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의 장편답사기>

제11장
귀향의 강

1995년 11월 7일.
나는 두번째 두만강답사의 길에 올랐다. 첫 목적지는 삼합이였다. 그런데 때는 문전에서 서성대던 겨울이 성큼 문턱을 넘어섰으므로 손님이 없는 시골의 려관은 오싹하니 랭기가 돌았다. 려관주인은 나 한사람의 손님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불을 때겠다고 서둘렀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붙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갈가고 생각을 더듬었다.
문득 삼합향 북흥촌에 있다는 리성국(현재 리성국씨는 삼합향 문화소에서 사업한다)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면목은 없지만 지면을 통해서 그의 소설을 본적이 있었다. 그리로 갈 잡도리로 나는 려관을 나왔다. 문인은 글로 서로 상면이 되여있는 법이니 만나면 구면처럼 반갑다.

북흥촌은 삼합에서 룡정으로 오는 큰길목에 있는데 삼합과는 겨우 10리 상거였다. 마침 룡정으로 되돌아가는 오후 뻐스가 있어서 걷는 수고는 덜게 되였다.
단층 벽돌집 지붕우에 십자가가 걸린 북흥기독교회에서 하차한 나는 리성국씨의 집을 물어서 찾아갔다. 그들 부부는 세간을 나서 따로 살림을 꾸리고 부모들이 촌 학교운동장앞에 있는 아담진 초가집에 기거했다. 아주 반겼다. 작은 키에 후더운 인정이 밴 수염투성이 둥근 얼굴인 문우의 부친은 리기희(李基熙 54세), 중국 태생이고 현재 중국 공민이지만 부인은 조선 국적을 가진 분이였다. 그리고 31세의 리성국씨도 조선 태생이라 조선에서는 조교로 취급하려고 하나 벌써 어려서 중국국적에 입적이 되여있다는것이다. 말하자면 2중국적을 가진 사람인셈이였다.

작가 리성국씨는 특수년대의 특수한 두만강의 아들이였다. 그것은 광복과 더불어 두만강의 성격이 바뀌면서 그리된것이였다.
광복은 일제의 마수에 짓눌려 살던 피침략국 인민들의 명절이였다. 반대로 갖은 만행을 부리던 일제한테는 비운의 장례날, 하루밤 사이에 기고만장하던 침략자들의 기염은 서리맞은 배추잎처럼 되였다.
화룡시 로과진 죽림촌의 김동수(金東洙 67세 함경북도 길주군 태생)로인은 말한다.
<<그게 아마 광복이 나던 해 9월이였지비. 일본군 두놈이 총을 메고 산으로 해서 두만강쪽으로 가는것을 마을 자위대에서 발견했지 뭠둥. 류동수(劉東洙)가 자위대를 거느리고 뒤를 쫓아가서 포위를 했다꾸마. 퉁포를 겨누어들고 총을 놓으라고 했는데 그자들이 대항을 하더라나. 그래서 퉁포로 쏘아죽여서 파묻었다꾸마. 58년도에 장마가 지면서 해골이 드러났지 않겠슴둥. 살이 썩어 금이발이며 몸에 지녔던 금만년필이랑 누군가 가져가고 해골은 학교에서 실험용으로 썼댔지비. 후에 홍진이 도니 로인들이 일본놈 귀신의 작간이라고 해서 다시 해골을 파묻었으꾸마. >>

망국노가 된 우리 민족이 눈물을 뿌리며 넘던 두만강을 기세등등하게 넘어온 일제한테 두만강은 죽음의 강으로 변했다. 조선측 교두를 지켜선 쏘련군은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조사하여 일본군이면 체포하고 총살했다.
룡정시 삼합진 북흥촌(三合鎭北興村)의 장경락(張京洛 78세 함경북도 어랑면 고양동 출생)로인은 당시의 정경을 회상한다.
<<우리 마을 서쪽의 두번째 골이 가마골이라 하는디 일본군 군수품창고가 있었다꾸마. 광복전에 일본군 트럭이 수없이 그리로 나들었지비. 광복이 나서 사람들은 거기에 가서 군용이불이며 옷이며를 달구지에 실어냈지라우. 그때 일본놈들은 사복을 하고 삼합으로 해서 회령으로 도망을 했는디 쏘련군들이 잡기만 하면 신을 벗기고 발목을 봤다지 뭠둥. 그자들은 군화를 신고있어서 발목이 새하얬는디 불문곡직 죽였다는거꾸마. 그통에 발목이 하얀 조선사람들도 잡혀서 죽을번 했다지 않슴둥. 변계감시가 심해지자 감히 강을 건널 엄두를 못낸 일본군들은 마을에 들어와서 살려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우다. 그자들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당장 죽이고싶었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리되지 않더라 그거꾸마. 불쌍한 생각도 들고 해서 집집에서들 거두어주었지 않겠슴둥. 그자들은 하루 세끼 밥을 주고 따뜻한 온돌에서 자게 되자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시키지도 않은 일을 머슴처럼 했지라우. 우리 마을 리상희네 할머니는 워낙 용한 분이라 일본군 두사람을 집에 두고 손님처럼 대접을 했던거라우다. 후에 마을을 떠날 때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일본군들은 너나없이 눈물을 흘렸다꾸마. ―>>

연변은 인민의 천지로 변했고 일제의 주구와 지주들한테는 생지옥으로 탈바꿈했다. 연변과 조선의 공산당정부에서는 일제주구에 대한 청산부터 했다. 훈춘의 대지주이고 대동아전쟁때 비행기를 헌납하고 동경에 가서 천황의 접견을 받은 한희삼은 물론 다른 지주와 친일파들은 처단을 당했다. 항일부대 토벌에 공로가 있는 룡정의 박도끼는 북조선으로 도망가서 숨어살다가 청진에서 잡혀서 총살당했다.
그래서 미처 공산당의 질서가 잡히지 않은탓에 주구들은 두만강을 건너 줄행랑을 놓았다. 당시 두만강을 건너는 귀향민들의 물결속에는 민족역적들도 끼여있었다는 말이 된다. 역빠른 그런자들한테는 삼팔선이남이 삶의 락원이였다. 화룡현 신선대대장 김일로는 일제가 연길공원에 동상까지 만들어 세웠던 김동환 다음으로 가는 주구였다. 1940년 3월 25일 일본인 산림경찰대장과 함께 병졸들을 휘몰아 항일유격대를 추격하다가 홍기하에서 매복습격을 당해 120여명의 졸개를 잃었었다. 김일로도 졸개들을 호령하다가 벌린 입으로 탄알이 꿰뚫고 지나갔지만 요행 목숨은 부지했었다. 그런데 그는 광복이 나자 남으로 도주, 여생을 편히 보내다가 수원에서 일생을 마감한것으로 전해진다.
그래도 광복과 함께 귀향의 길에 오른 사람 절대 대부분은 독립운동가들과 망국노의 설음을 이기지 못해 고향을 등졌던 사람들이라 하겠다. 당시 중국에 거주한 조선족 수는 220만, 제1차 귀향의 물결을 타고 강을 건너 조선반도로 건너간 사람은 무려 백만을 헤아린다는 계산이 있다.

두번째 대귀향은 1957년부터 1962년까지였다. 조선전쟁이후 일로서 전후복구지원을 위해 많은 조선족들이 북조선으로 들어갔던것이다. 첫번째 귀향은 삼팔선이라는 계선이 없이 한반도 전체로의 자유로운 이동이였다면 두번째귀향은 사회주의 국가의 테두리안에서의 이동이였다. 당시 복구건설에 화룡시 용화의 재해년에 굶어죽게 된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북으로 건너갔다. 룡정시 삼합향 북흥촌의 최태경일가도 1962년 함경북도 연사군으로 갔는데 최씨의 막내 딸 최해옥은 연사에서 소학교를 다니던중 5학년때 평양으로 뽑혀갔는데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되였다고 한다. 그녀는 70년대 <<꽃파는 처녀>>에서 꽃분의 역을 했다고 전한다.
그번 귀향에서 많은 인재들이 떠나갔다. 반우파투쟁이 지식인들을 잡는 운동이나 다름이 없고 민족심을 가진 사람들은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되는 판국이라 무리로 떠나들 갔다. 유명한 시인 주선우, 작곡가 정진옥, 소설가 김동구, 아동문학가 채택룡 등 문학예술계 인사들도 많이 건너갔다. 바로 리성국의 부친 리기희씨도 그때에 조선으로 갔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잠자리를 펴고 마른 명태와 낙지를 찢어 안주를 하면서 장밤 술을 마시면서 그는 이야기했다.
<<나는 연변대학을 2학년까지 다니다가 1961년 7월에 조선으로 갔디오. 배를 곯는데다 한마디 말을 잘못해도 학생들중에서도 우파분자가 속속 잡혀나오는데 남 일같지 않더만. 그래서 갔수. 조선에서는 아주 열정적으로 맞아주었소. 공부하겠다는 사람은 시험을 쳐서 대학에 보내고 불합격자는 공장에 넣어주었소. 나는 회령의 사탕공장에 들어갔디. 건설중이였던 그 공장에는 그때 연변에서 간 사람들이 태반수였소. 나는 대학을 다니던 사람이라서 공무직장에 배치되였지오. 저 로친(식장께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로친을 돌아보며)도 공무직장에 근무했었는데 전쟁고아였다오. 무척 나를 따랐소. 젊었을 때 나도 꽤 멋쟁이총각이였다구. 하도 끈질기게 못살게 굴기에 할수 무가내로 저 로친과 결혼까지 하게 된거라오. >>
자는듯 아무런 기척이 없던 부인은 갑자기 돌아누우면서 <<이봅소, 능청을 떨어도 분수가 있음지비 언제 내가 그랬슴둥? 당신이 집작거렸습지비. >>라고 한마디 해오는 바람에 한마당 웃음이 터졌다.

리기희씨는 한모금 술을 하고는 낙지를 질근질근 씹으며 말을 계속했다.
<<어쨌든 결혼이라구 하게 된것만은 사실이였소. 로친이 고아이고 또 나도 중국에서 간 사람이라 조선땅에 혈육 하나없는 사람이라 공장에서 잔치를 챙겨주더만. 제법 그럴듯한 잔치였소. 결혼날 또 집까지 마련해서 주었소. 다음해 성국이를 낳았던거요. 그때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건너갔고 다시 되돌아가기도 했다오. 여북하면 국가 철도상으로 있다가 함북도 건설사업소 소장으로 온 김주봉이 우리 공장에 와서 연설할 때 <중국에서 하루에 백오십명씩 건너오고 백명씩 돌아갑니다. 조국에 왔으면 참답게 살아야지 이게 뭡니까?> 라고 비판하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구만. 어떤 날 출근하면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소. 강을 건너 되돌아간 사람들이 분명했소. 그러면 야단이 난다오. 기대를 보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기계가 설게 아니겠소. 67년도 7월에 나도 가정을 끌고 야밤도주를 했으니 이튿날 나때문에 공장에서 한참들 야단을 쳤을거요…조선으로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중국에서 처음에는 국적을 붙여주지 않다가 67년 9월에 자원에 좇아 붙여주었다오. 그런데 저 로친은 기어이 조선 국적을 고집해서 지금도 몸은 중국에 살지만 국적은 조선에 있게 됐소. >>
오늘 중국에 사는 조교들은 바로 두번째 귀향에서 되돌아온 사람들이다. 원래 중국에 살다가 조선으로 갔었으므로 원 국적은 중국이였다. 그러나 조선에 가서 중국국적을 포기했었던것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와 국적을 선택했었는데 오늘의 조교들은 바로 당시에 조선국적을 보류한 사람들이다. 강을 건너 조선에 뿌리를 박고 살거나 갔다 와서 중국국적을 회복한 사람들이 조교보다 훨씬 많았던 사실과 오늘 조교들의 수가 5천여명이라는 통계수자를 념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두번째의 귀향에서 가고 온 조선족들의 수가 엄청난 수자였음을 직감할수 있다.

세번째 귀향은 문화대혁명시기였다. 이 시기의 귀향자들은 거의 모두가 정치적박해를 피해서 간 피난자들이였다. 룡정시 대소과수농장만 해도 항일에 참가했던 사람들 70여명인데 그들은 거의 모두 문화대혁명에서 귀순분자로 억울하게 투쟁을 당했으니 250호 마을에서 70호가 적이 된 셈이였다. 그중 10여호가 북조선으로 도망을 갔다. 룡정시 백금향 백금촌의 차덕균은 일제시기 동경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였는데 일본에서 공부한 력사가 간첩조건으로 되여 투쟁을 당했다. 그는 모진 매를 견디다 못해서 가족을 데리고 문득 조선으로 갔는데 떠나던 날 큰딸이 친척집으로 놀러 가고 없어서 두고 간것이 평생의 생리별이 되였다는것이다.
캉다(抗大)조직의 집체적 도강은 문화혁명에서의 대표적이라 하겠다. 1967년 7월 29일 연길 캉다에서 개산툰 캉다와 합세하여 홍색조직을 습격했다. 싸움은 팔프공장울안에서 벌어졌는데 돌멩이가 날고 날창이 가슴을 찔렀다. 렬세에 몰린 홍색에서는 해관의 총을 내다가 불질을 했다. 총앞에서 사기가 꺾인 캉다는 선구촌 대안에 있는 사이섬으로 퇴각했다. 8월 2일 사이섬을 포위한 홍색은 공포를 놓으면서 투항하라고 웨쳤다. 총소리를 듣고 종성사람들은 강변에 나와 어서 건너오라고 소리쳤다. 섬에 갇혔던 3백여명이 강을 건넜다. 헤염을 칠줄 모르는 녀성 하나가 물에 빠져죽었다. 2개월후 몇사람 남고 모두 돌아왔다. 캉다의 조직자들 몇은 1년 구류를 당했다.

도문에 가면 중조교두를 마주하고 선 친선탑을 볼수 있다. 문화대혁명시기 이 자리에는 모택동사상이 조선에 비치라고 조선쪽을 향해 손을 젓는 모택동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었다. 그만치 이국의 정치를 간섭할만치 량국관계는 팽팽해있었다. 강건너가 고향이여도, 강 건너에 친척이 있어서 서신래왕이 있어도 간첩혐의를 받기는 충분한 리유였다. 시인 문창남선생은 대학시절에 두만강을 건넌 죄로 10년 옥살이를 했었다. 당시의 두만강은 살기가 감도는 한의 강이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70년대말에 모택동동상을 폭파하고 지금 우리가 보는 거대한 두손이 악수하는 모양의 친선탑을 세웠다. 그때로부터 이상의 사실들이 억울한것이였음이 판명되였다. 그때 북조선으로 건너가 거주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손해배상을 받아가기도 했다. 룡정시 삼합진 승지촌의 김광진은 지방 자위단에 있었다는것이 죄가 되여 투쟁을 당해 죽었다. 그래서 온 가정이 도주하여 회령으로 건너갔다. 1992년 아들 상연이가 와서 룡정시 민정국에 상소, 3만원을 보상받았다는 얘기가 당지에서 떠돌고있다.

광복후 오래도록 두만강은 국경구실을 잘하지 못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명목이 국경을 무시하게 했던것인지 모른다. 문화대혁명 한시기 강량안에 짙은 랭기가 휩쓸기도 했지만 그것도 겨우 몇년이였을뿐이였다. 1970년 주은래총리가 조선에 다녀오고나서 두나라 관계가 완화되고 두만강은 두나라 사람들이 자유로이 오고 가는 보통 강으로 되였다. 강량안의 사람들은 거치장스러운 통행증이나 려권따위는 필요도 없이 왕래를 했다. 룡정시 개산툰진 선구촌의 사람들은 랭면을 먹으러 대안의 종성으로 다녔다고 한다. 개산툰으로 가야 식당추렴들을 할수 있었는데 20여리나 떨어져있고 국수맛도 엉망이였다. 그래서 가까운 강건너로 가면 걸음도 덜고 입맛도 돋굴수 있었으니 꿩먹고 알먹기였다. 더구나 종성의 랭면은 함경도에서도 제일이여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고 할 정도였다는 사람들의 회상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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