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여우의 울음소리/ 류연산의 장편답사기

1995년 11월 2일 나는 훈춘발, 방천행 뻐스를 탔다. 그때만 해도 변경에 대한 통제가 심해 훈춘역파출소에서 려객들의 신분증을 검사하고 수속비 2원을 받고 변경통행증을 발급했다. 경신까지는 별로 까다로운 검사가 없지만 권하군부대에서 변경통행증을 휴대하지 않은 사람은 무작정 통행을 엄금시켰다. 아쉽게도 나는 경신이 목적지였으므로 변경통행증은 쓸모가 없게 되였다.

오후 1시반에 떠난 뻐스는 3시가 좀 넘어서 경신진에 도착했다. 훈춘에서 경신까지는 42. 5키로메터의 거리였다. 초겨울 짧은 해가 어느덧 서산에 매달려 노을 비낀 하늘이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더는 파랄수가 없는 푸른 하늘이 붉은 물이 들어 한결 고왔다. 고운 하늘아래 훈춘에서 두번째로 크다는 경신벌(147평방키로메터)이 두만강을 옆에 끼고 길게 누워있었다.

로야령산줄기에 련이은 오가산발밑에서 수리봉기슭에까지 죽 펼쳐진 20리 경신벌은 해발이 겨우 9메터라고 한다. 기름진 벌을 둘러싼 수려한 산마다엔 전설이 깃들어있다. 남쪽의 두만강기슭에는 날아갔던 룡이 다시 돌아왔다는 회룡봉(回龍峰)이 있다. 동남으로 흘러오던 두만강이 경신에 이르러 회룡봉을 3백도 원으로 굽이 돌아서 다시 동남으로 유유히 흘러간다고 해서 전설이 생긴 봉우리인데 전설을 무시한 한족들은 회룡봉을 회류봉(回流峰)이라고 자연상태를 형상화해서 부르고있다. 경신벌 서쪽에는 오가산, 북쪽에는 삼각산과 노름산이 있다. 노름산은 경신벌 북쪽 변두리를 병풍처럼 싸고도는 오가산발의 주봉이다. 노름산기슭에는 또 1200헥타르나 되는 엄청 큰 호수가 있어서 그 호수를 노름산호라고 한다. 호수에는 늘 물안개가 감돌고 노름산마루에 운무가 춤추어 멀리서 보면 산봉우리가 움직이는듯한 착각을 준다. 어떤 날 아침해가 뜰 때 노름산을 바라보면 안개속에 갑옷 입고 말탄 장군이 장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환영으로 보여오며 전고소리와 함성이 울려오는듯도 하다고 한다. 그래서 산이 <<논다>>고 이름을 노름산이라고 했는데 한족들은 비슷한 음을 따서 단것이 로룡산(老龍山), 그 호수가 로룡호(老龍湖)란다. 경신벌 동남에는 수리봉이 있다. 봉우리 상공으로 독수리가 날아예고 바위벼랑에 새끼를 친다고 해서 불려진 이름이다. 옛날엔 옌지봉, 중로국경에 자리했고 또 주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라서 봉화대이기도 했다는 이 산의 해발고는 460. 3메터란다. 만족들은 싸무둔(沙木墩), 한족들은 운대산(雲臺山)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수리봉을 음역해서 水流峰(물이 흐르는 봉우리)이라고 적고있다.

경신벌은 요즘 사람들이 경신진이 생긴 후로 불러온 이름이고 원명은 권하(圈河)벌이란다. 용맹한 총각의 화살에 맞아 용을 쓰고 죽어간 흑룡의 자취가 아흔아홉굽이 강줄기를 만들었다기도 하고 미꾸라지정이 동해 룡왕의 자리를 넘보고 동해바다로 파헤치고 가다가 아흔아홉굽이만에 기진맥진해서 오줌을 싸갈기고 쓰러졌다기도 하는 전설의 권하, 만약 그때 백굽이만 되였더래도 이곳에 서울이 섰을것이라는 설도 있다. 경신진에서 려관업을 하는 김창하(金昌河 64세)옹은 한굽이만 더해서 백굽이가 되였더면 바다길이 열렸을것이라는 말을 했다. 옛날 발해시기에 일본과의 왕래가 훈춘을 통해서 되였다니 현재 로씨야땅이 발해의 국토내에 있었을것이요, 그런만큼 권하에 깃든 전설은 가까운 근대의 이야기였음을 알겠다. 주인이 바뀌고 바다로 가는 길이 막힌 그 <<답답함>>이 엿보이는 전설이라 하겠다.

바다길이 열렸다고 서울이 설수가 있는것은 아니다. 서울이 설수 있는 지대는 지리적으로뿐 아니라 풍토적으로 좋은 곳이여야 하는것이다.

경신은 산수가 아름다운 고장이다. 동남으로 흘러가는 두만강이 지금은 흙탕물이지만 예전엔 호수와 같이 푸르렀을것이다. 그리고 오가산, 삼각산, 노름산기슭에서 파랗게 빛나는 거울처럼 안겨오는 아홉개의 호수는 동그라니 권하(圈河)를 이루었다. 호수마다에서 뛰노는 잉어, 련어, 초어, 붕어 고기에 감질이 난 갈매기도 바다를 떠나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와 호수면을 유유히 원무한다. 봄이면 기러기 날고 여름이면 련꽃이 만발한다.

경신의 두만강 건너가 바로 경흥, 리성계가 자랐던 고장이다. 조선력사에서는 유서깊은 곳이라 하겠다. 그리고 경신땅의 릉골은 명당자리, 리성계가 어머니를 모시여 임금이 되였다는 설도 있다. 임금이 날만치 풍토가 좋은 고장인 경신은 강과 호수가 있어서 어업자원이 풍부하고 벌이 있어서 논농사가 잘되고 초원과 림지가 있어서 목축업에도 적격인 <<어미지향(魚米之鄕)>>, 북국의 강남이다.

수리봉에 오르면 중국, 조선, 로씨야 3국이 눈아래 굽어보인다. 두만강 권하인도교를 건너면 조선의 선봉군, 륙로로 오가산을 넘으면 로씨야의 크라스키노, 두만강 물길따라 배를 띄우면 일본해에 이른다. 경신은 동북아세아 금삼각주의 명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래서 이 3국의 접경지대는 련합국에서 지정한 국제경제기술개발구로 되였다. 련합국국제기술개발서(開發署)에서는 경신벌에 5백만인구를 가진 국제자유무역구를 건설할 계획이며 그것과 더불어 6457명의 인구를 가진 경신진은 다음세기초에 50만 인구를 가진 도시로 변한다고 한다. 전설과 같이 서울이 서는 셈이다. 그것도 한개 나라의 도읍이 아니라 국제적인 문화와 경제 및 정치의 집합점이 되는것이다.

경신진 량식공급소에서 꾸리는 려관에서 하루밤을 자고 이튿날 아침 나는 옥천동으로 갔다. 전날 밤 훈춘에서 태여나 1953년에 경신에 이주해와서 곧장 살아왔다는 김창하옹을 방문, 경신이야기를 듣던중 옥천동의 김광익(金光翼 74세 경신 권하촌 태생)로인이 이 지대에 밝다는 소개를 받았던것이다.

옥천동은 경신진부락과 늪 하나를 사이두고있다. 초겨울이라 강은 얼지 않았지만 고인 늪은 전면이 얼음으로 덮였다. 아직 얼음 두께가 엷어서 건너다닐수는 없었다. 그래서 늪을 에돌아 옥천동까지 가는 거리는 3리길, 맑은 얼음판을 핥고 불어오는 바람을 안고 반시간을 소요했다.

호수를 등지고 두만강을 눈앞에 두고 앉은 옥천동은 일제시기 때에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경신의 지리적위치가 특히 중요했던바 일제는 훈춘에서 일본훈춘령사분관을 세울 특권을 가지게 되자 1917년 옥천동에 일본 훈춘령사분관의 경찰분서를 앉혔다. 마을 북산비탈에서 맑은 샘이 사시장철 흐르는데 그 샘이 수질이 특별히 좋은 약수, 옥처럼 맑은 샘이라는 뜻에서 이 마을을 옥천동이라고 했단다.

산수가 좋으면 사람이 장수하는 법이다. 권하에서 태여나 1957년도에 옥천동에 이사와 지금까지 살아온 김광익로인도 약수를 마신 덕인지 아주 정정했다. 로친은 정주간에 소반을 놓고 콩나물을 키울려고 똑또그르르 콩을 고르고있었고 령감은 방구들에 목침을 베고 누워서 신문을 읽던차 내가 들어섰다. 집도 오랜 초가이고 집안의 장식들도 고물이였다. 로친앞에 놓인 소반은 물론 김광익로인이 등지고 앉은 롱도 돈주고 살수 없는 문화재감이였다.

로인은 화저가락으로 문화재감인 쇠화로에서 빠알갛게 타는 까만 숯을 되작이면서 이야기했다.

<<조부때 두만강을 넘어왔수다. 원래 살던 곳은 함경북도 경원군 유덕면이였다우다. 백부(金基世)가 생존이면 110살, 아버님(金基福)도 살아계신다면 100살이 되는구만. 백부도 권하에서 났다고 하니 우리 집 이주가 110년도 더 된다는 말이 되는거우. 조부는 슬하에 아들 삼형제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조모가 일찍 세상을 뜨자 조선 웅기에 가서 자식이 많은 과부를 후실로 들이고 두곳 살림을 벌리다나니 사는게 말이 아니였다우. 집은 자식들한테 맡기고 장 웅기에 가 살다가도 가을에 와서 손수 타작을 해서는 후실네 식량을 후무려갔다우. 고생이 막심했지라우.―

아버지는 일자무식이고 다행이 나는 관립학교가 있어서 3학년까지 글을 읽었다우. 그러다가 만주국이 되면서 관립학교가 페교가 되고 나도 농사를 했지우. 소작농사를 했지라우. 소작세가 3:7, 지주한테 7할을 바쳐야 했으니 봄이면 당연히 결량이 되였수. 그래서 삯김을 매기도 하고 강에 나가 조개를 줏기도 하고 늪에 가서 련밥을 뜯어 식량보탬을 하기도 했지우. 근근득식하며 초근목피로 겨우겨우 연명을 하던차 광복을 맞았다우.―

46년초에 토지개혁을 해서 난생 처음 자기의 땅이 있게 됐다우. 농사군한테 땅은 명줄이지우. 공산당에 감격했수. 이듬해 신농회(新農會)가 서고 나는 농회 부주임으로 임명을 받았다우. 빈고농 출신인 나는 공산당의 은덕에 보답하려고 모든 심혈을 다 바쳤수다. 농회의 일을 하다나니 집일은 모친과 처가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우다.―

그 다음해(1948년) 6월에는 해방군을 지원하여 담가대를 조직해서 전선으로 나갔수다. 사평전역에 참가했었지우. 8월에 돌아오니 촌의 무장위원을 시키더구만. 꼭 9년을 하다가 1957년도에 옥천동으로 이사를 왔지라우. 옥천동 당지부 선전위원을 맡아했었수. 문화대혁명 착전까지 했었수.

내가 이사오던 해에 공산풍이 불었수다. 소와 농기구를 집체에 바치게 했고 돼지까지도 집체에 바쳤수다. 후에 돼지가 여위게 되자 할수 없이 되돌려주었수. 그런데 집체에서 기르면서 병든 돼지라 거의 다 죽었지라우. 그리고 집체식당에서 식사들을 했수다. 가정에 량식을 주지 않았으니 식당에 가서 먹지 않으면 안되였다우다. 어떤 곳에서는 잠까지도 집체로 잤다고 합네다.―>>

이른바 공산풍이란 인민공사화를 말하는것이다. 향을 인민공사로, 촌을 대대, 자연부락을 소대로 개칭하고서 모든것을 군사화했다. 농민군사화를 위해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온 마을이 집체식당에서 끼니를 때웠다. 당시 생활은 집체화여서 먹는것은 물론 잠자리까지도 합숙화를 시도했다. 농기구의 기계화 명목으로 소수레 바퀴축에 마구잡이로 베아링을 넣었다. 제대로 굴러갈 턱이 없었는데 공산풍이란 마치 그 소수레같은것이였다. 그랬으면서도 가랑잎으로 얼굴을 가리고 따웅! 하는 식으로 일단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은 우파분자로 몰아서 투쟁을 했다. 내가 살던 서성진 북대촌 6촌민소조에 살았던 동경수(董京洙 이미 별세)는 당시 고중을 졸업했는데 자기가 애지중지 키워온 소를 집체에 바치려니 자식을 남의 집살이로 보내는 그런 심정이였다. 그래서 일기에 <<불쌍한 소야, 너를 보낼려니 이 가슴이 미여지는구나. 언제면 다시 돌아올고?>>라고 한마디 쓴것이 죄가 되여 평생 우파로 투쟁을 당했었다.

화룡시 덕화진 천중백로인이 회고하는 당시 연변 농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수운 꼴이 많기도 하다. 그러나 어디 웃음인들 웃을 여력이 있었겠는가. 하여튼 그 절박했던 어려운 시절의 사연을 잠간 귀담아 들어보기로 하자.

<<하루 진종일 일을 하고도 밤이 이슥해야 잠을 잤디요. 밤에는 학습과 투쟁을 하라고 기래요. 눈을 비비면 새벽부터 군사훈련을 시켰댔는데 농촌사람들이 제대로 할리 만무 아닙네까. 아 글쎄 <우로 돌앗!> 하면 오른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꾸만 위켠으로 돌아 두만강을 향합데다. 훈련장소에서 보면 위켠에 두만강이 있었댔시오. 기리니끼리 농사일도 안되고―해봤자 내 일이 아니니께 건성건성이였디요. 그런데 명령은 주살나게 떨어져 정신차릴 틈도 없습디다. >>

인민공사는 대약진(大躍進)의 산물이였다. 연변의 대약진은 연길현 동성용의 김시룡사(金時龍社)에서부터 시작했다. 주인민위원회에서는 연변 각지의 고급사(향) 주임들을 불러서 김시룡사에서 현지회의를 했다. 이른바 <<4천명대회>>였다. 그번 회의에 참가했던 천중백옹은 회상했었다.

<<룡정에서 자고 새벽에 떠나서 동성용에 이르니 소학교와 중학교에 숙소를 정해줍데다. 동성용 기차역 아래 언덕논 넉쌍(헥타르)을 한뙈기 논으로 만드는데 한메터 깊이로 땅을 파고 그 밑에 콩깍대를 깔고 다시 흙으로 덮었습네. 그게 심경이라는겝네. 그번 현지회의는 남명학주장이 사회하고 심경을 지휘를 했었소. 돌아와서 그대로 했지.―>>

김광익로인은 옥촌동의 심경을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우리는 겨울에 심경을 시작했수다. 땅을 한메터반씩 번졌지라우. 언땅을 번진다는것은 고역이였수. 땅거죽을 벗긴다음 수수대며 콩깍대를 두텁게 펴고는 흙을 덮고 또 펴고는 덮기를 세번을 했수다. 수수대랑 땅밑에서 썩으면 비료가 되여 토질이 높아진다는거였수. 우에서 파견되여온 공작대와 대대 간부들이 돌이를 하면서 일을 감독했수. 잘하면 홍기를 주고 잘못하면 백기를 꽂았다우. 백기를 받은 소대 간부들은 눈알이 빠지게 욕을 먹었다우. 그러면 그 분풀이를 사원들한테 해대기가 일쑤였다우. 로인들도 불러내다가 때릴셈만치 욕설을 퍼부었수다. 그런데 겨우내 얼었다가 봄에 밭갈이를 할려니 소가 빠져서 죽기도 했수. 생각해보슈․한메터반을 번졌는데 그 구덩이에 빠지면 육중한 소가 나오겠수다? 그리고 수수깡이며 콩깍대가 썩기는 고사하고 논판을 덮었고 생땅을 파올려놓았으니 페농을 했지라우. 소출이 원래의 절반도 안났수다. 보통 벼는 쌍당 8천, 옥수수는 9천, 콩은 3천이였는데 그 절반 소출도 겨우 되였는데도 공사에서는 콩은 만근, 옥수수는 1만 5천근, 벼는 2만근으로 회보를 하라고 했수다.․>>

참으로 대약진운동은 허상에 불과했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대약진이 아니라 대퇴보였다. 우에서 심경을 명령하면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한 곡식을 그대로 둔채 흙을 덮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이듬해 씨를 뿌리면 곡식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땅속에 썩지도 않은 콩대 등이 그대로 깔려있으니 흙이 들떠서 곡식이 자랄수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보고는 늘 전량 완수한것으로 되여있었다. 우에서는 더욱 한심했다. 이듬해 생산계획을 세울 때면 헥타르당 만근도 안되는줄 번연히 알면서도 6만근으로부터 지어 36만근으로 정해주었다. 군중회의에서 우에서 파견되여 온 간부들은 석자 땅밑에 농가비료를 넣고 벼를 심으면 가을에 가서 사다리를 벼대에 기대놓고 올라가서 가을을 하게 된다고 떵떵거렸다. 한해에 2백년, 지어는 3백년 먹고 살 농사를 짓게 될거고 벼낟가리우에 올라서면 태양에 대고 담배불을 붙이게 된다는 신화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화룡현 덕화공사 부동골에서는 누군가 <<감자 구워 먹은 자리가 농사 잘된다>>는 말을 한것이 화근이 되여 토화비(土火肥)를 만드는 운동을 했다고 한다. 밭의 흙을 퍼다가 가마에 구워서 다시 내다 펴기도 하고 나무를 해서 밑에다 놓고 불을 때면서 흙을 굽기도 했다. 토화비를 만든다고 집집마다 엿을 다리듯이 밤낮으로 불을 때서 구름까래에 불이 나서 집이 타는것은 항다반한 일이 되였다. 그리고 헥타르당 36만근 소출을 낸다는 미친 생각에 덕화공사에서는 남진촌, 부동촌, 사양동, 룡암동 등을 남평으로 이주시키고 집을 무니고 밭을 일구는 망발을 서슴치 않았다.

행동은 군사화, 생활은 집체화, 식사는 식당화, 잠은 합숙화―이것이 대약진의 원칙이였다. 당시 식당화의 진상을 김광욱옹은 까밝힌다.

<<주정부에서 옥천동으로 허관일이라는 사람을 공작대로 파견해왔수다. 연변대학에서 정치선생을 했다는 사람인데 무서운 관료주의자였다우. 집체식당을 하면서 대식품을 강요했수다. 가랑잎을 가루내서 떡을 해먹고 옥수수를 바른 껍질을 큰 가마에 푹 삶아서 찧으면 전분이 나는데 그걸 쌀가루에 섞어서 음식을 만들었수. 맛도 맛이거니와 먹고나면 소화불량에 걸리기가 적격이였다우. 대개 사람들은 변비에 걸렸지라우. 로인들이 무리로 죽었수다. 군중들은 부중이 와서 굶어죽는 판국인데 허관일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식당을 잘했다고 거짓보고를 올렸수다. 인조 돼지고기, 인조 장도 만들고 쌀은 십분의 하나밖에 안드나 맛있고 또 영양가 높은 대식품을 만들었다고 했지라우. 그래서 우에서 참관을 왔는데 그럴 때면 쌀가루에 사탕가루를 넣어서 콩기름에 구워서 떡을 해놓으니 천하일미일수밖역훈춘현에서 전형으로 되였지 않겠수. 58년 겨울 현에서 대식품전람회의를 가졌는데 옥천동에서 20여종의 음식을 만들어 갔다우. 기름에 튀우기도 하고 굽기도 했는데 쌀 90%에 다른 대식품을 섞은것이였수. 현의 간부들이 검식을 하고는 사원들 모두가 이렇게 먹는가고 묻자 허관일은 그런다고 대답을 했수다. 그래서 옥천동 사람들이 배고픈 고생을 남보다 곱절 했지라우. 후에 허씨가 물러가고 주병원 원장으로 있었던 정씨가 오면서 먹는것이 괜찮아졌다우다.―>>

가을이 되면 콩꼬투리마저 산량에 넣어서 공량으로 바치게 했다. 연변대학 학생들을 각 촌에 보내여 탈곡장에서 검근을 시키고 창고까지 뒤지게 했다. 산량을 곧이곧대로 회보하면 책임자는 백기를 받아 투쟁을 받게 되였다. 그러니 자연히 거짓말 보고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니 집체식당에서는 옥수수 껍질은 물론 수수 속대를 말려서 가루내서 먹는건 보통이였고 피나무껍질이나 소나무잎을 짓찧어서 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때식이면 그릇들을 가지고 식당에 온 사람들은 멀건 물뿐인 죽가마를 보고는 맨나중에 타려고들 했다. 처음에 뜨면 건덕지가 적기때문이였다. 매인당 한끼에 한냥, 지어는 8돈의 량식이 돌아갔다. 여북했으면 공작대가 개똥을 주어모으라고 회의에서 명령을 하자 한 할머니가 <<개똥과 사람똥 가릴 사람 있으면 알려다우!>>라고 화를 냈겠는가!

쥐가 소금 녹이듯 하면서도 일은 소처럼 했다. 새벽부터 어두울 때까지 일에 내몰았고 저녁식사후면 또 마라손 회의를 했다. 당장 죽어가는 로인들도 억지로 회의에 참가시켰는데 부동골에서는 운명을 하는 로인을 회의장에 업어오라고 해서 회의장이 조문장으로 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오줌 누고 X 볼새도 없이(뒤보고 밑구녕 씻을 새도 없이) 독촉하니 진짜 도척의 심보구나. >>라고들 간부들을 욕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어떤 지방에서는 <<누런 물을 토하는 병>>이 류행하기도 했다. 극산병 혹은 심근병이라고 했다. 1904년 화룡현 와룡호에서만도 개척민 백여명이 죽어나갔다고 해서 그 일대가 시체골이 되였다고 기재에 올릴만치 청나라시기부터 소름을 끼치게 하는 지방병이 회오리바람처럼 휩쓸기 시작한것이였다.

밤에 여우가 캥캥 울어대는 날 새벽에는 의례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했다. 녀자들이 더 많이 목숨을 잃었다. 부동골에서는 한해 겨울을 났더니 젊은 아낙들이 40여명이나 죽었다는것이다. 배가 아프다고 물을 토해내다가는 밤을 넘기지 못하기가 일쑤였다. 매일 밤마다 여우가 울어대고 사람이 죽어나가자 성한 사람들도 실성거렸다. 성황당을 찾아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병을 잡지는 못했다.

극산병은 5―10년을 주기로 고봉으로 닥쳐 무려 천여명씩의 목숨을 앗아갔다. 1944년 오늘의 화룡시 덕화진 고산촌 우복동 60여호 2백여명중 180명이 세상을 떴다. 1957년을 전후하여 극산병과 함께 천연두와 홍진이 겹쳐서 찾아왔다고 한다.

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촌의 김봉룡(金峰龍 72세)로인은 말한다.

<<내 옥석에 있을 때 일입네다. 소문을 듣고 가보니 금방 시집을 온 새각시가 배를 붙들고 죽는다고 고아대고있었수. 남편은 지원군에 나가 조선에 가있고 시부모들과 같이 있는데 로인들은 어쩔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합데다. 그때 침깨나 놓는 의원이라구는 시만 상촌에 한분이 있어서 달려가서 모셔왔디요. 의원은 극산병이라면서 속수무책으로 앉아만 있습데다. 환자가 애고대고 죽는다고 광기를 쓰는데 이거 야단이 아닙네까. 손톱이 하나씩 색이 죽는데 바른 손이 끝나니 왼손으로 넘어가더라 이겁네다. 명색이 의원인데 보고만 있을수 있냐고 하니 한다는 소리가 엉뚱하기라니―듣자니 극산병은 하신에서 온다는데 젊은 아낙을 벗겨 볼수도 없지 않느냐고 대듭데다. 물에 빠진 사람 짚오리도 잡는다고 하신을 보이고도 완쾌된다면 대수냐고 내가 주동해서 아낙을 짓누르고 다짜고짜 치마를 들추고 반쯔(팬티)를 벗겨내렸디요.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하신을 벌려보니 음질속에 좁쌀알만큼씩한것이 잔뜩 돋아있습데다. 의원이 침으로 마구 쪼았디요. 달거리 때처럼 피가 흘러나옵데다. 소랭이(대야)를 대고 피를 받았디요. 사람이 죽은듯 늘어지기를 한시간쯤 지났나, 환자가 물을 찾습데다. 한바가지 물을 들이켜더니만 언제 앓았더냐 싶게 일어나 앉는걸 봤디요.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 녀자들은 배만 아프다 하면 속곳을 훌렁 벗었디요. 내 평생 마누라말고 다른 녀자 살을 섞은적은 없어도 웬간한 바람쟁이보다는 녀자 하신구경은 더 했수다. >>

극산병은 여직껏 병인을 밝히지 못하고있다. 토질이 문제라는 사람도 있고 가난이 근원이라는 말도 있다. 어쨌든 극산병은 수토병으로서 혈액순환이 안되면 죽게 된다는 사실만은 드팀이 없다.

지방마다 치료방법이 조금씩 달랐다. 화룡시 덕화진 남평촌에서는 미역이 혈액순환에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인민공사시절이라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판국에 미역을 어디서 구하랴. 궁리끝에 한밤중 두만강을 건너 조선 함경북도 무산의 수산사업소를 찾아갔다. 죽는 사람을 살리고 보자는 일념에서 모험을 감행한것이였다. 수산사업소에서는 조선족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쌀 여섯되와 미역을 주었다. 그것을 갖고 와서 집집에 나누어주었다. 마을 전체가 한군데서 해먹고 사는 집체식당 때라 집에서 음식을 해먹으면 경을 치는 시절이였지만 그날만큼은 집집에서 연기가 피여올랐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조선에서 수산물을 밀수하다가 변방부대에 들켰다. 마침 부대 련장이 조선족이여서 <<내가 눈 감아줄테니 우에서 물어오면 딱 잡아떼라. >>고 일러주었다. 아니나다를가 밀수조사를 왔다. 리경화구장도 모르쇠를 댔다. 그래서 그해 겨울을 그럭저럭 무사히 보낼수 있었다. 해산물이 명약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만 당시 기아선상에서 허덕였던 조선족들에게 해산물은 명약구실을 했을것이다. 그래서 캥캥대던 여우의 울음소리도 뜸해졌을것이다. 여우가 울면서 바라본 마을에서 상사가 난다는 속담이 그른데 없다는 결론은 돌림병때 사람들은 실감했다고 한다. 저녁에 여우가 울면 꼭 자정이나 새벽녘에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여우는 용케도 죽어가는 사람의 냄새를 맡는다고 했다. 그리고 겨울이라 언땅에 깊이 묻지 못하면 여우는 묘지를 파고 시체를 뜯어먹었다고 한다.

김광익옹은 당시의 비참했던 실정을 되새기면서 타령 한가락을 불렀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극산병

열이 걸리면 아홉이 숨지나니

주검은 산과 들에 쌓이고

일가식솔 영리별한다네

황페한 옥토 풀이 무성하고

가난한 농사군 애간장 다 타네

한많은 우리 살림 언제 펴날고

따사로운 햇볕 쪼일 그날을 고대하네

대약진운동과 함께 3년 재해와 더불어 돌림병에 허덕지덕 목숨을 부지해온 사람들은 배를 불리며 타령조에 얽힌 소원이였던 <<햇볕을 쪼일>>만 하니 잇따라 문화대혁명이 휩쓸어왔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운동을 뺨쳤다. 연변에서 문화대혁명 당시 반혁명분자, 간첩, 우파, 지주, 부농, 나쁜 분자,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반동적 지식분자 등의 혐의로 투쟁을 받은 사람은 무려 5만여명이였다. 간부, 인테리는 모두 투쟁대상이였다. 외국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거나 편지거래가 있었다면 간첩이고 심지어는 말 한마디 잘못해도 용빼는수가 없었다.

룡정시 삼합진 북흥촌의 한인수는 사람들이 목에다가 충(忠 모택동한테 충성한다는 뜻으로 심장을 상징하는 복숭아형 빨간 판에 충자를 쓴 패쪽)자를 메고 다니는것을 보고 <<병아리 잡아 먹는 개처럼 패쪽은 왜 메고 다니는가. >>라고 해서 반년동안 투쟁을 당했다. 그리고 한 무식한 할머니는 모택동의 어록 <<최저한도의 지식분자―>>를 <<쇠좆 한동이―>>로 잘못 외웠다고 일년동안 욕을 보았다.

투쟁수단의 가혹정도는 상상할수도 없었다. 매는 약과, 납을 녹여서 먹이고 쇠를 달구어 물리고 널판에 못을 박고 그우로 걷게 하고―룡정시 대소과수농장의 조창선은 불찜질을 당한 그날 밤 두만강 건너 벼랑밑에 가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시체가 발견되였는데도 죽은 사람의 허리띠가 조선상표가 붙은것이라는것을 트집을 잡아서 중국사람이 아니라고 못가져오게 했다. 결국 조선에 사는 친척들이 매장을 했다. 지금도 묘는 강건너에 있어서 자식들이 청명, 추석에도 산소에 갈수 없다는것이다.

문화혁명 당시 주도권을 잡고 사람잡이에 날뛴 사람은 대개 일자무식의 농민, 로동자, 군인이였다. 그들은 로농병선전대라는 이름으로 농촌과 도시의 공장과 직장을 쥐고 흔들었다. 그들의 무지의 실례가 있다. 당시 소수민족의 언어를 한어화하였는데 조선말도 한어를 기준으로 고쳤다. 연변인민출판사로 들어온 로동자선전대는 조선말 고유어를 한어로 고치는데 요일도 한어화하여 성기(星期)로 고칠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요일이 성기로 되면 월요일은 성기일, 화요일은 성기이―일요일(성기일)은 또 월요일과 똑같은 성기일이 될것인데 어떻게 가를것인가 하는 문제에 걸려 결국 포기되였다고 한다. 만약 이런 걸림돌이 없었더라면 문화혁명 10년동안의 3650일은 모두 성기로 변했을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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