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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남자가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쉬는듯한 바스음성으로 부르는 노래에는 애절한 그리움과 얇은 숙명이 깔려있었다. 노래는 영어로 부르고있었기에 창호의 수준으로는 가사를 파악하는데 껄끄러움이 있었다. 인순이가 가사의 토막토막을 번역해주었다.

<<가시려는 당신에게 안녕이라는 말 하지 않으리.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날 땐 상처는 이미 추억으로 남으리... 와- 저 남자 필리핀에서 온거 맞아? 창호씨, 남아시아계는 키도 작고 가무잡잡하던데 뭔가 이상해요. 너무 멋진거같잖아요?...>>

인순이는 부푼 과장을 련발하고있었다.

몇시간전 그들은 끈적거리는 정사에 몰입해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는 바에서 와인을 마시고있었다. 창호의 혀에는 아직도 인순이의 애액의 여운이 남아있는것 같았다. 떨쳐버릴수 없는, 그런 집요함이 있었다. 성적으로 인순이는 참으로 멋진 녀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탄산음료와 같은 짜릿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창호는 인순이에게 정감적인 부드러움과 사랑같은 그럼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인순이와 정준태사장의 관계를 알고있어서일가? 그런것 같지는 않았다. 성적으로 몰입해있을 때 창호의 뇌리에는 정준태의 존재가 없었다. 창호는 인순이와의 관계에서 어딘가 모르는, 어떤 투명한 벽이 존재한다고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가까이 하는 순간에 부딪치는, 한겹의 막같은 그런 벽이 존재하는것 같았다. 그리하여 멋진 성적인 상대로만 여겨지는 관계를 유지하고있었다.

창호는 음악에 젖어 머리를 흔들어대는 인순이를 바라보며 오후에 있었던 정사를 생각하고있었다. 좀은 음탕한데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창호는 인순이를 깔보고있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면으로는 인순이와 지적인 대화를 하고싶었다. 인순에게는 지식인 녀성에게 있는 지적인면이 있었다. 날카롭고 투철했고 그리고 학문적인데가 있었다. 때때로 이런 두가지면이 하나로 통합되여있는 인순이를 보면서 창호는 자기의 내면도 그런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거울을 보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와인을 홀짝거리던 인순이가 초불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그리고는 메모지를 꺼내 영어로 노래 제목을 쓰고 지갑에서 50원짜리 지페 한장을 꺼내 웨이터에게 넘겨주었다.

<<미안하지만 다음에 그 필리핀남자가 불러달라고 부탁해요.>>

웨이터는 꾸벅 인사를 하고 가버렸다. 지방가수의 노래가 끝나자 필리핀남자가 무대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창호와 인순이가 앉았는쪽으로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날렸다. 인순이가 박수를 짝짝 쳐댔다.

필리핀남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선이 그들이 앉은 상으로 끌려오고있었다. 창호는 주기가 아닌 열기가 얼굴에 몰리고있는것을 느꼈다. 주위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끌어오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런 과시욕이 인순이에게 있었다. 바로 그점이 창호가 인순이에 대해 사랑같은 감정을 품지 못하게 하는 요소인도 몰랐다. 창호는 남의 표적이 된다는, 주목의 상대가 된다는데 상당한 콤플렉스같은것이 있었다. 나 건드리지 마, 싫어, 하는 저항감이 가슴 깊이에서 소용돌이치고있었다. 그것이 사람이 많은 곳일 때에는 더욱 그랬다.

<<이제 돌아갈가요? 늦은것 같은데...>>

인순이가 무슨 소리냐는듯 눈을 깜빡거렸다.

<<돌아가요? 이제 시작이잖아요?... 기분 풀려고 온거지 않아요. 좀 마음 정리하고 놀아요. 술도 왕창 마시고. 지갑이 부담스러우세요? 저한테도 있으니까 근심 말고 놀아요. 좋지 않아요?... 어쩌다 놀러왔는데 그런 김빠지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창호씨 요사이 뭐 이 시대하고 원수라도 진 얼굴이예요. 찌뿌등해서 당금 저주라도 외울 사람같아요...>>

창호는 피끗 안해 금화를 생각했다. 저주를 할거예요. 당신까지도...

창호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갈등의 미소가 피여올랐다.

<<그렇게 보여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선악은 언제나 동전의 앞뒤면이지 않아요...>>

인순이가 허리를 펴며 머리를 흔들었다.

<<어머머, 또 그런 심각한 이야기를 하실거예요? 세대차이를 긍정하고싶은건 아니겠지요? 여긴 술 마시고 즐기는 바얘요. 재미없어도 있는듯 박수 쨕쨕 쳐주주고 즐거운듯 싱거운 상통이라도 보여주고 가면 좋지 않아요? 우리도 이런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남 장사하는 기분 좀 살려주세요. 심각하고 철학적인것만 인생이 아니예요. 철학이 인간이 살아가는데 무슨 필요가 있어요? 칸트, 헤겔, 맑스, 니체, 뭐 그러루한 사람들이 철학을 말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1차세계대전이 있었고 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인류가 자신을 몇번 멸망시킬만큼만한 핵무기를 만들었다구요. 철학? 그건 옥스포드나 북경대학의 배고프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라구요. 그런 인간들 사흘만 굶겨보아요. 철학이 나오는가...>>

창호는 웃음이 터지려는것을 참고있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던 인순이는 무언가를 느끼고 홀랑 혀를 내밀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더니... 창호씨하고 있으니까 저도 닮아가는가봐요. 자, 술이나 마셔요.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주지는 않으니까요...>>

창호는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인순이가 놀라며 물었다.

<<왜요?>>

창호는 술잔을 들고 상을 돌아 인순이의 옆에 가 앉았다. 그러면서 인순이의 어깨를 한쪽 팔로 감았다.

<<인생은 누가 대신해서 살아주지 않는다면서요?>>

그리고는 인순이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자리에서 인순씨하고 해버릴가?...>>

인순이는 어깨를 흔들어 창호의 팔을 털어버렸다.

<<그런다고 해서 뭐 신세대라고 해줄것 같아요? 신세대는 하나의 정신이예요. 모든 과거의 도덕적인 률에 의심을 던지고 배신할수 있는. 선배님...>>

인순이는 기분 좋은 표정을 얇게 얼굴에 바르며 술잔을 들었다.

<<드세요. 축배는 생략하구요.>>

인순이는 취기가 있었다. 창호도 서서히 인순이의 취한 분위기속에 빠져들고있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에는 식당은 이미 영업을 끝내고있었지만 노래방은 한창 영업의 고조기에 있었다. 룸마다에서 노래소리가 터져나오고 복무원들이 오가고있었다. 손님방에 들어가지 않은 배동아가씨들이 담배를 피우며 한담을 하고있다가 창호와 인순이가 들어서는것을 보고 인사를 했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 그것도 인순이와 함께 있는것을 종업원들앞에 보이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창호는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문득 검은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은 녀자애가 피끗 룸안으로 들어가는것이 보였다. 모습이 익숙했고 어딘가 몸을 숨기려는 총망함이 보였다.

<<레이훙?!...>>

창호는 옆에 서있는 인순이를 보았다.

<<레이훙 맞아요?>>

인순이는 대수롭지 않은 눈으로 창호를 바라보았다.

<<그럴수도 있겠죠.>>

<<뭐라구요?!>>

창호는 버럭 화를 냈다.

<<식당의 영업원들은 노래방의 배동아가씨로 쓰지 않게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된거얘요?!>>

인순이는 창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취기가 섞인 눈에 질투의 빛이 실렸다.

<<뭐 애들이 돈벌고싶다는데 막을수야 없잖아요? 하물며 배동아가씨들이 모자라요. 잘못되였어요?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창호는 종업원들앞이라는것을 생각하고 분을 눅잦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기강이 있어야지 않아요? 그렇게 애들 마음대로 하게 하다간 식당영업은 어떻게 해요?>>

인순이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였다.

<<한상만으로 제약을 했어요. 열두시전이면 끝나니까 충분히 휴식은 돼요. 좋지 않아요? 우린 월급 안주고도 영업 잘되고 애들은 돈 벌어서 좋고...>>

창호는 인순이의 뻔뻔스러워보이는 얼굴을 직시했다.

<<그러다가 애들 망친단 말이얘요. 이게 어떤 장소인데 순진한 애들 물들이고있어요? 인순씨도 녀자이지 않아요?>>

인순이는 야유하듯 피식 했다.

<<왜 그러세요? 순진한 애들 망친다구요? 그럼 왜 이런 영업을 해요? 고상한체 하지 말아요. 지겹지 않아요? 레이훙이 아니고 다른 애들이라도 그렇게 관심을 가질거예요? 왜 그렇게 그애한데만 관심을 가져요? 뭐 딸이나 돼요?...>>

언제인가 인순이는 레이훙이 딸이라도 되는가 말한적이 있었다. 창호는 인순이의 말속에 숨겨있는 질투심과 창호의 년령을 상기시키려는 의도를 읽을수 있었다. 그러나 인순이의 말은 맞는 말이였다. 만일 레이훙이 아니고 다른 복무원이였다면 그대로 지나칠수도 있었다.

<<인순씬 원칙조차 없어요?>>

<<원칙? 창호씨 지금 원칙 이야기하고있어요? 레이훙하고 원칙하고 뭐 상관되는게 있어요?>>

인순이는 레이훙을 물고 늘어질 낌새였다. 창호는 이 자리에서 더 쟁론해보아야 아무런 결과도 없으리라는것을 알아챘다.

<<아무튼 식당복무원들은 노래방에 얼씬 못하게 해요!...>>

창호는 돌아서서 레이훙이 들어간 룸쪽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뒤에서 인순이가 악을 쓰는듯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인이라도 만들어봐요!>>

창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레이훙이 들어간 룸의 문을 잡아당겼다. 쏘파에 웅승그리고 앉아있던 레이훙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너 사무실에 좀 와!>>

사무실에 들어서는 레이훙은 노래방에서 입던 옷 그대로였다. 가슴이 깊이 패인 티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모양이 무엇이 드러날듯 아슬아슬 했다. 화장도 짙었다.

<<너 그게 뭐야? 딱 삼등기생같단 말이야! 그렇게도 돈이 말랐니? 노래방아가씨가 뭔데 네가 나서는거야? 엉?!... 네가 정말 하고싶다고 인순경리하고 말했니?>>

<<네.>>

레이훙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주눅이 들어 대답했다. 창호는 이시각 귀뺨이라도 때려주고싶은 마음이였다.

<<아무리 돈이 살판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인격이 있어야 해! 알아? 인격말이야! 인격은 돈주고도 못사는거야. 난 네까지 돈에 팔려 이럴줄 몰랐다. 기가 막혀... 난 그래도 너만은 당당하게 사는걸 보고싶었어. 돈이 뭔데. 돈에 인격까지 다 팔아먹고나서 이담 세상을 어떻게 살거야? 말해봐. 살다보면 돈보다도 더 큰 유혹이 기다리고있단 말이야. 알아? 그땐 어떻게 하겠어? 몸이라도 팔거니?!...>>

창호는 말하고나자 인차 아차 했다. 너무 심한 말이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이훙이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분노와 그리고 원망의 빛이 선뜻하게 지나갔다.

<<아저씬 나빠요!>>

<<뭐야?!>>

<<위선자란 말이예요!>>

레이훙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왕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 어깨가 세차게 흔들렸다.

창호는 레이훙이 이처럼 크게 반발할줄은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레이훙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품고있는것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이성으로서의 그런 정감은 아니라고 창호는 생각하고있었다. 딸같다는 그런 느낌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그러면서도 레이훙을 보면 카이란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군 했다. 착각을 할 때도 있었다. 깜빡 품에 안고싶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가슴 깊이에서 부성애와 같은, 그런 부드러움과 관용이 마음에서 돋아오르군 하였다. 그날 양고기뀀집에서 레이훙이 좋아한다고 했을 때 한순간은 설레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인차 아빠 없이 자란 레이훙이 부성에 목말라 있을거라는 생각으로, 정에 메마른 표현을 한것이라고 그 설레임을 반추해버렸다.

레이훙은 울고있었다. 위선자라고 하는 레이훙의 말이 맞는지 몰랐다. 그러나 자기위선의 정도를 알기에 창호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억울하고 화가 치밀었다.

<<그래, 내가 위선자라고 하자. 그렇지만 그렇다고 너 노래방에서 뭇 사내들하고 질탕하게 놀아치는건 뭐니?!...>>

창호는 실수를 느꼈다. 내가 그렇지만 너는 그러면 안된다는, 이런 방식의 설교는 수준 이하이고 너무나 유치했다. 그러나 말은 이미 나간것이였다.

레이훙이 가렸던 얼굴에서 손을 뗐다. 동그랗게 뜬 눈에서 창호는 자기의 실수를 확인했다. 그러나 물러설수는 없었다. 내친김이였고 취기도 있었다.

<<창녀가 될거니?! 그럼 돼봐! 맘대로 해! 그렇지만 여기선 안돼. 알았어?! 여기선 안돼. 내 눈앞에서는 안된단말이야! 꺼져! 꼴보기도 싫어!...>>

<<아저씨!...>>

레이후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자기도 너무 높은 소리에 놀랐는지 한동안 입을 벌리고있었다.

<<좋아요. 갈게요! 보기싫다고 하였죠? 창녀가 될거라구요?! 그래 될거예요...>>

레이훙은 어느새 소파에서 일어서있었다. 중국 녀자들에서 흔히 볼수 있는, 대담함과 당돌함이 속속 드러났다.

<<아저씨가 보는데서 창녀가 될거라구요! 제가 뭐가 되든 아저씨 관계가 있어요? 아저씨가 뭔데? 저의 뭐가 되여요? 저에 대해 관심해본적이 있어요? 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울여본적이 있어요? 제가 돈때문에 노래방에 배동아가씨 하고싶었는줄 아세요? 저가 그만큼밖에 안보여요?... 저 아저씨하고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싶었어요. 인순경리가 배동아가씨를 해야 노래방에 들어올수 있다기에...>>

레이훙의 목소리가 갈리고있었다. 서러움이 북받치고있었다.

<<그래서 노래방에 왔어요. 인순경리가 복무원으로 된다면 복무원을 했을거예요... 사사건건 저의 잘못만 꼬집고 못살게 구는 사람이 저의 말을 들어줄리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아저씬 인순경리하고만 붙어다고있었어요. 저를 생각해본적이 있어요? 사랑해서 인순경리하고 다녀요?... 저두 알아요. 아저씬 인순경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근데 그게 뭐얘요? 왜 그러시는거예요? 저에게 상처를 주고싶어서예요?... 저도 알고있어요. 저도 어른이예요. 저에게도 사랑할 권리가 있고 그런 자유가 있단말이예요!... 저 아저씨 사랑하고있는거 아저씨 정말 몰라서 그러세요? 시치미 따고있지 말아요. 저요, 아저씨를요, 사랑하고있단말이예요!...>>

레이훙은 비명을 지르듯 마지막 말을 내뿜고는 소파우에 풍덩 주저않으며 엉엉 어린애들처럼 소리를 내서 울었다.

창호의 취기는 가신듯 사라졌다. 그러나 머리가 완전히 정리되여있는것은 아니였다. 레이훙이 나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것은 랭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였다. 창호로서는 레이훙의 사랑을 받아들일만큼한 정신적인 준비도 그런 생각도 해본적이 없었다.

창호는 레이훙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어찌해야 할지 오리무중이였다.

<<됐어. 이러지 마. 난 널... 넌 아직 아이같아... 우는 모습부터...>>

창호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자기로도 무엇을 말하고있는지 감이 없었다. 다만 레이훙의 울음을 그치게 해야 한다는, 창백한 생각만이 있을뿐이였다.

레이훙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창호의 목에 매달렸다.

<<아저씨,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 아저씨가 좋았어요. 몰라요. 저도 왜 그런지... 사랑해요. 걷잡을수 없었어요...>>

창호의 정신은 비명을 지르고있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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