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지의 연변리포트

민족교육 문제

중국이 소수민족정책 차원에서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와 관습을 선양함에 따라 소수민족은 스스로 자신의 언어로 민족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동포들이 해방이후 60여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한국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구소련권의 고려인들과 달리 우리의 말과 글을 오롯이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이다.

민족교육을 통해 조선족은 한족을 포함한 여타 민족에 비해 문화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으며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소통의 시대를 맞아 한국과의 새로운 관계맺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출생률 감소현상 및 조선족 동포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인식변화 등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사회의 민족교육이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학생 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있다. 학령아동의 급격한 감소와 함께 중국 주류사회에 진입하는데 용이하다는 이유로 조선족동포들 가운데 자녀를 한족학교에 보내려는 경향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듬에 따라 조선족학교는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농촌지역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연변지역 소‧중학교 수의 변화추이를 보면 극명하게 나타난다.(박금해, 2001) 1989년과 1999년 사이 농촌의 소‧중학교 수의 변화추이를 보면, 소학교는 188개교에서 43개교로 무려 1/4 이하로 줄었으며 중학교는 52개교가 모두 문을 닫았다. 흑룡강성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1990년에 소학교 382개, 중학교 77개였지만 1997년에는 소학교 51개, 중학교 15개로 대폭 줄었다.

농촌지역의 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서 소학교부터 객지로 나가 하숙을 하거나 기숙사에기거하면서 학업을 계속하기도 하지만 그중에는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늘어나고 있다. 변화된 상황에서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족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이 증가하는 것은 자식들이 중국의 주류사회로 진입하기를 바라는데서 비롯된다. 학부모들이 민족의식보다 현실적 이해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학교에 다녀서는 한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없어 중국 주류사회에 진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연변에서는 희한한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아빠는 한국말로 아이는 중국말로, 그리고 엄마는 한국말과 중국말을 번갈아 사용하는 광경이다. 아빠는 중국말이 서툴고 아이는 한국말이 서툴어 엄마가 중간에서 통역 아닌 통역을 하는 셈이다. 아이를 한족학교에 보내는 현상은 지식인사회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0. 정체성 문제

해외이민자의 정체성은 일차적으로 국가의식과 민족의식으로 나누어 살피는 것이 보통이다. 국가의식은 스스로를 어느 나라 국민으로 간주하느냐의 문제이고 민족의식은 자신의 종족적 내지 문화적 귀속의식을 뜻한다.(권태환, 2005)

개인의 자아의식 또는 정체성은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집단 내 상호작용과 집단 간 상호작용 가운데 어떤 것이 그 성원들에게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대상 집단은 어떻게 정의하고 그 집단에 대해 어떠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상황적 인지는 어떠한가에 따라 자신에 대한 인식은 결정된다.

중국의 조선족동포들은 여러 번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했다. 20세기 초까지는 단순한 월경민에 불과했으며,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한데 이어 만주를 점령함에 따라 연변지역에 살던 조선인은 중국인 또는 만주인과도 구분되었다. 조선인의 신분은 형식적으로 일본인과 만주인의 중간에 위치하였으나 실제로는 양쪽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한계인의 처지였다.

조선조 말에서 일제시대에 걸친 기간에 만주에 정착한 조선인은 대부분 스스로 영주 이동자로 규정하기보다는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이주한,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갈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관념적으로 ‘디아스포라 정체성’ 또는 ‘나그네 정체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인의 디아스포라 정체성은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면서 발생한 귀환이동 물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2백16만여 명으로 추산되던 조선인이 1940년대 말 절반 가까운 1백11만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해방이후 연변에 정착해 조선족으로 불리며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위상이 바뀌면서 점차 중국국민 의식이 자리잡아갔다. 이렇게 된 데는 한반도의 정치상황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중국 형성 직후 실시된 토지개혁과 이를 통한 토지분배였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조선인들로서는 중국공산당이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해 주는 것에 대해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조선족 정체성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조국과 모국의 분리이다. 이는 전통적인 혼인의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족은 자기집을 떠나 중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중국은 그들을 식구로 받아들였다. 이를 혼인에 비유하면 중국은 시집이고 조선은 친정에 해당된다.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아버지집이 되고 조선은 어머니집이다.

조선족의 중국국민으로서 국가의식은 다른 해외한인들의 그것보다도 강하다. 그 배경에는 이주 1세대들의 신중국에 대한 고마움이 저변에 깔려있다. 또한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해 조선족이 함께 집거하며 민족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민족문화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민족의식과 함께 국가의식을 병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다.

조선족의 민족의식을 규정하는 모국은 한반도이다. 그런데 한반도는 해방 후 남과 북 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졌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이해관계도 완전히 달랐다. 따라서 조선족동포들은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자연스럽게 북한(조선)을 모국으로 인식해 왔다. 지금도 적지 않은 조선족동포들이 북한에 대해 더 많은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은 이같은 역사의 결과이다.

탈냉전적 상황에서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며 조선족동포들은 한국에 대해 모국의 관점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경제건설에 매진하던 중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경제적으로 발전된 남한은 집나간 아버지가 떼돈을 벌어온 것과 같이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상황은 많은 조선족동포들로 하여금 정체성 혼란을 겪게 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새로운 관계맺기가 기대만큼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이들은 한국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됐고 이로 말미암아 다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한국사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면서 한민족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보다 중국국민으로서의 정치적 정체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려 하고 있다.

정치적 동기에 의해 뒤늦게 중국의 소수민족 대열에 합류한 조선족동포들은 이중 또는 다중 정체성으로 인한 심리적 갈등에 더해 중국 국내정치상황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즉 1960년대 중반이후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조선족동포들은 특별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족 최대 집거지인 연변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피해가 더 컷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리고 한중수교로 조선족 동포와 한국국민 간의 교류가 빈번해 지면서 중국당국은 이 지역 동포들의 사회적 동요를 의식해 동포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왔다. 이런 점에서 연변지역 밖에 산재해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연변지역 동포들에 대해 “연변사람들은 눈치만 보고, 믿을 수 없다”고 평가하는 이유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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