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길우의 수필 115>

 

申 吉 雨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skc663@hanmail.net

 

이 세상의 꽃들 가운데에서 가장 진화한 것이 국화꽃이라고 한다. 품종만 해도 개량종까지 합하면 수천 가지나 된다. 꽃의 모양이 다양하고 빛깔도 산뜻할 뿐만 아니라 아무데서나 잘 자라기 때문에 꽃 중에서 가장 번성하다. 국화꽃은 대부분이 가을에 피지만 종류에 따라서는 여름이나 겨울에 피는 것도 있어서, 피는 시기에 따라 하국(夏菊) 추국(秋菊) 동국(冬菊)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흔히, 매화(梅花)는 청우(淸友)요, 연화(蓮花)는 정우(淨友)요, 국화는 가우(佳友)라고 하는데, 따로 국화는 모란․작약과 함께 삼가품(三佳品)이라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 국화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치고 있어서 많은 시인 묵객들이 다투어 예찬하고 노래해 오기도 하였다.

국화의 원산지는 우리 나라와 중국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우리 나라에는 곳곳에서 국화가 자라고 있다. 산에는 산국(山菊)이 피고 들에는 들국화가 무성하다. 가을철에는 물론, 초겨울의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피어 있는 국화꽃을 만날 때가 많다.

국화의 재배 역사도 매우 길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부터 길렀다. 송나라 원예가인 유몽전(劉蒙筌)이 쓴 국보(菊譜)에는, 신라(新羅)의 국화는 일명 옥매(玉梅)․육국(陸菊)이라고 했으니, 그가 아껴 기른 163종 가운데에는 일찍이 신라에서 들어간 특수한 품종도 있었던 것 같다. 왜한삼재도회(倭漢三才圖會)를 보면, 백제(百濟)는 서기 385년에 청황적흑백(靑黃赤黑白)의 다섯 가지의 국화를 일본에 보냈다고 하니, 우리 나라의 국화 재배의 역사는 오래다.

오늘날에도 시골집 장독대나 울타리 옆에는 으레 국화가 자라고, 도시의 작은 마당 구석에도 한두 포기쯤은 심어진다. 큰 건물의 현관에는 수십 수백의 송이가 무리지어 피어 있는 국화 화분이 놓이고, 기념식이나 발표회 연회 등의 장소에는 거의 국화꽃이 빠지지 않는다.

이처럼 국화는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온 꽃이어서 국화꽃과 관련된 일화도 많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은 붉은 줄기에 노란 꽃이 피는 국화를 유난히 사랑하였고,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꺾어 들고, 남쪽 산들을 유연히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유명한 시구도 남겼다.

국화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풍류는 대단하였다.

근세조선 중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신용개(申用慨)는 국화를 무척 좋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루는 부인에게 오늘 저녁에는 귀한 손님이 오시니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부인은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마련하였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얼마 뒤, 둥근 달이 휘영청 뜨고 국화 향기가 집 안에 가득 피어나자 그는 술상을 내어오라 하였다. 부인은 손님도 오기 전에 무슨 술상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으면서,

“저 밝은 달과 이 향기로운 국화가 오늘 저녁의 내 귀한 손님이오.”

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달빛 아래에서 국화를 마주하며 술을 즐기는 그의 풍류는 가히 최상의 것이라 하겠다.

조선 13대왕 명종(明宗)께서 궁정에 곱게 핀 노란 국화를 보시고는, 그것을 옥당에 보내고 시를 지으라고 하셨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시를 짓지 못해서 걱정을 하다가 송순(宋純)에게 부탁하여 시를 지어 받아서 임금께 바쳤다. 명종께서 그 시를 보시고는 매우 기뻐하여 지은이를 물으셨다. 신하들은 어쩔 수 없어 사실대로 아뢰었다. 명종은 송순을 불러 잘 지었다고 상을 주셨는데, 그 시가 유명한 ‘특사황국옥당가(特賜黃菊玉堂歌)’이다.

풍상(風霜)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은반(銀盤)에 꺾어 담아 옥당(玉堂)에 보내오니

도리(桃李)야, 꽃인 양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임금과 신하 사이의 따스한 마음과 멋진 풍류를 느끼게 하는 이야기이다.

국화는 일명 계초(契草)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는 형제간의 깊은 우애를 나타내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옛날 일본의 오옹슈우의 어느 시골에 우애가 매우 깊은 형제가 살았다. 어느 날 아우가 일이 있어서 멀리 쿠우슈우까지 떠나가 있게 되었다. 그때, 형이 정원에 있는 국화 한 포기를 캐내어 뿌리를 반으로 갈라 하나를 아우에게 주면서,

“서로가 보고 싶고 그리울 때 이것을 보며 마음을 달래자.”

고 하였다.

그리하여,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아우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고, 국화꽃은 때를 만나 피었다. 그런데, 그 국화는 한 쪽 가지에서만 꽃이 피고 다른 쪽에서는 꽃이 피지 않았다. 마치 형제가 떨어져 있으면서 각각의 상대방 쪽의 국화꽃을 보고 있기에 그와 반대되는 쪽에서는 피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그때부터 사람들은 국화를 계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국화에 얽힌 정감 있는 이야기들은 많다. 국화에 대한 글도 많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열심히 살면서도 마음을 여유롭게 갖는 데에서 나옴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정신없이 바쁘게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꽃 한 포기 가꿀 수 없을 만큼 바쁠 수는 없다. 꽃 한 송이를 가만히 바라볼 틈도 없지는 않다. 삶의 보람은 일을 성취하는 데에 있겠지만, 삶의 즐거움은 열심히 살아가는 것에서 오는 것이며, 삶의 멋과 풍류는 마음의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쁠수록 여유를 찾고, 스스로 멋과 풍류를 부릴 줄 아는 선조들의 이런 삶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본받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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