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텔레비죤방송국 아나운서 박홍섭선생은 어릴 때 삼촌을 따라 강을 건너 친척집 잔치에 참가했던 일을 아주 감명깊에 이야기했다.

<<한달을 놀다가 돌아오려니 그만 얼음이 풀리기 시작했지 뭡니까. 교두로는 감히 올수가 없고 그렇다고 강이 풀리기를 기다릴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껍고 긴 널판자를 가져다 량켠 얼음우에 걸쳐놓고서 허리에 바줄을 동여매고 건너왔댔습니다. >>

두만강 답사길에 들린 두만강 연안 마을마다에서 나는 강을 사이두고 오고간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수없이 들었다. 화룡시 용화향 상화촌 김씨는 강건너 무산군 화평리(옛 이름은 봇데기)에 사는 조카잔치에 참가는 못했지만 강에 와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잔치날을 알게 되였고 또 쌀이며 고기며를 물로 건네주었다고 했다. 이같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참으로 두만강 량안의 마을은 가까우면서도 멀다는 생각을 했다. 거리로 계산하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고 국법으로 따지면 어마어마 멀다. 하지만 철조망을 치고 콩크리트 담벽을 쌓은 무인지대를 사이두고 총부리를 겨눈 군사분계선에 대면 두만강은 보통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선땅 상계리와 서쪽으로 마주한 룡정시 백금향 안개골에 세워진 백금발전소는 천리두만강에서 유일무이한 발전소이다. 1960년 주 수리처 리호성과장이 안개골을 답사하고 발전소 건설구상을 구체화했고 당해부터 착수해서 옹근 10년만에 완성된 발전소의 전기는 조선땅을 경과하여 중국땅으로 흐르고있다. 상계리는 조개형국으로 된 언덕이 북으로 뻗어내려 두만강이 병풍처럼 둘러선 두렁바위(둘러선 바위라고 해서 불려진 이름)를 핥으며 10여리를 굽이 돌아가므로 강을 따라 전기줄을 느릴려면 인력과 물력랑비가 엄청나서 조개언덕으로 전선대를 세우게 되였다는것이다. 두나라는 협의시에 땅을 빌려준 보상으로 조선에서는 상계리에 있는 조선측 공전소에 무상으로 전기를 공급받기로 했다고 한다.

조개언덕 동쪽켠 비탈에 10여호 인가가 있는데 하계리라고 하고 대안에 있는 중국쪽 마을 이름은 백금향 동광촌 제3촌민소조(옛명 현암동)인데 역시 10여호 동네이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서는 두만강물을 길어 음료수로 했다. 겨울에 강이 얼면 아예 대안의 북조선으로 건너가 물을 길어왔다. 온 마을이 물동이를 이고 지게를 지고 국경을 넘어 이국으로 간다. 그들은 하루에도 수차례 귀국했다간 입국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동삼내내 펄럭거리고 다니자니 미안하기 짝없더군요 하계리분들이 얼굴 한번 찡그리는 일없이 반겨줄수록 죄송했디요. 그래서 가끔 사탕, 과자며 과일이며 떡을 가져다 드리곤 했느데 그러면 <이러지 마시오, 엎음갚음입꾸마. 우리가 쓰는 전기가 중국게 아임둥. > 라고 했습니다. 물고생도 무던히 했지요. 그때는 언제면 따뜻한 온돌구들에 앉아서 물을 받아 먹나고 했더니 정부에서 집집마다 뽐프를 박아주었구만요. 끝내 물동이를 팽개치게 되였답니다. 그런데 정작 물고생을 덜고나자 강건너 고마운 분들이 그립구만요. 물을 긷는다는 구실로 국경을 넘나들었는데 이젠 세울 명목을 잃은겁니다. >>

동광마을의 김씨가 들려준 국경을 들락거린 시절의 회고담이다.

내가 백금향 백금촌 박길남(조선 함경북도 무산군 풍경면 소학동 태생) 로인을 찾아갔을 때 그 집에서는 꿩고기국에 햇이밥으로 후더운 접대를 했다. 연변에서 평강벌 입쌀이 제일이라 만주국시기 공품이였다고 하지만 백금의 입쌀도 못지 않았다. 나와 동행한 향문화소의 최몽필소장은 이밥 맛이 어떠냐고 묻고는 <<수입해온 종자>>라고 부언했다.

<<백금은 연변에서 해발고가 제일 높고 서리가 빨리 내려서 논벼 산량이 많이 떨어지는 땅입니다. 그런데 백금분이 어느 해 가을 강을 건너가 조선 논에서 잘 영근 벼이삭을 몰래 가져왔댔습니다. 이듬해 그것을 심었는데 그 품종이 지금 백금에 많이 퍼진겁니다. 무상기가 짜른 고산지대에 맞는 우량품종을 수입한걸로 봐주시라요. …>>

조선땅을 경유하여 흘러온 전기불밑에서 밤가는줄 모르고 이야기를 듣고 조선의 종자를 옮겨다 재배하여 지은 쌀밥으로 배를 불린 나는 도보로 백금을 떠나 대소과수농장으로 갔다. 시루형국의 두개의 시루봉사이 안침진 곳에 터를 잡고 강건너 오국산성을 바라보며 오순도순 모여앉은 대소과수농장은 봄이면 과일꽃속에 묻히고 가을이면 싱그러운 사과향기에 젖어 말 그대로 아름다운 무릉도원을 련상하게 되는 고장이였다. 1, 700여명의 인구에 4백여명의 로동자를 가진 이 농장의 과수밭은 450헥타르, 국광, 홍성, 진흥, 계광 등 20여가지 사과품종의 총산이 매년 평균 450만근이라고 했다.

자초의 이곳 이름은 큰소골(대소에서 5리 떨어진 오늘의 대명동은 작은 소골이였음), 소를 방목하던 곳이라서 생긴 이름이였다. 그런데 소골을 아무래도 한문으로 적을수가 없어서 큰 대(大)자에 소는 발음대로 蘇라고 썼던것이다. 광복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소나 키우고 옥수수나 심어 먹던 고장이였다. 그런데 여기에 사과를 심어볼 엄두를 낸것은 리지주였다. 그는 대소땅을 독차지하다싶이 한 지주였는데 길주사람이였다. 그는 고향 길주에 가서 사과묘목을 사다가 시루같이 생긴 아래 시루봉과 웃 시루봉 줄기가 만나는 움푹지고 양지바른 비탈에 옮겼다. 그리고 식구들과 소작인들을 총동원해서 사과밭을 가꾸었다. 사과원을 만들면서 리씨지주의 며느리는 일에 지쳐서 죽기까지 했다. 리씨지주는 며느리의 묘를 사과밭속에 썼는데 지금도 임자없는 묘가 쓸쓸히 남아 사과원의 창업사를 하소연하는듯 했다. 그러나 광복이 나고 토지개혁을 하면서 지주를 청산하자 리지주는 자기가 심은 사과가 열매를 맺는것도 못보고 몰래 떠나가버렸다.

1964년 주덕해주장이 대소로 시찰을 갔을 때 촌에서는 리지주의 사과원에서 난 사과를 대접했다. 홍조를 띈 처녀의 볼마냥 탐스러운 사과를 받아든 주장은 사과원을 꾸려볼 구상을 무르익혔다. 그는 료녕성 개현에서 초빙해온 과수전문가 관치성(만족, 대소과수농장의 퇴직간부임)을 대소에 파견하여 농장을 세웠다. 리씨지주의 대담한 시도가 없었더라면 오늘 두만강변에 사과원이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소의 맞은쪽 대안 마을은 조선의 함경북도 회령군 상수리다. 강 하나 사이두고 대소에 사과꽃이 만발한것을 볼 때마다 승벽심이 난 상수리에서는 어느해엔가 대소의 사과묘목을 떠다가 옮겼다. 그해 겨울을 무사히 났다. 신심이 생긴 회령에서는 과수지도원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파견하여 시찰을 했다. 회령군에는 천여헥타르의 살구와 다른 과수는 있었으나 사과만은 없었다. 1985년 가을 대소에서는 묘목을 대량 실어갔고 이듬해 4월 22일에는 관치성, 허경진, 김수돈 등 책임자들로 대표단을 조직하여 회령으로 가서 기술을 전수했다. 그로부터 3년후인 1988년 회령군에서는 세상자의 사과를 따가지고 대소과수농장으로 와서 감사를 드렸다. 내가 답사차 대소에 들렸던 1995년 그해에도 조선에서는 편지를 보내여 과수농약을 부탁해왔으므로 밤을 타서 농약상자를 둘러메고 강을 건네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리치를 따지면 국경을 사사로이 넘나드는것은 불법이지만 이같은 후더운 인간애앞에서 그런것들이 무시되는것이 오히려 옳바른 처사가 아닐가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엔 천추에 길이 남을 미담으로 되기도 하는것이 사실임에랴!

중국쪽 강연선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간 도로는 국방용이라서 뻐스는 물론 오가는 기동차마저 희소했다. 숭선에서 로과까지, 백금에서 대소까지, 대소에서 삼합, 그리고 개산툰에서 도문, 도문에서 훈춘, 경신에서 방천까지 도간도간 하루 한번 뻐스가 있을뿐이였다. 그래서 강역에 자리잡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차를 타고 가려면 다시 현성에 나와 차를 갈아타야 했다. 돈 팔고 시간 앗기고 몸 고달픈 일이였다. 그래서 20~30리 인적이 없는 구간을 도보로 갔다. 11월말 밤새 얼었다가 낮이면 녹아서 내리는 성에장과 나란히 강역 국방도로를 터벅터벅 걸아가노라니 때때로 강건너에서 울려오는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가 1963년 12월 27일에 있었던 영원히 퇴색하지 않는 <<묵은>>이야기를 머리속에 떠올렸다.

무산행 9931호 렬차가 삼형제굴을 지나 남촌굽이로 뱀같이 구불구불 달려오는데 갑자기 달리는 렬차우에서 청년 둘이 뛰여내렸다. 쇠처럼 굳은 언 땅에 나뒹굴떡 그들은 벌덕 일어서면서 옷을 벗어던지고 강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얼음장이 둥둥 떠내리는 물에 서슴없이 첨벙첨벙 뛰여들었다. 바로 조선 청진철도국 백암렬차구 차장 김형호와 함경북도 림산사업소 공무직장 선반공 최상현이였다. 화룡시 로과진 리수촌에서 500m 떨어진 두만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녀자아이들을 구하려고 물에 뛰여든것이였다.

그때 물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녀자 아이가운데 하나가 오늘 화룡시 팔가자진 부진장의 부인인 한친선(원명 한순자 45세)이란다.

1964년 1월 9일 화룡시 인민영화관에서는 중조 인사 7백여명이 김형호, 최상현의 자아희생적인 용기를 기리기 위한 대회를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한순자의 부친 한창도는 구명은인한테 감사드리는 의미에서 딸의 이름을 한친선으로 고쳐 부를것을 약속했다. 그날 저녁 연변가무단은 김형호, 최상현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각색한 가극 <<친선의 물결>>을 공연했다.

지금도 가끔 오락판에서 불려지는 <<친선의 노래>>는 그때 처음 불려진 노래였다.

중조친선의 미담은 오늘날에 와서 많이 퇴색할만큼 무정한 세월은 변해있다. 십년동란시기에 한때 중조관계가 버성기면서 한친선은 처녀시절에 간첩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은인들과 편지거래가 빈번했던 연고로 루명을 쓰게 된것이였단다. 그후 중조관계가 완화된후엔 은인들의 련락처를 몰라 오래동안 문안 편지 한장 띄우지 못했다면서 그녀는 눈물을 지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나는 조선에 사는 김형호의 소식을 듣게 되였다. 백금향 문화소 최몽필(48세)소장이 조선에 갔다가 만났다는것이였다.

<<재작년 가을 웅기로 친척방문을 갔댔습니다. 도문해관을 넘어 북조선 남양에 이르렀더니 뉘엿뉘엿 해가 지더군요. 그곳에서 밤을 나고 이튿날 웅기행렬차를 탈수밖에 별 도리가 없더군요. 그래서 짐들을 보관시키고 갖고 간 쌀과 고기며 술을 가방에 넣고는 무작정 아무 집이나 찾아갔습니다. 남양군 남양읍 42반이라고 쓴 벽돌집이였는데 방에 앉아 유심히 집안을 뜯어보다가 깜짝 놀랐댔지요. 북조선 정부에서 발급한 라성교식영웅이라는 훈장과 중국정부에서 발급한 상장들이 액틀속에 정히 넣어져 벽에 걸려있었댔지요. 그전에 두만강에서 조선족 녀자애들을 구해준 김형호였습네다. 우리는 밤늦도록 이야기를 했습네다. 이튿날 그는 자기가 당번인 화물차에 나를 태워서 웅기까지 데려다주었습네다…>>

도문시 친선탑앞에 서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마 이 탑은 자초엔 중국과 조선의 혁명적친선을 상징하는 뜻이였으리라. 하지만 시대의 발전에 따라 그 이미지도 폭을 넓혀서 두만강 건너 한반도 전부를 포함하지 않았느냐 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광복전처럼 저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고 서울에서 또 중국으로도 온다면 얼마나 좋으랴싶었다.

지금도 기차길은 서울도 통하고 중국도 통하건만 아쉽다, 고국땅 허리를 자른 군사분계선과 국경선이 발목을 잡고있음이여!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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