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문학특집

좁고 긴 골목을 절반쯤 왔을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후두둑 하고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먼지가 뿌옇게 덮혀있던 땅은 급기야 로년반점 같은 무늬가 찍혀지며 흙방울이 이리저리 툭툭 튕겨지고있었다.

평시 한적하던 골목은 오늘따라 인적이 드물었다. 우산도 없이 비속을 걷고있는데 화단옆 나무뒤에서 부스럭하고 기척소리가 났다. 이런 날씨에 거기서 무엇을 하고있지 하는 호기심으로 슬쩍 훔쳐보니 거기서 몰래 소변이라도 보고있을줄 알았던 녀자 하나가 나무가지에 손을 뻗쳐 젖은 나무잎을 뜯고있었다.

그 나무는 두메터가량 자란 류송(柳松)이였는데 비방울이 가지를 타고 잎끝으로 흘러내려 나무가 한번씩 흔들릴 때면 비방울보다 훨씬 큰 물방울들이 후두둑 후두둑 사정없이 그녀의 몸을 때리고있었다.

참 이상한 녀자다 하며 그앞을 지나가는데 방금까지 나무잎을 훑어내리던 그 녀자가 허리를 굽혀 금방 뜯은 나무잎과 땅밑에 쌓아둔 나무줄기며 가지들을 안고 세멘트로 된 화단을 훌쩍 뛰여내려 허둥지둥 저만치 달려가는것이였다. 뚱뚱한 몸집 량켠으로는 나무가지들이 삐죽삐죽 나와있고 물방울을 튕기며 달려가는 자리마다 솔잎들이 어지럽게 떨어지고있었다.

몇발자국 더 걸어 굽인돌이를 해서야 길어구 처마밑에 허리를 구부리고 서있는 그녀를 다시 볼수 있었다. 강남의 운치를 자랑하는 그 건물은 검은 기와에 흰 회칠을 올린 골동품상가였는데 워낙 처마밑이 넓다보니 다른 땅이 비가 와서 흠뻑 젖었는데도 거기만은 쏟아지는 비줄기를 가려 도로옆으로 비를 피할수 있는 마른 공간 하나를 넉넉히 내여주고있었다. 거기에는 금방 그쪽으로 달려간 뚱뚱한 녀자외에도 옷을 두툼하게 껴입은 작은 아이 하나가 겁먹은 송아지처럼 눈이 동그래서 앉아있었다.

녀자는 뜯어온 나무가지와 잎을 땅바닥에 펴고 맨바닥에 앉아있는 아이를 덥석 안아다 그우에 앉혀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잎을 차곡차곡 땅우에 계속 펼쳐놓고있었다. 그제서야 이 녀자는 아이를 데리고 류랑을 나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생활이 어찌 곤란했으면 이렇게 비오는 날 저기 앉아있을가. 아이가 불쌍하지, 하면서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그때였다. 하얀 승용차 한대가 미끌어져오더니 치익, 하고 우리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차창이 반쯤 내려지더니 녀자 하나가 손에 백원짜리 한장을 쑥 내밀었다.

“라이, 쩌거 거이니(여기요, 이거 가져요).”

바닥에 잎을 펴고있던 녀자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웬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워? 쓰 껀워 쒀화마?(나? 나랑 말하는건가요?)”

“쓰더. 나줘우바.(맞아요. 가져가요)”

“부요우.(싫어요)”

녀자는 퉁명스레 한마디 내뱉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무잎으로 침대 혹은 방석 하나를 만드는 그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쯤 난처해진건 차창을 내리고 돈을 내민 녀자였다.

차안에서 백원짜리 한장을 내민채로 앉아있던 녀자는 도저히 안되겠다싶은지 차문을 열고 내려 아이 무릎에 백원짜리 한장을 놓아주고는 다시 차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엉뎅이를 한번 비틀듯 기우뚱하던 차는 급기야 저쪽 비오는 골목으로 사라져버렸다. 착각이였을가. 그 차가 내곁을 스치는 사이 어쩐지 나는 차안에 앉아있던 녀자의 알수 없는 웃음을 보는것만 같았다.

얼떨결에 돈을 받아쥔 그 아이는 동그랗던 눈이 더구나 똥그래서 앉아 있었고 얼굴이 굳어진채로 그 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녀자는 아이의 손에서 돈을 넘겨받더니 무표정하게 백원짜리를 호주머니안에 마구 구겨 넣었다. 그리고 한숨을 풀 내쉬더니 다시 땅우에다 나무잎을 펴고 앉았다.

비는 점점 더 세게 오고 날은 흐려지는데 오늘밤 그 아이는 정말 거기 누워 잠이라도 잔단 말인가.

“낳아서 제대로 키우지도 못할거면 낳지나 말던가.”

나는 화까지 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저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괜찮은 엄마라고, 누가 뭐래도 내 아이는 튼튼한 목재로 만든 편안한 침대에 누워 수입제우유를 먹고 백설공주나 미키, 미니 도안이 또렷이 찍혀있는 예쁜 옷을 입지 않는가. 내가 어디 떠나자고 하는것 그것은 우리 가족의 더 좋은 미래를 위하는것, 종당에는 아이에게 좋은 길을 택해서 가는거라고 변명삼아 중얼거렸다.

“이상한 녀자야.”

금방 그 녀자에 대해 그런 판단을 내리고있었지만 다시 돌아본 나 자신의 몰골도 거기 비해 별로 나은데가 없었다. 맵시없는 후줄근한 티에 반바지 차림이였고 발에는 굽낮은 슬리퍼 하나를 어설프게 끌고있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비내리는 날에 나는 우산도 들지 않은 몸이였고 젖을대로 젖은 옷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있었다. 오히려 비를 가릴수 있는 처마밑에 태연스레 앉아있는 그들의 형편이 나보다 더 나아보이기까지 했다. 비줄기가 시선을 가려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암담한 이 심정이란.

여기 비내리는속에 거지가 따로 없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 방금 보아온 그 루추한 몰골의 녀자와 알락고양이처럼 더러운 옷을 입고 옹송그린 그 아이를 보는 내 마음은 흙탕물을 튕기고있는 하나의 늪으로 누워있었다. 거기 눈에 띄이는 파아란 록색 한점 보이지 않고 즐겁게 헤염치는 하얀 거위나 그우를 끼룩끼룩 날아다니는 들새는 없었다.

천국과 지옥, 그것은 구경 어느만큼 떨어져있는것일가? 하늘과 땅만큼한 거리, 너에게서 나에게로 오는 거리,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작은 골목 하나를 사이두고 마주보거나 원래부터 하나로 붙어있던것인지도 모른다.

이 골목에 들어서기직전 나는 지옥에서 왔던가 천국에서 왔던가.

나의 집이라고 일컫는 거기에는 지금 한창 재롱을 부리는 세살짜리 천사가 있다. 그러나 그 천사를 제외한 모든것은 이미 지옥이였다.

“정 원한다면 마음대로 해. 대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후회는 하지 마.”

앞으로 직면해야할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들, 이를테면 아이의 양육문제나 앞날에 대한 구체적계획 같은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남편은 그 한마디만 내던지고 전화를 털썩 놓아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나에 대한 마지막 위협인지 아니면 이제 조금씩 내가 하는 행위들에 대한 타협을 의미하는것인지 혹은 지금부터 아예 포기하고 무시하기로 한건지 좀체로 판단할 길이 없었다. 다만 전의 강경했던 태도에 비해 남편의 어투가 어느 정도 수그러든것만은 사실이였다.

이제 서둘러 준비를 해야 했다. 말이 준비지 출국에 필요한 서류도 거의 챙겨진 상태고 트렁크에 옷만 몇견지 챙기면 끝날 일이였다. 어쩌면 준비라기보다 마지막 결심 하나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잘된 선택인지는 지금까지도 모를 일이였다.

“나도 외국수속 한번 넣어볼가?”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는 아무 생각도 없이 불쑥 내던진 말이였다.

“왜 가는데?”

“돈도 벌고 세상구경도 하고.”

“너 돈 필요해?”

“응.”

“어디다 쓰려고?”

“그냥. 나도 돈이란거 한번 벌어보고싶어서 그래.”

“배부른 흥정이야. 돈이 없는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 세상구경이라는게 별거 아니거든. 어디 가나 산이고 물이고 거기서 거기지.”

그렇게 말하는 남편의 말이 일리가 없는건 아니였다. 그가 매달 돈을 꼬박꼬박 벌어서 보내주는 덕에 여직 남들처럼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어떻게 돈을 벌가 머리를 싸쥐고 고민해본적은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생각없이 심심해서 내뱉은 말일지언정 거기다 단꺼번에 찬물을 확 끼얹는 남편이 은근히 괘씸하기도 하고 또 속으로부터 부쩍 오기 같은것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후에도 심심하면 한번씩 남편을 골려줄 작정으로 외국가겠다는 말을 노래처럼 해댔다.

“외국? 외국가서 뭐하는데? 너가 할수 있는게 뭐냐 말이다.”

“뭘 하면 안되는데? 내가 못하는게 뭐가 있냐구.”

기름처럼 번들번들해서 하마트면 미끄러져 내가 상처받을것 같은 조바심에 나는 항상 개미처럼 영악스레 매달려서 남편에게 박박 대들었다.

“집에서 매일 놀면서도 비실비실 하는 주제에 어디 가서 돈을 번다고. 그냥 가만히 집에나 들어앉아있어요. 네? 속 좀 태우지 말고.”

우리는 사흘이 멀다하게 전화에 대고 그렇게 티각태각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심심풀이로 내뱉은 말이였지만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고 아무렇지도 않던 생각 하나가 점점 조용해있던 내 마음의 모퉁이에서 빠꼼빠꼼 머리를 치켜들고 자라날줄이야.

원래부터 혼인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쌓인 울안이라고 했다. 나는 어쩌면 그안에서 애써 발돋움하며 가지를 뻗는 한그루 나무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높이 올라가 꽃을 피우고싶던것은 어쩌면 담장밖의 낯선 세상과 좀더 넓어보이는 하늘이 그리웠던 까닭이였으리라.

내가 임신한 소식을 알기 바쁘게 남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한답시고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워낙 타향에 나와있다보니 사람도 그립고 또 임신한 몸이라 한창 남편의 보살핌이 필요할 때 그렇게 떠나보낸다는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이처럼 철없이 남편을 잡고 늘어질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두사람이 같이 직장을 다니고 그만한 봉급이면 적은건 아니라지만 집을 산 대출도 매달 2천원어치 은행에서 빠져나가고 또 래년에 집을 받아 인테리어하고 가구를 들여놓자면 당장 많은 돈이 필요한건 사실이였다. 더구나 이제 아이까지 임신했으니 오라잖아 나도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아이가 태여난후 분유며 기저귀며 거기다 아줌마까지 청하면 생활비만 해도 대충 3천원은 필요했다. 거기다 전기세며 통신비, 가스비까지 합하면 매달 지출이 6천원은 헐히 넘는것이다. 그래서 여직 굴레벗은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먹고 쓰고 철없이 굴던 우리는 어느날인가 서서히 신경이 조여지기 시작했고 이리저리 고민하다 방법없이 선택한것이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가는 길이였다.

같이 있을 때는 티각태각 싸움도 잘하고 세상에 저런 원쑤가 더 없을것 같았지만 정작 떠나보낸다니 생사리별이라도 하는것처럼 어리석게 눈물이 찔끔찔끔 났다. 공항에서 남편을 바래고 돌아설 때는 왜 그렇게도 눈물이 나던지. 리별이 두려운것은 어쩌면 그것이 주는 아득한 거리감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있었다. 어쩌면 돌아서서 걷는 순간 우리는 서로 남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이 처음부터 내 마음을 힘들게 했다.

처음 외국으로 떠나는 남편은 원래 생활절주가 빠르고 살기도 힘들다는 그 섬나라에서 한 고생이 오죽했으랴만 매일 집에서 eld굴다싶이 하는 내 생활도 결국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다. 비록 남편이 떠나기전 나를 돌본답시고 아줌마 한사람을 청해다놓긴 했지만 그때부터 너무 많은것들을 혼자서 극복해나가야 했다. 배가 불러오면서 저녁마다 다리에 뻣뻣하게 쥐가 오를 때 으윽- 하고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서는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그때 다리를 한번 주물러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줌마는 아줌마대로 저쪽방에 엎어져 쿨쿨 잠이나 자고 나는 나대로 가까스로 장문을 짚고 일어나서는 저려나는 다리를 쩔뚝거리며 방안을 걸어다녀야 했다. 그리고 숨이 턱턱 막히는 더운날 갑자기 쓰러질듯 현기증이 날 때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산소흡입기를 찾아 코구멍에 갖다대고 헉헉 거친숨을 몰아쉬야 했다. 그리고 출산도 남들보다 몇배는 더 힘들었던것 같다. 남들은 주사 한대 놓고 반시간만 힘을 쓰면 어떻게 낳는지도 모르게 아이가 쑥 빠져나온다더니 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침에 산실 들어간것이 오후 두시가 넘어서야 겨우 아이를 낳았으니 말이다. 그 기나긴 여섯시간너머의 진통시간을 혼자서 완성해가면서 나는 그때 가족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이렇게 힘들 때 내 가족은 어디 있을가. 내 남편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가. 그리고 어쩌면 가족이 없이 이제 나는 혼자 남부럽지 않게 살수도 있을거라는 그런 건방진 생각마저 없지 않았다.

다행스러운건 태여날 때 조금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아이가 그후로 별탈없이 무럭무럭 자라줬고 하루가 다르게 오관이 또렷하니 이쁘게 번져져서 얼마나 마음이 흐뭇한지 모르겠다. 문제는 나자신이였다. 육아로 인한 과도한 체력소모때문인지 심신이 점차 지쳐가기 시작했고 밤마다 실면, 급기야 신경쇄약의 모든 증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던것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직 눈으로 한번도 직접 본적이 없는 아이를 너무나 끔찍스러워했다. 그는 매일매일 전화를 걸어와서는 아이에 대해 물어보고 아직 말귀도 못알아듣는 아이을 안아다 기어코 전화를 받으라며 억지를 부렸다. 어쩌다 아이가 애앵 하고 작은 소리라도 한번 내지르면 그는 목소리가 자기자신을 닮아 너무 맑고 우렁차다며 대견스러워했다. 처음에는 그 모든것이 아이의 아빠로서 당연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그는 그러한 방식으로 눈앞에도 없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베푸는것이라고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도때도없이 울려오는 그 전화에 점차 짜증이 나기 시작하고 어떤때는 집에 있으면서 일부러 때르릉때르릉 울리는 전화를 빤히 내려다보며 받지 않는 그런 고약한 행위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언제나 아이가 첫째였다. 건성으로 나에 대한 안부를 물어오기도 했지만 수화기 저쪽에서 전해오는 그의 목소리에서 나는 티끌만한 애정도 느낄수가 없었다. 오로지 감사한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남편이 꼬박꼬박 벌어서 보내오는 생활비였다. 그 돈은 은행대출을 물고 아이의 우유와 기저귀, 물티슈를 사고 아줌마 봉급을 주고 그외 생활비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그의 수입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러나 얼핏 짐작해도 그가 매일 출근하는데 비하면 그것은 단순 그 수입의 오분의 일이나 륙분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그는 따로 돈이 필요한 경우가 있거나 별도로 저축을 하고있는 모양이다. 그의 안해로서 그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알 권리가 있는지 여부에 대해 고민하다 말고 나는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고 살기로 했다. 적어도 나는 집에 있으면서 먹고 살 걱정을 안해도 되지 않는가. 남편은 어렵게 돈을 벌고있다고 그 돈으로 가족을 먹여살리고 그에게는 자기가 번 그 돈을 마음대로 지배할 그만큼의 권리가 있는거라고. 오래동안 집에 있으니 정말 사유도 꽉꽉 막히고 그만큼 마음 역시 비겁해지는수가 있는가보다.

생활은 그렇게 조금 갑갑한속에서 무난히 흘러가고있었는데 어느날 같지도 않은 일 한가지로 불똥이 튕기게 되였다.

내가 있는 지역 동창들이 모임을 해서 거기 한번 참석하게 되였는데 워낙 오래된 친구들이고 어쩌다 한번 만나다보니 3차, 4차까지 모처럼 좀 거창하게 놀아대기 시작했다.

저녁 늦은 시간 집으로 들어서니 그때까지 잠도 안자고 기다리던 아줌마가 “야단났소. 애 아빠가 화가 나서 전화가 열두번도 더 왔소.” 하며 눈치를 살피는것이였다.

“몇년만에 한번 나간걸 갖고 참. 지가 뭐 어쩔건데.”

술까지 얼근하게 되고 그러잖아도 평시 쌓인게 좀 있는지라 나도 그날은 큰소리부터 나갔다.

아니나다를가 집에 도착한지 몇분도 안되여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고 통화가 이어지는 순간 고래고래 소리부터 질러오는것이였다.

“너 미쳤어? 애 놔두고 나가서 이제 들어온단 말이야? 애비도 옆에 없는데 에미가 그 꼴이야?”

“동창모임 갔다. 왜? 넌 동창도 없어?”

그러고는 탕! 하고 전화를 놓아버렸다. 전화는 다시 미친듯이 울리기 시작했고 화가 난김에 전화선까지 쭉 뽑아던진 나는 나대로 침대우에 벌렁 누웠다.

한참 씩씩거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가를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 남편과의 불화에서 온 설음뿐이 아니였다. 동창모임에서 받은 상처들, 어느 녀자든 나보다 젊고 이뻐보인다는 그런 절망스런 느낌에서 터져나오는 슬픔이였다. 누구는 박사학위를 탔소, 누구는 대학강사요, 누구는 무슨 회사를 차렸고 누구는 서구 어느 번화가에서 전시회까지 가졌소. 동창모임은 상상밖으로 살벌했고 다시 돌이켜보고싶지도 않을 정도로 마구마구 소름이 끼쳤다.

삼심대에 와서 잃어버린 이십대의 꿈, 나는 내가 지망했던것과 내가 즐겨서 하던 그 많은것들을 생각했다. 왜 나는 이렇게 초라해지고 꿈도 리상도 없는 녀자로 살고있는것일가. 그 생각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냥 이대로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주저앉아 생활할수는 없다. 불확실한 미래는 이미 열려져있고 남편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서 갖다준다고 쳐도 그의 마음이 여전히 나한테 묶여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설령 그 바줄 하나를 아직 그가 거머쥐고있다고 해도 다른 곳을 향해 은바줄을 던졌는지 금바줄을 던졌는지 그것은 내가 모르는 사실이 아닌가. 나는 내 살궁리를 해야 하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해야 하고 내 인생을 스스로 구축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내가 아직도 잘할수 있는 일, 내 생애 반전을 가져올수 있는 일이 구경 뭐가 있을지 생각을 굴리기 시작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잘한다는것은 공부밖에 없었다. 학교다닐 때는 수재로 불릴만큼 성적이 월등했던것이다. 비록 여차여차해서 어중간한 대학 하나를 마치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긴 했지만 아직 공부에 많은 미련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학교때는 싹수 보이는 문학도로 주목되지 않았던가. 문학을 하고 학문을 닦자. 어느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좋은 일이지만 그런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해도 몇년만 이를 악물고 고생하면 학벌도 따고 이후 어디 취직을 해도 지금보다 훨씬 쉬울것이다. 적어도 연구생이나 박사라는 금테를 한번 휘드르고 다니면 어디 나가서 지금 이 정도로 무식하게 보이지는 않을것이다.

그래서 혼자 계획한것이 한국으로 류학을 떠나는 일이였다. 우선 거리가 가깝고 언어도 통하고 비용도 싼편이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비해 비자도 쉽게 발급받을수 있다는것이 그 리유였다. 내가 한국가겠다는 말을 꺼내기 바쁘게 남편은 미쳤다고 펄쩍 뛰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반응은 애초부터 예상했던바이고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당장 떠나갈듯 길길이 날뛰다가도 돌아서서 해쭉해쭉 웃는 아이를 보면 또 마음이 한결같이 무너져내렸다. 내가 이 어린것을 두고 무슨 짓을 하는가싶었던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한 아이의 엄마가 아닌가. 나 하나 편하게 살자고 아이를 버리고 떠나다니. 그러는 내 자신이 참 독하고 잔인하게 생각되였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가는 방향을 이제 와서 다시 되돌릴수도 없고 남편이 일본에서 몇년간 지내다 어떤 몰골을 하고 돌아올지도 모르는판에 그냥 이대로 주저앉을수는 없었다. 그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 나도 무엇인가 해야 하고 또 기어코 뭘 이뤄내고 말것이라는 그런 강박관념b같은것이 이미 내 마음속에 자리를 틀고 앉은것이다. 그것은 부부간의 평등을 위한것이라기보다는 각자 평행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필요한 수단이였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평행이 깨지면 모든게 깨지기 마련이고 거기에 가정의 화목이나 남녀간의 평등 같은건 운운할 여지도 없는것이다.

내가 한국행을 결심하자 바빠난건 남편이였다. 그는 얼리고 닥치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이미 떠나기로 작정한 내 마음을 돌려세울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이상 방법이 없었던지 몇달에 거친 팽팽한 대립끝에 오늘 끝내 전화를 걸어와 그 한마디를 내던졌던것이다.

그럼 이제 나에게는 가는 일만 남았는가? 골목사이로 올려다보이는 하늘은 어쩐지 침울하고 보는이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미친것처럼 우산도 없이 비오는속을 걸어다니니 마음만은 그래도 한결 시원해나고있었다.

어쨌든 잘된 일이였다. 이제 내가 떠나가는 일은 결정되였고 준비를 해서 떠나면 그만인것이다.

그로부터 한달후 비자가 발급되였다.

원래는 인차 떠나려고 했지만 아이의 생일도 한달밖에 안남았고 5월쯤 날씨가 따뜻할 때 아이를 북방에 있는 시부모님께 데려가는게 좋을것 같아 당분간 더 집에 남아있기로 계획했다.

그쯤 전화통에 불이 나게 걸려오던 남편의 전화가 이외로 뜸해졌다. 무슨 일이 있는걸가? 아니면 내가 기어코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단단히 화가 난걸가?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번꼴로 전화가 걸려오긴 했지만 웬지 모를 서먹함 같은것이 우리들사이에 쌓여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달리고 또 달려도 서로 닿지 못할것 같은 그런 거리감 같은것이.

평소보다 낮고 지친듯한 그 목소리가 한순간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자칫하면 그것은 가련한척 내 발길을 묶기 위한 위장이라고 조금만 마음이 약해지면 다시 또 그 지겨운 일상으로 돌아가 남편 하나에 아이 하나 바라보고 살아가야 한다고 나는 마음을 독하게 다지고 또 다졌다. 아이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것,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녀자의 일생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가. 사랑한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생명체로서 나는 내 사유가 있고 내 공간이 필요하고 스스로 가야할 길이 따로 있는 법이다. 나는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피흘리고 싸우고 죽을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내 인생 송두리째 그 아이에게 내놓을수는 없는것이다. 나는 나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선 알아야 하고 하나의 완정한 내 인격체여야 하며 나는 내 자신의 삶을 살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것이다. 집구석에 앉아서 매일 그렇게 신경질이나 바락바락 쓰는 추한 몰골을 바라보며 내 아이가 우울하게 자라나기를 나는 원치 않았다. 내 찬란한 래일은 어차피 내 아이의 현란한 미래와 이어져있지 않는가.

떠난다고 작정한 그날부터 나는 아이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기 시작했다. 우유를 풀면서 과일로 이유식을 만들면서 시시각각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고 나는 정말로 아이가 미워서 떠나는것이 아니라 더 잘 살기 위해 떠나는것이라고 부단히 내 행위에 정당성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울지 않고 의기양양하게 떳떳이 떠나갈수 있을거라고 믿고있었던 것이다.

그쯤 계절의 녀왕이라 불리우는 5월. 꽃은 사처에서 흐드러지게 피여나고 이제 곧 떠날 준비가 되여있는 내 마음의 고뇌와 쓸쓸함마저 따뜻하게 녹여내릴것 같은 따뜻한 그날. 나는 정성껏 아이를 위해 생일상을 차렸다.

아이는 케익우에서 한들거리며 춤추는 초불을 보며 캐드득 웃고 나는 어쩌면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 될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항공사에 련락해서 고향으로 가는 티켓을 끊고 슬슬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비가 거의 끝날 무렵 나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오후였다. 쏘파에 가만히 앉아있는 나는 갑자기 어지름증이 나면서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북경에 있는 친구한테서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너네 거긴 괜찮아?”

“괜찮은데. 갑자기 왜?”

“여긴 지진이 일어난다고 란리법석인데. 다들 바깥으로 피난가고 난시야.”

“뭐? 지진?”

“아무튼 비상에 걸렸어. 조심하라고.”

그때까지 나는 그것이 친구의 장난인줄 알았다.

이튿날에야 사천 원천에서 7.8급 대지진이 일어난것을 알았다. 2008년 5월 12일 14시 28분. 그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수 없었던 그런 인류의 한차례 대재앙이였다. 수려하던 산간도시가 순식간에 페허가 되고 수십만채의 가옥이 쓰러지고 수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갔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여직 경험해보지 못한 슬픔과 공포, 그리고 절망을 느꼈다.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 이 땅덩어리에 언제 다시 커다란 재난이 덮칠지 누구도 정확히 예견할수는 없는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은 때로는 정말 한장의 종이장과도 같이 쉽게 찢어질수도 있는 법이구나.

그후부터 본시 우울해있던 나는 가뜩이나 침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전의 내 불안함과 일상속에 물결처럼 이는 비애 같은것이 단지 내 생활의 한부분이였다면 다만 그것은 하나의 작은 박스와도 같이 어디서 와서 어디에 놓여있는지 정체성을 가늠할수 있는것이였지만 지금은 아니였다. 인생 전체에 대한 허탈함, 지금 숨쉬고있는 이것이 구경 무슨 의미가 있고 또 언제 어떠한 형체로 무너질것인가, 모든게 허무하고 불안스러웠다. 시시각각 땅바닥이 쩌억- 갈라지고 하늘에서 갑자기 거대한 무엇이 떨어져 한순간에 모든것을 훼멸할것 같은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5월초로 떠나려던 내 계획은 6월이 되여도 시행하지 못한대로 있었다. 현실에서 도망가려던 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것은 단순히 그 한차례 재난이 주는 거대한 충격만은 아니였다. 어쩌면 한번 이렇게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다시 돌아와도 어떠한 변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다만 내 아이를 품속에 꼭 끌어안고 있을 때라야 잠간이나마 안도의 숨을 내쉴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쯤 마침 방영된 지방 TV뉴스에서 어떤 환자의 얘기를 들었다. 시복리센터에서 오갈곳이 없는 두 모자를 수용했는데 그들은 거기서 제공하는 복리를 마다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것이다. 그리고 며칠뒤 다른 지역의 복리센터에서 또 그들을 받아들였지만 역시 사라졌다는것이다. 조사결과 아이의 엄마는 심한 정신적질환을 겪고있었고 그녀가 그 모든것을 마다하는 리유는 하나, 무조건 자기 혼자힘으로 아이를 키운다는것이였다.

텔레비죤화면에서 언뜰거리는 둬달전 골목에서 봤던 그 녀자의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쏘파우에 쓰러지고말았다. 그때 끊임없이 자책하며 울었다. 내가 어디로 간다고. 어린것을 두고 내가 구경 어디로 간다고.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 다음주 중국 들어가.”

남편도 원천지진을 통해 무엇을 느낀것일가? 떠나갈 때 5년을 계획하고 갔는데 그 기간도 못채우고 갑자기 돌아오려고 한 용의는 무엇일가? 그래, 가족끼리 같이 있는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인생을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남편에 대한 모든 원망들이 그 시간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외독자로 태여나서 곱게 자란 남편이 거기 섬나라에서 한 고생인들 오죽했으랴. 일본 가있는 먼 친척들, 혹은 오래만에 만난 친구들이 쉬쉬하면서 흘러낸 얘기들, 얼굴이 동그랗고 쌍겹눈이 정기도는 녀자와 같이 있는걸 봤다는 소문들, 그러나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든지 그는 여전히 나의 남편이고 내 아이의 아빠고 이 집으로 돌아오면 그만인것이다.

정작 돌아온다고 하자 멀어진줄 알았던 남편이 갑자기 지척에 느껴졌다. 밤이면 밤마다 꽉 품어주던 그 갈비대 엉성한 여윈 품을, 베란다에 맴돌던 그 남자의 담배냄새를 나는 그리워하기 시작했던것이다. 모든것은 신기하리만치 원점으로 돌아가고 나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처마밑 제비둥지처럼 보기에 까칠하던 내 둥지가 이리 좋은것인줄을. 이젠 누가 나가라고 내쫓아도 이 보금자리를 그리 쉽게 떠날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하면 집이란것은 결국 누구 한사람이 없어도 집 같지가 않았다. 집이라는 풍경은 출렁이며 흐르는 강이 있어야 하고 그 변두리에 서걱이는 갈대밭이 무성해야 했다. 그 강밑으로 자갈들이 어여쁘게 깔려야 하고 바람도 심심찮게 불어줘서 쏴쏴하며 물소리가 나야 했다. 그 누구 한사람만 떠나가도 강은 강 같지 않게 바닥이 다 드러나고 흩어진 모래가 되는것임을.

7월 5일. 남편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날이라 공항으로 남편을 마중갔다. 한번도 아빠를 본적 없는 아이는 량쪽으로 땋은 머리태를 짤랑이며 저만치 앞서서 달려갔다. 일본이란 나라가 남편을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시켰을가? 어쩐지 머리는 좀 길게 길렀을것 같았고 일본이 일본인만큼 얼굴에는 기름기가 흐를것 같았다. 그리고 유연한 미소를 머금고 빛뿌릴것 같은 눈빛. 어쩌면 생전 본적 없는 그런 모습일지도 모른다. 거기서 류행하는대로 머리에 살짝 칼라팅도 했을것이고.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안내음과 함께 손님들이 입찰구로 하나 둘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워낙 급한 성격이라 선두에서 빠져나올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반시간쯤 기다렸을가 기다리다못해 이제 막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언뜰거리는 눈익은 모습이 보였다. 남편이니 그 많은 사람들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지만 눈에 비쳐진 남편의 모습은 이외로 여위고 초라한 모습이였다. 웬지 모르게 그 순간 가슴이 무너질것 같은 그런 충격이 느껴졌다.

-무슨 일, 대체 무슨 일이야.

남편이 앞으로 다가오는것을 의식하며 굳어지는 표정에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이한테 아빠를 소개시켰다.

“아빠야, 인사해.”

“내 딸.”

남편은 아이를 안아올려 얼굴을 마구 부볐다.

“으응. 싫어-”

그렇게도 아빠타령을 하더니 정작 눈앞에 다가오자 낯설고 거부감이 느껴졌던지 아이는 내쪽으로 몸을 돌리며 이잉- 하고 못나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잖아. 아빠.”

될수록 부드러운 어조로 아이의 정서를 완화시키려던 남편은 그러나 그 먼저 눈가에 이슬 같은것이 맺히고있었다.

“대체 무슨 일 있었던거야. 사실대로 얘기해봐.”

저녁 아이가 잠든 뒤 남편을 밖으로 불러내였다. 아무말도 안하고 고개를 숙이고있던 남편은 두손으로 머리를 싸쥔채 허걱, 허걱 소리를 죽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처음 가서 제법 순리로왔던 남편은 한동안 돈도 벌고 꽤 잘나가는 편이였으나 1년전부터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던것이다. 원래 위가 안좋았던 남편은 거기서도 가끔 심한 진통을 느끼기는 했지만 단순한 위경련인줄 알았는데 얼마전 갑자기 참을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병원에 가보니 당장 수술을 받을 정도로 위상황이 악화되였던것이다. 그래서 거기 천문수자 같은 의료비가 두려워 급기야 중국행을 택했던것이다.

남편이 넘겨주는 돈은 예상외로 적었다. 대충 계산해보니 그동안 중국에 있는 나와 딸아이의 생활비를 해결한외에 일본 나가면서 진 빚을 갚고 그외에도 어느 정도 여유가 남아있긴 했다. 잘 버티면 명년까지 세 식구의 의식주는 해결될듯 하나 우선 당장 남편을 병원에 입원시켜 수술하고 치료를 받아야할 상황이였다. 원래는 좀 더 많은 여유가 있어야 하는것이 뻔한 사실이지만 그야 일본에 있으면서 따로 썼을것이고 지금 남편이 아파서 돌아온 상황에 그것까지 물어본다는것도 현실적이 안되는지라 그 일은 그냥 모르는척 넘어가고말았다.

며칠뒤 남편이 위수술을 받고 고향에 있던 시부모님이 남편과 아이를 보살피러 서른시간의 기차를 타고 우리가 사는 도시로 찾아왔다.

전번에 발급받은 사증 유효기간이 사흘정도 남아있는 날, 나는 대충 짐을 챙기고 공항으로 나갔다. 나의 한국행이 드디여 현실로 이어진것이다.

북경올림픽을 한달정도 앞둔 중국은 어디 가나 활력이 넘치고 공항의 질서도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듯싶었다. 젖어드는 내 눈가로 바람에 나붓기는 나무잎처럼 무수한 기발이 스쳐지났다.

“2005년쯤 우리가 서른살이 될 때 너를 북경으로 초대할게.”

“언젠가 북경에서 올림픽이 열릴거야. 우리 VIP좌석에 앉아 개막식 보자.”

“나 북경에서 널 기다리고있을게.”

20세기가 저무는 어느날 나에게 맹세했던 잘생긴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이 시간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오른것일가. 마음이 씁쓸해나고있다. 스무날 남자가 했던 그 맹세는 이미 20세기 어느 찬란한 언덕우에 하나의 오르골로 묻혀있다. 춤사위를 멈추고 소리를 영 잃은채. 그에 비하면 그래도 아픈 몸으로 돈을 벌어 내곁으로 돌아와준 남편이 내겐 훨씬 소중한 존재라고.

비오는 날 젖은 나무가지를 안고 허둥지둥 달려가던 녀자, 지금 내 뒤모습이 그녀를 닮아있는건 아닐가. 나는 어느새 나를 보듬어안던 담장밖을 나서고있었고 온몸 삐죽삐죽 낯선 공기를 헤가르며 가지들이 쭉쭉 뻗어 오르고있었다. 흔들리는 내 나무의 뿌리, 뒤돌아보니 남편이 맥없이 손을 휘젓고있었고 아이가 엄마, 엄마 발버둥질하며 이악스레 울어대고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크게 한번 웃어주고 고개를 숙여 입찰구로 들어섰다. 돌아서는 찰나, 내 얼굴 거기서 몇급 바람이 불고있었을가? 어쩌면 내 아이와 내 남편이 당장 쓰러질지도 모를.

-기다려. 돈 많이 벌어갖고 올테니. 우리 꼭 남들보다 잘 살아. 기다려, 조금만 더 기다려…

2008년 7월, 더위가 한창인 계절에도 떠나가는 그 날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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