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국경의 강

두만강 천리 두나라 국경은 일곱개의 해관으로 상호 왕래가 국법으로 되여있다. 상류로부터 화룡시 숭선진의 고성리해관(조선 량강도 대홍단군 삼장리), 화룡시 덕화진 남평세관(조선 함경북도 무산군 칠성리), 룡정시 삼합진 삼합해관(조선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 룡정시 개산툰진 개산툰해관(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삼봉해관), 도문시 도문해관(조선 남양시), 훈춘시 삼가자향 사타자해관(조선 종성군―지금은 은덕군), 훈춘시 경신진 권하해관(조선 온성군)이다.

력사의 기재에 따르면 두만강에 해관이 선것은 1902년 12월 훈춘총관이 선 때로부터라고 한다. 거의 그와 동시에 연길분관이 룡정에 세워졌으며 1923년 조선의 회령과 잇닿은 (천보산―개산툰)경편철도가 개통된후에야 연길분관이 총관으로 훈춘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당시 룡정은 중국, 조선, 일본 3국 무역래왕에서 중요한 상부지로 부상했기때문이였다. 조양천역을 시발점으로 룡정, 동성용, 팔도하를 지나 개산툰에서 두만강을 넘어 회령을 지나 청진항까지 가는 기차길이 1934년에 완공되면서 수륙로정으로 일본으로 가는 제일 빠른 지름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개산툰국경다리로 기차가 통하는걸 볼수가 없다. 당시 화물을 만재하고 두만강을 넘던 철도교는 레루와 침목을 철거, 조선으로 통하는 기차는 유독 도문에서만 볼수 있다.

철로는 무역을 상대로 하고 륙로는 무역과 민간인 출입에 겸용된다. 매년 두만강 연안의 해관을 통해 오가는 사람과 통관화물수량은 엄청난바 내가 두만강답사를 시작하기 이태전인 1993년 개산툰해관을 통한 출입경인원은 연인수로 2만 2, 965명, 수출입화물량은 2만 7, 608톤이였다고 한다.

1995년 10월 당시 지금 고성리해관자리에 변방검사소가 있었다. 해관처럼 정규화되지 못한 작은 검사소라서 조선으로 오가는 장사군들의 휴대품검사가 까다롭지가 않아서인지 중류나 하류의 해관을 피해 사람들은 숭선으로들 몰켜왔다. 그래서 숭선진 행정부 각 부서에 근무하는 인구까지 통털어서 3백호도 안되는 고성리촌의 국유초대소와 개인 려관들은 매일 초만원을 이루었다. 외지손님들이 많아지자 장거리도 흥성해져 강역 뚝옆에 육류와 채소류를 파는 가게들이 줄을 섰고 식당은 물론 가라오케까지도 있어서 연길의 어느 한 거리를 방불케 했다.

교두려관에서 나하고 한침실에 들게 된 김철석(51세 화룡시 사람)씨는 조선측에서 출입경인원 단속이 심해져서 벌써 보름 가까이 건너가지 못하고 이제나 저제나 때를 기다리고있었다. 조선장사를 나드는 사람들 거개가 친척방문 통행증이거나 려권을 사용하게 되는데 조선측 규정에 따르면 친척방문일 경우 매인 일년에 한번씩밖에 허락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그런데 장사에 짭짤한 맛을 들인 사람들은 한해에 몇번씩 오가게 되므로 자연 검사에 걸리기가 마련이다. 김철석씨도 두번째라고 실토하면서 옛시절을 거들어 불평을 토했다.

<<도대체 국경이 뭐란 말입네까. 예전에 려권없이도 마음대로 왔다갔다했지요. 고성리와 강건너 삼장사람들은 한데 모여 군함산아래서 운동회도 했댔수다. 몇백원씩 받는 월급을 모아서 만여원어치 물건을 사놓았는데 못가고있으니 꼴이 뭡니까. 되돌아갈 처지도 안되니끼리 이렇게 기다립니다. 이거 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조선장사에 재미를 본 조선족들은 한국바람이 불어도 좀처럼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작은 밑천을 가지고 돈맛을 톡톡히 볼수 있고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고도 왕래할수 있었고 더우기는 한국에서처럼 고용인의 수치를 당할리가 없기때문이였다. 그럼에도 마음 먹은대로 제때에 국경을 못넘는것이 불평이라면 큰 불평이다. 려관에서 수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빽만 있으면 풀린다>>는 소리도 서슴없이 했다. 그러면서도 기다리는 사람들의 속사정뒤에는 모두가 목돈을 움켜쥐겠다는 욕심이 깔려있었다.

내가 숭선진에서 3일동안 묵는 사이에 어느 한 사람은 배갈과 맥주만 100상자를 싣고 건너갔다. 한번 장사비용이 많은 사람은 20여만원, 제일 적은 사람이래야 1만원이였다. 보통 두세집의 물건을 실으면 트럭 한대의 적재함이 넘쳤다. 한국에 갔다가 천인호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조선족들의 짐보다도 훨씬 크고 무거웠다.

그들이 가진 물건은 대개 경공업품과 식품이였다. 옷가지들은 20원좌우의 도매품이고 담배는 <<장백삼>>, <<장백산>>, <<박쥐>>표들은 고급이고 보통 한갑에 60전씩 하는 <<해란강>>과 30전짜리 <<길성>>이였다. 배갈도 화룡산 <<대고량>>이고 고급스럽다고 할만한것이라면 연길시 산<<BC>>표 맥주였다. 그리고 입쌀과 밀가루였다. 조선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짐을 보면 부피가 작은데 대개 해산물들이였다. 해삼이며 명태, 낙지였다. 50년대까지도 중국의 쌀이 아니면 두만강연안의 조선사람들이 굶고 조선의 소금과 옷감이 아니면 중국사람들은 염분 결핍으로 털난 벌거숭이가 된다는 말이 생겼다면 오늘은 중국의 경공업품과 량식이 아니면 조선사람들은 헐벗고 굶고 조선의 해산물이 아니면 중국연변지역에서는 물고기맛을 모를것이라는 말이 돈다.

<<보통 열다섯배, 잘 받으면 스무배가 더 떨어지디요. <길성>표 담배 한갑이 조선돈 15원, 입쌀 한근이 20원, 꼭 20배가 떨어지는 장삽니다. 중국돈 1만원 갖고 사도 조선돈 20만원을 만들디요. 찔러주고 길에 널고 하는 돈까지 떼고도 남는 떼돈벌인데 누가 안하겠습니까? 조선에서 명태 1키로가 4백원이니까 중국돈 20원인데 중국 시장에서 도매값이 35원이상입니다. 중국에서 인민페 4백원씩 하는 생복은 조선에서 조선돈 4천원이니 인민페 2백원인 셈이고 조선돈 3천원인 해삼은 연길 도매가격으로 인민페 350원입니다. 2월부터 4월까지는 명태, 4~5월은 해삼, 8월은 낙지철입니다…>>

장사군들의 말을 들어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선을 상대로 한 장사는 손쉽게 돈을 버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룡정시 삼합진 북흥촌에 사는 김창균(60세, 조선 함경북도 유선군 성북리 태생)씨의 50년대 장사는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이다.

<<내가 삼합에 살면서 조선 회령에 가서 학교를 다닐 때 일입네다. 중국사람이 조선에 가서 공부했으니 출국류학입네다. 삼합에 고중이 없고 룡정에 가야 공부를 계속할게 아니겠습니까. 멀기두 하고 기숙사비도 댈수가 없어서 조선에 가서 공불 한겁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두만강을 건너 집에 와서 주말을 보냈습니다. 한번은 룡정에 갔다가 한감에 12원씩 하는 샤떼천 두감을 끊었댔습네다. 월요일 새벽에 강을 건너가서 하숙집 아주머니한테 맡겼는데 아주머니가 청진에 가 팔아서 돈을 줍데다. 그 돈으로 한달 숙비를 내고도 헝가리 신발 열컬레와 손목시계까지 사 찼지 않았갔시요. 그때 헝가리 신발 한컬레가 중국에서 12원씩 기랬어요. >>

장사군들이 조선으로 갖고 가는 짐보따리는 크고 무겁지만 물건들은 싸구려 저질품이였다. 양말따위는 한두번 신고나면 실밥이 나고 몇번 빨고나면 판나서 버려야 한다. 먹는 입쌀만은 품질이 보장되여있다고 할수 있었다. 여북하면 숭선사람들은 <<큰 군함산에 눅거리를 가득 싣고 가고 작은 군함산에 값진 해산물을 무겁게 싣고 온다. >>는 비유의 말까지 생겼겠는가.

고성리촌은 크고 작은 두개의 군함형국의 산아래 오붓하게 자리잡은 마을이다. 옛날에는 두만강물이 군함산밑을 지나갔다고 하니 두산은 물살을 가르고 떠가는 군함과 흡사하다. 그런데 큰 군함산은 군함머리가 조선쪽인 남으로, 작은 군함산 머리는 중국쪽 북으로 향했으므로 이상과 같은 말도 생겨날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저질이든 싸구려든 량측에서 수요하는 바이고 또 합법적인 장사이니 타매할것도 아니다. 무서운것은 국경을 구멍 뚫는 밀수란다.

자고로 두만강은 도적골이 생겨날 정도로 밀수가 성행한 곳이였다. 바로 룡정시 개산툰진 선구촌 서쪽골 이름이 도적골이다. 밀수군들이 도적처럼 그 골짝으로 무리를 지어서 다녔다고 해서 난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선구, 배가 들어오는 어귀인 선구촌에서는 일제시기 해관과 일본경찰서가 있었고 곡물수레를 배에 실어 강을 건너 종성으로 넘나들었다. 아침거리가 없으면 강을 건너 종성에 가서 닭알을 팔고 쌀을 사갖고 올만치 종성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선구촌사람들은 밀수군들의 귀가 되고 눈이 되였었다고 한다. 밀수군들이 야밤삼경 도적골에서 도적고양이마냥 쌀짐을 지고 살금살금 강을 건너가서 종성 장거리에서 팔고 그 돈으로 소금을 사서 다시 야밤도강을 할 때면 선구촌 패거리와 미리 내통을 한다. 선구촌 패거리들은 소리없이 신호를 강건너로 보내는데 감시가 심할 때면 집문앞 빨래줄에 빨래를 넌다. 빨래가 없으면 안전하다는 신호로 여겨 강을 건넌다. 일제시기 소금은 금물이였다.

해관을 용케 통과했어도 죽음의 신은 그림자처럼 내내 밀수군들을 묻어다녔다. 룡정시 삼합진 경내에는 재피골이라고 있다. <<잡히는 골>>이 입에 오르면서 줄어든 이름이다. 광복전에 재피골에는 공안분주소가 있어서 오랑캐령을 넘는 밀수군들이 많이 잡혔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간 골짜기로 다녔다. 그런데 그 골짜기에 중국 사람 쑹(宋)가가 홀아비로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단다. 산중의 외딴 그집으로 밀수군들이 홀로 들어가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쑹가는 사람을 죽여서 뒤산 감자굴에 차곡차곡 쟁여놓았는데 광복후에야 비로소 발견했다고 한다.

룡정시 백금향 평정사람이 조선에 가서 무명 다섯필을 둘러메고 강을 건너 집으로 가는 길에 백금의 김옥래의 집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이튿날 평정으로 떠났는데 종무소식이였다. 후에 숲속에서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은 시체를 발견했다. 그런데 목을 맨 가죽띠가 김옥래의것이였다. 그것때문에 김옥래는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결국 무사히 풀려났다. 일제때의 일이였다. 그런데 문화대혁명 당시 김옥래는 그 일로 해서 맞아죽었으니…

밀수군들은 운수 좋게 재피골의 쑹가와 같은 강도를 만나지 않고 갈리골(화룡시 로과진 로과촌과 죽림사이에 있는 골인데 오고 가는 길에 그곳에 이르면 꼭 목이 갈한다. 다시 말하면 목이 탄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에 이르러 갈한 목을 축이고 단숨에 집에 당도했다고 해도 수시로 덮쳐드는 집사대의 눈길이 무섭다. 집사대가 마을에 들어서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군 했다.

나의 외할아버지 허영혜는 강원도 홍천군 내천면 물레방아골에서 량부모 시묘 6년을 해온 소문난 효자였다. 20년대 <<나라가 망했는데 효자가 있을소냐?>고 효자문을 거절하고 오늘의 화룡시 용화향 개사냥골로 이주를 해왔었다. 한번은 나의 어머니(허숙 1918년생)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였다. 집사대가 오자 아버지는 소금을 옥수수밭에 감추었단다. 그런데 세상을 모르는 내가 소곰재(잠자리의 함경도 방언)를 잡느라고 <소금재 꽁꽁 앉은 자리 앉아라, 먼데 가면 죽는다. >라고 하면서 옥수수밭을 뱅뱅 돌지 않았겠니. 그 소리를 듣고 집사대가 옥수수밭을 수색해서 아버지를 붙잡았단다. 집사대 대장이 일본사람인데 아버지의 상투를 끄잡아 물매를 안겼다는구나. 벌금을 내고 무사히 풀리긴 했어도 아버지는 일본놈이 더러운 손으로 상투를 어지럽혔다고 그날 저녁 머리를 잘랐단다. 목숨보다 더 귀중히 다루어온 아버지의 상투는 철없는 내 불찰로 없어졌단다. >>

광복후 청년들로 조직된 공안부대가 변경을 단속했다. 그런데 강역 사람은 누구라없이 모두 밀수로 살아왔던바이고 공안부대에 들어간 사람들도 밀수를 해왔었거나 아니면 밀수군의 자손들이였다. 무정한 법은 유정한 인정에 진다. 이것을 일러서 앞문을 막으면 뒤문이 열리고 뒤문을 단속하면 벽이 터진다고 비유해서 말하기도 한다.

룡정시 백금향에 사는 박학철씨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광복나서 얼마간 중국에서 조선돈이 통용되였디오. 북흥촌 김영준이라는 사람이 회령에서 온 쏘련군한테 조선돈을 받고 소를 팔았거든요. 그 돈을 가지고 회령에 가서 소를 사자니 이미 페지된 화페였다 이겁네다. 그때 소장사가 좋았다구요. 중국에서 소 한마리를 팔아 갖고 가면 소 두마리가 되였디요. 우리가 살던 대소에 모두 17호였는데 세집을 내놓고는 모두가 소장사를 해서 한해에 몇백마리가 건너왔습니다. 골안에서 잡아서 삼합장에 내다가 팔기도 하고 룡정에 갖다 팔기도 했디오. 검사소 소장은 보고도 못본체 했구만요. 그때나 지금이나 고약한 놈은 어디에나 있었습네다. 한마을에서 누군가 고자질을 해서 우에서 공작조가 내려오지 않았갔시오. 집집마다 장정들이 잡혀 들어갔디오. 공작조의 조장 박씨가 우리하고 동성동본이라 어찌어찌 하라고 알려주어서 아버지는 30만원 (지금돈 30원)을 벌금내고 놓여나왔디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2년 혹은 4년씩 징역을 살았구만. >>

변강보초를 강역마을의 민병들이 섰으므로 녹아나는것은 면목을 모르는 외지 사람들이였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고지식하고 소박했으므로 돈보다 정으로 통했던것이다. 낯선 사람이라 해도 강하게 나오면 모르쇠를 했다. 밀수군은 모험을 하는것이요, 보초군은 직책일뿐이라 각박하게 나오지 않았다.

조선전쟁이 끝나면서 1953년부터 3년동안 밀수는 고조를 이루었다. 쌀을 갖고 가서는 암모니아비료며 공목이며 백곰표 크림이며 연필, 종이 등을 대량 들여왔다. 보초를 서는 민병들도 밀수대렬에 끼여들었다.

1995년 11월 2일 내가 두만강답사차 고성리 변방검사소(지금은 해관임)에서 뒤로 불과 50m 상거한 교두려관에 행장을 풀고 신분증을 보이고 주숙등기를 하는데 주인은 마치도 귀빈을 맞듯 반가와했다. 작가가 아니신가고, <<청년생활>>에서 련재중이였던 <<서울바람>>의 속편 <<칠보사색>>을 감명깊이 읽고있다면서 따뜻한 온돌칸에 들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젊은 청년 하나를 주인은 조카라고 하면서 나한테 소개했다. 그 조카라는 청년은 25살, 옥석에 있는 친척집에 공룡화석이 있으니 한국에 팔수 없겠느냐고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주 박물관에서 3천원을 주고 가져가려고 했으꾸마. 그게 어떤 보밴데 헐값에 주겠음가? 한국사람한테 팔면 적어도 십만원은 받는다는 말임다. 선생님께서 줄을 달아줍소. 한몫 넣어줍지. >>

나는 흥취가 갔다. 파는건 자신이 없는 일이고 또 장사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나였지만 공룡화석을 한번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젊은이가 빌어온 오토바이뒤에 앉아서 옥석으로 떠났다. 옥석의 원 이름은 옥돌골, 고성리에서 로과쪽으로 되돌아오는 길역에 자리한 마을인데 10여리 상거였다. 군함산을 지나 석성못(錫成池 고성리촌의 로서기 최석성을 기념하여 지은 못 이름)을 지나 한참 가노라면 협착한 골짜기를 공중으로 가로 건너는 구름다리가 보인다. 58년도에 최석성이 사원들을 동원하여 수리공사를 벌리고 두만강의 물을 끌어서 산에 올려 숭선에서 그때부터 수전농사를 하게 되였다는 그 물길이다. 그래서 구름다리를 사람들은 무지개다리라고 한다.

큰길로 해서 무지개다리를 금방 지나면 두만강이 앞을 막아 길은 강을 따라 사뭇 에돌아간다. 강 이쪽 중국쪽은 쳐다보이는 높은 절벽이고 강 저쪽 조선은 눈아래 굽어보이는 낭떠러지다. 그 절벽의 중간쯤에 뽐프물을 자아내는듯한 작은 폭포가 조용히 떨어지고있는데 얼핏 보기에 암컷이 엉뎅이를 길쪽에 돌려대고 소변을 보는 형상이다. 그래서 옛날 이 절벽의 이름은 외설스럽게 개×바위, 지금은 문명스럽게 개바위라고 점잖게들 부른다. 길은 개바위를 지나 휘연한 둔덕을 달리는데 불과 얼마 안가서 옥석부락이 눈앞에 나타난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