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의 장편답사기>

제10장

선혈의 강

싸구려려관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아침을 먹으려고 거리로 나왔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있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눈발은 천지간을 푸덕푸덕 나는 새하얀 나비떼처럼 고웁다.

이른 아침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밤늦도록 영업을 한 음식점들은 문을 꽁꽁 잠그고 손님을 맞지 않았다. 광복전엔 류동인구가 주민수보다 곱절 많았다는 도문시가 오히려 반대로 되였다. 아마 교통때문이리라. 여기에서 차를 타면 한시간이면 연길에 가닿을수 있으므로 손님들은 연길에 집중되는것이다. 그러다보니 아침영업을 하는 식당은 거의 없었다. 요행 한집에서 순두부를 먹을수 있어서 감사했다.

아침을 먹고 거리에 나서자 아까와는 달리 두툼한 솜옷들을 챙겨 입고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의 자전거행렬이 시내거리에 물결쳤다.

광복전에 찍은 도문시경을 보면 가야하와 두만강 합수목 골안에 일본식 벽돌집 몇채와 게딱지같은 판자집들이 질서없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좁은 골목으로는 누더기옷차림의 골기없는 행인들이 보일뿐이였다. 현대화를 부르짖고있는 오늘 고층건물들이 늘어선 사이사이에 단층 기와집들이 게딱지같이 붙어있고 백여리 상거한 연길에서는 진작 자취를 감추어버린 인력거들이 거리를 비좁게 누비고있어서 옛모습을 엿보는듯한 감을 주기도 한다.

나는 여기 도문시 우의(友誼)거리와 해방로(解放路)의 교차점에 세워진 동북해방기념탑(東北解放紀念塔)앞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었다. 순간 80년대초에 류행되였던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리선근 작사, 방룡철 작곡)라는 노래가 기억의 문을 열고 혀에 감겨들었다.

봄빛도 정다운 강반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련인들이여

텔레비죤앞에 모여앉아

이 밤을 즐기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

이 강산을 찾아준 은인들을

아직도 어느 한 심산속에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중국에는 <<물마실 때 우물 판 이를 잊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행복을 누리면서 오늘의 평화를 위해 몸바친 렬사들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연변 각지에서는 마을마다 기념비를 세웠다. 바로 이 기념비도 1945년 8월 도문시를 해방하는 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된 쏘련홍군전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것이다. 1945년 8월 8일 쏘련정부는 아세아 여러 나라 피압박민족의 해방사업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쏘련 홍군 제1방면군은 일본군의 방선을 돌파하고 파도처럼 중국의 동북으로 밀려왔다. 8월 15일 이른 새벽 쏘련 홍군은 훈춘―도문도로를 따라 짓쳐왔다. 도문을 지키고있던 일본군 수비대, 헌병대와 괴뢰만주국 경찰 등 반동세력은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쏘련홍군을 대항해나섰다. 일본침략군은 사전에 팔엽교를 폭파해버리고 도문시내로 들어오는 주요한 통로를 끊어버렸으며 또 후안산일대에 군대를 매복시켜 쏘련홍군의 선두부대를 저격하였다. 이틀동안의 격전을 거쳐 쏘련홍군은 8월 17일 팔엽교를 건너 도문시구역에 쳐들어와 일본침략군의 저항력량을 몽땅 섬멸하고 도문을 해방하였다. 이 전투에서 20여명 쏘련홍군 지휘원과 전투원들이 희생되였다.

광복과 함께 해방을 맞은 인민들은 연길공원에 세워졌던 <<김동환기념비>>와 명월진에 세워졌던 <<16용사기념비>>를 짓부셨다. 일제의 주구 김동환은 항일군 토벌을 일삼던 자로서 1936년에 김산부대에 의해 처단되였다. 그리고 <<16용사>>란 역시 안도 특설부대원들로서 항일련군 최현부대에 의해 죽은 자들이였다. 바로 일제는 저들의 앞잡이로 충실해온 자들을 기념비를 세워주는 추태를 공연했던것이다.

주구들의 기념물이 짓부셔지고 대신 항일렬사들의 기념비가 솟기 시작했다.

바로 내가 우러르고 서있는 이 비석도 1945년 9월 도문시 시민들이 비통한 심정을 안고 세운것이였다.

이 기념탑이 차지한 부지면적은 594㎡, 정방형 탑의 기좌가 차지한 면적은 169평방메터란다. 보검같은 탑의 직경은 1. 06㎡, 탑신 높이는 16. 99㎡이고 맨 꼭대기에는 붉은 오각별이 받들려있었다. 탑의 정면에는 쏘련 국장(國徽)아래에 로씨야문으로 <<일본침략자를 도문성(圖們城)에서 내몬 영용한 홍군전사들께 영광이 있으라>>라는 글이 새겨져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쏘련 홍군이 동북으로 진출하였다. 8월 18일 연길에 들어온 쏘련홍군은 위만주국 간도성 공서(公署)와 일제와 주구기관을 해산하였다.

광복을 맞은 그날의 정경을 한택수(韓澤洙)선생은 <<해방을 경축하던 날>>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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