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만주 조선인종교

제1절 개론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종교를 신앙해 왔다. 중국조선인의 종교는 당연히 조선의 고유한 종교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주이주초기 기독교, 천주교는 조선이민들이 정신적 고통에서 해탈되고 초세적 안위를 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순신앙의 작용, 즉 정신상에서 자아만족을 얻는 것이다. 만주에서의 종교 활동은 점차 조선인의 일상생활 범위에서 벗어나 교육과 사회와 항일무장투쟁과 직접적 연계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 계통의 교세가 이주조선인 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도 이 방면의 원인이 있다. 조선광복운동이 종교를 밑바탕으로 일어났고 주요한 령도인물들도 종교계인사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의 대표로는 이상욱 씨와 김약연 씨를 들 수 있다. 종교를 배경으로 한 애족, 애국운동 및 이주조선인의 지도활동의 공적은 마멸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종교단체는 자금을 내여 학교를 꾸리고 반일사상괴 사회개량주의를 선전하였다. 천주교에서 꾸리는 해성여학교, 예수교에서 꾸리는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 대성유교에서 꾸리는 대성중학교, 천도교에서 세운 동흥중학교 등이 그 예로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결속 후 소련10월 혁명의 성공과 더불어 국제형세는 커다란 변화가 일었으며 3 .13반일운동과 더불어 동북의 반일민족독립운동이 획기적인 전변을 가져올 때 종교단체의 민족지사들은 무장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대한군정서는 대종교를, 대한국민회, 대한의군부, 대한북로독군부는 예수교를, 대한광복단은 공교회를, 대한국민의민단, 신민단, 대한공의단, 대한의사부, 대한총군부, 구국군은 천주교를, 야단, 훈춘 한민회, 청년단은 청림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상 단체는 9880명의 인원을 갖고 있었으며 그중 무장대원이 3700명이었다. 이런 반일단체들은 혈전정신을 실천에 옮겼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그 범례이다.

이상과 같은 반일 종교당체가 있는가 하면 시천교와 같은 친일종교가 간도지역에서 일제의 앞잡이로 추악한 면을 보여준 사실도 있다.

1934년 재만 조선인의 종교를 살펴보면

1. 남만지역에 있어서는 교회당이 48개, 기독교신도 9950명으로 그 대부분이 장로파에 속하며 주로 통화, 해룡, 봉천, 안동의 각 지방에 분포되고 기타는 신경, 길림에 소수의 감리교신도가 있었다.

2. 북만과 동몽지방에 있어서는 총수 1570명의 신도가 있었고 대부분이 할빈에 집중되여 장로파와 감리파가 반반의 세력이었다.

3. 기독교의 설교가 제일 설행된 곳은 간도지방으로서 교회당 104개, 신도는 2만 1261명에 달하여 재만 조선인기독교도의 65%를 점하고 있다.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재만 조선인 중에서 거의 세력을 갖고 있지 못하였으며 단지 간도의 용정촌을 중심으로 3000명 신도를 갖고 있을 뿐 만주 각 지역에 있어서는 표면에 나타난 신안자가 거의 없었다.

불교는 고려시대에 정점에 달했으나 이조에 와서 이를 압박, 금지한 결과 장기간에 걸쳐 조선인과 탈리된 종교였기 때문에 이주조선인 중에서 크게 전파되지 못했다.

기타 종교 중 천도교, 시천교, 제우교 및 보천교 등은 남북만주에서 신봉되고 있었으나 조직적인 설교활동은 없었으며 단지 간도에서 이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동 지방에서는 천도교, 시천교, 원종교, 대종교의 각 유파 중 천도교는 약 800명의 신도가 있어 용정촌을 중심으로 설교하고 있었으며 원종교와 대종교는 각각 80명 내지 40명의 신도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종교와 같은 것은 국교적인 성질을 띠고 중, 일 당국에 의해 취제가 심하였다.

유교는 간도지방에서 대성유교와 공교회 두 파로 갈라졌으며 약 1만 7600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향상하는 경향이었다.

1936년 6월 현재 통계에 따르면 교회당이 293개, 신도는 6만 1156명이다. 그중 기독교회당이 233개, 신도 3만 8251명이고 유교회당이 5개, 신도는 1만 4515명, 불교회당 23개, 신도는 3899명이었다. 또한 만주에 설치된 조선인교회에서 경영하는 신학교는 1939년 현재 길림에 신학교, 용정에 성경학원, 사평가에 역시 성경학원이 있었으며 봉천에는 하급전도사양성소와 보모양성소가 있었다.


제2절 종교 각파

1. 기독교

기독교는 1920년대에 조선에서 널리 보급되었으며 교파가 많았다. 예수교 장로회, 감리교, 천주교, 동아기독교, 조선기독교, 재림안식교, 성결교, 조선기독교회 등이 있었다. 그중 장로교의 세력이 가장 컸다. 1940년 5월 19일 일제의 강제적인 시책에 따라 만주 6개 기독교교파는 신경에서 《조선기독교연맹》을 조직할 데 관한 제1차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선언서》를 발표했다.

1941년 8월 신경에서 제2차 연맹회를 소집하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 기독교는 완전히 일제의 동아침략의 정신적 도구로 되어 버렸다.

11월 28일, 《합동》결성을 마치고 제1임 총회장으로 봉천 서탑장로교 목사 정상인을 선거했다. 합동 이후 《만주조선인기독교》는 동북을 신경, 동만, 북만, 봉천, 안동과 남만 등 6개 교구로 나누고 사무소를 신경에 설치하고 산하에 총무국, 교육국, 교무국, 전도국, 출판국, 재무국 등 6개국을 두었다.

1). 장로교회

일찍 1880년 기독교장로파는 간도를 카나다 장로파의 전도구역으로 획분하고 조선의 4개 전도구의 하나로 정하였다. 1876년 카나다 《일치선교회》의 마이러타이(麦勒泰) 목사는 조선 평북 의주에서 우장(현 영구)에 이주한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 4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882년 심양에서 조선어로 된 《신약전서》가 이응찬 등의 번역으로 출판되었고 서상륜, 이성하 두 사람은 러스(罗斯)목사의 촉탁을 받고 동만, 남만의 조선인촌락에서 전교하였다. 1884년, 마이러타이, 러스 목사는 동만을 상회할 때 75명 조선인신도들이 자원하여 세례를 접수하였다.

1910년 전후 기독교반일민족주의자들이 유하, 흥경 일대에 정착한 후 기독교전도사도 따라 왔다. 1918년 무순, 봉천, 흥경, 통화, 유하 등 지역서 전파되었으며 경신년대토벌 후 조선난민을 구제한다는 명의로 남만 각 지역에서 모금활동을 벌려 기독교는 남만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1924년 후, 마레주의 전파로 한시기 기독교는 저조기에 있었다. 남만에서 장로회는 통화를 중심으로 그 부근 30리 내에 20여개 크고 작은 교회가 있으며 신도는 1000여 명이었다. 이밖에 유하현에 신도 50명, 집안현에 200명, 장백현에 100명, 흥경 지방에 600명, 휘남현에 1170명, 해룡현에 320명, 안동현(부속지를 포함)에 700명, 봉천부속지에 460명, 그 부근 지방에 200명, 대련에 70명, 기타 부근지역을 합하면 장로회신도 6000여 명이었다.(《재만조선인 사정》)

20세기 초 장로교는 간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김진근(金振谨), 한경희(韩敬熙) 등은 간도에 와 설교하였다. 1902년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구례선(具礼善)과 선교사 조리 홍순도(洪淳图)는 간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활동을 했으며 뒤이어 전도사 안순영이 계속 전도활동을 했다. 1906년 구례선과 홍순도는 용정교회를 세웠다. 그해 전도사 안순영(安顺永)이 중국인교도 선금(单金)의 도움 밑에 선후하여 화룡현 양목정자 (杨木顶子) 교회와 광제암(广济岩)교회를 세웠다.

1907년 조선반일지사 김약연, 구춘선, 마진, 박무림, 강백규 등은 다라즈 장재촌에 명동강습소와 명동학교를 꾸렸으며 서울로부터 장로교회의 정재면(郑载冕)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장로회에 집단적으로 가입했다. 1909년 김약연은 명동교회를 세웠고 성경을 강의하면서 반일민족의식을 선전하였다. 또 이동휘 등은 《러, 중, 조 삼국전도회》의 명의로 조선에서 연변에 와 설교하면서 《종교로 민족을 단결시키고 민족해방을 쟁취》하자고 주장했다. 외국선교사들은 병을 치료해주고 부침 땅을 좀씩 희사하는 방법으로 각지서 설교하면서 많은 군중을 저들의 교회에 흡수하였다. 1911년 현재 간도에는 교회와 집회처가 40여 곳, 교도가 1600여 명에 달하였다.

1912년 카나다 선교사가 용정에 장로교 선전부를 세웠다. 박걸, 구례선 등 선교사들은 용정, 명동을 중심으로 전고활동을 활발히 밀고나갔다. 1914년 이후 명신고등여자학교, 명신여자학교, 은진중학을 육속 창건했고 1916년 5월에는 제창(济昌)병원을 세웠다. 그해 간민회와 훈춘의 한민회를 합쳐 간도《국민회》를 조직했으며 구춘선이 회장에 취임 하고 아래에 80여 개 분회를 앉혔으며 연락지점을 제창병원지하실에 두었다. 전도하는 동시에 반일활동을 벌리였다. 유럽, 미국 등 나라와 일본과의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구미선교사들은 조선인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적극 지지해 나섰다.

1918년 4월,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 교감 정재면 등 39명 반일지사들은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으며 그후로는 반일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암살대를 기반으로 국민회군을 창건하고 안무를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하였다. 그뒤 또 홍범도장군을 초빙하여 군사 령도를 강화했다. 국민회 본부는 《군적등록령》을 반포하였으며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골간을 양성했다. 자금을 모아 무기를 사기 위해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최봉 설, 김준, 전홍섭, 박웅세 등 7명 교도는 조선은행 회령 분행으로부터 용정으로 오는 차를 습격하여 조선은행권 15만 원을 앗아냈다.

1920년 일제의 무장진압 하에 장로회는 심한 파괴를 받았다. 그후 장로회 상층인사들은 반일기치를 내리우고 《구세촌》을 건설한다고 떠들었다. 1921년 12월 1일, 장로교는 토성보에서 회의를 열고 조선 함북로회에서 갈라져 간도로회를 세우고 김내범(金乃范)을 회장으로 선거했다. 1925년 《동만로회》라 재칭하였다. 1926년 3월, 박창옥 (朴昌玉), 이찬걸 등은 왕청 배초구에 예수교청년회를 건립하였는데 회원은 14명이며 문화학습, 신체단련 등 계몽교육방식으로 교회의 영향을 이어갔다. 1936년 6월, 동만 장로회는 간도와 돈화, 영길, 서란, 녕안, 교하, 길림 등 지역에 129개 교회를 설치하였으며 신도는 1만 6000여 명에 달하였다.

1939년 9월 15일, 일제의 통제 하에 동북의 장로교회대표 32명은 조선 신의주에서 열린 제2차 교회회의에 참가하였으며 《전만주 조선예수교장로회연합회》의 건립을 보았다. 1940년 5월 장로교회는 강박에 의해 《만주 조선기독교연맹회》에 가입했고 이듬해에는 《만주조선기독교회》에 합병되었다. 1944년 말, 간도《만주조선기독교》는 교회 100개, 전도소 16개, 신도 1만 449명이 있었다.

2).감리교회

감리교회는 기독교신교의 한개 파로서 세계 성을 띤 종교조직이다. 남감리 교파와 북감리 교파(미감리교파)로 나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조선을 거쳐 만주에 들어왔다.

남만에 있어서 감리교신도는 흥경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이 있었고 장춘, 사평가에 300명, 길림, 액목, 몽강 등 지역에 예배당 7개소, 신자 약 2000명이 있었고 할빈에 예배당 1개소, 신자약 100명, 해림에 예배당 2개소, 신자 50명, 기타 지역까지 합하면 4000명 신자가 있었다.(《재만조선인사정))

1908년 9월, 남감리교회의 전도사 이화춘(李和春)이 책장사 이응현(李应铉), 함주익(咸株益) 등과 함께 용정에서 전도하였다. 중국인 기독교도 선금과 반일민족지사 박무림의 지지 하에 용정촌과 그 부근에 9개 교회를 세웠는데 500여 명 교도가 있었다. 1908년 8월, 장로교파와 감리교파의 전도구역협정에 좇아 간도의 감리교회를 장로교파에 넘겨주고 조선으로 나갔다.
1920년 5월 남감리교회는 또다시 간도에서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7월 남감리 교회는 훈춘 등 지역의 성리교회(圣理教会)를 접수하였으며 이듬해 4월 정재덕(郑在德)목사는 용정, 투도구, 왕청 등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당시 간도지역의 총책임자는 량주삼(梁柱三)목사이고 용정교회책임자는 이용정(李容政), 왕청교회의 책임자는 최세환(崔世焕)이었다.

초기에 남감리 교회는 왕청 ,용정 등지역에 《반일학교》 등 교회학교를 세웠다. 또 교도자녀를 위해 동명학교, 북일학교, 영창학교, 삼광유치원을 세웠으며 용정에다도 매일성경학원을 세워 국립, 사립학교의 학생들이 퇴교 후 성경을 배우게 하여 그 영향을 크게 넓히였다. 1925년 남감리교회는 국자가, 옹성라자, 용정, 투도구, 훈춘, 배초구, 석현, 경신, 대두천 등 곳에 교회를 세웠다. 1926년 2월, 최착봉(崔镯凤), 김리남(金利男) 등이 배초구에서 남감리파청년회를 건립하였으며 회원 30명은 모두 선도자녀였다.

1918년 전후 미감리교회의 배형식(裴亨植)목사는 간도에서 사회조사를 하였고 1920년에 도문에 감리교회를 세웠다. 1929년 1월, 장로교파와 감리교파는 봉천에서 협상을 거쳐 신경지역을 감리교전도구로, 간도지역을 장로교파 전도 구역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감리교파는 계속 간도에서 전도하였다.

1931년 12월, 감리교회의 남북 두개 파는 용정에서 연합회의를 열고 감리교 《만주 선교년회》를 조직하였으며 교육, 농촌 기구를 설치하여 교회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1933년에 이르러 간도에 24개 교회, 1644명 교도가 있으며 6개 교회학교에 506명 학생이 있었다. 1939년 감리교회 만주년회는 북만, 동만 두 곳으로 갈라졌다. 1940년 5월 감리교회는 《만주조선기독교연맹》에 합병되었으며 1941년 11월 《만주조선기독교회》로 개칭되었다.

3) 동아기독교

1906년 카나다 선교사 변위익이 충청남도 강경에서 《대한기독교》를 세웠으며 1921 년 《동아기독교》라 고치였다. 신약성경을 유일한 경전으로 삼고 정치와 종교를 갈라 보는 원칙을 주장했다.

1906년,한태영(韩泰永)등 4명이 간도에서 전도했고 1912년 5월 김만순(金万顺)의 발기로 송언(松偃)예수교회를 세웠다. 1914년 1월 조정립(赵鼎立)이 종성동예수교회를 건립했다. 1916년 2월 대모록구(大母鹿沟)교회, 1918년 연길교회, 1920년 훈춘교회가 세워 졌다. 20년대에는 화룡현 명신교회, 왕청교회, 금당(金塘)교회, 흥인(兴仁)교회를 내왔으며 11개소의 교회학교를 갖고 있었다. 1923년 전후에 만주의 동아기독교는 남만과 북만 두 개 교구로 나눠졌다. 1936년 6월 만주의 동아기독교의 신도는 516명, 1940년에는 1000명 좌우였다.

동아기독교는 초기에는 반일을 주장하였으나 점차 포기해버렸다. 1940년 5월 일제는 동아기독교를 《만주조선기독교연맹》에 합병시켰다.

4).복림안식일교회

안식일교회의 특점은 토요일을 전도일로 하며 술과 담배를 엄금한다.

1914년 전도사 백덕순(白德逊)씨는 봉천에서 전도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이듬해는 장춘에 교회를 세웠다. 1917년부터 조선인을 대상으로 간도에서 전도하였으며 그해 4월에 투도구교회, 5월에 용정촌교회를 건립했다. 1919년 11월 화룡현 명신촌에 삼도구교회를 세웠다. 1926년 동만구교회내에 2개 학교가 있었고 학생은 149명이었다.

위만주시기 교회의 발전은 컸다. 1934년 2월 연길현 남구(南沟)교회, 1935년 3월 조양천 교회, 1936년 5월 로투구교회가 건립되었다. 1936년 6월말현재 만주의 신도는 544명 이었다. 1939년 1월 기독교 동북연합회는 동만구교회를 조선기독교복림안식일교회에 귀속시켰고 《간도합회》라 개칭했다. 1940년 5월 《만주조선기독교연맹》에 합병됐다.

5). 성결교회

1907년 미국 동양선교회는 서울옅동양교회복음전도관》을 세웠다. 성결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영혼을 구원》할 것을 주장했다.

1924년 조선 충청남도 규암교회교도 박기래(朴基来), 경주교회의 교도 박장환 (朴章焕)이 각기 용정촌과 도문에 이주하여 전도를 시작했다. 그해 최성무(崔成茂)목사가 시찰원신분으로 용정에 파견되여 정황을 조사했고 1925년 3월 이원근(李元根)전도사가 용정교회를 세웠다. 뒤이어 여전도사 김경흡(金庚洽), 박로희(朴鲁熙)가 용정부근에서 전도했다. 그해 8월 기와집을 지어 교회당으로 하고 부흥전도회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 했다. 1926년 교도가 49명으로 늘어났다. 1928년 여전도사들이 용정을 중심으로 조선이주여성들가운데서 전도활동을 벌리였다. 1930년 11월 천보산분회가 세워졌고 이듬해 11월에 교회당을 지었다. 1932년 9월 김인석(金仁石)목사가 명월구교회를 내오고 1933년 2월 김학선 (金学善)목사가 조양천교회를 내왔다. 1935년 이정원(李祯源)목사가 연길교회를, 이듬해 10월 박문익(朴文益)목사가 도문교회를 세웠다. 1936년 6월 당시 만주 내 성결교 도는 1280명이다. 1940년에 《만주조선기독교연맹》에 합병되었다.

2.천주교

1872년 오문에서 세례를 받은 조선인 첫 신부 김대건(金大健)은 녕고탑, 왕청, 훈춘 등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조선 경흥에 돌아갔다. 1896년 4월,조선 청년 김영렬(金英烈)은 도선 원산에 있는 프랑스인 신부를 찾아가서 교리학습을 거친후 5월 17일에 세례를 받고 요한이란 본명(本名-교회이름)까지 지니고 화룡현 루학대에 돌아와 가족과 친지 10여 명 을 데리고 다시 원산으로 갔는데 때는 1897년 초봄이었다. 박련삼(朴连三), 김진오 (金真五), 김중렬(金仲烈, 김영렬의 동생) 등 12인은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가입하였는데 《북간도 12도도》라고 불리웠다. 그해 가을 간도에 돌아와 회령, 용정간의 큰길가 마을 삼원봉(三元峰, 지신향에 있음)과 하교동, 대교동, 부처동 그리고 용정촌에서 전교활동을 했다. 1902년 김계일(金桂一), 석해일, 박정규 등 100여 호 교도들이 용정촌으로부터 팔도구에 이주하여 교도촌을 이루고 교회를 내왔다. 1909년 화룡 지신사 영암 (英岩)촌에 천주교예배당을 세우고 남일량(南一良, 프렁스적)이 신부를 맡았다. 같은 해 용정촌에 용정천주교예배당을 세우고 원형근(元亨根, 프랑스적)이 신부를 맡았다. 이듬해 5월 팔도구에 천주교예배당을 세우고 최문식(崔文植, 조선인)이 신부를 맡았다. 그때 간도에 교도 2100여 명이 있었다. 1914년 간도의 조선인천주교회는 예배당 3개에 천주교공소 50개, 교회학교 17개(학생 339명)을 갖고 있었으며 교도가 5418명에 달하였다. 1919년 3.13반일시위 때 용정 각지의 천주교교도들은 반일시위에 적극 뛰여 들었으다. 《경신년대토벌》때 각지의 교회당은 파괴당하였다.

1920년, 조선에서 원산종교구가 나와서 연길, 이란 두 교회는 원산종교구의 관리를 받았다. 제1차세계대전후 빠리전도회의 프랑스신부들이 육속 귀국했고 독일 센구디리 분듀회에서 로마종좌의 위탁을 받고 원산종교구를 관리하였다. 1921년 3월 이후 독일 신부 임갈충(任渴忠), 서상렬(徐相烈), 구걸근(具杰根), 심배의(沈培义), 오근수(吴根诛) 등이 간도에 파견되었다. 그해 9월 백화동(白化东)이 연길천주교예배당 주임신부로 전근되었다. 이때부터 천주교는 반일기치를 버리고 《순종교 활동》을 벌리였다. 1923년에 이르러 조선인천주교는 30개의 교회학교에 9990명의 교도를 갖고 있었다. 그 가운데 팔도 구천주교회의 교세가 가장 왕성했는데 1924년 교도수는 2000여 명에 이르렀다. 1928년 연길교구가 건립되었고 그 지역은 간도와 녕안, 목단강 등지를 포함하였는데 당시 교도가 1만 2057명이었다. 백화동이 김목교구장으로 되었다. 1931년 백화동은 스위스의 수녀를 청해다가 연길에 수녀원을 세웠다. 1933년 교회에서는 연길에 병원을 앉히였다. 지금의 연변군분구와 옛 연변가무단 건물이 바로 당년의 천주교 교구사무청사이다. 1934년에는 연길에 성십자가수원을 건립하였고 1936년 3월에는 잡지 《카톨릭 소년》을 창간하였다. 1937년 연길교구에는 주교 1명, 신부 22명, 수사 17명, 수녀 23명, 수원학생 31명, 전도사 21명, 천주교공소 45개, 교회당 39개, 그중 400명 이상을 용납할 수 있는 교회당이 13개, 교도 1만 2884명이었다. 1944년말 연길교구는 조선인신도 2만 명, 중국인신도 2000명을 갖고 있었다.
1947년 11월, 백화동이 귀국하고 대부분 독일신부들도 육속 떠났다. 전지령(田志灵)이 대리목구장으로 되었다. 토지개혁 후 천주교는 기본상 활동을 중지하였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