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조선족의 삶의 현장/류연산의 장편답사기

경신진은 원래 만족의 선인 우쿠룬부(烏庫倫部)의 옛 땅의 하나였고 <<훈춘향토지(훈春鄕土志)>>의 기재에 따르면 이곳은 금나라시기엔 식염산지(食鹽産地)였다고 한다. 청나라 강희(康熙) 53년(1714년) 훈춘에 협령(協領)이 설립되면서 이곳에 마을이 서기 시작했고 청나라 광서(光緖) 7년(1881년) 4월 흑정자에 초간국(招墾局)이 서면서 강건너 조선사람들이 분분히 이주해왔다. 1932년 만주국에서 향촌제(鄕村制)를 실시하면서 경신향으로 되였고 1934년 보갑제(保甲制)가 실시되면서는 경신보(敬信保), 1936년에 다시 가촌제(街村制)로 되면서 경신촌으로 이름이 바뀌였다.

경신진 소재지 마을 이름은 이도포(二道泡), 1881년에 세워진 부락으로 봉무동(鳳舞洞), 련화동(蓮花洞), 남화동(南花洞) 등 세개의 자연부락이 합쳐져 이루어졌다고 한다. 1938년부터 향의 기관이 앉아서 지금은 진정부와 정부기관의 소재지인 이도포의 인구는 1450명, 그중 한족이 142명이고 조선족이 1304명, 만족 4명이 산다고 한다.

자그마한 벽촌을 련상시키는 작은 마을이면서도 큰길 량옆에는 상점이며 식당이며 려관이며 지어 가라OK 간판들이 촘촘했다. 경치가 좋고 진내에 있는 아홉개의 늪에서 맛있는 물고기가 나고 또 련합국의 개발지역으로 지정된 후로 중앙에서부터 지방, 세계 방방곡곡에서 손님들이 밀려와 흥성거리는 곳이라서 음식업과 봉사업체의 수입이 톡톡하다는것이다. 더구나 한때 밀수풍이 불 때에는 벽촌답지 않게 고운 아가씨들이 바글대기도 했다는것이다.

개혁개방이후 농촌의 소득은 높아졌다. 1994년 룡정시 백금향 인구당 년간소득은 1천 6백원, 화룡시 숭선진은 1천 3백원, 그리고 경신진은 1천 2백원이였다.

<<문화혁명때 이도포에서는 한공에 10전이 간 때도 있었시오. 우표 한장이 8전이였으니 사시장철 뼈빠지게 일하고도 굶기를 밥먹듯 했지라우. 쑥에 소나무껍질에 안먹어본 별식이 없드랬시오. 그런 주제에 밭고랑 타고 앉아서 세계혁명에 관심을 가지라고 족쳐댔지우. 미친 광대놀음을 한거디요.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하지 않았더라면 모두 굶어죽었을겁네다. >>

경신진에서 개체려관업을 하는 김창하로인의 말이였다.

화룡시 덕화진 룡연촌 박서양(朴瑞陽 69세)로인은 일제 때 울릉도에서 속아서 이민을 온 사람이다. 일본인들이 만주로 가면 들판에서 해가 뜨고 지는데 감자가 하도 커서 둘이서 하나를 다 못먹는 복지라고 하는 말을 듣고 1938년 고향을 등졌다. 그런데 웬걸, 무산에서 두만강을 건넜더니 하늘만 보이는 산골이였다. 아름드리 나무를 베여 부지런히 농토를 개간, 그런대로 배불리 먹었다. 그러다 해방에 이어 문화대혁명을 맞았다. 문화혁명시기에는 겨우 감자톨을 구워 먹으면서도 거지로 빌어 먹고 산다는 고향(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은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에서 연변땅 밀림지대로 함께 이주했던 24가구가 해방이후 거의 귀국해버렸지만 혼자 남은 그는 내내 당의 은덕에 감사했을뿐이였다.

<<지난 90년도에 고향 울릉도에 갔더니 없는게 없이 살데. 나도 밥술이나 먹어 잘 사는줄 알았더니 그게 아이데. 해방전 지주집이라 해도 호주만 이밥을 먹고 다른 식구들은 조밥에 된장국이 고작이였으니 때마다 이밥을 먹는 요즘 지주도 부럽지 않다고 만족을 했었는데 한국에 갔다오고는 주눅이 들었어. 그래도 어쩌겠수. 팔자소관이지비. 땅 파먹는 놈 땅 떠나면 못산다구―>>

고지식한 땅을 믿고 한생을 살아온 박서양로인은 내가 룡연에 들렸을 때 고지식한 마음을 그대로 기울여보였다.

하지만 밥술이나 들게 된 농촌에서 날로 <<농자천하지대본(農子天下之大本)>>은 색바래지고있었다. 두만강류역 숭선에서부터 경신에 이르기까지 마을마다 주인을 잃은 집이영엔 로신이 <<고향>>에서 묘사한 고향집마냥 풀이 무성했고 묵어난 밭들에도 범이 새끼를 칠만치 풀이 숲을 이루었었다. 화룡시 로과진 호곡촌은 무산과 마주한 오붓한 17호 인가를 가진 마을이였는데 처음 내가 갔을 때인 1994년 10월에는 3개의 굴뚝에서만 연기가 날뿐이였으나 이듬해 봄에는 아예 사람 그림자마저도 없었다. 그리고 화룡시 덕화진 부동촌은 독립군 안무일가가 자리잡고 항일을 해온 유서깊은 마을로서 광복후 7백여호였다. 그런데 이제는 황페해져 농사군은 한집도 없다. 두만강 언덕에 자리잡은 초가들은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대머리모양으로 벼짚이영이 훌렁 벗어져 귀신이 살기에 알맞는 마을이 되였다. 그같이 을씨년스러운 마을에 유독 한집만이 앞마당에 닭 몇마리가 구구구―모이를 쫒고 개가 행인을 보고 콩콩 짖는다.

나는 지나가던 걸음에 그집에 들렸었다. 늙은 량주가 따뜻한 온돌에 앉아서 이불을 꿰매고있다가 내가 들어서니 대단히 반가와했다. 아이들 소꿉장난 모양으로 개와 닭하고 동무하며 적적하게 살아가던 량주는 낯도 성도 모르는 길손이지만 찾아온것이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였다. 인간무리에서 살면 인간이 혐오스럽다가도 인간이 없는 곳에 살면 오히려 그리워 한시도 인간을 떠나 살수 없는것이 사람인가 보다.

주인의 이름은 리성국(李成國 60세), 화룡시에 거주하는 퇴직로동자였다. 지난해(1993년) 8월 4백원에 버린 집을 사서 들었다고 한다. 오랜 간염환자라 공기좋고 물좋은 곳으로 휴양삼아 와있다는것이였다. 화룡시에 있는 자식들이 쌀이며 채소며를 날라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령감이 운동삼아 자전거를 타고 십리밖 남평에 가서 사오기도 한다는것이다. 농사군들이 삶을 찾아 버리고 간 산수좋은 이 땅은 서서히 주인이 바뀌여 터밭이나 가꾸면서 여생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휴양지로 변해가고있는것이다. 숭선진의 경우 1990년에 1025가구가 살았는데 1994년말까지 990호로 줄었는데 그것은 호적을 떼여간 사람들이고 호적은 두고 몸만 간 사람들은 무려 620여명이라고 했다.

쉽사리 농촌을 떠나 도시에 잠적할수 있는 사람은 처녀들이였다. 그래서 농촌에서는 갑자기 처녀가물이 들었다. 향진의 총각 처녀가 배필을 무을수 있는 적정비례가 깨여져 25대 1이라는 수치가 나와있다. 그래서 처녀가 아무리 박색일지라도 총각들을 줄세워놓고 이마를 튕길수 있게 되였다는 이야기도 거짓말이 아니다. 시골치고 생활이 윤택하다는 룡정시 대소과수농장 총각들은 장가 못가는 근심이 없이 살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처녀들이 제 마을 총각들은 쳐다도 보지 않고 한수를 높여 도시만 바라보고있다는것이다.

옛날에는 딸 가진 부모는 두번 섧다고 했다. 낳아서 섧고 시집 보낼 때 섧고―지금은 세월이 바뀌여서 아들을 둔 부모들이 한숨을 쉬게 되였다.

1994년 10월 룡정시 개산툰진 XX촌에 이른 날 마침 마을에 잔치가 있었다. 34살 로총각이 룡정시 XXX진에 사는 녀인을 안해로 맞는 날이라고 온 마을이 경사가 난듯 떠들썩했다. 몇해사이에 딸들을 외지로만 내놓다 모처럼 녀인 한사람이 마을로 들어오게 되였으니 법석을 떨만한 일이기도 했다. 선구촌에 남아있는 혼기가 찬 처녀가 단 하나뿐이여서 우글거리던 로총각들도 경쟁자가 하나 줄어든터라 이날 혼사가 사실상 기쁘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떡줄 사람은 궁리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라 하겠다. 요즘 세월에 귀한 딸을 농촌에 주려고 하는 부모도 흔치 않거니와 농촌총각을 배필로 삼겠다는 처녀도 없기때문이다. 이날 맞는 신부도 남편 하나를 이미 거친 리혼녀인데다 그나마 다리를 저는 불구자이고보면 알만한 일이다.

시골은 처녀가 바닥이 나고 도시는 처녀가 사태가 터졌다. 공장과 상점 등에 취직하기도 하지만 아무런 연줄도 없고 가진 재간도 없는 녀성들이 쉽게 찾을수 있는 직업은 음식점과 유흥장소이다. 그녀들은 적지 않게 자의든 타의든 부모가 물려준 몸을 밑천으로 돈주머니를 챙긴다. 잠간 사랑이 50원, 긴 밤 봉사가 1백원이 표준이란다. 한달수입이 보통 4-5천원, 대개 젖가슴을 타고 넘는 사내의 수가 많을수록 수입이 많다.

바로 그런 녀인들을 고용하여 밀수군들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서 숭선진, 삼합진, 개산툰진 등 통상구를 가진 두만강역의 마을들이 경신진처럼 거리에 음식점과 가라OK가 촘촘히 생겨나게 했던것이다. 그래서 한때 도시에서만 성행하던 성병이 시골에까지 묻어왔었다. 시골마을의 변소나 마을 길옆에 세워진 전선대에 <<일차성제근(一次性除根)>>이라는 성병치료 광고판이 나붙어있는것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다.

매음은 불법으로서 지하영업으로 되여있다. 일단 경찰에 잡히면 남자는 5천원 벌금에 행정처벌을 받고 당원은 당적제명을 당한다. 매음녀도 벌금형에다가 15일 구류를 살아야 한다. 암암리에 진행되는 업이다 보니 위생조치가 따라가지 못해 성병은 더욱 급속도로 파급되는것이다.

유흥가에 발을 들여놓은 녀성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남성들이 징그럽다는것과 돈을 벌면 혼자서 살지언정 시집은 가지 않겠다는것이다. 그런데도 징그러운 남성들을 상대로 쉽게 돈을 벌면서 매춘을 후생수단으로 삼은 이들 녀성은 귀향의 꿈은 아예 꾸지도 않는다. 매춘을 일삼는 녀성들사이에는 착한 농촌 총각 약혼자를 헌신짝 버리듯 팽개친 경우가 흔히 있다. 유행가의 가사같은 한 농촌 총각의 하소연을 들었을 때 참으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제 이름만은 밝히지 말아주시오. 내래 3년을 사랑한 약혼녀가 있었습네다. 그런데 장인될 량반이 중풍에 걸려 누웠지 뭡니까. 돈은 자꾸만 들고―생각다 못해 약혼녀가 돈을 벌러 연길로 나갔디요. 그래서 내래 가시집 논밭까지 다 부쳤수다. 나중에 알고보니 유흥가에 있었는데 파혼을 하자고 기래요. 종당에는 거기서 만난 한국사람 기업가의 현지처가 됐답데다. 그 한국사람이 아파트까지 사주었다니 어디 고향에 오갔시오. 총각귀신이 되는 수밖에 없디요. >>

농촌의 피페에 따르는 도시로의 농촌인구의 이동, 관내와 연해주로의 재이주시작, 결혼률의 저하, 그리고 이미 결혼한 생육년령의 부부들이 소수민족은 아이 둘을 낳을수 있다는 우대정책을 무시하고 하나만 낳는 등 각종 원인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민족비례는 뒤바뀌여지고있다. 1990년 인구보편조사 당시 연변의 조선족 수자는 85만 4천 4백 68명, 전체 인구 213만 8천 397명과 대비하면 고작 39. 5%에 지나지 않았다. 1907년 연변의 총인구는 100, 500명, 그중 조선족은 77, 000명으로서 76. 6%였고 조선족비률이 한껏 높았던 지난 1926년 80. 5%와 비교하면 천양지판이다. 조선족의 비률은 광복과 더불어 급격히 떨어져 1949년 835, 278명의 인구중 조선족이 63. 3%, 1979년 1784, 468명의 인구에서 조선족이 40. 6%를 기록했다. 현재 생육능력을 가진 녀성들이 대부분 아이 하나에서 단산을 하는데 그런다면 지금부터 30―50년이 지나면 인구가 절반이 줄어들기가 마련인데 그때에 가면 조선족의 인구는 겨우 10만좌우에 머물것이라는 추산을 하게 된다. 워낙 두만강연안 농촌은 거의 모두가 조선족이였지만 오늘은 거의 절반 수자가 한족이 점하고있다. 지난 70년대까지 한족이 단 1가구도 살지 않았던 숭선진에 지금은 1천여명을 헤아리게 되였다. 화룡시 덕화진 농촌인구는 3712명인데 그중에서 한족이 1700명이란다. 이는 한족의 번창을 단적으로 드러낸것이다.

조선족마을이 한족마을로 뒤바뀐 사례가 허다했다. 화룡시 숭선진 하천과 원봉, 로과진 치마대, 덕화진 차창즈, 룡정시 백금향 평정 등은 조선족마을이였으나 지금은 한족들이 주인으로 들어앉았다. 그속에서 쌀의 뉘처럼 조선족들이 더러 끼여있지만 자식들을 한족학교에 보낼 정도로 동화되고있는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일뿐 주내에서도 조선족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한족마을을 지나다 보면 한뼘은 내려온듯싶은 코를 훌쩍훌쩍 들이마시는 아이들이 버글대고있다. 그러나 조선족마을에서는 아이들 울음소리마저 거의 뚝 그쳐버릴 정도였다. 조선족들은 아이 하나면 만족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오히려 하나밖에 낳지 못하도록 정책으로 묶여있는 한족들은 아이들을 무우 뽑듯 쑥쑥 낳아 슬하에 자녀들이 주렁주렁하다.

차창즈마을의 한 한족은 아이가 아홉이나 된다고 한다. 이름을 미처 기억하지 못해서 번호를 매겨서 1호부터 9호까지 달았는데 아침과 저녁이면 부대에서처럼 번호를 불러서 확인한다는것이다. 한번은 우심에 갔다 오는데 한놈이 마차에 앉지 않은것을 모르고 집까지 왔는데 저녁 취침점검에서 모자란것을 알게 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연변에서 한족들이 늘어나는 또 다른 요인은 외부인구의 류입이다. 지난 1960―1963년까지 산동성에서 지변청년(支邊靑年 변방에 나가 살기를 지원한 청년)들이 대거 연변에 들어왔다. 그들은 자리를 잡고 친척은 물론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들여 화룡시 장살령의 경우 한 마을에 1백가구나 되는 산동사람들이 살고있다. 또 문화대혁명 당시 장춘, 북경, 상해와 같은 대도시에서 하방(下放)한 지식청년들이 아예 연변땅에 자리를 잡고 눌러산다.

근년에 조선족들이 땅을 버리고 도시로 마른 돈 벌러 들어가고 그 빈자리를 관내로부터 밀려온 한족 망류들이 <<고맙게>> 메꾸어주고있다. 룡정시 백금향 평정촌은 산언덕 마을이라 교통이 아주 불편하지만 농사가 잘되여 농사군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고장이였다. 광복전까지 780여호 조선족이 거주했는데 지금은 겨우 15호 조선족이 살뿐이란다.

농촌인구의 류실과 조선족의 인구 마이나스증장은 직접적으로 조선족의 교육위기를 몰고 왔다.

우선 농촌인구의 도시집중은 농촌의 교육현장에 그대로 반영되여 학교가 점점 더 썰렁해지고있다. 한족과 비교해 조선족이 더욱 심하다. 화룡시 덕화진의 조선족이 다니는 남평중학교와 한족이 다니는 차창즈중학교가 그 표본이다. 두 학교는 원래 같은 정원을 가지고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차창즈학교 재학생이 120명인데 비해 남평중학교은 겨우 80명으로 줄었다는것이다. 지난해(1993년) 덕화진 길지촌과 남평촌에서 신생아가 4명이 태여났는데 그나마 두집에서 도시로 이사를 가다나니 두아이만 남았다. 두 마을에서 8년후에 입학할 학생은 겨우 둘이라는 계산이다. 몇해전 로과진 호곡촌 학교모식을 도입해야 할 정도였다. 호곡촌 소학교에는 선생 하나에 학생 둘이 있었던것이다. 개혁개방전까지는 마을마다 학교가 있었다. 교육의 보급률이 높은 표현이기도 했다. 그래서 화룡시 문화관의 사진작가 최정록씨가 호곡촌 소학교를 찍은 사진은 국제화보에 기문으로 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옛이야기를 뒤로 밀고 지금은 촌의 학교들은 페교가 되고 향, 진의 소재지에 학교를 집중시키고있다. 화룡시교육위원회에서는 60명이하의 학교는 무조건 합친다는 규정을 내렸던것이다. 덕화진 룡연촌 소학교도 학생이 60명, 4년후(1998년)이면 40명으로 줄어들 전망이여서 페교위기가 닥쳐올판이였다. 1985년 연변의 조선족소학교가 무려 419개소였는데 1995년에는 177개로 감소, 중학교는 118개로부터 49개로 축소되였다. 참새가 아무리 작아도 오장륙부를 다 갖추어야 사는것처럼 들어갈 돈은 다 들어가야 하므로 작은 학교를 여러개 합쳐서 하나로 하는것은 국가나 학생한테나 다가 리로운것이였다.

우선 조선족교원의 자질이 한족보다 뒤떨어진다. 연변대학 졸업생이 교원으로 배치되는 수자가 적은데다 막상 배치되였다가도 곧바로 직업을 바꾸기가 일쑤이다. 그런데도 초중교원양성을 전담하는 사범단과대학이 없다. 교원의 학력도 한족은 70%가 기준에 도달하지만 조선족은 그보다 낮다. 고중교원의 학력은 한족에 비해 높은 편이나 연변1중과 같은 중점학교를 제외하고는 실제 그러한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농촌학교의 교원질은 대단히 낮은 편이다. 숭선진중학교의 경우 대학입시에 떨어진 고중졸업생이 초중수학을 가르치는 형편이니 교원의 질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학교가 많고 교직원 수가 많다보니 국가재정부담이 가중해서 교원의 인기가 떨어졌다. 숭선진과 로과진의 교원중에는 그 흔한 흑백텔레비도 없는 집은 대개 교원가정이였다. 250원 남짓한 봉급에 쪼들리고있는 실정이니 누가 교원을 하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연변에서는 교원직업이 인기가 없는것으로 알려졌다. 연길시 4개 학교 315명의 교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보면 응답자 40%외 60%의 교원은 학생을 사랑하지 않으며 교수임무를 참답게 수행하지 않는것으로 알려졌다.

무책임한 사람한테서 가르침을 받는 그 학생들의 질도 저하될수밖에 없는것이다. 학생들의 지식수준도 한족학생들보다 뒤진다. 조선족학생은 조선어외에 한어와 다른 외국어를 배워야 하므로 학습부담이 큰데다가 몇개 조선족출판사에서 찍어내는 책으로 과외독서를 하는 가련한 처지이다. 그러니 수백개 한족출판사에서 출판하는 많고 질좋은 책을 탐독하는 한족학생에게 자연히 뒤지게 되여있다. 대학입시에서 합격하여 대학으로 가는 학생수가 조선족속에서 차지하는 비례가 높다고 해서 매스컴은 왕왕 고아들대지만 일단 대학교에서의 학술탐구에서는 한족학생의 뒤에 묻어가는 상황이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오히려 소수민족으로 떨어진 조선족들은 저도모르게 언어, 풍속 등 면에서 한족화되여가고있는 실정이다. 일찍 치발역복 당시 화룡시 덕화진 룡연촌에서 허치영, 김영준, 허종권 등은 상투를 자르고 호복을 입은 덕분으로 대상 10여헥타르 밭을 소유하고 일약 부호가 되였으며 광복전 화룡의 리영춘은 한족의 양아들로 들어가 대부자가 되였다. 그래도 당시는 조선족이 절대 대부분이고 일제통치시기라 한족들이 동화되는 수가 더 많았다.

화룡시 용화향 상화촌의 허정윤옹은 말한다.

<<광복전 상화촌의 땅은 거의 한족 왕수찬지주 차지였습네다. 조선말을 모르는 그는 소작료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작인들의 조롱을 받기까지 했거든요. 한번은 왕지주가 강건너 봇데기마을에 사는 소작인과 돈이 많고 위풍을 갖춘 사람을 조선말로 뭐라고 하느냐고 물었답니다. 그 소작인은 두손을 맞잡고 공손한 태도로 <고토리(함경도 사투리로서 남자의 생식기)올시다. >라고 짐짓 가르쳐주었군요. 곧이들은 왕지주는 이제부터 왕고토리로 불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말뜻을 해석해주었군요. 진노한 왕지주는 봇데기사람의 소작권을 박탈했답니다. 그 다음부터 왕지주는 의식적으로 조선말을 배웠고 그 자식들은 조선족이나 마찬가지로 말을 하게 되였답니다. >>

조선족만 사는 백금촌이나 삼합 등지에 거주하는 한족들은 이미 조선족을 닮아 조선말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조선식 집에서 조선음식을 먹고 산다. 하지만 이제는 두만강연안 시골에서 조선족이 한족에 동화될 차례이다. 한족의 문화권에서 사는만큼 그리고 자급자족의 농업사회가 시장경제로 전환된 실정에서 어차피 동화는 불가피하다. 그 동화의 속도가 상상외로 빠르고 심도 역시 놀라와서 지어 해괴망측한 일까지 있다.

평정촌의 곽해부(郭海富 51세 한족)의 형이 장춘지구에서 돈으로 녀자를 사다가 안해로 만들었다. 그후 형이 죽자 동생 해부가 형수를 안해로 삼았다. 한 녀자에 두 남자의 소생들이라 형이 낳은 자식들은 삼촌이라 부르고 자기가 낳은 아이들은 아버지라고 한다. 형수를 안해로 품고 사는것은 한족의 재래의 혼인풍속이라 별로 웃음거리가 안된다. 아직까지 조선족들속에서는 그런 실례는 찾아볼수 없지만 사촌쯤 되는 실례는 있다. 몇해전에 백금촌의 40대의 리모는 친구하고 안해를 바꾸는 새로운 풍속을 창출, 두 가정은 현재 연길에 거주하는데 어른들은 물론 두집 아이들까지도 아주 친하게 보낸다고 한다.

한족과 조선족의 통혼은 조선족이 이땅에 발을 붙이기전부터였다고 한다.

화룡시 덕화진 남평촌의 천중백옹은 말한다.

<<무산은 개척되기전에 리조의 정배지였다고 합데다. 언젠가 한 벼슬아치가 무남독녀를 데리고 지금의 무산아래 칠석동으로 정배를 왔는데 무인지대라 딸을 시집줄수가 없었다는군요. 어느날 강건너에서 연기가 나는것을 보았답니다. 오늘의 로과진 호곡촌쯤 됐을지도 모르지요. 찾아가보니 한족 홀애비가 살더라는군요. 그는 한족을 사위로 삼고 강을 건너와 살았다고 합네다. >>

한족과 사는 로인들을 보면 대개가 과부들이다. 조선족은 홀애비가 아니면 과부를 맞아들이지 않았으므로 한 남자를 건넜든 열남자를 건넜든 개의치 않고 더구나 돈으로 녀자를 사야 했던 한족들은 달갑게 조선족과부를 모셔갔다. 60여호 사는 평정촌에 한족과 사는 조선족녀인들이 일곱이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한족녀자와 백년가약을 맺은 실례는 거의 없었다. 요즘 조선족처녀들은 한족남자들의 품에 안기는 경우는 푸술하나 한족 처녀와 결혼하는 조선족총각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두만강은 경신향 방천촌에서 15키로메터를 더 흘러서 동해로 흘러든다. 량안의 넓은 땅을 적시며 수백만 인간의 생명수로 흐르던 담수는 쯥쯜한 소금물에 절어버린다. 그것처럼 조선족의 운명도 바다물에 삼키우는 두만강이나 다를바 없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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