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서울노회에서 제게 <나눔과 기쁨>이라는 단체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I.

  저는 과거에 IMF 경제위기가 왔을 때 돈을 실직자에게 나누어주지 말고 동네마다 교회, 학교, 기업, 병원, 식당, 점포, 주민 등 동네의 구성원들이 매달 얼마씩 돈을 모아 그 동네의 가장 어려운 차상위 계층(극빈자이나 자식이 있어 정부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는 운동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새마을 운동이 이 운동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새마을 운동은 이 운동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눔과 기쁨>이란 단체를 만들어 안산市와 손을 잡고 이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또 실패했습니다. 동네에서 적극적으로 모금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지방자치단체가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에 가서야 저는 미자립 교회 목사님들이 나서면 이 모금활동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기업인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독거노인을 돕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만일 매월 30만원씩 독거노인을 주신다면 한 가정을 도울 수 있지만 그 돈을 저를 주면 제가 열 가정을 도울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한국교회의 70%가 미자립교회인데 이 작은 교회 목사님들은 교회성장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용의가 있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에게 매달 30만원씩 6개월간 지원을 하면서 동네에서 나눔 네트워크를 만들도록 하여 매달 백만 원, 이백 만원을 모금하면 그 돈으로 열 가정을 도울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매달 1억원씩 6개월간 <나눔과 기쁨>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방으로 홍보를 해서 작은 교회 목사님들에게 자기 동네에서 정기적인 모금활동을 하면 6개월 동안 월 30만원씩을 지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300명의 목사님이 모였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들에게 동네에서 자동이채로 모금운동을 하도록 하고 이 목사님들에게 매달 30만원씩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이분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중 2백 명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돈만 받아갔습니다. 저는 지원금 1억 8천만 원을 헛되게 낭비한 셈입니다. 그리고 백 명만 이 활동을 했습니다. 무조건 매달 얼마씩 지원하는 방식은 반드시 모럴 헤저드를 가져오고, 밑 빠진 독에 물붓기로 끝남을 엄청난 댓가를 지불한 후에야 깨달은 셈입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지원방식을 바꾸어 실적에 따른 지원을 했습니다. CMS로 한 달에 십 만원을 정기적으로 모금하면 30만원을 지원하고 또 십 만원을 더 모으면 또 30만원을 지원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실적이 없으면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돈 낭비가 사라지고 목사님들도 열심히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연말에 점검해보니 120명이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 30명은 정말로 열심히 했습니다.

II.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나눔과 기쁨> 활동을 열심히 한 목사님들의 삶 속에서 엄청난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목사님들은 그동안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교회성장만을 꿈꾸면서 교회성장 세미나를 열심히 찾아다녔지만 교회는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동네사람도 많이 만나지 못했습니다. 개척교회 목사의 명함을 가지고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눔과 기쁨> 활동을 하면서 이 목사님들이 독거노인을 찾아가서 노인과 친구가 되어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발 안마를 해주고, 병원을 함께 가고, 먹을 것을 주고,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하신 일이 바로 병자를 치유해주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일인데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예수님처럼 행동한 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우리 동네에 훌륭한 목사님이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도움을 받은 분도 교회에 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교회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작은 교회 목사님들의 삶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목회의 성공만을 추구했는데 이제는 삶의 목표가 예수님처럼 사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하니까 그곳에 엄청난 감동이 있게 되고, 또 그렇게 되니까 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송파구의 류춘실 목사님은 8년간 목회를 했지만 계속 실패하다가 <나눔과 기쁨>활동을 시작하면서 무료급식, 문화교실, 공부방, 발마사지 샵, 반찬나누기 등을 하면서 30명의 교인이 15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아산시의 박선호목사님은 교인이 20명이었는데 <나눔과 기쁨> 활동 후, 무료급식과, 발마사지 샵을 하면서 출석교인 150명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산시의 김병천 목사님도 개척교회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나눔과 기쁨>을 만나, 지역아동센터, 무료급식, 나눔가게, 알콜중독자 치유센터, 노인요양보호센터 활동을 하며 매월 천만원(물품포함)의 모금을 해서 차상위 계층을 돕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교회자립은 물론이고 4층건물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눔과 기쁨> 사역으로 목사님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눔과 기쁨> 목사님들은 목회가 너무도 행복해 졌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겠다는 각오가 중요하지, 교회규모가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목회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니까 어디 가서도 당당합니다. 큰 교회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니 다른 작은 교회 목사님들도 이야기를 듣고는‘나도 하겠다, 나도 하겠다’하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눔과 기쁨>활동이 시작된 지 3년 반 만에 이 활동을 하는 목사님의 숫자가 1,300명으로 늘어났고, 그동안 100억원을 모금해서 연인원 100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이 상태로 계속 늘어나면 앞으로 2년 내로 전국의 모든 동네에서 <나눔과 기쁨>활동을 하는 목사님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이 활동을 하는 작은 교회들이 크게 성장을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나눔과 기쁨> 성장법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살면 반드시 감동이 있고, 또 감동이 있는 곳에 반드시 교회성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저 역시 서울조선족교회에서 절실히 느낀 점입니다. 조선족 목회를 하면서 저는 조선족이 강제추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기한 단식을 여러번 했습니다. 한번은 단식 17일째 되는 날 위출혈이 생겨 입으로 피를 쏟고 변으로 피가 나오면서 졸도를 했습니다. 가까운 데 병원이 없었더라면 생명이 위험할 뻔 했습니다. 긴급수혈과 레이저수술 후 정신을 회복하고 단식을 계속했습니다. 결국 단식 23일째 되던 날 우리는 요구사항을 관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피를 쏟던 광경을 지켜 본 조선족들이 저에게 물었습니다.“목사님께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왜 목사님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십니까? 목사님이 중국에 가서 정치인이 될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이해관계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까?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여러분이 한 달만 우리 교회에 와서 제 설교를 들으시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들이 한 달 후에 제게 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이 믿는 그 하나님을 우리도 믿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너무도 쉽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저는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살다 보면 반드시“왜 당신은 그토록 헌신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십니까? 왜 당신은 그토록 열심히 정의를 위해 일하십니까? 도대체 당신의 비밀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전도의 순간입니다. 전도는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줄 때에만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행실을 보고“아! 하나님이 계시구나”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III.

  <나눔과 기쁨>활동을 하면서“영적 대각성”운동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1907년의 평양대부흥이 다시 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영적 대각성 운동을 전개했지만 아무리 열심히 통성기도하고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처럼 살겠다는 결단이 없으면 일시적인 감흥에 불과할 뿐 진정한 의미의 영적 대각성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회부흥은 교회가 예수님처럼 살 결심을 하고 이를 실천할 때, 그래서 교회를 통해 사랑과 정의가 실현될 때,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함을 <나눔과 기쁨>활동을 하면서 절감했습니다.  
  3.1운동 당시에 한국교회는 민족운동이 앞장섰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많은 교회가 불에 타고 제암리 교회는 주민까지 불에 타고, 많은 목사, 장로님이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인의 행동으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고 한국교회는 가장 크게 부흥했습니다. 기독교인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70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면서 교회가 감시당하고 억압당했습니다만 그 대신 다른 많은 교회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우리 민족의 희망으로 생각하고 자기 발로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지나간 70년대에 교회가 두 배 반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물론 큰 교회는 성장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의 수평이동입니다. 매년 3천교회 씩 작은 교회가 문을 닫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지난 십년동안 14만명의 교인수가 감소했습니다. 왜 감소했나? 그들이 볼 때 교회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를 자기들끼리 엔조이하는 곳으로 생각하지, 사랑과 정의의 본산지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3년전 한기총 정책협의회에서 강남교회 전병금 목사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나간 70년대에는 매주일 새 신자가 열 명씩 자기 발로 교회에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새 신자가 한 주일에 한두 명 정도인데 그들도 열심히 전도해서 오게 된 사람이지, 자기 발로 찾아온 초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우리민족의 희망이라는 생각이 없으니까 자기 발로 찾아오는 초신자가 없는 것입니다.  
  
IV.

  그런데 정의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이 정의였고, 해방 후에는 민주화운동이 정의였다면 지금은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진국이 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후진국이 중진국을 거쳐 선진국이 된 사례는 일본, 아일랜드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선진국의 문턱에서 주저앉았습니다.
  선진국이 되려면 국민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노무현 정부 하에서는 국가의 목표같평준화”였습니다. 그래서 국토균형발전, 교육 평준화, 사회 평준화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다 같이 못사는 하향평준화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는 국가목표를 평준화에서 국제경쟁력 강화로 바꾸었습니다. 이 것은 잘한 일입니다. 교회는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한 개혁이 잘 되도록 정부를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선진화의 길을 막아서는 反선진화 세력, 反대한민국 세력과 맞서야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행동하면 결국은 우리 국민이 교회에 대해 감사해 할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사학법 재개정을 위해 피나는 투쟁을 했습니다. 내용을 잘 모르는 국민은 교회가 교회의 이해관계를 위해 투쟁한다고 비난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학의 자율 없이는 교육 선진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무엇보다 강력한 선진화 세력이 존재해야 하는데 이러한 세력을 만드는 일을 교회가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역할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가 이 역할을 열심히 하면 훗날 우리국민은 반드시 교회에 대해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진화로 가려면 이명박 정부를 지지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한 편으로 선진국의 길을 가로막는 친북좌파들과 맞서 싸워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명박 정부가 말로는 선진국을 지향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가진 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지 않는지를 철저하게 감시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국은 환경선진국, 복지선진국, 정신선진국이어야 합니다. 또 경쟁하다 보면 경쟁에서 낙오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중요해 집니다. 이 문제를 정부에게만 맡길 수 없습니다. 정부보고 전부 해결하라고 하면 우리는 다시 평준화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나서서 이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부와 기업이 경쟁력 강화의 길로 매진하더라도 나라 전체에 큰 어려움이 없게 됩니다.  

V.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볼 것인가? 저는 이일은 작은 교회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큰 교회들이 <한국교회 희망연대>를 만들어 조선족을 돕는 행사도 하고 노숙자를 돕는 행사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족 동포들이 그 행사에 가서 오리털 잠바를 받아왔는데 고맙다는 생각 없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갔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은 작은 교회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은 교회 목사님이 독거노인을 찾아가서 먹을 것을 나누고 말동무를 하고 발안마를 하면 그분들이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큰 교회의 프로그램에는 스킨쉽에서 오는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은 작은 교회 목사님들입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와 큰 교회는 역할 분담을 해야 합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작은 교회의 몫입니다. 이것까지 큰 교회가 직접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작은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사랑을 듬뿍 받게 해야 합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많은 사람들이 수평이동을 해서 큰 교회로 갑니다. 저는 수평이동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제가 볼 때 불가피합니다. 그 대신 큰 교회는 작은 교회가 성장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시간이 지나면 교인들이 큰 교회로 옮겨오지만 그래도 작은 교회를 문 닫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동안 큰 교회가 계속 성장했는데도 지난 십년간 교인 14만명이 감소했습니다. 왜 그런가?  교인들이 큰 교회로 수평이동하면서 매년 3천교회 씩 작은 교회가 문 닫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에는 작은 교회 목사님의 고통과 恨을 잘 몰랐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서울조선족교회가 평안하면 저 역시 아무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눔과 기쁨> 상임대표가 되어 작은 교회 목사님들과 접촉하면서 그분들의 아픔을 알고 나서는 제가 그동안 個교회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어느 작은 교회 목사님은 열심히 주일학교를 키웠는데 학생들이 인근 큰 교회의 하기성경학교 행사에 참석하더니 주일학교 학생의 삼분지 이가 옆 교회로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님은 억장이 무너집니다. 어느 교회는 셔틀버스를 작은 교회 문 앞에 세워놓고 교인들을 실어 나릅니다. 그것도 후라이펜을 판촉물로 주면서 까지. 그러면 작은 교회 목사님은 분노의 눈으로 큰 교회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전에는 큰 교회의 예배를 즐겼습니다. 큰 교회에서 예배를 보면 참으로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의 아픔을 알고부터는 큰 교회에서 예배 보는 것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잘 아는 목사님이 서울근교에 교회를 세웠는데 교회가 급속성장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축하할 마음이 나지 않았습니다. 교회 주변의 수십 개 작은 교회가 문을 닫았겠구나 하는 생각만 났습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사이의 갈등문제는 한국교회 최대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큰 교회는 작은 교회와 共生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을 전도하는 일은 작은 교회에 맡기고 큰 교회는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국가적인 과제나 식자층과 中上層에게 전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큰 교회가 절대로 작은 교회가 자기들대신 가난한 사람에게 전도하도록 일을 나누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모두 다 큰 교회가 독점해야 합니다.
  교회간 관계는 마치 정글과도 같습니다. 작은 교회들이 설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반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는 襟度(금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기업은 반도체, 선박, 자동차, 제철, 항공기 등의 분야에만 진출하고 생필품 제조업에는 진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소기업의 몫입니다. 그래서 중소기업에게도 살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내에는 이런 금도가 없습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철저하게 관철됩니다.

VI.

  제가 이렇게 말하면 분들이 예장 통합측은 총회차원에서 작은 교회에 생계비 지원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교단의 생계비지원 제도는 성공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작은 교회가 열심히 전도하지 않아도 교회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제도는 사회주의 제도와 비슷합니다. 유럽교회들이 이와 비슷한 제도를 도입했는데 그 결과 교회가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이 제도 하에서는 목사님들이 악착같이 교회 부흥을 위해 뛰어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제도는 작은 교회를 살리는 제도가 결코 아닙니다. 무조건 정기적으로 돈을 주면 반드시 모럴 헤저드에 빠지고, 반드시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됩니다. <나눔과 기쁨>은 2억원에 가까운 돈을 낭비한 후에야 이점을 절감하고 작은 교회를 지원하는 방식을 실적에 따른 지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우리 교단도 작은 교회를 지원할 때 실적에 따른 지원을 해야 합니다. <나눔과 기쁨>에서 활동하는 천삼백 명의 목사님 중에 통합측 목사님은 숫자가 매우 적습니다. 합동정통보다도 적습니다. 총회에서 생계비를 도와주니까 그다지 상황이 절박하지 않아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일도 열심히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작은 교회는 절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노회가 <나눔과 기쁨>을 통해 작은 교회들을 돕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들이 나눔네트워크를 만들어 정기모금을 해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돕는 실적이 커질 때마다  활동비를 지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작은 교회는 반드시 성장합니다. 여기에다 <나눔과 기쁨>은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다양한 방법을 알려주고 서로 위로받고 격려하며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많은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나눔과 기쁨>에 들어와서 진심으로 행복해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큰 교회 목사님들에게‘개척교회를 지원할 때 매달 얼마씩 정기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그렇게 하면 절대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합니다. 지원받는 교회로 하여금 <나눔과 기쁨>활동을 하도록 권유해 주시고, 재정 지원할 때 저희를 통해 실적에 따른 지원을 하도록 해 주십시오’하고 말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요즈음 들어서야 지원방식을 바꾸는 교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VII.

한국교회가 농촌교회를 많이 돕는데 농촌교회는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눔과 기쁨>의 경험에 의하면 농촌교회도 도시교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경남 고성군의 김인수 목사님은 농촌지역이지만 매달 2백만원의 모금을 합니다. 전주의 이명윤사모도 매월 백만원을 모금하여 어려운 사람을 돕습니다. 강릉의 박미경 사모도 매달 물품기증을 포함해서 3백만원을 모금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습니다. 이 교회들은 <나눔과 기쁨>활동이후 전부 자립했습니다. 농촌교회도 예수님처럼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면 반드시 성장합니다.  
  농촌목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농촌목회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농촌교회로 부임하더라도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 아예 짐을 풀지 않는 목회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만 바꾸면 농촌교회에 무한한 미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농촌에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농촌을 망친 것은 농업 포퓰리즘입니다. 그동안 정부는 농민이 데모를 하면 무조건 다 지원해 주었습니다. 부채도 탕감해주고 온갖 지원을 해줍니다. 그 결과 농민은 적자를 보아도 정부가 다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농촌이 희망이 없는 것은 이처럼 농민의 정신상태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농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새마을 운동입니다. 정신개조운동입니다.‘하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는 용기입니다. 농촌교회 목사님들이 발 벗고 나서서 새마을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처럼 민중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농촌은 반드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교회 안에서 성경공부만 하고 있으면 교회도 부흥하지 못하고 농촌도 살아나지 못합니다. 농촌교회 목사님은 바지를 걷어붙이고 농촌과 농업 살리기에 앞장서야 합니다. 목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주민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주민이 다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도시가 공해로 찌들어 있는 요즈음 농촌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은퇴한 도시민은 한결  같이 농촌에서 사는 것이 꿈입니다. 이렇게 꿈의 지역에 살면서 절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농촌교회 목회자는 농촌을 생태적으로 청정하고 유기농업을 하고 고루 잘사는 지역으로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인구가 부족하면 귀농사업을 하면 됩니다. 도시에는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인구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농촌에서는 얼마든지 일할 수 있고 농촌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며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분들을 농촌에서 살도록 하면 이분들도 행복해지고 농촌교회도 성장합니다.  더욱이 이제는 요양보호사 제도가 도입되어 노인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면 정부가 1인당 월 백오십만원까지 돈을 줍니다. 정부가 지원하지 않아도 목사가 노인환자를 돌보아야 하는데 돈까지 받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농촌교회가 도시교회의 도움 없이도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농촌교회 목사님의 마음가짐입니다.

VIII.  

  <나눔과 기쁨>의 “예수님처럼 살기운동”은 해외선교에서도 꼭 필요합니다. 저는 최근에 미얀마를 방문하고 한국선교사가 하는 일이 문제가 많음을 알고 놀랐습니다. 한국선교사가 미얀마 원주민 교회의 목사님에게 봉급을 주고, 교회도 지어주고, 교회 담장도 고쳐줍니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교인들이 자부심을 느낄 만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현지교회 목사님은 자기 교인들의 헌금으로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한인선교사가 주는 돈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가난한 교인들을 섬기지 않게 되고 교회는 더 약해집니다. 한인 선교사들이 미얀마에 가서 오히려 현지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깊게 들여다 보면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물량주의, 상업주의, 실적주의가 한인선교사를 병들게 하고 그 결과 현지교회까지 병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는 격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미얀마 뿐 아니고 남아연방도, 연길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한인선교사가 현지교회를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방식은 안 됩니다. 현지 교회 목사가 <나눔과 기쁨>처럼 동네에서 정기적으로 모금해서 그 돈으로 동네 안의 가장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한인선교사는 <나눔과 기쁨>의 방식대로 현지교회 목사의 모금실적에 따라 재정지원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미얀마의 목사님으로 하여금 더 열심히 지역의 가장 어려운 사람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병든 미얀마 교회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마음 속 목표는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건립이 목표이면 오히려 목표달성이 어렵습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선교사들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선교사는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는 일에 더 힘을 쏟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현지인들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왜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와서 우리를 그렇게 죽도록 사랑하십니까? 도대체 당신의 비밀은 무엇입니까?”그러면 이러한 질문을 받는 때가 바로 전도의 순간입니다. 선교지역에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면, 그 나라 국민을 죽도록 사랑하면, 틀림없이 큰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IX

  오늘 서울노회에서 너무도 영광스럽게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기회에 저는 서울노회에 네 가지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금은 한국교회가 교인들에게 영적인 충족감을 주는 교회로 自足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교회가 되려고 결단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초대형 교회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크기와 상관없이 예수님처럼 살려고 분투하는 교회들이 한국교회를 대표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곳에 반드시 감동이 있고, 기적이 체험될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면 한국교회에 대한 안티세력도 줄어들 것입니다.  
  둘째로 작은 교회의 고통과 恨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은 작은 교회가 전담해서 하도록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작은 교회를 더 이상 애물단지로 보지 말고 작은 교회 안에 한국교회를 새롭게 할 굉장한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개척교회와 미자립교회를 지원할 때에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도울 것이 아니라 <나눔과 기쁨> 활동을 통해 지원할 수 있도록 지원방식을 전환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요즈음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고통을 겪는 가난한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어 이들을 섬기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작은 교회들은 신학교 학생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군소교단의 방만한 신학교 문제, 자격 없는 목사안수 문제를 근본적으로 정비하여 목회자의 수급불균형을 해소해 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목회자 수급불균형이 계속되는 한 작은 교회 목회자의 고통은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한국교회의 개혁과제가 산적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개혁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어디에도 개혁주도 기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안에서는 사회개혁은 청와대가 주도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한기총이 개혁의 사령탑이 되어야 합니다. 부디 한기총을 개혁해 주십시오. 한기총이 교회 지도자들이 1년에 한 번씩 거쳐 가는 명예직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개혁의 사령탑이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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