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길림 강영애 소설가
지헌씨와의 첫 만남은 B시의 《아름다운 날들》커피숍에서였다. 그때 나는 ××대학 3학년이였고, 내 말을 황후마마의 말처럼 꼬박꼬박 잘 따라주는 남자친구 현수는 연구생공부를 하고있는 중이였다.

그 날저녁도 나는 《아름다운 날들》에 가자고 현수를 못살게 굴었다. 거기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종 향수였다. 노래도 감상하면서 공부로 인한 긴장감도 다소 풀 수 있으니. 허나 현수는 아니였다. 그저 커피잔만 꾹 잡고서 무의미하게 앉아 있기만 하였다. 꼭 벌을 받는 것처럼. 나의 커피잔이 굽 나기가 바쁘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의 손목을 끌고는 커피숍을 나서 군 했다.

그 날, 커피숍에서는 모자르트의 《화사의 행존자》를 틀어놓았다. 이 노래의 멜로디는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아주 우울했었다. 내가 제일 즐기는 노래였다.

느닷없이 나의 시야에 마치 이 노래처럼 아주 우울하면서도 아주 부드러워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마흔좌우 되여 보이는, 성숙의 미가 흘러 넘치는 멋진 남자였다. 그 남자의 맞은 편 의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새까만 남자휴대용가죽가방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맞은 편에 앉는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남자는 완전히 그 노래속에 휘말려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아주 가볍고도 절주있게 두드렸다.

문득 그 남자를 놀려 보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치밀어 올랐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현수와도 아무런 말도 없이 곧장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이 자리에 앉아도 괜―찮을가요?》

아주 부드러웠지만 너무 당돌한 나의 말에 그는 고개를 돌려 힐끗 쳐다 보더니 맞은 편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가방을 옆자리에 가져갔다.

맞은편에 앉은 나와는 이야기를 나눌 의향이 꼬물만치도 없다는 듯 시선을 인차 다른 곳으로 옮겼다.

종래로 랭대를 받은 적 없던 나였다. 짜증이 났다.

(쳇, 뭘 그리 잘난 척 하는데? 당신의 가면구 따위는 벗겨낼 수도 없는 그런 하찮은 존재로 착각하셔? 천만엡)

보통 남자에게는 모두 두개의 가면구가 있다는 걸 잘 알고있는 나니까.

《저기요, 어디서 꼭 만났던 것 같은데…요?》

《글쎄요.》

간단한 대답을 한 그는 나한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꼭 어디선가 뵜어요. 아, 어제 이곳에 오셨죠!》

그는 다시 고개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아뇨.》

《아, 맞다! 그저께, 그저께 이곳에 오셨었죠!》

《아뇨!》

《맞어 맞어, 그그저께 당신은 맨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었죠!》

그는 의아해진 눈길로 나를 정시했다.

《좋아요. 반대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마 제가 왔었는지도 모릅니다.》

《에 -, 그 봐요.》

내가 웃으면서 말하고 있을 때다. 현수가 내게로 걸어왔다.

《나영아, 너 지금 대체 뭐 하는 거니?》

《어? 어…, 나 지금 아는 사람 만났거든. 자리에서 잠깐만 나 기다려줄래?》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지헌씨를 쳐다보던 현수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남자친굽니까?》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또 인차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담담한 미소를 짓던 그는 웨이터를 불러서 결산하고 나서 곧바로 떠나려 했다.

《지금 가시는 거예요?》

《남자친구 곁으로 돌아가세요. 기다리고 있어요. 행복하세요!》

간단한 말 한 마디만 남기고 그는 어느 결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현수가 커피숍 한가운데 굳어진 듯 꼼짝 않고 망연히 서있는 나를 끌고 돌아가려 했다.

난 기어이 자리로 되돌아가서 맥주 몇병을 시켰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나를 현수는 조심스레 부축하였다. 갑자기 추워났다. 눈 가장자리에서 차가운 것이 흘러내렸다.

그때로부터 뭐라고 꼬집어 말할수 없는 고민을 느닷없이 느꼈다. 현수는 나한데 아주 잘 해주었다. 마치 전생에 나한데 엄청난 빚이라도 진것처럼.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현수는 내가 걱정 없이 평생을 기탁할 수 있는 훌륭한 남편감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지헌씨의 출현은 나로 하여금 눈앞이 환해지게 했다. 그는 아주 미더워 보였다. 마치 산꼭대기에 우뚝 치솟은 사시장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아무리 모진 바람이 분다 해도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많이 우울했지만 퇴페하지는 않았다. 그의 거동은 우아했지만 교오하지는 않았다. 그는 완전히 생활 속에 빠져있었다. 어쩐지 그의 이런 기질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이런 기질은 예로부터 몸에 지니고 있는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동안을 지나면서 이루어진것이다. 그를 다시 만날수 있길 학수고대했다. 또한 그토록 원했다. 어쩜 그도 마음속 깊이에는 나와 똑같은 갈망이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매일이다싶이 《아름다운 날들》에 갔다. 마치 잃어버린 오랜 옛 친구를 찾듯이 눈길은 그냥 그를 찾아 헤맸다.

어느 금요일저녁, 커피숍에서 밤 11시 반까지 기다렸었다. 기다림에 너무 지쳐버린 나는 실망을 안고서 돌아가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문 어구에 이르렀을 때다. 문득 커피숍으로 걸어오는 지헌씨가 눈에 띄였다. 문어구에 조각처럼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존재를 느끼고 조금은 놀라는 기색이였다.

《또 만났군요! 커피 마시고 싶은데 지갑을 가져오지 않아서…》

《그래? 내가 있으니까 마음놓고 마셔. 자, 그럼.》

그는 곧장 어쩜 일부러 그를 위해 남겨두기라도 한 자리, 커피숍 제일 구석진 곳에 쏘파 등받이로 주위와 분활시켜 놓기라도 한 것 같은, 독립적인 소천지가 형성된 아주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당신을 많이 찾았어요. 번마다 밤 11까지 기다렸었어요. 당신은 이곳에 늘 안 오시나 봐요?》

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식경 나를 바라보았다.

《매일 11시가 넘으면 이곳으로 오거든. 그때면 사람이 제일 적은 때니까.》

《당신은 사람 만나는 일이 두려우세요?》

묻고 나서야 나는 이 물음이 얼마나 유치한가를 깨달을수가 있었다. 내뱉은 말을 다시 주어 담지 못하니까.

《난 쥐도 무섭지가 않아. 사람 만나는 일이 두려운게 아니고 귀신 만나는 일이 두려워서 그래.》

나는 얼른 테이블 우에 놓여진 종이를 집어들었다. 구멍을 두 개 뚫은 다음 얼굴을 가렸다.

《으흐흐, 나는 마―귀―다!》

《어, 손들었어. 무서워! 제발 살려주세요, 마귀할머님!》

웃고있는 그를 한참 응시하던 나는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와 같이 있으면 그렇듯 미더우면서도 그렇듯 따스하고 또 아주 자유스러운 그런 감각이였다. 그의 눈길은 아주 드넓은 손바닥처럼 나를 살며시 들어 올려놓는 것 같았다. 그도 나를 흔상하였다. 하지만 나의 방종은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이미 나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이른 새벽, 둘은 나란히 커피숍을 나섰다. 바깥의 공기는 청신하면서도 시원했다. 은회색의 쏘나타가 자욱한 안개속에서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는 천천히 달렸다. 어느덧 학교 문어구에 이르렀다. 차에서 내리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저 둘이서 차를 탄 지금 이 상태로 앞을 향했으면, 열 몇개 학과목도 없고 엄엄한 지도교사도 없고 매일 걱정하시는 부모도 없고 나와 지헌씨만 있는 곳으로!

나는 저도 모르게 되뇌이였다.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이대로 나아갔으면…》

《나영아, 내려. 다 왔어.》

그는 가볍게 내 손을 도닥였다.

차에서 내린 나는 차창밖에 서있었다.

《저기요, 정말 가세요?》

《네가 원한다면.》

《우리 또 만날 거죠? 》

《네가 허락한다면.》

기대에 젖어있는 나의 시선을 마주하기가 안스러워서인지 시선을 확 트인 시가지로 옮겼다. 갑자기 나는 차창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그의 얼굴에 소리나게 뽀뽀하고는 몸을 돌려 앞으로 내달렸다. 뒤로 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치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이기라도 한듯.

나는 차츰 현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지헌씨와 같이 있기를 너무너무 원했다. 그가 안해도 있고 예닐곱살 된 딸애도 있다는걸 강건너 불보듯 빤히 알면서도. 이 모든것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 자신이 원하는 사랑에 충실하고 싶었다. 결코 현수가 싫은 건 아니다. 그는 아마 나중에 훌륭한 남편이 될것이다. 그는 너무나도 때이르게 내게 다가왔다. 최소한,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름다운 날들》에 가도 번마다 꼭 지헌씨를 만날수 있는 건 아니였다. 하지만 아주 내심하게 기다렸다. 황혼으로부터 자정까지. 자정으로부터 또 새벽까지. 마치 초췌해진 연인처럼. 허나 자신이 이렇게 변하는 것도 오히려 좋았다. 이런 일로 내 생활이 더 충실해지는것 같아서.

어떤 때는 진짜 운이 좋아 지헌씨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설탕도 넣지 않은 쓰디쓰면서도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미소지으며 골똘히 내 이야기를 듣군 했다. 그런 때가 나한데 있어서 정녕 제일 아름다운 나날이였던것 같았다.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세요?》

《내가 왜 집으로 가야하지?》

《안해가 집에서 애타게 기다릴텐데.》

《나에게 이런 질문 들이대는 넌 왜 학교로 돌아가지 않니?》

《그따위 과목들이 너무너무 싫으니까요.》

《너의 지도교사들도 널 애타게 기다릴텐데.》

지헌씨는 X시의 외자기업의약회사의 B시 업무부에서 직무를 맡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그의 회사에 가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그를 깜짝 놀라게 하고싶었다.

그 날, 나는 은회색 미니스카트를 골라 입었다. 미니스카트는 나의 미끈한 두 다리를 그대로 드러내였다. 나비형 선글라스를 걸고 새하얀 하이힐을 신은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배 그러안고 한참은 웃었다.

(지헌씨가 날 보면 어떤 표정일까? 첫마디 무슨 말을 할까?)

구라파식 고층건물에 들어서자 문지기가 례절스레 물었다.

《아가씨, 무슨 용건으로 오셨어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걸어가는 나를 보며 문지기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더는 나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

문지기의 거동을 보고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3층 경리실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지헌씨의 목소리를 들렸다.

《당신들 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그까짓 일도 제대로 처사 못하다니…?》

경리실의 문은 반쯤 열려져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수그리고 서있었다. 반듯한 정장을 입은 지헌씨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책상우로 홱 집어던졌다. 내가 문어구에서 언뜻 했는데 지헌씨의 눈에 띄였다. 그는 손을 저어 부하들더러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넌 왜 왔어?》

아주 시답지 않은 어조였다. 막 자리에 앉으려던 참이였는데.

《보…고파서…》

조금은 두려웠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였다.

의자에 앉을 수도 없었다. 예전에 비해 자못 위엄스러운 얼굴을 마주하면서.

《요즘 통 얼굴을 못 봐서…》

망연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내가 짜낸 건 겨우 이 한마디였다.

《여긴 사무실이야. 너 옷 입은 꼴 좀 봐. 회사 직원이였다면 언녕 짤렸어.》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 던졌다.

고개 숙여 치마를 내려다보던 나는 억울하기도 하고 화내는 지헌씨가 너무 두려웠다. 상심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슬피 울자 지헌씨는 당황했는지 얼른 문을 닫았다.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손수건을 건네 주었다.

《미안, 울지 말어. 사과할게.》

그는 서랍에서 아름다운 수정목걸이를 꺼내서 훌쩍거리고 있는 나에게 걸어주었다.

《예전에 선물 받은거야.》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던 나는 수정목걸이를 만져보았다.

《피, 저 주려고 부러 사신 거죠?》

《아냐, 다른 사람한데서 선물 받은거야. 기념으로 남기려고. … 나 이제 여기 떠나.》

떠난다는 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당장이라도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에.

《떠나신―다구요? 회의 가세요?》

《아니. X시 본부로 되돌아가는 거야.》

《그럼 영 B시 떠나가시는 거예요?》

뜨거운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럼 전, 전 어떡하죠? 네?》

《남자친구랑 행복하게 살아야지.》

《안 돼요 안― 돼. 안 돼요!》

《바보처럼 굴지마. 이 세상 그 어떤 행복도 타인한데 의지할 수는 없는 거야. 그런 말 있잖니? 산에 기대면 산이 무너지고 사람에게 기대면 사람이 넘어진댄다.》

그 후, 그는 정말 X시로 되돌아갔다.

떠나는 날에 나는 공항까지 그를 바래주었다. 너무 울어서 완전 눈물사람이 되였다.

그는 부드럽게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바보처럼 울지마.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야 해. 언젠가는 나도 늙어질 거야. 또 언젠가는 죽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힘 내. 너 웃는 모습이 제일 예뻐.》

《이 수정목걸이 저 위해 산 거죠? 그죠?》

그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헌씨는 떠나갔다. 난 예전으로 되돌아왔다.

현수는 매일 내 주위를 팽팽 돌아쳤다. 연구생공부를 끝내고 나와 결혼할 일들을 얘기했다.

난 사랑지상의 여자인가보다. 사업상에는 그 어떤 야망도 없었다.

현수는 이미 날 안해로 맞아드리려고 했고 모두들 또 OK이다. 나도 반대는 하지 않았다. 이 일은 결국 이렇게 정해졌다.

현수의 살뜰한 보살핌속에서 나는 전보다 혈색이 많이 좋아졌고 몸무게도 예전보다 많이 불어났다. 이런 자신을 늘 《누옆라 했다. 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날들》에 가지 않았다. 그곳에는 지헌씨의 체취가 너무 푹 슴배여 있어 멀리에서도 냄새가 물씬 나는것 같아서.

1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졸업은 코 앞에 닥쳤다.

어느 하루, 나와 현수는 B시의 이름난 고대명승지에 놀러갔다.

돌아올 때는 벌써 자정이 지났다. ××대학 서쪽문에 이르렀을 때이다.

숙취한 청년 셋이서 히죽거리며 비틀걸음으로 무작정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현수는 언녕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고있는 나를 보고 용기를 내서 그자들한테 담배를 한가치씩 건네주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형님여러분, 우린 ××대학 학생들입니다. 좀 봐주세요!》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담배가치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 셋중 하나가 갑자기 어두운 구석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난 끌려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애를 썼다. 그러던 도중에 입은 겉옷이 찢기면서 엷은 속옷이 드러났다.

현수가 나한테로 오려고 아득바득 했지만 헛수고였다. 사색이 되어 그 자리에 굳어져 있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현수가 풀썩 땅에 꿇어앉았다.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애원했다.

《형님, 제발 제 여자친구 놔주세요! 대신 제가 받겠습니다, 뭐든지. 제발!》

돌연 발생한 일에 그자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잠깐 눈길을 주고받더니 나를 끌던 놈이 비수를 꺼내더니 현수한데 넘겨주었다.

《그럼 좋아. 내기 해볼래? 너가 우리 셋 중 어느 하나를 이기기만 하면 너희 둘 무조건 놓아준다. 어때? 이만하면 많이 봐 준거지?》

현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비수를 받았다. 입술까지 새파랗게 변해갔다.

《왜 겁나? 안 되겠어?》

그자는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쯧쯧, 넌 어쩌면 저런 바보 같은 남자친구 사귀였냐? 너 등신 같은 놈, 싸우기가 두려우면 별수 있냐? 너 몸에다 자국 하나 내. 그러면 우리한데 사과한셈 쳐주지. 빨랑빨랑. 어른이 친히 해야겠어?》

잠깐 망설이던 현수는 비수로 자신의 종아리를 힘껏 찔렀다. 새빨간 피는 샘솟듯 솟아 나왔다.

《너, 운수 좋은 줄 알아라.》

그자들은 앙천대소하면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파출소에 알려야지.》

《됐어, 빨리 상처나 처치하자.》

쩔룩거리는 현수를 부축해서 병원으로 향했다. 파출소로 가고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그 리유를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침대에 드러누운 나는 형용할수 없는 고독, 우울을 느꼈다.

지헌씨가 그냥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가 화 내는 모습은 정말 위엄 있었다. 그는 마치 우뚝 솟은 가파로운 산과 같아서 그 누구도 서뿔리 건드리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날 밤, 나는 끝도 없는 꿈들을 꾸었다. 깡패들한데 추격을 받았다. 시뻘건 피도 보고 콩볶는듯한 총소리도 듣고 번뜩이는 칼날도 보았다. 지헌씨가 이딸리아 영화의 주인공 조로처럼 새까만 옷을 입었는데 나를 등에 업고 담벽도 강도 산도 날렵하게 날아넘었다…

여름에 나는 실습을 떠나게 되였다. 나는 X시를 택했다.

이미 2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지헌씨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밤이면 밤마다 나는 X시의 커피숍들을 헤맸다. 그에 대한 그리움을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보기는 아마 이번이 처음인것 같았다.

어느덧 X시에도 매일 비 내리는 계절이 되였다. 매일 밤 내리는 비는 더더욱 지헌씨를 그리워지게 했다. 밤비가 지헌씨에 대한 그리움을 몇배로, 몇백배로 늘여주는 것 같았다. 한국가수 이진관씨가 부른 노래 《오늘처럼》의 가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당신이 그리워서 고통이었어요

내 생에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아주 잊지는 말아줘요 사랑했던 사람아―

오늘처럼 바람 불면

당신 모습이 그리워요

당신이 보고파서 고통이었어요

내 생에 당신과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지금쯤 눈 감아도 모든 걸 다 잃어도

후회하지 않을거예요

아주 잊지는 말아줘요 사랑했던 사람아―

오늘처럼 비가 오면

당신 숨결이 그리워요

현수는 D시의 조선회사에서 실습했다. 실습이 끝나는 즉시로 나를 데리러 X시로 온단다. 그의 부모들이 나를 퍽 마음들어 한단다. 벌써 D시에 아파트도 한채 사놓았다나. 결혼하거들랑 살게. 나는 자신의 나약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런 감각 또한 너무너무 지헌씨를 생각히우게 만들었다.

실습도 이젠 끝났다. 아마 이젠 그 어떤 가망도 포기해야 하나보다. 짐을 꾸리는 나의 마음은 웬지 서글펐다. 하긴 짐이라 해봐야 고작해서 달랑 트렁크 하나였다.

저녁에 나는 《금빛해안》이란 커피숍에 머물렀다. 가방을 맞은편에 올려놓았다. 순간 눈 앞에는 지헌씨의 그 새까만 남자용가방이 알른거렸다. 또 서글픈 웃음이 흘러나왔다. 커피도 마시고 음악도 감상하면서 이 기나긴 밤을, X시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내리라. 래일 오전 일곱시면 현수가 X시에 도착할거다.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려야 한다.

갑자기 음악이 끊기였다. 이어 음반 넣는 소리가 나더니 영문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미 이 사실의 발생이 기억나지 않아

아마 난 오랜 시간 지각을 잃은 모양이야

… …

바로 그 노래, 《아름다운 날들》에서 지헌씨와 함께 들었던 《화사의 행존자》였다.

《어머, 모자르트의 노래!》

흥분했던지라 저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가고 말았다. 주위의 사람들이 나한데 던지는 불만의 눈길에서 목소리가 어느 정도 높았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너무도 무안해서 고개를 얼른 돌렸다.

바로 이때였다.

누군가 등뒤에서 두 손으로 나의 두 눈을 막았다.

《알아 맞춰봐, 내가 누군지?》

나는 알아맞히려 하지도 않았다. 알아맞힐 필요가 없으니. 나의 시선을 가린 그 손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자신의 그리움에 젖은 뜨거운 눈물이 그 손가락들사이로 편안히 흘러내리도록.

반듯한 정장을 입고 유난히 희고도 가쯘한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있는 사나이의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의 맞은 편에 놓여져 있는 트렁크에 잠깐 눈길을 주던 그는 나의 곁에 앉았다.

《누가 영이 눈물 흘리게 만들었어? 말해, 내가 혼내줄게!》

나는 지헌씨의 품에 안겨 속 시원히 실컷 울었다. 훌쩍거리면서도 나는 말했다.

《다시는 못 만나는 줄 알았단 말 이예요. X시에서 꼬박 3개월동안이나 찾아 헤맸었어요. 이런 느낌 아세요?》

그는 예전처럼 설탕을 넣지 않은 커피 마셨다. 나도 한모금 마셔보았다. 처음엔 쓰면서도 조금은 떫기까지 했으나 뒤 맛이 아주 향긋했다.

《화사의 행존자》는 그냥 되풀이 되였다. 커다란 커피숍에는 나와 지헌씨 뿐이였다. 밖에 비까지 오니 조금은 썰렁했다.

웨이터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문득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다섯시가 되였다.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커피숍을 나섰다. 그의 차안은 금시 봄날처럼 따스해났다.

날이 밝아올거라는 생각에 나는 절망감이 들었다. 지헌씨한데 키스를 막 퍼부었다. 나의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려 그의 티셔츠를 흠뻑 적시였다.

《영아, 너 남자친구는?》

《날이 밝아오면 도착할거예요 그 사람. 일곱시에. 저 어떡해야 해요? 정말 모르겠어요. 정말!》

나는 천천히 속옷을 젖히고 따스한 수정목걸이를 밖으로 꺼냈다.

《보세요, 이 수정목걸이 저의 몸 떠난적 한 순간도 없어요. 저한텐 온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꿀수 없는 너무너무 소중한 물건이예요!》

《너 진짜 바보구나! 그거 가짜 수정이야. 그때 널 울려 너무 미안해서 널 속였던건데…》

《피, 거짓말 말아요. 저 속이는거예요 지금? 어림도 없는 소린 절대금지예요!》

나는 지헌씨의 목을 꼭 그러안았다. 이런 포옹은 나로 하여금 무한한 희열을 느끼게 하였다. 현수와는 단 한번도 이런 느낌 없었다. 세차게 뛰고있는 그의 심장박동소리를 그대로 느낄수가 있었다. 그도 좀 격동된듯 싶었다. 그가 나를 으스러지게 안아주길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다. 내 인생에 제일 황홀했던 시각은 바로 오늘 이 순간일거라고 생각하면서. 어쩜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귀가에 가볍게 속삭였다.

《안아주세요. 저를 꼬옥 안아주세요…》

그러나, 그러나 그는 오히려 가볍게 나를 밀어냈다. 아주 부드럽게 아주 천천히. 그는 견결한척 하였지만 조금은 흔들리고 있었다.

《어, 벌써 여섯시네. 여기에서 기차역까지 꽤 멀거든. 이젠 떠나야 해.》

나는 지헌씨의 넓은 가슴에 비스듬히 기댔다. 이젠 더 이상 눈물도 없었다. 차는 천천히 기차역으로 달렸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다만 차 엔진소리가 절주있게 들릴 뿐이였다.

이번은 지헌씨와의 마지막 만남일것이다.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산천초목 다 변하면 그도 늙을것이고 언젠가는 사랑도 헤어짐도 이별도 없는 천국으로 날아갈 것이다. 나도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 얼굴엔 주름살도 늘어날 것이고 키도 줄어들 것이고 더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 한줄기 연기가 되여 하늘하늘 하늘나라로 날아올라 갈 것이다. 또 다른 세상에서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 꼭 만날 거다. 그래야 또 커피숍에 나란히 앉아서 커피도 같이 마시고 《화사의 행존자》도 같이 듣고…

날이 밝았다. 지헌씨는 차를 기차역에서 몇십메터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두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곧장 앞을 바라보고 걸었다. 고개 돌려 지헌씨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쩜 이곳을 떠날 수 있는 모든 용기를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멀리서 누군가 가방을 메고 내 있는 쪽으로 경쾌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나를 향해 손을 젓고 있었다. 다름 아닌 현수였다.

나는 끝내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지헌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색 잃은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어요. 솔직히 얘기해 주실거죠, 네? 이 수정목걸이 절 주시려고 특별히 사신거죠? 맞죠!》

차창너머로 지헌씨는 천천히 말을 했다.

《만약, 만약 내가 너를 위해 그럴수만 있다면 온 세상을 다 사서라도 너에게 아낌없이 주고싶은 마음이란 걸 아니?!》

순간, 나는 웃었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에게로 다가오는 현수를 맞받아 걸어갔다. 이젠 밝게 웃고있는 현수의 모습까지도 똑똑히 보이였다. 나는 다시 한번 수정목걸이를 만져보았다. 수정목걸이는 여전히 아주 따스했다.

내 모든 생명과 령혼은 이 수정목걸이에 응결되여 있으리라!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수정목걸이는 진정 이미 지나간 아주 아름다웠던 옛 추억만을 의미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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