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 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나 역시 그런 길을 걸었다오, 친구.

나 역시 그대와 똑같은 아픔을 겪었어요.

하지만 일이 벌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모든 난관에는 교훈이 있어요.

과거를 후회하지 말아요.

오히려 과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당신의 스승으로 받아들이세요.

- 로빈 샤르마의 <나를 발견한 하룻밤 인생수업> 중에서 -

1. 정치적 측면

0. 중국의 정치민주화와 연변

후진타오체제가 정착되면서 중국에서의 정치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2007년 10월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17전대)는 이러한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비록 획기적인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았지만 최근의 정세변화를 반영하여 중국의 중앙 정치무대에서 정치민주화를 위한 조용한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북경에서 17전대를 지켜본 서울대 정재호 교수는 한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이번 17전대가 16전대에 비해 당내민주화에 대해 점진적이나마 지속적인 노력을 보였다고 평가한다. 특히 그는 중국공산당내에 일정한 상호견제의 민주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중국이 향후 양당제 또는 다당제로 나아갈 가능성에 주목했다. 중국이 정치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관건은 “어떻게 균형의 과정을 정책 차에 기반한 양당제 또는 다당제와 같은 명시적인 제도의 영역으로 끌어낼 것인갚에 있다면서 중국이 다당제를 도입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런 점에서 17전대는 사회적 변화와 인민의 욕구를 당의 정치이념과 제도에 적절하게 용해시킴으로써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정치사회적 변화를 수용하려는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정재호교수가 관측한 것처럼 이번 17전대에서 정치적 민주화와 관련한 새로운 시도가 추진됐음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17전대 이후 이러한 요구가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중국의 민주화 목소리가 잇달아 터져 나온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17전대에서 조화사회를 강조하며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중화권 언론의 2007년 11월 22일자 보도이다. 안후이(安徽) 성 정협 상무위원인 왕자오쥔(汪兆鈞) 안후이 궈바오(國寶)그룹 이사장이 한 달 전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 국무원총리에게 보낸 민주화를 촉구하는 서한을 공개한 것이다.

“공산당 이외의 다른 정당은 집권을 금하는 당금(黨禁)을 개방하라. 다당제 민주선거를 실시하라. 파룬궁(法輪功)을 인정하고 해외에 망명한 민주인사의 귀국을 허용하라. 인민해방군을 국가의 군대로 돌려놓아라....” 공개서한은 중국공산당의 정치개혁노선에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으로서 획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식 사회주의 기치아래 국가적 변혁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은 경제발전을 기본적인 국가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개혁개방 정책과 이른바 ‘4항 견지노선’을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 개혁개방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사회주의체제인 중국에서 적용하기 위한 정책이라면 4항 견지노선은 경제발전을 위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에 따른 정치적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하지만 체제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적어도 여기서 제시하는 네 가지 사항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변화의 한계선인 셈이다. 지켜야 할 네 가지 준칙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독재, 인민민주주의, 그리고 공산당영도이다.

사회주의체제의 특징을 간략히 말하자면 정치적 측면에서 일당독재 체제를, 경제적 측면에서 사적소유의 부인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중국은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사적소유가 광범하게 허용되고 있어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칭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체제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공산당영도의 견지는 중국이 스스로를 중국 특색적 사회주의로 칭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중국 변화의 마지노선으로 설정된 네 가지 준칙마저 변하고 있다.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마지노선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중에서 ‘공산당영도 견지’만은 여전히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이 정치적 다원주의, 즉 다당제를 수용할 것인지 여부는 결국 4항 견지노선의 마지막 준칙인 공산당영도 견지 노선을 포기하느냐와 직결된다. 중국이 정치민주화의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는 다당제를 수용할지의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이유이다.

중국 중앙무대에서의 점진적 정치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지방정치에서 민주화를 언급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다. 공산당 영도를 견지하고 있는 한 중앙정치에서의 정치적 민주화가 당장 지방으로까지 확산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지방에서의 정치적 민주화는 4항 견지노선의 유지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정치민주화 역시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논의 가능할 것이다.

0. 조선족동포의 정치의식

사회주의국가에서 일반주민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중국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일부 논객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발언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중국의 정치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있는 증거이다.

그러나 지방의 정치환경은 중앙무대와 다르다. 지방에서는 상대적으로 중앙무대와 같은 융통성이 훨씬 더 제한적이다. 이른바 ‘공산당영도 견지’의 원칙이 보다 엄격하게 지켜질 뿐 아니라 그 역할도 공산당이 중앙에서 결정한 사항을 집행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변의 조선족동포 역시 사회주의 중국의 국민으로서 이러한 정치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다. 즉 정상적인 정치적 메카니즘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섣불리 제기할 수 없다.

더욱이 연변은 소수민족 자치주라는 점에서 그리고 민족적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한반도와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측면도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조선족동포들의 정치의식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미국의 행태주의 정치학자들인 가브리엘 알몬드(Gabriel Almond)와 시드니 버바(Sydney Verba)의 분류에 따라 중국의 정치문화를 구분하면 중국은 아직 신민형 정치문화의 초기단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치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정치 메카니즘상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방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연변 조선족동포들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국민으로서 조선족동포들의 긍정적 국가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선족동포들의 대다수는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동포들 스스로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다수의 조선족동포들은 중국공산당과 정부가 정치를 비교적 잘하고 있고 이에 따라 당장 고단할지라도 향후 중국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조선족 동포들의 이러한 국가관은 결국 한국 및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 및 관계맺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모국으로서 한국에 대한 동경이 크면 중국정부에 대한 신뢰감이 낮아질 것이고 반대로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기대치가 낮아지면 상대적으로 중국 국민으로서의 귀속감이 강화될 것이다.

현재 조선족동포들은 한국에 대한 동경도 한국에서의 기대치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중국국민으로서의 귀속감이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족 동포들의 경우 한국국적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중국국적을 포기하는 것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중국국적을 유지하는 것이 장차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이들의 결정을 주저하게 하는 요인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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