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선 경대

내가 선경대를 찾은것은 1995년 봄이였다.

꽃피는 계절, 만물이 소생하는 따스한 해빛은 대지에 한껏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아침 8시에 연길을 출발, 9시반에 화룡에 도착한 나는 곧장 중심거리옆에 자리잡은 화룡시 민정국공업회사에서 경영하는 선경대자연풍경구관광사무실로 갔다. 나의 친구 한영수(韓永洙 40세)씨가 이 회사에서 사무실 주임을 담임하고있는고로 첫걸음이지만 시름을 덜수 있었다.

한영수씨는 중학시절 화룡현에서 나하고 함께 문학을 지향하고 자주 거래하던 동인이였다. 세월이 흘러 서로 사귄지가 20년이 되여와 상호 하는 일이 다르고 사는 고장이 다르지만 자초의 어린 심령에 고이 싹틔웠던 문학에 대한 애착심은 여직껏 만나면 무랍없는 친구로 될수 있는 심령의 비료가 되여있었다. 그는 바쁜 시간을 내서 나를 선경대로 안내했다.

화룡발 덕화행 뻐스는 시내구역을 벗어나자 좁고 우둘투둘한 비포장도로를 털털 달려갔다. 우심산을 지나 저 유명한 처창즈에서부터는 길옆 산협착으로는 류동하가 내처 따라왔다. 광복전에는 화룡에서 유명한 지주였던 김영춘이가 꾸렸다는 만원호목재회사는 류동하로 떼목을 엮어서 띄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떼목이 아니라 부지깽이도 흐를것 같지 않은 작은 내로 되였다. 떠난지가 반시간이 좋이 흘러서 뻐스는 덕화진 신흥동에 이르렀다. 화룡에서 예까지 꼭 29키로메터라고 한다. 바로 신흥동에서 마을 남산잔등으로 기여올라간 길을 묻어가면 숭선이고 그냥 왼손켠으로 차체를 돌려 마을을 에돌아간다면 덕화라고 한다.

뻐스는 덕화쪽으로 달렸다. 확 틔인 앞창으로 내다보니 길을 막는 앞산 정수리에 단풍이 든 숲에 떠받들린 락타형국의 바위가 흰구름 흐르는 파아란 하늘속에 조각처럼 박혀있었다. 키워준 정을 못잊어 저 락타가 모란꽃을 물어다가 주인한테 주었는데 그것이 처녀로 변해 짝을 뭇고 살았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 욕심많고 악착한 형의 도끼질에 죽어서 돌로 굳어졌다는것이 바로 저 락타봉의 유래란다.

락타봉을 안고 돌자 선경대자연풍경유람구가 나타났다. 신흥동에서 약 1키로메터의 거리밖에 안되고 화룡에서 예까지는 꼭 30키로메터라고 한다. 화룡을 떠나서 40분이 걸렸다. 선경대에서 하차하지 않고 그냥 달려서 류동촌, 길지촌을 지나면 다음 역이 덕화진 소재지 남평이다. 선경대에서 14키로메터 지척이다. 바로 남평 맞은 쪽은 조선 칠성리, 남평에서 5리만 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의 철의 도시 무산읍이 두만강을 사이두고있다. 두만강을 거슬러간 이 길을 따라 달리면 로과, 숭선, 그리고 두만강발원지 적봉을 지나 백두산으로 간다. 백두산관광코스를 이 길로 잡으면 길이 못할뿐으로 안도쪽으로 다니는것보다 구경은 제격이라 하겠다.

화룡에서 선경대로 가는 교통편은 꽤나 불편했다. 매일 가는 뻐스가 세번(화룡--남평 7. 40분, 13. 40분, 화룡--룡연 14. 10분)이고 돌아가는 뻐스는 두번(룡연--화룡 7시, 남평--화룡 14시)뿐이라서 자가용이 없거나 호주머니가 푼푼치 못해 택시를 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뻐스편에 왔다가 이곳에서 하루밤을 묵어야 했다. 1995년 11월 당시만 해도 <<선경대자연풍경유람구 자금투자합작건설항목설계도>>에 보면 뻐스정류소 길남쪽켠 한전을 파고 인공호수 선경호(仙景湖)를 만들고 길북쪽에도 못을 만들고 수영장을 앉힌다는것이다. 그리고 못옆에다가 관광객들이 주숙할수 있는 호텔을 지을 타산으로 불도젤로 땅을 한길 파놓았었다.

뻐스는 한영수씨하고 나를 길옆에 내려놓고 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달려갔다. 선경대로 들어가는 산언덕 중턱에 선경대접대실과 가지런히 기다란 벽돌집이 추녀가 들린 기와지붕을 이고 서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몰몰 피여오르고있었다. 큰길을 꺾어서 언덕길을 절반가량 올라가자 갑자기 개가 컹컹 짖더니 뒤미처 젊은 청년 둘이 벽돌집에서 나와 반겨주었다.

때가 11월이라 산은 단풍이 들어 울긋불긋했다. 나는 한영수씨와 함께 락엽이 깔린 숲길을 즈려밟으면서 때아닌 유람길에 올랐다. 비록 관광객들의 걸음이 끊기긴 했어도 잠풍한 가을날 타는 단풍을 바라보는 호젓한 걸음이 훨씬 마음을 흥분시켰다.

차를 타고 선경대를 여러번 지나쳤어도 몰랐었는데 류동하골안 막치기에 몸을 잠그니 봉우리마다 절승이고 바위마다 기암이였다. 참으로 <<여러 신선들이 노니던 천하의 제일 선경>>이라기에 손색이 없었다. 고려봉(高麗峰), 락타봉(駱駝峰), 미경봉(美景峰), 금귀봉(金龜峰), 독수봉(獨秀峰), 삼형제봉―천태만상 조물주의 재간을 뽐내는 봉우리마다엔 아름다운 전설이 깃들어있어서 보는 눈을 새삼스럽게 했다. 더욱 감명을 일으키는것은 북두칠성절당(北斗七星佛廟) 자리였다. 금귀봉아래 고려봉으로 오르는 언덕을 가로막아선 절벽아래 펑퍼짐한 공지가 바로 예전의 절터였다고 한다. 높이가 24메터, 길이가 46메터나 되는 깎아지른 절벽 동쪽 귀퉁이 한모서리에 <<북두칠성불묘 유지(北斗七星佛廟 遺址)>>라고 글을 새긴것이 보였다. 절벽아래의 공지는 너비가 52메터, 길이가 70메터인데 바로 여기에 절이 섰더란다. 아직도 집 기초돌과 구들장이 보였다.

그 옛절터앞에 섰노라니 어린 시절의 한토막이 생생히 되살아왔다. 내 고향 북대촌 6소조에서 중남으로 가는 해란강역에 외따로운 초가집이 있었다. 거기에 비구니가 살고있었다. 나는 배가 아프면 비구니할머니한테 가서 병을 보이군 했었다. 할머니는 념불을 하면서 입쌀을 세여 약 대용으로 먹이고 손으로 배를 어루만져주었다. 갈 때는 밸이 비탈리듯이 동통이 심했다가도 할머니한테 가면 가신듯 나아지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촌혁명위원회에서는 그 할머니를 투쟁했다. 하지만 나의 모친은 남몰래 할머니를 찾아가서 나의 병을 보이군 했었다.

무당녀인을 양어머니로 삼았었고 또 칠성이라는 애명을 가졌던 나는 비구니의 따스한 손길에 다사한 병을 이기고 용케 자라났던것이다. 그래서인지 칠성묘앞에 서니 당년의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듯한 안온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조사증실한데 의하면 이 절은 1777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식 집구조의 절 한채가 있었는데 처음에 여기에 거주한 중은 누구인지 바이 알길이 없고 하홍락(何洪洛), 유희춘(兪熙春), 황정숙(黃貞淑 녀) 등 세 중이 불도를 닦았다는 사람들의 기억이 살아있을뿐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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