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1931-1945년 조선인교육

이주사 연재 27


제3절 1931-1945년 조선인교육

1.노화교육방침

9.18사변 후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식민지노예교육을 본격적으로 추진시키였다. 위만주국은 교육취지를 아래와 같이 규정하였다.

《교육취지는 인의를 중히 여기며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게 양보하는 예의를 지키며 왕도주의를 발양하여 인의가 있는 사람과 친하며 인방에 대하여 선량하게 대함으로써 공동이 생존하고 공동이 번영하게 하는데 있다.》

이때부터 1937년까지 일제는 일, 위통치관할구내의 조선인학교를 조선총독부에서 관할하는 《보통학교》로 고치였으며 반일경향이 있는 조선인사립학교를 강제적으로 폐교하였다. 9.18전에는 만주에 조선인학교가 710개소나 있었던 것이 1932년에는 37개소로 감소되었다. 일제는 사립학교를 완전히 통제하기 위해 1933년에 《사립학교잠행규정》을 반포하였으며 1935년 9월에는 《만주국교육방안》이 제기되었다.

《만선 두 민족의 융합은 비록 곤난이 적지 않지만 해결할 방책은 그들을새 《만주국>에 귀화, 동화시키는 것이다》, 《조선인의 교육에 대해서는 동화의 방침을 실시해야 하는데 이를《만주국>에서 담임하는 것이 상책이다.》, 《간도에서 조선인이 자기로 경영하는 학교들은 불량선인들의 어용도구였고 치안에 혼란을 조성하였으므로 엄격히 취체 또는 폐교시켜야 한다.》

《재만조선인교육 개선안》에서 재만조선인의 교육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국책에 따라서 교육칙어, 일한합병조서, 통감 및 총독의 유고(谕告)를 근본으로 하여 조선교육령, 보통학교규정에 좇아 진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이중적인 지배형식은 1937년 후에 보다 명확히 확정되었다.

1937년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취소하는 동시에 만철에서 경영해온 14개 조선인보통학교를 제외하고 직접 장악해온 조선인학교에 대한 교육행정권을 위만정부에 귀속시켰다. 이해 5월 2일에 《신학제》를 반포하고 이듬해 1월부터 실시하였는바 이로써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체계를 식민지이중교육체계로 완벽히 하였다.

1938년 3월에는 제3차 《조선교"曆�》에 의하여 황민화교육을 강행하였다. 1939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조선인의 성과 이름까지 일본 성과 이름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그렇히 않을 경우 입학과 진학 및 취직을 금지시켰다. 1941년 공포된 《초등학교 규정》에 따라 조선에서처럼 학교에서의 조선어의 사용과 교육을 취소하였고 모든 사립학교를 페교시켰다. 이해부터 조선인의 전통명절을 없애고 일본의 명절을 쇠게 하였으며 조선민족복장을 취소하고 일본복장을 입게 하였다.

1943년 3월에 제4차로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고 6월에는 《학도 전시 동원 체계 확립요강》을 반포하였으며 10월에는《교육에 관한 전시 지상 조치령》을 공포하여 조선인대학생들에게 《강제병제》를 실시하였다. 1945년 5월 《전시교육령》을 공포한 후부터는 학교의 교육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일제통치시기 조선인에 대한 노화교육의 기본내용은 황민화, 직업화, 군사화로 개괄할 수 있다.

《황민화》란 만선일체, 천황에 대한 충군애국 사상을 키우며 조선 문자, 역사, 의식을 상실시키는 것이다.

《직업화》란 《공업일본, 농업만주》의 식민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하층 기술노동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군사화》란 《일본무술》을 배워주고 《무사도정신》을 부어넣으며 학교를 《병영화》하는 것이다.


2. 1931-1937년 식민지노예교육

일제의 《재만 조선인 개선안》에는 《보통학교, 사립학교 규정을 제정한다. 보통학교에 설치한 과목으로는 수신, 국어(일본어), 조선어, 만어(중국어) 혹은 노어, 산수, 국사(일본역사), 지리(일본지리), 이과, 직업, 도화, 창가, 체조 등이고 여학생에게는 가사, 제봉을 더 첨가한다. 사립학교에서는 종교과목을 설치할 수 없다. 교재는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교재를 사용》이라고 씌여져 있다.

보통학교로 개편되지 않은 조선인소학교는 4년제 초급소학교와 2년제 고급소학으로 나누었다. 일제는 조선인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삼았으며 조선어교수시간을 일본어의 2분의 1도 되지 않게 줄이었다.

해당통계에 따르면 위만주국 16개 성(시)의 조선인 학령아동은 남자가 7만 8832명이고 여자가 1만 8812명이며 취학아동은 남자가 5만 1736명이고 여자가 1만 4979명이다. 남자의 취학율은 65%이고 여자는 25%이다. 조선인초등학교의 학생 당 1년 교육경비는 17원이다.

1936년 6월말 현재 만주조선인 초등학교 수, 중등학교 수, 유아원수, 특수교육기관, 일본측 학교에 다니는 조선인, 중국인측에 다니는 조선인상황은 표 1-07-3에 적어둔다.

3. 1938-1945년 식민지노예교육

1938년부터 《신학제》는 정식으로 실시되었다. 근본적 취지는 식민지노예교육을 가일층 강화하여 그것을 전면적으로 실시하려는데 있다. 학교체계는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등 3단계와 사도교육, 직업교육 등 2개 부분으로 나눠졌다.

1940년, 위만주국 문교부를 폐지하고 《민생부교육사》에서 교육 행정권을 행사하다가 1943년 4월 1일 다시 《문교부》를 회복하였다. 교육행정부문에 《시학관(视学官)》, 《독학관(督学官)》을 두었다.

아래에 《신학제》를 실시한 후의 교육을 학급과 유형별로 고찰하자.


초등학교

초등학교는 국민학사(学舍), 국민의숙, 국민학교, 국민우급학교 등을 포함한다.
《신학제》가 실시됨에 따라 종전의 4년제 초급소학교와 보통학교를 국민학교로, 6년제 고급소학교와 보통학교를 국민우급학교로 개편하였고 단학급으로 된 초급소학교를 국민학사 혹은 국민의숙으로 개편하였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일본어교육을 철저히 실시하였으며 타민족동화의 기초가 일본어임을 강조하였다. 국민학교의 주당 108시간 수업시간에서 32시간을 《국민과에 배정하고 국민우급학교에서는 주당 총 수업시간 수 66시간에서 16시간을 《국민과》수업에 배당했다.

1940년, 간도에는 조선인초등학교가 371개 소, 학생은 6만 4005명이고 교원은 1146명 이었다. 1944년 7월에는 학교 수가 474개소, 학생은 8만 4887명, 교원은 1506명이었다.(《중국조선인교육사》)
중등교육

《학교 령 및 학교규정》에는 《중등교육은 실업교육 및 실무교육을 위주로 하는 국민교육을 실시하여 국민의 중견이 될 자를 양성하는 것을 본지로 한다.》는 양성목표를 제기하였다. 조선인중등학교의 양성목표는《실업 또는 실무교육을 기초로 하며 국본 전정조서의 취지대로 건국의 본의를 밝히고 유신의 길을 따라 충효인애, 협화봉공의 정신을 소유한, 일본천황과 만주국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국민의 중견이 될 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여자국민고등학교는 《현모량처》를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가사, 재봉, 수예 등 실업과목에 치중하였다.


사범교육

일제는《신학제》에 의하여 사범을 사도로, 성립을 국립으로 고치였다. 사도 교육은 《실천에 주의하여 인격을 도야하고 지식기능을 습득시키며 신체를 단련시키고 건국정신의 정수를 습득시켜 교육보국의 신념을 양성한다.》는 종지를 내놓았다.

간도사도학교는 설립되어서부터 1944년까지 1920명을 졸업시켰고 간도여자고등학교 사도과에서는 131명을 졸업시켰다. 1944년 7월 통계에 의하면 학생 일인당 경비는 25원이었다.


유아교육

1944년 7월《간도성문교요람》에 의하면 전부 사립 유치원이였는데 모두 조선인 기독교계통에서 경영하였다. 당시 44개 유치원에 어린이 651명, 보모 25명이 있었고 비용은 어린이 일인당 23원이었다.

1933년 2월 봉천 서탑기독교회에서 봉천보모전습소를 세웠는데 이는 만주에서 조선인유치원보모를 양성하는 유일한 학교이다.


직업교육

《사상, 기능이 다 건전한 초급기술자를 양성》목표로 한 중등직업학교를 설치하였는데 전부가 조선인자체가 경영하는 사립학교였고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


고등학교

1943년 당시 20개소의 대학에 일본인학생 3717명, 중국인학생 2716명이었으며 조선인학생은 극소수였다. 대학의 교장, 학감은 전부가 일본인이었다.

1940년 일본인 마사이가 용정에 《개척의학원》을 세웠다. 의사양성의 응급조치로 세운 것으로서 일본의학전문학교 2학년 수업정도의 학생을 모집하여 2년간 학습시킨 후 전부 개척지보건지도원으로 배치했다. 교직원 17명 중 조선인이 6명, 50명학생 중 조선인이 5명이었다.

1942년 만주조선장로교회에서 봉천에 3년제 신학원을 건립하여 1944년말에 제1기 졸업생이 나왔다.


성인교육

일제는 민중학교, 일본어강습소, 조선청년특별훈련소 등을 꾸렸다.

1943년 8월 16일, 조선청년에 대하여 《특별련성》을 실시할 데 관한 문건을 발표하였다. 1944년 중순까지 모두 3기를 꾸렸는데 매기 훈련시간은 40일 좌우이고 매기마다 1000명씩 강제 훈련시켰다.

1939년 6월에는 간도성 농촌여자양성소를 설치하였다. 수업연한은 1년이고 정원은 30명이며 15-20세의 초등학교 졸업생 또는 동등한 학력의 미혼여자들을 전부 기숙사에 입사시켜 노예교육을 실시하였다.


4. 항일유격구의 조선인교육

1932년 하반년부터 중공동만특위는 연변 각 지역에서 항일근거지를 창건하였다. 이해 겨울 동만항일유격근거지의 로농병정부에서는 《소학교의무교육법》을 반포하고 전반적 무료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동만유격근거지역에 30여 개소의 학교가 설립되었고 학교의 운영, 교재, 경비 등은 로농병정부에서 통일적으로 해결하였다. 교재는 조선어로 편찬하였고 조선어로 강의하였다.

근거지의 성인교육은 주로 야학교와 식자반을 통하여 문명을 퇴치하고 문화지식과 혁명이론을 선전하는 것으로서 근거지 조선인군민들의 문화수준과 계급의식을 크게 제고시켰다.

항일연군 제2군은 장백산유격근거지를 개척한 후 밀영에서 학교교육과 성인교육을 계속 견지하였다.



제4절 1945-1949년 조선인교육

동북행정위원회는 1946년 9월에 《학교교육을 개조하고 동학운동을 전개할데 관한 지시》에 따라 교육방침을 《일제강점시기의 노예교육과 장개석의 봉건적, 파쑈적교육의 유독을 가일층 숙청하며 민족적이고 민주적이고 대중적이고 과학적이고 신민주주의 교육을 확립하여 교육으로 하여금 신민주주의 정치적 투쟁을 위하여 봉사하게 하며 동북인민들의 평화민주건설을 위하여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고 제기했다.

1946년 연변 5개현의 소학교는 365개소, 교원은 2190여 명이였고 중등학교는 연길, 화룡, 왕청 3개현에 41개소, 교원은 424명, 학생은 1만 1474명이었다.

1946년 9월 연길에 민주학원을 세우고 공업, 교육, 행정, 재정경제 등 학부를 두었다. 1946년 길동군정대학을 세웠다. 이 두 학교에서는 해방전쟁과 토지혁명을 위해 조선인간부와 교원을 양성하였다.

1949년 4월 1일,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제1임교장 주덕해)을 창립하였다.

연변대학은 설립초기부터 민족종합대학으로서 문학부, 이공학부, 의학부, 농학부를 설치하였으며 교직원 153명, 학생 427명이었다. 여러 차례의 기구조절을 통하여 현재 연변대학은 사범학원, 의학원, 농학원, 이공학원, 인문학원, 예술학원, 과학기술학원, 성인교육학원 등 10개 학원에 40개 학부, 11개 연구부, 3개 부속병원, 1개 부속중학교로 구성되었다. 연변대학은 중국조선인 최고의 고등학부이다.

1950년 동북인민정부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조선인이 꾸린 학교는 대학이 1개소이고 중학교가 55개소이며 소학교가 1241개소였다. 교원은 6775명이고 학생은 20만 9773명이었다.

1950년 통계에 따르면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늦게 해방된 지역의 조선인 농민들이 꾸린 각종 야간학교는 1326개소이며 참가한 농민은 3만 1624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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