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필자가 선경대에서 5백여보 사이를 둔 흥진촌에 가서 만나뵈온 류영협(劉英協 1913년 생)옹은 말했다.

<<나는 4살 때 선경대로 이사와서 줄곧 지금까지 살고있수다. 내가 알건대 제일 처음 중으로는 하홍락이고 선경대절이라고들 했었지우. 그는 1885년에 절벽아래에 륙간초가집을 짓고 나무불상을 모시고 도를 닦았다는거였수. 매년 초파일이면 마을에서는 떡을 치고 감주를 해갖고 선경대절에 가서 기도를 드렸수다. 그후 유희춘이 있었는데 절당을 북두칠성절이라고 했수다. 유희춘을 사람들은 유대사, 스님, 신의(神醫)라고도 불렀지우. 그후 녀자중 황정숙이 북조선에서 손녀 둘을 데리고 왔었다우. --->>

비구니 황정숙의 손녀 김영숙(1938년 생)은 화룡진 서가촌에 생존해있어서 유력한 증언을 해주었다.

―할머니는 1940년도에 선경대에 와서 절을 짓고 중으로 되였다. 북조선 강원도 원산 독수절의 주승들의 소개로 찾아왔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가 3대 독자였는데 급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가를 하였답니다. 할머니는 생활난을 이기지 못해 출가를 하려고 원산 독수절에 갔더니 주승들이 동북땅 남평이라는 곳에 선경대절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 불도를 드리면 만사대길하리라 하더랍니다. 그래서 짐군 두분을 앞세우고 세살나는 아이를 업고 언니를 걸려서 선경대로 왔던겁니다. 부근 마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불에 탄 원 절터에 팔간집을 짓고 기거하고 밭을 일구어 붙였습니다. 이듬해 할머니는 북조선 독수절에 가서 에밀레종(구리종을 이름)을 가져다 절당에 걸었습니다. ―당시 할머니는 아래우에 검은 옷을 입고 면사(面紗)를 쓰고 기도 드리러 오는 사람들을 맞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이 나고 이태후인 1947년에 토호렬신(土豪劣神)을 타도하는 바람에 구정부에서 절에 불을 달고 에밀레종은 빼앗아다가 신흥동학교의 종으로 썼습니다. 불상과 목탁, 념주, 승서(僧書) 등은 할머니가 절부근에 묻었다고 했는데 확실한 곳을 알수가 없습니다.―

생존자들의 기억을 더듬은 증실재료를 대략 종합하면 이러하다.

선경대절은 1777년에 섰다. 당시 절 이름이 선경대절이였다. 초기의 스님은 누구인지 몇대를 지나서 하홍락이라고 하는 스님이 주지스님이 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홍락은 1885년에 여기에 왔는데 당시 나이가 19살, 꼭 40살이 되던 해인 1906년에 떠나고 유희춘이가 이어받았다. 유희춘은 절 이름을 칠성불이라고 했다. 그는 누데기중이라고도 불렸는데 까닭은 돈이 없어서 헝겊을 주어서 옷을 기워입었기때문이란다. 그는 무산군 야양골에 가서 만년을 살았다고 한다. 1940년 황정숙은 팔간집을 짓고 칠성불묘라고 했다. 1947년 덕화구정부의 핍박에 절을 떠났다.

모든 종교와 같이 기타 신앙민속도 미신이라는 딱지를 달고 <<혁명>>의 철퇴에 박산이 났다.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계승, 발전되여온 민족풍속은 광복후 40여년사이에 세차례의 혁명을 당했으니 첫번은 물론 토호렬신과 함께 두드린 그번이였다. 취재걸음에 멈추었던 마을마다에서 로인들의 기억에는 예전의 민족풍속행사가 너무도 생동하게 살아있었다.

음력 10월 초순이면 마을사람들은 찰떡을 치고 돼지를 잡아 홍살문앞에 차려놓고 단군성인께서 오는 해에도 좋은 수확을 하사합시사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제사가 끝나면 제물들을 천으로 싸서 곡식무지에 넣어두었다가 다음날 음복들을 했다. 조선전쟁 당시 회령의 안흥국은 상사떡을 낟갈이에 끼워두었는데 마침 그날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파편이 찰떡에 박혀서 낟갈이에 불이 달리지 않았었다고 한다. 기도가 효험을 낸것이라고들 말했다.

로인들의 감회깊은 이야기들은 필자와 같은 젊은이들한테는 신비한것들이였다. 그만치 우리의 고유의 풍속이 죽어있었다는 말이 된다.

남평촌의 천중백옹은 말한다.

<<4년에 한번씩 4월 초파일부터 보름동안을 부동 사람들은 사양동 백살령에 모여서 대잔치를 벌렸답니다. 남성들은 한복을 깨끗이 해입고 녀성들은 꼬리치마 입고 아이들은 색동저고리 입고 명절기분이였지요. 나무로 진 막앞에 큰 대를 세웠는데 팔방으로 흰 명주천으로 줄을 매서 고정시켰습니다. 복술 일곱이 륜번으로 밤낮 북을 치고 양푼을 두드렸습니다. 어릴 때 우리는 사람들이 기밀짚 막안에 치성으로 올린 음식을 복술이 몰래 잘도 훔쳐먹었습니다. 마지막 날복술이 손에 쥔 작은 대를 떨면서 당겨라 하면 팔방에서 명주천 줄을 일시에 당기니 큰 대가 허공 들리더군요. 행사가 끝나면 복술들은 미리 준비해둔 소를 끌어갑니다. 47년도에 미신을 타파하는 운동이 한창인 때라 줄을 쥔 청년들이 손을 놓아버렸습니다. 큰 대가 휘우뚱 하고 넘어졌지요. 복술들이 황황해났지요. 이때 당원간부들이 나서서 <신쟁이가 대를 번져놓고 볼 일이 뭐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끌고 가려는 소를 잡아서 40호 주민들과 복술 셋의 몫으로 똑같이 나누어 주었답니다. >>

두번째의 혁명의 철퇴는 반우파투쟁의 시작과 함께 내려지면서 마을마다에서 성황당나무가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룡정시 삼합진 북흥촌의 채국식(75세)옹은 격분해서 공소했다.

<<토개때 미신을 타파한다고 야단들을 쳤지요. 그때 최증봉의 형이 도끼로 성황당나무를 찍고 며칠이 못가서 죽었수다. 산신령을 노엽혔으니 천벌을 받은거지요. 그후 마을사람들은 정월과 7월이면 성황당에 가서 치성을 드렸다구요. 그런데 대약진 때 간부들이 청년들을 동원하여 성황당나무를 찍어다가 건조실 화목으로 썼답니다. 장길이가 도끼질을 하다가 자기 다리를 찍고말았수다. >>

나는 두만강연안의 수십개촌을 편답하면서 룡정시 삼합진 북흥촌에서 요행 살아남은 성황당나무 두그루를 보았다. 원래 네그루였는데 허수라는 사람이 두그루를 찍어서 불을 땠단다. 집체화가 시작되면서 그 나무에는 종 대신 포탄깍지를 달아매고 돌로 울려서 사람들을 일에 부르고 회의에 불렀다고 한다.

북흥촌의 리기희옹은 말한다.

<<삼합 건너 회령 동산에 백천사(白泉寺)라고있습니다. 로승이 때마다 솥뚜껑을 열고는 밥 한술씩 퍼서 물독을 들고 넣거든요. 이상하게 여긴 젊은 중들이 로승이 외출한 기회에 그대로 하니 물독밑 굴에서 흰 뱀이 나와 밥을 받아 먹더랍니다. 그러는 뱀을 때려 죽였더니만 숱한 뱀들이 나오더라는군요. 뱀을 다 잡자 그 다음부터는 샘물이 콸콸 솟아올라 집이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 백천사랍니다. 문화대혁명 착 전에 백천사의 중의 손녀 리춘옥이가 오빠 리호일을 보려고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 왔댔습니다. 그때 들을라니 그녀의 할머니가 비구니로 있었다는 백천사에는 회령 삼림경영소가 들어앉았다고 합데다. 백천사가 있는 산에 안개만 끼면 비가 와요. 그날 천기를 알려거든 백천사를 보라고들 한답니다. 부처님이 기거할 곳이 없게 되였으니 눈물을 흘리는가 봅니다. >>

화룡시 로과진 죽림촌의 김동수로인은 군인출신이고 로당원이면서 당원답지 않은 말씀을 하기도 했다.

<<죽림에 고려장이 많았답니다. 그속에 보물이 있다고 묘를 판 사람들이 다가 잘못 됐지요. 전학식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리금옥은 기계에 손이 떨어지고 억만이는 칼에 맞아 죽었지 뭡니까. 정말 이상한 일이였습니다. >>

문화대혁명은 모든 전통에 대해 무자비하게 깡그리 소탕해버렸다. 상두를 불살라 죽어서도 덜컥거리는 수레에 실려가야 했고 닭을 놓아 묘자리 잡는 일은 감히 할수도 없었다. 지어 부자간도 계급관계로 획분하면서 <<자산계급 혈통론>>이라는 죄명을 씌워서 족보까지도 소각했다. 결혼식에 주고 받는 례단은 모택동선집이 가장 바람직한것이요, 거기에다 로동자는 마치, 농민은 곡괭이나 삽을 넣는것이 혁명적 류행이였다. 신부는 치마, 저고리 대신 당시 류행이였던 군복을 입기도 했고 하필이면 잔치상에 게떡을 빚어놓고 과거날 지주집 머슴을 살면서 굶주리던 때를 회상하면서 모든 잔치손님들이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어떤 신랑, 신부는 잔치날 새벽에 광주리를 들고 밖에 나가 집집승 똥을 주었다고 해서 당원에 들기도 했다. 농악무를 출 때 상모를 돌리노라 머리를 흔드는것은 공산당의 령도를 부정하는 뜻이라고 농악무는 터무니없는 <<복고주의>>, <<민족주의>> 죄명을 들썼다.

토지개혁,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을 경과하는 근 30년간의 토벌을 받아 오늘날 조선족들한테서 <<동방례의지국>>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미풍량속이 풍지박산이 났다. 세배법이 사라졌고 축은 물론 제상을 차리는 법도마저도 제대로 모른다. 더욱 한심한것은 친척관계가 엉망이 되여버린 그것이라 하겠다. 연변에서는 할아버지는 아바이, 할머니는 아매로 통칭되는데 외척이나 인척이나 할아버지항렬은 물론 남의 할아버지, 할머니뿐 아니라 나이가 지긋한 분들도 아바이, 아매로 통한다. 아버지, 어머니는 틀림이 없지만 숙부는 혼란하다. 아버지의 나이를 기준 삼아서 그 이상인 백부모는 맏아바이, 맏아매로 통하고 종백부, 재종백부, 삼종백부, 문백은 물론 외척이든 그 계렬은 통칭 맏아바이, 맏아매이다. 이것은 할머니를 아매로 부르는것과 혼동시킨다. 아버지보다 나이가 아래인 같은 항렬은 숙부, 종숙, 재종숙, 문숙, 외척, 인척까지도 죄다 아주바이, 아주머니라고 한다. 이웃집 사람도 아주바이다. 아주머니는 더욱 혼란하다. 숙모도, 형수도, 젊은 녀인도 다가 아주머니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기준 잡아서 나이가 아래인 고모, 종고모, 재종고모, 삼종고모와 외척의 이모 역시 아재라고 부르는데 남의 처녀들도 아재이다. 모든 친척관계가 사회주의 인간관계의 통칭인 동무처럼 간단화되고 아리숭해졌다.

절벽에는 옛스님들이 살아온 흔적으로 산성불(山星佛), 칠성불(七星佛)이라는 글이 새겨져있었다. 그리고 절벽 중앙에는 선경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절벽에 커다란 보살을 새기다가만 흔적이 력연했다. 돌에다 새기는것보다 옥돌로 조각하는것이 좋다는데 의견이 모아져서 역사를 벌렸다가 그만두었다는것이였다. 1년후에 두번째로 선경대로 갔을 때는 옥돌조각으로 된 불상이 절벽앞에 세워져있었다. 높이가 2.4메터이고 무게가 2.5톤인 이 불상은 절강성에서 조각한것인데 이곳까지 오는 운반비까지 포함해서 7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옛 절터 옆 절벽아래에 우물 하나가 있다. 감로천(甘露泉)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관광지개발이 되면서 단 이름이고 옛적엔 신선수라고들 불렀고 전설에는 장수물이라고 했다는것이다.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고 늙은이가 마시면 젊어지고 젊은이가 마시면 힘장사가 된다는 전설은 전혀 무근거한것이 아니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한모금 마시니 가슴벽이 시리도록 차고 뒤맛이 달았다. 광천수를 사서 마시는 오늘같은 세월에 이 물은 신선수이고 장수물이고 감로천이였다.

절벽을 에돌아서 고려봉으로 오르던 나는 반룡송(盤龍松)이라고 부르는 기괴한 모양의 한그루 소나무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껍질이 뱀의 비늘같고 또 뱀이 따발을 튼것 같다고 하여 그 이름이 반룡송이라는데 거대한 반석밑에 뿌리를 두고 타래타래 뻗어나온 소나무의 정상이 눈물겹도록 이악스러워 가슴이 저려왔다. 자그마한 널로 만든 판에 씌여진 설명문은 이러하다.

―반룡송은 백년이상 자라왔고 굵기는 35센치메터, 길이가 9메터이다. 그중에서 바위에 누운 부분이 5메터, 바위에 따발을 틀고 머리를 추어든 커다란 구렁이모양이다. 반룡송은 애목때부터 너비가 75센치메터, 길이가 2. 5메터, 무게가 2톤인 돌에 눌려있었다. 반룡송은 무거운 바위밑 틈에서 중압을 떠이고 억세게 자라면서 35센치메터되게 바위를 쪼개고 그리로 자라났다. 이 소나무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것이다.―

바위에 눌려서도 억세게 자라왔고 결국에는 바위를 뚫고 솟아오른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는 종교의 힘과 전통문화의 생명력을 다시금 실감하기도 했다.

한 민족의 문화와 전통은 골격에 슴배여 대를 이어가기 마련, 수천년 대대손손 이어온 민족의 문화, 민족의 심리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정치적 박해가 바위같이 지지눌렀어도 전통문화는 반룡송처럼 억세게 생명을 연장했었다.

부동골에서는 1958년 극산병이 돌자 군중들은 자원해서 상공당을 만들고 집집마다 쌀을 내서 떡을 치고 돼지를 잡아 치성을 드렸다.

개혁개방이후 구질구질한 정치투쟁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자기의 뜻을 펴갔다. 지난해 무더위가 지루하게도 연장되자 두만강연안의 룡연 등지에서는 기우제를 지냈고 상화촌의 과부 몇은 알몸으로 두만강에 들어가 통곡을 치면서 몸을 씻었다고 한다. 그러자 신통하게도 비가 내렸다는것이다. 화룡시 룡성향 봉산동에서는 마을옆을 지나는 큰길에서 아이들이 차사고로 자주 죽자 몇년전부터 마을앞산 소나무에 천오리를 매놓고 봄, 가을로 치성을 드리였다. 지어 점쟁이들도 활개를 치면서 도시 거리복판에서 돈벌이를 하고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아직도 <<혁명의 폭풍우>>는 누그러들지 않고있다. 룡성향 합신촌 길옆에 있는 성황당나무에 요 몇년새에 사람들이 비단천오리에 돌을 매서 달기도 하고 야밤에 와서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고 마을의 단조직에서는 나무가지를 베여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미신을 타파하는 행동이라고 신문에서는 찬양을 하기도 했던것이다.

해질녘에 나는 고려봉 정수리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이 땀배인 몸을 부채질해주었다. 해발 845메터, 고려봉에 오르니 시야가 탁 틔였다. 저앞 남쪽으로 두만강 건너 조선의 산들이 지척으로 달려왔다. 흥진촌 로인들은 맑은 날이면 고려봉에서 서남을 바라보면 백두산이 아물아물 보인다고도 했다.

나는 백두산이 보일듯싶은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백발을 날리는 신선과 같은 백두산은 보이지 않고 붉게 타는 석양에 물든 구름송이들이 뭇 봉우리우에 곱게 떠있었다. 아름다운 노을과 울긋불긋한 단풍은 조화를 이루어 인간이 사는 대지와 신선이 사는 하늘을 분간할수 없게 만들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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