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2월말 밤이었다. 늦은 시간 집안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가냘프게 들려왔다. 집에서 기르고 있는 고양이 울음은 아니었다. 낯선 새끼 고양이의 울음 같아 마당으로 나갔다. 대문 밖 담장 아래서 아주 조그만 새끼고양이가 울고 있었다. 집을 잃고 헤매는 새끼고양이의 모습이 불쌍해 얼른 붙잡았다. 새끼고양이는 그러기를 바랬다는 듯이 공손했다. 대문 안으로 안고 들어왔다. 목에 방울이 달린 예쁜 목사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기르다가 버리고 간 것 같았다.

시골도 아닌 도시에서는 애완동물을 기른다는 게 어려운 일이다. 이웃집 눈치도 따갑거니와 짐승의 오물 처리도 문제다. 아파트나 연립 등 다세대 같은 공동주택에서는 더군다나 거의 불가능하다. 고양이는 더더욱 그러하다.

아마도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귀엽기도 하고 호기심도 나고 하여 분양을 받아서 기르다가 여의치 않자 동네에서 고양이 집으로 소문난 우리 집 대문 앞에 슬그머니 놓아두고 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당시 우리 집엔 여러 마리의 고양이가 차 사고로 죽거나 또는 가출하여 세 마리만 남아있을 때라 한 마리 더 늘어난다는 게 그리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방으로 안고 들어와 자세히 살펴보니 토실토실한 게 아주 귀엽게 생겼다. 그리고 수놈이라 훗날 번식 걱정을 덜게 되었다고 식구들은 몹시 좋아했다.

식구들 모두가 가끔이라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몹시 고양이를 귀여워했다. 요사이는 아마도 고양이가 없다면 심심하고 쓸쓸하여 세상 살아가는 맛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씩씩하게 생겼다고 딸애는 <흑(黑)범>이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

지난 해 여름 아내가 평생 첫 해외 나들이로 중국 곤명으로 관광을 떠나게 되었다. 3박 4일의 일정이었다. 아내는 젖먹이 아이를 두고 가는 마음으로 근심스러워 하면서 식구들에게 고양이 부탁을 했다. 아내는 고양이를 막내 자식처럼 귀여워해 주었다. 때로는 업어 주기도 했고, 고양이도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가만히 매달려 있기도 했다. 매일 시장의 생선 가게에 가서 버리는 생선 토막을 얻어다가 깨끗이 씻어 튀겨도 주고 갖은 양념을 다해 찜해서 주기도 했으니 말 못하는 짐승이라지만 아내를 제 엄마처럼 따랐다. 밖에 나갔다가 골목길을 돌아 대문을 열고 들어서기도 전에 예민한 후각과 청각으로 먼저 알고 분합문을 나가 마당에서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아내가 집을 떠난 그 다음 날 ‘흑범’이 까닭도 없이 가출을 했다. 고양이는 야행성(夜行性) 동물이므로 혹시나 하여 다음 날 밤 ‘흑범’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흑범’은 보이지 않았다. 가끔 으슥한 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인기척에 놀라 쏜살같이 사라지는 낯선 고양이만 보일 뿐이었다.

4일 후 아내가 돌아왔다. 분합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내에게 첫 인사로 ‘흑범’이 가출하여 들어오지 않는다고 전해 주었다. 아내는 내색은 없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속상해 할까. 혹시 들어오겠지 하는 기대 심리에 아주 좌절하는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없는 동안 고양이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느냐?” 하고 타박 아닌 타박을 한다. 서운하고 불쌍하고 걱정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또 하루가 지나도 ‘흑범’은 돌아오지 않았다. 늦은 밤 골목길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지만 감감무소식 이었다.

쓰레기를 버리는 날 밤이면 온 동네 고양이가 무리로 돌아다닌다. 봉투 속의 먹이를 꺼내 먹기 위해서다. 주인의 버림을 받은 고양이는 그렇게라도 먹이를 찾아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아내는 밤거리를 헤맸다. 어느 날 밤인가 자다가 일어나 보니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새벽 1시가 넘어서야 피곤한 모습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오늘밤도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며 찾아다니다가 돌아왔겠지 하고 생각하며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젠 없어진 거야. 죽지 않았으면 길눈이 어두워 집을 잃고 멀리로 떠나갔어. 이제는 생각을 지워 버리고 더는 찾지 말아요.”

또 나는 가끔 이런 말도 했다. 장마철은 다가오고 잠자리도 없고 먹이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그렇게 비참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흑범’에게는 더 행복하지 않겠느냐고. 그래도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짐승은 그렇게 자연에서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는 게 더 행복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또 꼭 살아 있을 거란다.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나는 감히 ‘흑범’의 죽음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꼭 살아 있을 것이며,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그런 기대감을 갖고 어두운 밤이면 혹시나 하며 골목길을 기웃거린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이 시각에도 온 집 식구들은 ‘흑범’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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