난 녀인은 그만 솟구쳐오르는 오열을 참지 못하여 한밤중에 울음을 터뜨렸던것이다.


려관집주인을 통하여 그 녀인에 대한 사연을 알게 된 리시우의 가슴에는 커다란 충격이 안겨왔던것이다. 그리하여 작곡가는 이튿날 그 녀인이 남편을 찾아 건너온 두만강을 바라보며 나라를 잃은 우리 겨레의 슬픔을 통탄하였다. 작곡가는 이러한 감정을 누를 길이 없어 가사에다 즉흥적인 선률을 붙인것이 <<눈물젖은 두만강>>이라고 한다.
이 노래의 후렴을 통해서 알수 있는바와 같이 희생된 남편에 대한 그리움에 목메이는 그 녀인의 애절한 호곡소리는 <<그리운 내님이여>>라는 시어로 승화되고 잃어진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은유되였던것이다.
특히 2절에서 <<추억에 목메이는 애달픈 하소>>라고 한 표현과 3절에서 <<님가신 이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라는 표현은 려관집 뒤마당에서 본 단풍나무에서 얻은 상을 시어에 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여 <<눈물젖은 두만강>>이 창작되자 극단 <<예원자>>는 장월성이라는 소녀가수로 하여금 연길 공연시에 막간에 나가서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던것이다. 처음으로 이 노래를 부르자 장내는 떠나갈듯한 박수가 터져나와 가수는 다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청진, 원산, 라진 등지를 순회하고 서울로 돌아온 리시우는 이 노래를 레코드에 취입하기로 맘먹고 뉴코리아 레코드사에서 사귄 김정구를 찾아갔다. 김정구는 무명 작곡가 리시우를 다시 박시춘에게 소개하였다. 당시 OK레코드악단 트롬본 연주자였던 김용호가 1절 가사를 다듬고 2, 3절 가사를 보충하였다. 박시춘이 편곡하고 김정구가 취입한 이 노래는 OKHE레코드사에서 발매되였다.

관광차 한대가 강역 주차장에 와서 멎어서자 벌집이 터진듯 여기저기 삼삼오오 떼를 지어 서있던 아가씨들과 아주머니들이 그리로 달려갔다. 차에서 내리는 한국관광객들은 대뜸 그녀들의 포위속에 들었다. 그녀들은 손에 든 조선 우표며 조선 돈을 얼굴앞에 펴보이며 <<한국 돈 만원만 주세요. 북한 우표얘요. >> <<조선 돈이래요. >>라고 하면서 들볶아댔다. 흥심이 없어 안산다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그중에서 어떤 사람이 마지 못해 하나를 사는 기미를 보이자 너도나도 그리로 달려가는것이였다.
등이 구불사한 한 로인이 맨 나중에 차에서 내려서 지친 걸음으로 강뚝으로 올라섰다. 그분한테도 네댓 녀성들이 그림자처럼 묻어갔다.
<<아바이, 하나 삽소. >>
<<내거 사지 않겠슴둥? 절반 값으로 드리겠으꾸마. >>
로인이 듣는듯 마는듯 녀인들을 밀치고 뚝우의 란간에 가 서더니만 무릎을 꺾인 사람처럼 풀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두손을 맞잡고 앉아 기도를 드리는것이였다.
<<하나님아버지시여, 이 불초한 자식을 용서하시옵소서. 저 강너머에 저의 부모와 처자를 두고 저는 남으로 갔나이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은 세상을 떠났을것이오나 이놈의 처자는 살아있을것이 아니겠나이까. 지척에 고향을 보면서도 가지 못하는것은 구경 누구의 죄이나이까?―>>
꼭 감긴 눈귀로 배여나온 눈물이 주름살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하늘이 유정하다면 인간 생리별을 만든 장본인한테 철추를 내리련만―
하늘이 유정하다면 한세기도 훨씬 넘는 우리 민족의 리별의 비운에 진작 종지부를 찍었으련만―
나는 오열에 떠는 로인의 등허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심장으로 노래를 불렀다.

 님 가신 강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그 님이 보고싶구나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30년대에 명랑하고 경쾌한 가수로 이름을 날리던 김정구선생을 민족의 한을 소리에 담아 읊조리는 새로운 이미지로 부각시킨 <<눈물젖은 두만강>>은 아직도 우리한테는 흘러간 옛노래가 아니였다.
반갑게도 두만강답사기를 마치고 책을 펴내려고 다시 정리를 하던 지난 1999년 6월 나는 도문시 두만강공원에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비가 선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래의 가사와 함께 노래가 창작된 경위를 밝히기도 한다고 한다. 길림성 조선족총회 도문분회에서 세우는 이 비석은 연변미술가협회와 연변예술학원에서 맡아서 제작하고 10월에 제막식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노래비주변은 민속촌형태의 관광지로 꾸며지며 사향정(思響亭)과 관망대(觀望臺)도 들어선단다. 도문분회 리종덕회장은 <<두만강 나루터는 이주민이 늘면서 생겨난 선착장으로 민족의 애환이 서린 곳>>이며 <<이런 력사를 기리여 급속히 붕괴하고있는 조선족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비를 세우기로 했다. >>고 기자 인터뷰에서 말했다는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보통 비석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이주사의 기념비인셈이다.
세계가 한마당에 모이는 오늘 다만 우리 민족만이 력사속에서 오늘을 살아가고있는것이다.
언제면 두만강에 젖은 눈물이 가셔지고 우리 모두가 밝은 모습으로 두만강을 대할수 있을런지―
정녕 그때에 가서야 <<눈물젖은 두만강>>은 력사의 노래로 될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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