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길우의 수필 121>

 

申 吉 雨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skc663@hanmail.net

 

교단에 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어떤 자세로 학생들을 대하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좀 생각하게 된다. 이럴 때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은 아마 자기가 학생이었을 때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생각나는 사람은 부모가 되는가 싶다. 물론 그 밖에도 형이나 누나, 친척들, 때로는 이웃 어른이라든지, 단 한 번 일러 주고 가버린 어느 낯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 분이 취한 자세와 저 분이 대해 준 모습은 서로 다르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정반대일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또 각기 일장일단이 있어서 쉽게 어떤 것이 더 좋은 자세라고 집어내기가 어렵게도 된다. 실제로는 그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이끌어져 나오게 되고, 거기에 주어진 상황과 조건, 자신의 처지, 그와의 관계 등이 곁들어져서 자기 나름대로의 자세가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마디로 이것이 좋은 자세라고 말하기는 매우 힘들게 되고, 그래서 모든 교육자들이 어떤 자세로 교단에 설까 하고 곤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자는 학생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잘 인식하고 있다면 자기의 자세와 행동에 대해서 그리 큰 곤란을 겪지는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교육자는 가장 관계가 깊은 부모가 아니며, 그렇다고 남과 같이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대할 수도 없다는 점을 늘 인식하고, 그 중간의 위치에서 학생들에게 따스한 정과 아픈 꾸지람을 아울러 주면서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하나하나 차근차근히 풀어 나가도록 이끌어 주어야 할 것이다.

가령, 대여섯 살 먹은 어린이가 길에서 넘어져 울고 있다고 한다면 교육자는 어떻게 해야 옳을까? 아마 애정이 깊거나 과보호적으로 키워 온 부모라면 즉시 달려가서 붙들어 일으키고는, 먼지를 털어 주면서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아프지는 않느냐 걱정하면서 달랠 것이다. 애정이 약하거나 성격이 다혈질인 부모는 우는 아이를 보고 바보같이 넘어져 왜 우느냐고 야단을 치며 일으킬 것이고, 좀 심하면 아이를 울지 말라고 때리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남남이라면 어떻게 할까? 흘낏흘낏 바라보면서 지나치거나, 좀 인정이 있는 사람이면 괜찮다고 일어나라고 말해 줄 뿐일 것이다. 어쩌다가 자기 아이 또래인 것에 마음이 들어 가서 일으켜 줄 정도이다.

그러면, 교육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약간의 방법상의 차이가 있겠으나 가까이 가서 스스로 일어나도록 타일러야 하고, 옷에 묻은 흙도 스스로 털게 해야 할 것이다. 아픈 것도 실제로는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러 주면서 그것쯤은 참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다니도록 주의를 주고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 조심해야 할 점은 절대로 그 어린이를 붙들어 일으켜 주거나 옷에 묻은 흙을 털어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야단을 치는 것은 좋지 않다. 교육자는 결코 부모처럼 행동해선 안 된다. 애정이나 인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학생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닥친 일을 스스로의 판단과 능력에 따라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교육자는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껏 살아가도록은 돕되 자기의 능력을 학생들에게 그냥 보태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말로만 일어나라고 하면서 지나쳐 버려서도 안 된다. 교육자는 할 수만 있다면 가르쳐 주고 일러 주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아야 한다. 무관심해서도 안 되고, 같이 마음 아파하되 직접 그 아픔을 덜어 주려고 나서지는 않는, 그런 자제된 마음가짐과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청소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부모는 그 자식을 매를 대며 나무라고, 심하면 집에서 나가라고까지 할 수도 있으며, 또 밤중에 몰래 들어온 자식에게 어머니는 아버지 모르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면서 자기 방에 들어가 자게 할 수도 있다. 부모는 그 누구보다도 자식에게 매정하게 대할 수도 있고, 관대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남인 경우에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대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감싸 주고 타이르지 않으며, 잘못한 비행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욕하거나 비난하기가 보통일 것이다. 마치 자기네에게는 그런 자식이 없거나, 있어도 절대로 그러한 잘못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를 매우 착하고 바르게만 여기고 있기 때문에 다른 청소년들의 잘못을 지도하고 이끌어 주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교육자는 이 경우에도 자신의 자세와 행동이 교육적으로 나와야 할 것이다. 잘못한 청소년을 앞에 두고 왜 그랬는지, 그것이 얼마만큼 잘못된 것인지, 잘못된 결과가 어떻게 나쁘게 영향을 주는지, 또 그런 뒤의 생각과 느낌은 어떠한가 등을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대화해 주어야 한다.

야단을 치되 잘못을 깨닫게 하여야 하고, 애정으로 무조건 감싸 주는 대신 적당한 꾸중과 용서로써 앞으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을 결심하도록 하여야 한다. 때로는 실의와 절망을 느끼지 않도록 적절한 격려와 칭찬까지도 해 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교육자가 경계해야 할 일은,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모처럼 무섭게 매를 대거나 무조건적인 관용을 베푼다든지, 애정이 적기에 남들처럼 무관심해 버리고 만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교육자는 학생에 대한 애정의 깊이가 어떻든 부모처럼 또는 남들처럼 대해서는 안 되며, 늘 그 중간적 존재인 교육자로서 대하는 이성적 훈련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교육자는 학업을 잘 가르치고 잘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것에 앞서서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어떻게 학생들을 대해 주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은 단순히 전달과 계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자 자신이 취하는 자세만으로도 갖가지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단에 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육자의 자세에 대하여 먼저 여러 가지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