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설을 쓸때만이 비로서 숨을 쉬고 있음을 확인한다. 숨을 쉬고 있는한 나의 곁에는 소설이 있을것이다.  그렇다고 소설이 나를 구원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나를  현실의 남루를 견디게 한다는것은  알고있다. 구차하고 하찮은 무수한 삶들을, 견딜수 없는 현실의 루추함을  그리운 눈빛으로 바라 볼수 있었던것은  소설이 나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푸주칸에 걸린 고기와 말걸기>를 통하여 리성이 없는 고기덩어리들의 끝없는  욕망을 쓰고 싶었다. 그 욕망의 치욕은 또 다른 치욕으로만 씻기며 이세상 어떤것도 그냥은 사라지지 않는다는것을 말해야 할것같았다. 우리를 견디게 하는 동시에  또 우리를 못견디게 무너뜨리게 하는  현실의 남루를 소설로 쓰면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남루로 우리의 실존적 상황을 엿 볼수있었고 그런 실존적인 상황을 통하여 삶을 다시 출발시킬수있는 다른 거처를 마련하고 싶었다.

지난해 여름, 서울에 갔다가 모텔에서 일하는 큰 올케를 만난적이 있다. 올케가 나한테 반지를 주면서 남편한테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귤색의 인조보석을 박은 반지였는데 과연 손가락이 견딜수 있을가? 고민이 될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웬 반지냐고 하니 방청소하다가 주은것인데 남편한테는 일부러 산것이라고 말해 달라고 하였다.

여관방에서 주은 반지를 남편한테 선물하는 여자?
뭔가 모를 기묘한 감정이 전류처럼 등곬을 타고 쫙- 흘렀다. 한마디로 말할수없는 복합적인 감정이였다.  애틋하고, 씁쓸하고, 슬프고, 측은하고,  비애스러웠다. 그리고 소름이 끼쳤던것은 <반지>의 음습한 기운때문이였다. 어떤 남자와 녀자의 불륜장소에서 주은 반지가 선물로 포장되는 과정의 기묘한  감정을 거의 일년 동안이나 남루처럼 이끌고 다니다가 드디여  <푸주칸에 걸린 고기와 말걸기>로  <반지>의  색갈을 찾게 되였다.

매번 새로운 작품을 쓸때마다 <좀 더 잘 쓸수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는 동시에 <다음에는 더 잘써야지> 하는 희망사항으로  그 아쉬움을 훌훌 털어 내기도 한다. 

 소설쓰기는 나에게서 가장 자신이 있는 일이면서도 늘 낯설고  두렵다. 작품을 쓸때면 가장 편안한 순간이면서도 내 한계를 느끼게 되는 가장 슬픈 시간이기도 하다.

한계에 부딫칠때마다 한겹씩 자신의 원래의 색갈을 벗어 버릴려고 발버둥을 친다.  탈피하여야 사는 뱀처럼 자기의 껍질안에  갇혀 죽지 않을려고 측측한 음지안에서 온몸을 던져 내안의 온기를 데워가며 자신의 새로운 피부에 새로운  무늬를  만들고 싶다.

언젠가는 그 단단해 진 피부를 다시 버리고 또 다른 피부에 새로운 무늬를 새겨야 할것이지만…

                 2008년 9월 27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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