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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가 강영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장수혁씨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들이 눈앞에 그렇게도 진하게 떠오른다. 그 사람은 한줄기 강한 빛처럼 나를 밝혀주었으니까. 키도 껑충하고 손가락도 길죽한 남자, 아리송하면서도 퇴페하다는 느낌이 들게 하기도 하는 그 남자가 나를 자오록하면서도 푸르스름한 안개속에서 갈팡질팡 헤매게 했다.

그때 나는 a대 2학년생이였고. 남자친구 윤형주 역시 같은 학교 2학년생이였다. 어느 날 형주가 웬 키가 껑충한 남자를 데리고 왔다.

《n대 수재야, 장수혁. 나와 제일 절친한 사이거든! 고중시절 우린 3년동안 줄곧 한 책상이였어.》

《강희정이야, 지금 윤형주의 반쪽임. 나중에도 변함없음.》

형주는 벌씬 웃으며 정겹게 나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왼손을 오른손보다 더 령활하게 쓰는편이였다. 그 날, 나는 태여나서 처음으로 남자에게 주동적으로 손을 내밀었었다.

그런데 이 껑충한 남자는 되려 자신의 두 손을 바지궤춤에 찔러넣으며 조용하게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라 낯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가느다란 나의 왼손 손가락들이 반공중에서 뻣뻣해남을 느꼈다.

《가자, 우리. 날씨도 엄청 더운데 해변가에 가서 시원한 맥주라도 쭈—욱— 마시자!》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린 사람은 형주였다.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주동적으로 비굴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 껑충한 남자는 거절했다. 진짜 무지 쪽 팔렸다. 손을 내밀었던 그 순간을 당금이라도 되돌리지 못한다는 현실이 가증스럽기까지 하였다. 해변가로 가는 동안 형주와 껑충한 남자는 그냥 얘기를 나누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묵묵히 길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노오란 금덩어리가 길바닥에 없다는걸 불보듯 뻔히 알면서도.

그 날, 나는 술을 많이 마셨다. 1원짜리 동전 한잎 갖고서 형주와 내기를 하면서. 숙녀티라곤 손톱눈만큼도 찾아볼수 없었을거다. 평소와는 완전 딴판이였다. 기실 나는 내성적이면서도 렬등의식이 강한 편이였다. 최소한 형주를 만나기 전까지는. 형주에게 나는 온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자신이 줄곧 못난이라고 생각했다. 멋진 글을 제외하고는 남들의 눈에 확 뜨이는데가 없으니까. 허나 형주는 아니였다. 미남자인데다가 재주 또한 많다. 당연 수많은 녀학생들의 시선을 모으는 초점인물이였다. 그러고 보면 결국 난 행운아였다. 최소한 그 녀학생들의 질투 어린 시선속에서는.

아마 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거다. 나와 형주는 두갈래의 길을 걷던데로부터 한갈래의 길을 걸었다. 허나 나는 이름못할 리유로 가슴이 떨리거나 파도가 이는 그런 설레임만은 조금도 느낄수가 없었다. 허다한 대학생들이 련애하는것처럼 그저 같이 밥 먹고 같이 저녁자습 다니고 저녁자습 끝나면 같이 영화 보러가기도 하고 주말이면 같이 거리에 나가 옷이랑 사기도 하는게 전부였다. 이런 소비는 모두 형주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이였다.

나는 응당 이런 현실에 만족을 느껴야 했었다. 허나 껑충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날, 나와 수혁씨는 두번 다시 서로 상대를 쳐다보지 않았었다. 다만 술을 마셨다. 처음엔 나와 형주, 후엔 형주와 수혁씨. 허나 나와 수혁씨는 단 한방울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

모두가 많이 마셨지만 그래도 주인행세 하느라 제일 많이 마신 사람은 형주였다. 어느덧 둥근 달님이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뻣뻣했던 그 왼손을 떠올리며 나도 잔을 들면 무조건 건배했다. 결국 상에 엎드린 나는 몸을 꼼짝할수가 없었다. 비록 의식은 있었지만.

나를 업고 돌아온 사람은 형주가 아닌 수혁씨였다. 그의 등에 엎드린 나는 바다비린내와 땀냄새, 술냄새로 범벅이 된 그의 체취를 느꼈다. 그의 머리에선 은은한 박하냄새가 풍겨왔다. 그 날 처음으로 나와 수혁씨는 그렇게 서로 살을 부딪쳤다.

나는 내 자신을 의심했다. 혹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냐구? 새로운것만 좋아하는건 아니냐구? 허나 몇년이 지난 다음에야 자신이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란걸 증명하였다. 수혁씨에 대한 내 마음은 시종여일했다. 어쩜 집착이라고 하는편이 더욱 적합할거다. 그런 사랑은 덩굴과 나무처럼 일생동안 서로 이어졌다. 지어 노랑꽃이 떨어져 시들어버려도 나는 이런 남자야말로 나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겼다.


2

수혁씨가 n대로 되돌아간후 난 형주에게 무조건 헤여지자고 하였다.

실은 생기지 말아야 할 일인데. 형주는 몇번이나 곱씹어 물었다.

《대체 리유가 뭐야? 우린 서로 사랑했잖아, 서로 사랑하잖아, 사랑할거라 했었잖아. 다들 널 복덩이라구 하는거 너 정말 모르는건 아니지?》

한번 결정 내리면 여유가 없는 내 성질을 손금보듯 환히 꿰뚫은 형주인지라 남자의 자존심마저 깡그리 버리고 내 앞에 무릎까지 털썩 꿇었다.

《없어, 리유. 이젠 사랑이 되지가 않아.》

애원에 젖은 형주의 시선이 너무 안스러워 나는 다리를 구부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녀자 마음 한번 변하는 일이 이처럼 공포적일수가? 마음이 약한건 여자라 했는데, 녀자가 눈물이라고 했는데 …)

《왜? 왜? 왜냐구?》

히스테리에 가까운 물음에 나는 이마살을 찌프리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없어, 리유.》

《왜??》

《새로운 사랑이 생겼어.》

순간 왼쪽뺨이 뜨거워났다. 형주는 황소처럼 씩씩거리더니 찬바람을 씽하니 일구며 가버렸다.

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나서 처음으로 나를 때린 사람은 바로 형주였다. 하긴 생각밖의 일이라 피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허나 차라리 이런 방법으로 형주의 마음이 순간이나마 다소 편안해지길 바보처럼 간절히 원하기도 했다. 얼굴은 금방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침실로 돌아오자 바람으로 찬물로 적신 수건으로 한참 대고 있다가 거울에 비쳐보았다. 거울속에는 차겁고도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만약 장수혁씨가 곁에 있다면 이 무표정한 얼굴이 활짝 핀 백합으로 변할지도 모를텐데.

그때로부터 장수혁씨에게 편지를 날렸다. 이름모를 녀자의 신분으로.
난 그가 형주랑 한고향이란걸 알기에 그들이 다니던 중학교의 둘레에 라이라크꽃이 만발한다는 일도 그가 층집꼭대기에서 피리 불기를 즐겼다는 일도 손금보듯 환히 알고 있었다. 이 모든걸 형주가 전에 내게 남김없이 얘기했었으니까.

편지에 난 자신이 중학시절 그를 사모했던 같은 중학교 다녔던 녀자애라고, 그때 그가 내곁을 지나칠때면 라이라크꽃향기가 풍겼었다고, 층집꼭대기에서 피리부는 모습을 보기 좋아했었다고 얘기했다.

허나 이 모든건 나의 상상일뿐이였다.

그는 회답편지에 많이 물었다. 편지내용이 정말이냐구? 그럼 새하얀 샤쯔입고 새까만 책가방을 메고 다니던 그 녀자애가 아니냐구, 어깨너머까지 머리칼을 기르지 않았냐구, 늘 학교근처의 교회에 다니던 그 녀자애가 아니냐구?

예감에 그도 나처럼 어느 누군가를 짝사랑하는것 같았다.

그 녀자애가 바로 나라고 알려주었다.

이렇게 편지는 그냥 오갔다. 해가 가고 달이 감에 따라 우리 둘의 편지내용은 점점 길어졌다. 먹고 입고 자고 노는 일까지도 하늘의 변화까지도 심지어 내가 어느날에 어느 리발관에 가서 머리를 깎았단 일까지도 모두 아낌없이 알려주었다.

그가 한번 만나봤으면 하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건 안돼, 이제 사귄지 반년인데. 사진 보내는게 어떨가? 좀 촌스럽기는 해도…》

나의 건의가 유효였다. 오래잖아 장수혁씨의 사진을 받았다. 역시 미남자였다. 어떤 구라파식건물의 계단에 앉아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웅숭깊은 시선에 삽시에 내 마음이 설레였다. 그 시선은 하나의 깊은 우물처럼 나를 단꺼번에 깊은 곳으로 쭈—욱— 빨아들였다. 다시는 헤여나올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난 나의 사진을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윤형주의 녀자친구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알려줄수가 없었다.

후에 그에게 보내준건 한 침실의 친구 민희연의 사진이였다. 민희연은 키가 170센치메터인데다가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을 가진 우리 중문학부의 꽃이였다. 아주 전형적인 미인인데다가 그 사진 또한 정중하게 사진관에 가서 찍은거였다. 이 세상 남자들치고 누가 미모의 녀인들을 좋아하지 않을가? 아님 남자가 미인계엔 두손 든다는 옛말이 있을수가 없는게 아닌가?

예상대로 회답편지가 얼른 왔다. 이번엔 편지를 속달편지였다. 어쩜 이렇게 많이 변했냐였다.

그가 새빠알간 거짓말을 한다는걸 나는 잘 안다. 늘 교회에 다니던 녀자애와 민희연이 한 사람이 아니란걸 불 보듯 뻔히 알지만 민희연의 미모에 매료되였다는걸.

우린 여전히 계속 편지거래를 했다. 그의 글씨는 껑충한 몸체처럼 정말 매끈했다. 외려 나의 글씨가 남자들처럼 시원스럽고 멋스러웠다. 나는 자신의 진실한 신분을 차마 까밝힐수가 없었다. 그를 영원히 잃을 두려움때문에 그가 다만 내 거울속의 백합꽃이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난 만족할수가 있으니까.

대학 4학년, 형주는 또 새 녀자친구를 사귀였다. 그 뒤로 그의 옆의 녀주인공들은 주마등처럼 많이도 바뀌였다. 오늘은 이 사람, 래일은 저 사람. 그의 녀자친구들은 영원히 내 스타일이였다. 대개가 여위고 키 크고 머리칼은 짧고 눈은 크고 얼굴은 창백하였다. 녀자친구를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속 한구석이 알알해났다. 형주는 분명 그녀들을 나로 간주하고 있었다.

하긴 난 죄 지은 사람이다. 형주를 배반했으니.

우리사이는 당연 낯설어졌다. 걸어가다가 마주칠 때 웃으며 어디 가냐구 묻는 나의 말에 형주는 차겁게 힐끗 쳐다보고는 쌩하니 지나쳐버린다. 우리 사이엔 분명 산이 가로막혀 있었고 강이 가로놓여져 있었다. 그 어떤 다리로도 만날수가 없도록.

떠나가는 형주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나는 길옆에 쪼크리고 앉는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나를 제일 사랑하는 남자가 누구인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헌데 내가 그 사람을 헌신짝처럼 휭하니 내버리고 어쩜 존재하지도 않는 꿈속의 사랑을 찾아 무작정 달려가고 있으니, 내 그 편지로 그 웅숭깊은 수혁씨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니.

그런데 어느날 장수혁씨가 문득 나타났다. 그의 뜻밖의 출현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어지러운 꿈속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였다. 어쩜 이렇게 나타날수가.

어느 토요일날 저녁, 형주가 느닷없이 날 찾으러 숙소에 왔다.

《희정아, 수혁이 왔다. 우리 술 마시러 가자.》

이는 꼭 2년만의 우리의 두번째 만남이였다. 이젠 난 더는 형주의 녀자친구가 아니다. 난 장수혁씨때문에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어찌 자신과 질긴 편지거래를 하는 사람이 나라는걸 알수 있겠는가?

어느 편지에선가 내가 이렇게 써보낸적 있었다.

《처마밑에서 사는 제비들처럼 우리가 늘 만날수만 있다면…》

《따뜻한 봄날이라 매일매일 포근한걸.》

그의 대답이였다.

일생중에서 제일 아름다왔던 봄날은 아마 그때일거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장수혁? 편지속의 애인, 비록 그의 편지를 받고었지만 나는 무한한 행복과 만족을 느꼈다.

그런데 이 시각 그는 바로 이 층집밑에 서있다. 그는 바로 내 곁에 서있다. 그가 왔다.

홀연 머리속에 무엇인가 스치웠다. 그는 누구때문에 왔을가? 맞다, 민희연. 민희연은 지금 창가에 서서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늘 자신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즐겼다.

《희연아, 가자. 술 마시러 가자.》

이렇게 금방 실련한 민희연을 장수혁씨앞에 내세웠다.

장수혁의 두 눈은 분명 빛이 났다. 난 작은 꽃이 그려져 있는 면치마를 입고 하늘 쳐다보며 천천히 걸었다. 2년전이랑 달라진게 없었다. 우리 넷은 또 해변가에 갔다.

《강희정씨, 안녕?》

장수혁씨의 인사였다.

순간 자신의 심장박동이 빨라짐을 느꼈으나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곁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장수혁씨에게 완전 깊이 푹 빠졌다는걸 눈치채게 하는게 부담스러워서.

《안녕? 장수혁씨.》

이번에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우리 사이엔 민희연과 형주가 앉아있었다. 그들 둘은 웃음꽃을 피우며 얘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민희연은 수혁에게 꽤 마음이 동한것 같았다.

《희정아, 이렇게 멋진 남자 왜 나한테 일찍 소개시키지 않았냐?》

장수혁씨의 시선은 민수연의 몸에 정지했다. 희연이도 눈인사 했다. 그렇다. 수혁씨는 끝내 자신의 꿈속의 사랑을 만났다. 허나 민희연이는 편지를 쓴 그 녀자가 아니다.

그들 둘은 눈으로 많고많은것을 얘기했다. 이 시각 난 다만 그들에게 드레스를 만들어준 사람일뿐이다.

본디 남자들은 모두 체격이 미끈한, 얼굴이 예쁘장한 녀자들을 좋아하나보다. 그 마음씨를 사랑하는 일은 아마 그 뒤의 일인것 같았다.

이번에 술을 제일 많이 마신 사람은 나뿐이였다. 장수혁은 민희연과 바다물속에 뛰여들어 수영하였다. 첫눈에 반해버린 그들은 장난치느라 나와 형주의 존재를 망각한것 같았다. 하긴 그들의 명랑한 웃음소리는 나와는 티끌만한 관계도 없다. 형주는 내 곁에 앉아있었다.

《희정아, 너가 생겼다던 그 사랑이 수혁이였어?》

난 깜짝 놀랐다. 몸을 돌려 그토록 익숙했던 형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날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료해하기에 나의 속마음까지 꿰뚫을수 있는걸가?

나는 바로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앞에 놓여진 잔속에 담겨진 술을 쭈—욱— 들이켰다. 시원한 술이 목울대를 넘어가면서  나는 나의 사랑도 나의 곁을 스쳐서 지나가 버렸다는걸 가슴 아프게 느꼈다.


3


그 뒤로 난 장수혁씨에게 더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 때 또한 졸업을 앞두고 석달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나의 사랑은 아주 황당하게 시작했다가 결국엔 고독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민희연은 a성과 n성을 오가기 시작했다. 적어서 한주일에 한번씩.

희연이와 장수혁씨가 사랑의 려정을 시작했단걸 알고 있다.

《희정아, 네가 진짜 고마워. 너 아니였음 내가 어찌 이런 사랑을 얻을수가 있었겠니? 난 수혁씨가 너무 좋다. 난 수혁씨랑 진짜 결혼하고 싶어.》

장수혁씨도 나에게 더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 우리 사이는 완전 진공상태였다. 그는 정말 민희연이를 나로 생각했을가? 어쩜 그럴수가? 우리는 서로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민희연이는 하늘에서 자유자재로 떠다니는 꽃구름인데 정말 그런 사람이란걸 보아내지 못했단 말인가? 이상한건 그가 침묵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때 희연이 사진을 그에게 보내주지 말았을걸 하고 바보처럼 후회도 해보았고 그때 희연일 데리고 해변가에 가지 말았을걸 하고 입술 깨물며 후회도 해보았다.

어쨌든 모든건 이미 틀려졌다. 어쩌면 계속 틀려지는게 더 나을상싶기도 했다.

희연이가 돌아와서 내 왼쪽귀를 간지럽힌다.

《희정아, 나 그 사람이랑 키—스—했다.》

처마밑에서 사는 제비들처럼 늘 만날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남자가 결국엔 내 눈앞에 있는 이 녀자의 미모에 약해지고 말았다는것까지는 시인하기가 너무 싫었다. 솔직히 희연인 하늘이 선사해준 예쁜 얼굴과 미끈한 체격 그게 전부였다. 장수혁씨만큼은 안 그럴거라고 괜히 기대까지 했으며 장수혁씨는 다른 남자들과 다를거라고 믿기까지 했었는데. 그는 분명 심금을 울려주는 사랑을 기다린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희연이와 키스까지 했으니.

나는 솔직히 진심으로 희연일 축복해줄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후닥닥 일어나 곧추 베란다로 뛰여갔다. 뜨거운 눈물이 끊어진 구슬처럼 량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렸다.

3개월후, 나는 b성에 갔다. 그때로부터 그 누구와도 련계하지 않았다.

윤형주는 출국했고 민희연인 n성으로 갔다. 장수혁이란 이름을 이제는 입밖에 내기조차 싫었다. 그건 다만 꿈이였으니까. 꿈속의 꽃들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져 언녕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3년후, 난 문득 형주의 메일을 받았다. 그와 신부의 결혼사진이였다. 그 신부의 얼굴도 나처럼 창백했고 여위였다. 지어 나처럼 짧은 머리칼이였고 두 눈은 커다랗고 쌍겹이였다.

나도 이젠 모국제화장품회사의 대리다. 벤츠도 있고 2층으로 된 자신의 아빠트도 있고 정기적으로 미용원에 가서 미용도 한다. 남자친구도 서넛 있지만 그저 얘기나 하는 정도이지 사랑이란 단어는 뻥긋도 하지 않는 사이였다.

그들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내가 여직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잊을수 없는 사람은 바로 숙취한 나를 학교숙소앞까지 업고 갔던 그 남자—장수혁이다. 살과 살을 서로 부비고 편지속에서 서로 사랑의 맹세를 했던 그 남자를 여직 내 기억속에서 깨끗이 지울수가 없었다.

26세때, 나는 싸이에 처음으로 《장수혁,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줄 아니?》란 글줄을 올렸다.

꼬박 7년이 지난 후에야 난 대담하게 나설수가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질수가 있었다. 어떤 한 사람을 사랑했다는게, 그 사람을 가슴으로 사랑했다는게 나의 자랑이라고 생각할수가 있었으니.


4


여전히 만물이 소생하는 따뜻한 봄날이였다. 나는 a성에 출장가게 되였다.

몇년만이지? 나는 다시 그 익숙한 길들을 걸어보았고 그 익숙한 해변가에 가보았고 라이라크꽃이 만발한 교정에도 가보았다.

지금은 예전의 그 일들을 누구랑 얘기할수 있지?

예전의 숙소문어구에 예전처럼 쪼크리고 앉아 형주에게 전화했다. 국제전화다. 그는 미국의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텐데.

《맞춰봐, 나 지금 어데 있는지.》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메여왔다. 몇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난 형주가 아직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수가 있었다. 내가 아직도 그 장수혁씨를 짝사랑하듯이. 사랑이 대체 뭐지? 무슨 악연이길래 어떤 사람은 빚지면서 살고 어떤 사람은 갚으면서 사는거지?

《너 지금 a대 숙소문앞에 또 예전처럼 쪼크리고 앉아있지? 머리는 두 손으로 가리고.》

형주의 목소리도 조금은 갈린듯싶었다.

7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나를 사랑했던 사람은 내가 a대의 숙소문앞에 있다는것도 내가 쪼크리고 앉아있다는것도 지어 내가 두손으로 머리를 가리고있다는것도 알고있지 않는가? 홀연 나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만약 내게 래생이 있다면 꼭 첫사랑을 소중히 간직할거라고 다짐하면서. 형주가 나에게 주었던 모든것은 그렇듯 아름답고 순수했는데 난 혼자 고집스레 전혀 보이지도 않는 허상을 찾아 갈팡질팡 헤맸다. 결국엔 두 손도 텅텅 빈 상태고 마음도 텅텅 빈 성루였다.

나는 a성에 7일간 머물렀다.

7일째 되는 날 나는 a성을 떠났다. 지난 모든 추억과도 고별했다. 젊음의 꿈, 그건 다만, 다만 꿈이였다. 이번 내가 a성에 일부러 온것은 미련때문인것이 아니라 리별때문이였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또 봄바람 산들산들 불어오는 계절이 되였다. 난 S시에 물건 구입하러 갔다. 5성급 《평화호텔》에 들었다. 거기서 회의가 있다고 했기에. 호텔카운터에 놓인 기록부는 두개였다. 무심결에 기록부에 적혀진 글자를 본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쩜 이럴수가?

《장수혁》

장수혁! 장수혁! 장수혁!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두 눈을 비비고 몇번이고 확인해보았다. 왼손으로 오른팔을 꼬집어 보았다. 또 만나다니?

트렁크를 들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엘리베터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7년이란 세월동안 내 마음속 구석에 석상처럼 떡 버티고 꿈쩍 않던 그 사람이 바로 내 눈앞에 서있었다. 눈길은 여전했다. 변한게 없었다. 우린 실히 7분동안은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말없이 나의 트렁크를 받아들었다. 내가 출장갔다 돌아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나에게서 시종 눈길을 떼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터가 서지 말고 영원히 이렇게 갔으면 하고 황당한 기도도 잠간 했다. 이 세상에 다만 우리 둘만 있었으면 하는 그런 간절한 바람에서. 오래동안 정지해있었던 내 가슴이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강희정씨.》

수혁씨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허나 난 그의 이름을 부를수가 없었다. 주책없는 눈물이 흘러내릴가봐.

《결혼했어?》

《아니.》

이사이로 겨우 짜낸건 달랑 한마디였다.

《그…럼… 그쪽은?》

입밖에 내고서는 괜한 물음을 물었다는 생각이 내 머리속을 꽉 채웠다. 그 답은 나를 충분히 질식시킬수 있으니. 벌써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27세인 이 남자가, 이렇듯 훌륭한 남자가 어찌 아릿다운 부인이 없을수가 있단 말인가. 아마 애도 있겠는걸.

《아니.》

그의 대답도 나와 똑같을거라고는 예기치 못했던 일이였다.

그제야 나는 바보처럼 초점 잃은 눈으로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았다. 이때 엘레베터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는 나의 손을 꽉 잡고 엘리베터를 타고 다시 기록부가 놓여진 곳으로 내려왔다.

《강희정. 이 글씨 나 7년전에 보았었어. 그 글들 매일 나의 편지함에 들어있었어. 알려줄게 있는데 내가 다니던 중학교엔 라이라크꽃이 없구, 나 또한 늘 수도원 다니던 녀자애를 좋아한적도 없구, 민희연 그 녀자는 그 편지들의 주인이 아니야. 내가 누군가의 싸이트를 봤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좋아했었다고…》

그는 계속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그의 입은 이미 막혔다. 나의 두 손에 의해. 호텔의 복도에서,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호텔의 복도에서 나는 두 팔로 그를 꼬—옥 그러안았다. 혹 내가 손을 놓기만 하면 그가 훌 날아가기라도 할가봐. 이젠 내 사랑을 두번 다시 놓치진 않을거다. 억천만번 틀린다해도 나는 이 사람을 서슴없이 택할거다. 이 겁(劫)은 나를 좌우지하니까.

내가 7년이나 기다렸던 사람이 시작부터 편지의 주인이 나라는것을 알았단다. 나처럼 첫눈에 나를 사랑하게 되였단다. 그런 리유로 내가 악수하자고 내밀었던 손을 잡을 용기가 없었단다. 자신이 나와 형주에게 그 어떤 상처를 주면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그가 난생처음으로 업었던 녀자도 바로 나였단다. 민희연이 석달동안 미친듯이 그를 쫓아다녔지만 결국 원점으로 돌아갔단다. 그가 다시 날 찾으러 a성에 갔을 때 난 이미 a성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단다…

그날 밤, 우리 둘은 손을 꼭 잡고 창가에 나란히 서서 은은한 장미의 향기를 맡았다. 밤하늘엔 쟁반같은 둥근 달이 걸려있었다.

《지금 이 순간 꿈 아니지? 아니지?》

나는 똑같은 물음을 몇번이나 되뇌이였다. 그렇다. 꿈일가봐 무지 두렵다. 날이 밝으면 그가 내 시야속에서 사라질가봐도 진짜 두렵다.

《날 꼬집어 봐. 아프면 내가 소리 지를거 아냐. 그럼 꿈인지 생시인지 확신이 서잖어.》

그는 두 손으로 나의 어깨를 잡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주아주 천천히 그는 나를 자신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심장박동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나의 오른쪽귀가 간지러워났다.

《사랑한다, 강희정!》

이 일곱글자를 난 7년이란 세월동안 기다렸었다. 짜장 365일 곱하기 7일동안.

밤하늘 별들이 깜박이며 소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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