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문학특집

▲ 작가 최영
1

나는 심술부리듯 은유한의 방문을 사정없이 두드려댔다.

“은유한, 문 열어!”

“씨발, 안유이 너 뭐야?”

하얀 피부와 상반대색인 올검은색 팬티 한장 달랑 입고는 부시시한 머리를 만지며 은유한이 문어구에 나타났다.

“니 뭐냐고 또, 니네집엔 휴지가 없냐? 쳐올 때마다 꼭 여기로 겨오지, 엉?”

“흑… 흑… 친구가 우는데 들어오란 말은 못할망정…”

그때에야 은유한의 눈길이 나의 눈물 흐르는 얼굴을 직시했다.

“전번처럼 옆집똥개 죽었다고 울고불고 지랄쓰면 죽을줄 알어!”

이젠 이런 내 모습에 넌덜머리가 난다는듯 유한이는 피곤한 얼굴로 문어구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유한아! 나 어떡해, 또 남자한테 차였어!”

난 코를 씰룩대다 끝내 설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유한의 알몸에 퍽 안겨버렸다.

“야야, 기지배가 진짜 나 옷 안입은거 안보여? 너 눈물은 몰라도 코물 묻히면 진짜 뒈질줄 알어?”

“너 짜증나! 씨. 우유나 줘! 알지, 딸기우유?”

“아! 잠 확 깼네! 씨!”

맨날 딸기우유 딸기우유 하며 생떼를 써대서 유한이는 이젠 자기네집 랭장고에 헬수도 없을만큼한 딸기우유를 준비해놓고있다.하긴 뭐 내가 우리 집보다 혼자 사는 은유한 집을 더 들락날락해대니 그럴만도 하다. 그리고 그 넘쳐나는 돈을 이 빈곤하게 살고있는 친구한테도 좀 섬겨주며 그렇게 살아야지. 은유한 말이라면 다 옳다고 오냐오냐 하는 우리 부모님들은 내 소비가 너무 든다며 날 아주 은유한한테 떠맡기다싶이 하고 사신다. 그래서 이젠 3년씩이나 은유한한테서 얻어먹고 얻어쓰고 가끔씩 얻어자기도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은유한은 돈이 넘쳐날 정도로 많다. 진지하게 말하는건데 정말 많다. 그래서 친구 하난 잘둔셈이다.

“근데 너 언제 갈건데?”

딸기우유를 촐싹촐싹 마시고있는 나를 유한이는 시큰둥한 눈으로 째려보며 물었다.

“몰라, 그냥 자고 가지뭐. 어차피 래일 일요일인데…”

“누구맘대로? 오늘은 안돼, 나 약속 있어.”

“누가 뭐래? 넌 니일 봐. 나 혼자 놀수 있어.”

“병신아, 눈치도 없냐? 집에서 약속있다고, 녀자!”

“뭐? 녀자? 이 색마 같은 자식, 너 집엔 녀자 불러들이지 말랬지!”

“내 집에서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니가 왜 참견이냐?”

“싫어!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집 들어가기 싫단 말야. 그냥 나 신경쓰지 말구 있음 안돼?”

“시끄러! 빨리 꺼져.”

“쳇, 그럼 나 딸기우유 세개만 줘!”

“야, 다 갖구가!”

철컥! 나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오며 은유한한테 밉지 않은 욕을 퍼부었다.

바람둥이 같은 자식. 그잘난 면상 하나 믿고 녀자들을 아주 꿰차고 다니는구나. 겨우 19살밖에 안된 주제에.

 

7시를 알리는 알람시계에 발딱 몸을 일으키고 습관처럼 거울부터 쳐다본다.

오늘은 어쩐지 기분도 말째다. 얼른 샤워를 마치고 머리도 말리고 꽤 빠른 시각에 학교로 향했다.

이 시간쯤이면 뻐스에 사람이 적겠지 하고 혼자 들까불며 뻐스에 몸을 실었다.

마침 뻐스안에 댕그랗게 홀로 앉은 한반의 한슬이가 보였다. 우리 반의 수재다.

“한슬아.”

나는 마치 구성이나 만난것처럼 엎어질듯 그쪽으로 몸을 옮겨갔다.

“유이구나.”

“또 공부해?”

나는 그의 손에 쥐여진 책을 내려다보았다.

“응, 래일부터 시험이잖아.”

“무슨 시험을 또 쳐? 누가 그래, 언제 말했는데, 왜 난 몰라?”

“전번주에 담임선생님이 말했어. 너 그때 빅뱅 노래가사 베끼고있었어.”

“아, 미쳐. 어떡해. 넌 좋겠다, 공부 잘해서.”

“그러니까 평소에 공부 좀 해. 이번 시험은 내가 간단한거 찍어줄게.”

“뭐? 정말이지?”

“응.”

“고마워, 한슬아.”

그나마 한슬이라도 있기에 시름이 좀 놓였다. 요번 시험까지 망치면 울 엄마 이젠 용돈조차 안주실텐데. 이 순간 한슬이가 이렇게 고마울수가 없었다. 나는 수많은 객들의 눈길을 제쳐놓고 한슬이의 볼에 쪽을 해주었다.

학교대문에 가닿았는데 마침 가방을 질질 끌며 등교를 하는 은유한이 보인다.

“은유한!!”

날 보는 은유한도 씩 웃었다. 옆을 지나가던 가시나들이 이 광경에 아주 쓰러질려고 했다.

“안유이, 나 방금 무슨 일 있었는지 아냐?”

“무슨 일?”

“내가 어딜 봐서 그 자식이랑 닮았다는건데, 내가 훨배 낫지”

“뭔 소리야?”

“글쎄, 아침에 등교하는데 말야. 어떤 기지배들이 나보고 싸인해달라는거야. 한국스타 강동건 닮았다고.”

“걔네 눈 삐었대?”

“그러게, 전번엔 동방신기 김재중 닮았다고 달려들더니 오늘은 또 강동건이냐? 허참.”

그리고는 벙어리 례단받은듯 코노래 즐겁게 씨엉씨엉 걸어갔다.

“잠간!”

“왜 또?”

“나 딸기우유 사줘.”

“또 시작이냐? 집에 와글와글한데 뭘 또 사?”

난 막무가내로 사람 많은데를 제일 싫어하는 은유한을 온 힘을 다해 소매점으로 끌고들어갔다. 그러는 우리를 녀자애들이 두눈을 올롱하게 치켜뜨고 바라본다.

“와, 은유한이다. 정말 멋지지 않아? 남자피부가 어쩜 저래? 우린 뭐야.”

“또 안유이랑 같이 있어. 은유한 말야. 딴 녀자애들이랑은 말도 안한다던데”

“쟤는 은유한 무섭지두 않나? 난 무서워서 말도 못거는데.”

“근데 이상해, 안유이한테만 좀 특별한거 같지 않아?”

“맞아. 잘 웃어주고 잘 놀아주고. 쟤랑 있을 땐 딴사람 같아.”

난 끝끝내 유한한테 칭얼거려 딸기우유 두개를 얻어마시고 나란히 교실로 들어와 앉았다.

여전히 교실 분위기는 은유한이 등장하자마자 조용해져버렸다.

녀자애들은 옷맵시와 머리를 만져대느라 분주하고 남자애들은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걸 잊지 않는다. 어떤 계집애들은 질투의 눈길로 나를 째려보기도 했다.

“은유한, 너 래일 시험인거 알아?”

“알지.”

“나두 아침에야 들었어. 어떡하니?”

“그러게 공부 좀 하지.”

싱겁게 내뱉는 유한이의 목소리가 등에 와 맞혔다.

 

드디여 시험날이 다가왔다. 쓸데없는 학교규칙때문에 매일마다 교실위치를 바꿔야 하는 상황이여서 오늘은 한슬이와 떨어져 혼자 다른반으로 가서 번호표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운도 없이 옆자리에 은유한이 턱하니 앉아있었다.

“왜 너야? 공부 잘하는 애였음 베낄려고 그랬는데. 오늘도 망했구나.”

드디여 시험이 시작되고 수학에 제일 자신없는 나는 대충 찍어버리고 책상에 골을 박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은유한은 뭘 그렇게 많이 써내려가는지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시험지를 내려다보며 골몰하고있었다.

얼마나 잤을갉 스물스물 일어나 시계를 보니 아직도 반시간이나 남았다. 이젠 자는것도 힘든데.

드디여 지루한 시험이 끝났다. 은유한은 연신 날 쳐다보며 기분 나쁘게 피식피식 웃었다.

다음은 력사시험이였다. 문과엔 조금 신심이 있어서 줄줄 써내려가고있는데 은유한이 옆에서 핸드폰으로 유희를 놀고있었다. 난 그가 컨닝할가봐 손으로 시험지를 꽁꽁 막고 답안을 써내려갔다. 모두들 재수없어하는 그 짓을 내가 지금 하고있었던것이다.

흐지부지 찍어버린 하루시험이 다 끝나버렸다. 이제 자유다! 항상 시험이라면 풀이 죽어 낑낑거리기만 하다가 시험이 끝나고나면 십년 묵은 변비가 쑥 가라앉듯이 속이 시원해진다.

후련해진 속도 풀어볼겸 은유한과 순대집에 갈 생각으로 유한이한테 전화걸려는데 한반의 허경희가 슴슴한 얼굴로 다가왔다. 경희뒤에 처음보는 애들이 몇몇이 따라왔다. 나는 허경희가 은유한한테 련애편지를 썼다는 사실도 알고있었다. 해반주그레한 경희의 얼굴이 오늘따라 좀 가련해보였다.

“잠간 나 좀 봐.”

“그래. 근데 니뒤에 있는 애들 우리 학교 애들 아니지?”

그때까지 난 상황파악을 못하고 허경희에게 낮게 속닥거렸다.

“아냐, 우리 자리 옮길래?”

“그러지뭐.”

허경희가 조용히 날 데리고 어느 조용한 길어구로 들어갔는데 거기엔 언젠가 억울하게 뺨 한대 내줬던 은유한의 녀자친구도 보였다. 난 직감적으로 무슨 일인지를 뒤늦게 깨닫고 허경희를 또렷이 쳐다봤다. 허경희는 반에서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이도 아니였다.

“허경희, 너 저런 애들이랑도 어울려 다녔니?”

내 말은 무시해버리고 허경희는 내게로 한발짝 더 다가왔다.

“안유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너랑 은유한 정말 그냥 친구사이 맞아?”

“무슨 소리야.”

“수학하고 화학 말야! 너 자고있을 때 니 시험지 가져다 풀어주더라.”

드디여 참고있던 분노가 폭발했던지 허경희는 소리를 꽥 질렀다.

“은유한이 내 시험까지 다 풀어줬다고? ”

“이 기지배 끝까지 아닌보살 떠는것 좀 봐! 넌 지금 이 상황이 장난 같이 보여?”

순간 허경희의 손이 내 볼에 와 맞히면서 애들의 이상한 잡음에 어울려 잔인한 집단행동이 시작되였다. 내가 자기들의 절대적인 어떤 존재에 걸림돌이 되고 이런 식으로 날 짓밟아줌으로서 자기들의 체면이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애들이다. 덩치도 호리호리한것들이 힘은 왜 이렇게 좋은지 대여섯명이서 마구 밟고 차고 하는데 아주 사지가 분리되는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흐드러지게 만신창이 되고말았다. 입술을 아무리 꽉 깨물고있어도 신음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갉

“야! 그만 좀 해라. 무슨 일땜에 불쌍한 애 이렇기 패냐?”

그러면서 나를 보려고 고개를 살짝 트는 남자의 눈과 내 눈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언젠가 어디서 본적있는 3반의 서진후였다. 멋진 인상을 주었던 애다.

“서진후, 너 아는 애야?”

허경희는 나와 서진후를 의아한 눈으로 번갈아보았다.

“아는 애다. 적당히 하구 꺼져.”

계속 조용히 서있던 서진후뒤에 섰던 친구로 보이는 애가 손동작까지 해대며 사라지라고 재촉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허경희는 낯이 벌개지더니 슬며시 입술을 깨물며 나를 쏘아보더니 다른 애들까지 데리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왜 맞구 있었냐?”

서진후는 허경희네가 사라지자 나를 돌아보았다.

“몰라두 돼.”

나는 창피해진 얼굴을 들지도 않고 땅에 떨어진 책가방을 주어들었다.

“기껏 구해줬더니.”

“고마워.”

“혼자 갈수는 있냐? 이후부턴 좀 조심해라.”

“응, 고마워.”

서진후는 나를 한번 쭉 훑어보더니 친구와 같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좔좔 흐른다. 온몸이 욱씬거리는걸 참고 그자리에 선채 멀어져가는 서진후네를 괴물 쳐다보듯 바라보았다.

겨우 집에 도착하고보니 다행히도 엄마 아빠가 집을 비우고 없었다. 흙투성이된 옷을 벗어던지고 뜨거운 물로 몸을 대충 씻었더니 잠이 막 몰려왔다. 다행히 몸을 집중적으로 때려서 눈에 보이는 곳엔 상처가 잘 나타나지 않았다. 막 침대에 누우려는데 나의 sky핸드폰이 급하게 울려댔다. 이 핸드폰은 은유한이 사준거다. 핸드폰을 받기 귀찮아서 안받으려는데 잠간 끊겼다가 또다시 요란하게 울려댔다. 액정에 유한이의 이름이 떴다. 하지만 말하기조차 귀찮아진 나는 핸드폰을 침대가에 버리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몇시간이나 잤을가. 완전히 컴컴해진 창문밖, 시계를 보니 8시가 다 돼가고있었다. 컴컴한 방안을 뒤룩거리며 배가 좀 고프다고 느끼고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또 은유한이다.

“여보세요?”

“문 열어.”

“엉? 무슨 소리야.”

“지금 니네집앞이야. 문 열라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커튼을 확 열어제끼니 핸드폰을 들고 이쪽을 쳐다보는 은유한이 보였다. 핸드폰 플립을 닫아버리고 현관문을 열어주고서 인츰 거울에 내 꼬락서니를 살폈다. 토끼잠옷에 부시시한 머리, 퉁퉁 부은 얼굴. 다행히 상처는 별로 보이지 않길래 난 안심하고 유한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꼬라지 하구는, 금방 깼냐?”

은유한이는 들어서자마자 핀잔부터 앞섰다.

“웬일이야?”

나는 하품을 하며 그대로 자리에 가서 벌렁 누워버렸다.

“부모님은?”

“둘다 안계셔, 손에 든건 뭐야?”

“통닭이다. 먹어라.”

“정말? 역시 너밖에 없어. 나 지금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난 통닭을 뺏다싶이 집어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너두 와서 먹어, 밥 먹었어?”

“너나 실컷 먹어.”

“헤헷…”

이건 진짜 내가 좋아하는 양념통닭이다. 난 닭다리부터 뜯기 시작했다.

유한이는 두리번거리다가 닭다리를 뜯는 내곁에 와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가 통닭을 절반 가까이 소멸하는 사이에 방안은 온통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야! 담배 그만 펴!!”

난 유한이의 입에 물려있는 담배를 확 뺏어서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얼른 방안에 공기를 환기시키려고 창문을 활짝 열고 페브리즈를 뿌려댔다. 웬일인지 부산하게 굴어도 유한이는 말없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너 잠간 일루 와봐.”

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침대머리맡에 털썩 앉았고 그런 나를 유한이는 계속 빤히 주시했다.

“너 입술이랑 목 왜 그래?”

유한이는 내 뒤목을 턱 잡고 턱짓으로 목을 가리켰다.

“이거? 계단에서 굴렀어.”

다른 핑게를 대려고 주춤하는 사이 유한이가 갑자기 내 잠옷을 확 들어올렸고 난 꺄악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내몸의 상처를 보고 유한이는 눈썹도 모자라 입술까지 파르르 떨었다.

“유한아, 사실말야, 아까 시험 끝나서 집오는 도중에 웬 양아치들을 만나가지구. 다짜고짜 돈부터 내놓으라는거야. 없다구 그랬더니 내 몸을 막 뒤지는거야. 그래서 신경질부렸더니 이렇게 얻어터졌지, 전화도 안받고…”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전화도 안받더란 말에 유한이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진짜냐?”

“응.”

“씨발 같은 새끼들! 대체 니가 어딜 봐서 돈있게 생겼다고. 병신 같은것들! 그래 맞구만 있었어?”

“상대는 남잔데 어떡해 그럼.”

“그 새끼 교복 봤냐?”

“래일 같이 물어보면 인츰 알게 될거다. 너 입으로 알고싶지 않으니까. 그 새끼 찾아내면 박살내버릴거야, 누구한테 감히 손을 대.”

은유한의 퍼렇게 잡힌 얼굴을 보며 나는 은유한이 내가 맞은걸 진짜로 가슴 아파한다는것을 알고 사뭇 감동되였다.

 

2

아침시간, 담임선생이 성적표를 들고 교실에 나타났다.

“조용 조용! 니들 오늘 성적 나오는 날인거 알지? 그러고도 이렇게 들떠있어? 그것보다 우리 반 허경희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몇주간 학교 못나오게 될거야.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알고있어. 지금부터 이름 부르는 순서대로 나와서 성적표 가져가.”

허경희가 사고를 당해? 무슨 일…?

“한슬아, 허경희 무슨 사고 당한거래?”

나는 내옆에 앉은 한슬이한테 궁금한 어조로 물었다.

“나도 몰라?”

한슬이도 고개를 갸웃했다.

“신나라!… 심은하!… 안혜경!… 안유이!”

긴장되는 맘을 가다듬고 성적표를 받아 천천히 펼쳐보았다.

어문-88  수학-97  화학-43  력사-70  정치-61  영어-69  물리-92  체육-90  사회-56

반 21등, 학년 230등.

“자, 다들 성적표를 보며 깨달은게 많을거다. 이번에도 우리 반 1등이자 학년 1등은 리한슬이다. 그리고 우리 반에서 높은 수학점수가 둘이나 나왔다. 한명은 그렇다치고 나머지 한명은 스스로 반성하길 바란다. 이상 끝.”

그러니까 허경희 말처럼 유한이가 내 수학시험을 대신 치러줬다는것이 사실임에 틀림없었다.

“은유한, 넌 아무튼 맘에 안드는 자식이야.”

나는 몸을 돌려 뒤에 앉은 은유한를 째려보았다. 웬지 유한이가 치러준 시험이 맘에 걸렸다.

“뭐야 또?”

유한이는 내 말에 그저 피식 웃고는 아닌보살을 떨었다.

“암튼 뭐 시험지 풀어준건 고맙다. 니 덕분에 집에서 안쫓겨나게 됐어.”

그래도 나는 그렇게 웃어주는 유한이한테 너그러움을 베풀기로 했다.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려댔다. 액정에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보세요?”

“하학하면 곧바로 집으로 와, 좋은 소식 있어.”

“좋은 소식? 뭔데?”

“와서 들어. 돈나간다, 끊자.”

좋은 소식이란게 뭐지? 나는 좋은 소식이란 말에 하학종소리 들리기 바쁘게 뻐스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들어서니 집안분위기도 나 못지 않게 들떠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이미 만개한 꽃밭이였다.

“놀라지 말구 들어. 오늘 니 아빠 국장으로 진급했어! 드디여 그 국장자리에 앉게 됐다구.”

“정말? 아빠, 엄마말 사실이야?”

“그래, 아빠 승진했어.”

“진짜 좋은 소식이네? 아빠 축하해.”

“그렇게 좋으냐? 이제 아빠가 먹고싶은거 갖고싶은거 다 사줄게.”

“정말이지? 나 컴퓨터!”

딱 하고 엄마의 손이 내 잔등을 때렸다.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냉큼 대답하니? 다 큰 애가.”

“아퍼! 19살이나 먹은 딸을 아직도 때려?”

“여보 그만해. 컴퓨터는 원래부터 사놓자 했던거잖소. 주말에 사러 가자.”

아버지의 환한 얼굴에 집안은 더욱 눈부셔졌고 분위기는 고무풍선처럼 둥둥 떠있었다.

 

점심시간.

한반의 한슬이랑 같이 학교식당에서 급식을 먹고있는데 핸드폰이 짧게 진동을 했다. 문자메시지였다. 그런데 모르는 번호였다. 액정에 그저 “야”라고 한글자만 떠올랐다. 나는 은유한이 또 장난치는거라고 여기고 그 모르는 번호에 회답을 보냈다.

“뭐해?”

“문자 보내잖아.”

“누구한테 보내는건데?”

“밥이나 먹고있어, 께끼지 말고.”

누구? 라고 문자를 보낸지 10초도 안돼서 회답이 왔다.

서진후?

나는 속으로 비렬한놈이라고 욕하면서도 신세갚음은 해야 한다고 여기며 푹 웃었다.

오늘 밥 사라고? 나 돈 없는데 어쩌지? 지갑을 열어보니 돈이 딸랑 십원짜리 한장밖에 없다. 이거로는 짜장면 두그릇도 빠듯해보이는데 진짜 어떡한담?

“한슬아! 날 돈 꿔주라, 백원만.”

“무슨 일인데?”

“저녁에 엄마가 고추가루랑 소고기랑 사오랬거든.”

“그걸 사는데 백원씩이나 들어?”

“응!”

“이젠 좀 파트 바꿔라. 어쩜 매번마다 고추가루랑 소고기랑 핑게냐? 너 전번에도 그랬었잖아.”

그러면서도 한슬이는 지갑에서 빨각거리는 백원짜리 지페 한장을 꺼내 귀찮다는듯이 내앞에 확 뿌려던졌다. 그래도 나는 한슬이가 너무너무 고맙기만 했다.

나는 한슬이한테서 꾼 백원 덕택에 근심없이 학교 끝날 때까지 버틸수 있었다. 우리 학교가 4시 반에 끝나는건 어떻게 알고 딱 그 시간에 오겠다는건지. 계획을 치밀하게 짜고 온건가? 혹시 그놈도 나처럼 궁핍하게 자란거야? 만약 이 사실을 은유한이가 알게 되면 무조건 서진후를 족칠건데…

아무튼 난 서진후를 만나기로 했다. 난 수업을 마치자마자 잽싸게 교문으로 튀였다. 저쪽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있는 서진후가 보였다. 오늘은 밥 얻어 와서 그런지 표정이 많이 밝아보였다.

“오래 기다렸어?”

“방금 온거야. 오늘은 안보인다?”

“뭐가?”

“은유한이 안보인다고.”

“그러게, 점심부터 안보이더라고.”

“은유한이 너 나랑 밥먹는다고 뭐라 안그래?”

“은유한은 몰라. 점심부터 못봤는데 뭘. 봤다구 해도 그런거까지 일일이 다 말안해.”

“은유한 골치 아프겠군.”

“응?”

“아니다. 밥먹으러 가자.”

서진후가 교복 입은 모습은 처음 본다. 우리 학교 녀자애들은 서진후를 알아보는지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며 주위를 매삼거리고있었다.

가끔 카메라폰으로 동영상을 찍는 빠순이들도 보인다. 내가 서진후 반응을 살피려고 살짝 올려다보는데 서진후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웃었다.

“저녁 뭐 먹을래?”

“난 아무거나 다 잘 먹어.”

“이 근처에 뭐 괜찮은데 없어?”

“음… 짜장면집이랑 피자집이랑 우육면 그리고…”

“우리 피자 먹자.”

나는 속으로 울며 서진후뒤를 따랐다. 피자값이 얼만데 이 자식이 그리로 가자는건가? 파산이다!

가게안은 저녁먹기엔 이른시간인데도 우리 학교 교복들로 붐볐다. 몇몇 아는 얼굴이 보여서 나를 꽤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오래만에 봐서 그런지 어딘가 조금 달라진듯한 화장한 허경희의 모습이 보였다. 허경희는 나와 서진후를 뚫어질듯이 쳐다보았지만 난 못본척하고 앉을자리를 찾았다. 헌데 보니 하필이면 허경희네 옆테이블밖에 자리가 없었다.

서진후는 대충 주문하고나서 허경희를 몇초간 응시하더니 다시 내게로 고갤 돌렸다.

“허경희 재들이 인젠 시끄럽게 굴지 않니?”

“아니, 그때 일 고마.”

“고맙긴, 사내대장부가 그깟일 갖구. 사실 재들이 왜 널 어쩌지 못하는지 알어?”

“몰라.”

“그게 다 너의 친구 은유한이 덕인줄 알어.”

“은유한 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다, 피자나 시켜. 나 화장실 갔다올게.”

서진후는 나의 올롱해진 눈을 피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이때 테이블옆에 사람인영이 드리워졌다.

”“오래만이다, 안유이?”

허경희가 내앞에 서서 날 똑바로 내려다보고있었다.

“그런가?”

나는 허경희를 피끗 쳐다보고는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안유이, 너 내 얼굴을 똑바로 봐.”

허경희의 말소리가 떨리고있었다.

“하고싶은 말이 뭐야? 알아듣게 쉽게 말해.”

나는 애써 평온해지려고 마음을 도사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새겨들어. 그리구 영원히 잊지 마. 네 친구 은유한이 내 친구들을 병신 만들어놓고 내 얼굴에 칼까지 대게 만들었어, 알아? 너무 맞아서 코뼈 부러지고 이발이 나가서 병원 신세지고있을 때 내 친구들은 려관방에서 소리도 못지르고 더러운 새끼들에게 당하고있고 니가 그런 고통들을 느껴봤어? 아무것도 모르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고있었겠지. 도대체 너까짓게 뭔데? 너 같이 보잘것 없는 년이 뭐라고 우리가 이렇게 고통받아야 되냐구?”

한순간 어지럼증이 확 몰려왔다.

“너 명심하고 잘 들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언젠가 꼭 너한테 복수하고 말거야. 너도 은유한도 정말 죽어도 용서 못해!”

허경희는 한참 나를 째려보며 이를 악물더니 가게를 나가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미동도 않은채 넋을 잃고 앉아있었다. 한참후 서진후가 들어와 식탁에 마주앉았다.

“미안, 밥 다음에 살게. 정말 미안해!”

그리고 나는 가방을 주어들고 서진후를 무시한채 밖으로 달려나갔다.

“야… 너 어디 가? 야!”

나는 그냥 무작정 달렸다. 은유한 그놈이 지금쯤 어디 박혀있는지 오늘 박산내버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대로 은유한의 집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유한이는 마침 팬티바람으로 쏘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텔레비죤을 보고있었다.

“뭐야, 꼴이 왜 그러냐?”

머리카락들이 땀이 흐른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고 호흡도 고르지 않는 나를 유한이는 아이스크림을 먹다말고 의아스레 바라보았다.

“넌 정말 인간두 아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린데?”

“이젠 내가 어디서 맞아죽든 누구한테 얻어터지든간에 내 일에 절대 상관하지 마. 나 모르게 뒤에서 일 꾸미지도 말구. 날 위해서란 핑게는 더더욱 하지 마! 난 너한테 그런거 시킨적 없으니까.”

“야, 유이야. 너 왜 그래?”

“사람이 그렇게 잔인할수는 없는거야, 감정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자식! 겨우 열아홉살인 녀자애야! 어떻게 그런짓을 할수가 있어! 너 한번씩 이럴 때마다 얼마나 무섭고 소름끼치는줄 알아? 내가 복수해달랬어? 고마워라도 할줄 알았니?”

“허경희 이 씨발년. 함부로 입 나불댔구나. 이게 내 방식이다. 누가 뭐래도 이게 내가 널 지키는 방식이야!”

“너 정말…”

“가라고! 썅 빌어먹을…”

나는 도도해지는 은유한의 모습에 그만 맥이 풀려 주저앉을것만 같아서 인차 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왔다. 눈물이 콱 쏟아졌다. 어떻게 이제껏 같이 어울려 지냈던건지 나자신이 놀라울따름이다. 날 지키는 니 방식? 방금 나를 똑바로 쳐다보던 은유한의 표정과 말투들이 떠올라 내 맘을 싸하게 만들었다.

 

내가 은유한이를 알게 된것은 고등학교 입학식날이였다. 나는 전날 드라마를 새벽 2시까지 보고 아침에 겨우 일어나 고양이세수를 하고 학교로 급히 뛰여갔다. 아직 상학시간이 남아있는지라 나는 딸기우유를 사려고 매점으로 달려갔다. 매점안에서 주인아줌마가 한창 머리카락이 노란 남자학생과 시비를 캐고있었다.

“아니 학생, 돈도 없으면서 여기는 왜 왔어?”

“지갑을 놓구 왔다니까요. 설마 돈 5원이 없어서 내가 아줌마한테서 삥 뜯을가?”

“아니 학생 말버릇 좀 보게나. 빨리 돈을 내놓든지 돈없으면 그 담배 놔두고 그냥 가든지.”

노랑머리는 씩씩거리더니 옆에 서있는 나를 피끗 내려다보더니 지껄였다.

“어, 이봐 꼬맹아, 돈 5원 있냐? 보다싶이 상황이 이래.”

나는 노랑머리의 발끝부터 천천히 훑어보았다.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보이는 그의 기다란 몸을 올리쫒다가 그만 그 아찔한 노랑색 머리칼에서 내 시선이 떡 멈춰버렸다. 살다살다 그런 화려한 노랑색은 처음 봤다. 금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황금빛머리카락이 내 눈동자를 상큼하게 했다. 근데 저런 머리를 학교에서 왜 그냥 놔두는걸가?

“없는데요.”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