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Caraz(카라즈)컵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응모글

응모글 제19편 방홍국 <형님과의 대화> 심사평

전은주 문학평론가,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

 

 

「형님과의 대화」가 지니고 있는 문제는 글 형식의 파괴이다. 문학 또는 예술은 종전의 어떤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보여주는 표현 형식의 파괴는 그런 예술적 고뇌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객관세계에서 통용되는 형식은 필자가 임의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합의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다. 그것을 객관성이라고 부른다. 작가가 이런 객관성을 따르는 이유는 독자와 서로 소통하기 위한 필요성 때문이다. 이것은 언어가 지니는 객관성과도 동일하다.

 

글을 이루는 기본 요소인 언어의 사용 방법에 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과학적 언어사용이다. 언어가 지향하는 의미 전달의 기본 단위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의 정확성 또는 명확성을 지향한다.

 

둘째, 문학적 언어사용이다. 이 경우는 최소 의미 단위인 단어에다 자신이 판단한 상황적이거나 정서적이거나 사상적인 요소를 덧보태어, 정확성이나 명확성에서 벗어나 그 의미를 확장시키거나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려는 성향을 지닌다.

 

물론 문학적 언어사용의 경우에서도 산문과 운문으로 나뉜다. 산문은 언어의 의미질서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차원에서 비유나 상징 등의 문학적 수사 용법을 사용한다. 이는 논리적 의미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운문의 경우, 특히 시의 경우는 산문의 언어사용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 언어 사용에서는 시인의 상상적이고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운문이 지닌 논리적 구조에서 벗어나거나 파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의 언어 사용에서는 대체로 한 행을 완성된 문장이 아닌, 미완성인 문장이나 단어(이미지)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때 시의 한 행을 산문의 형식으로 설명한다면, 아주 많은 분량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매운 계절의 챗죽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이 구절은 시인 이육사의 시 「절정絶頂」의 첫 연이다. 시인 박두진은 이 한 연에 일제 35년에 걸친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침탈의 역사가 전부 담겨져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2 행에 불과한 이 시를 산문적 언어사용 방식으로 풀어 쓰면 일제 35년의 역사를 다 담아도 부족한, 아주 방대한 양의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형님과의 대화」는 이 언어의 객관성이라는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글쓰기의 2가지 요소인 형식과 내용에서 형식이 파괴되었으므로 안타깝게도 이 글쓰기의 가치도 반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된다. 

 

작품보기

▶ 응모글 제19편  형님과의 대화 (방홍국) ◀

 

 

응모글 제20편 김춘녀 <숟가락에 비친 사랑의 미소>심사평

황유복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김춘녀의 <숟가락에 비친 사랑의 미소는> “사랑만한 교육은 없다”는 참교육자의 신념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교육의 참 의미는 사랑에서 잉태된다. “교원의 중시 없이도 잘 해낼 수 있”는 “상등생”이 아닌 “하등생” 학생을 비평으로만 다스리거나 무시해버리는 그러한 교육은 실효성이 없다. 교육은 과학이기 전에 우선 사랑이고 예술이어야 한다. 학생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은 교육은 반드시 실패한다. 선생님은 선생이기 전에 사랑으로 학생을 포용함으로써 교육의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 학생들에게 지식과 함께 미래에 대한 꿈을 심어주고 키워주는 것이 교육의 본연일 것이다.

 

글쓴이는 “상등생”이 아닌 강민준에 대한 교육을 “이름 석자 불러주기”로 상징시킨다. 학교에서 “점심밥술을 들 때마다” 강민준학생은  “숨박곡질”하듯 “학교 뒤울안에 가서” 숨어버린다. 그러면 글쓴이는 “민준이 빨리 찾아오너라!”라고 학생들에게 지시하고 강민준학생은 응모글 쓰기에서 “‘강민준, 강민준ㅡ’ 점심마다 스무번도 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선생님이 너무 좋았습니다.” 라고 회고한다.

 

글쓴이는 시작부터 결말까지 학생들의 공부나 품행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다만 점심때 숨어버리는 강민준이를 찾아와 점심밥 먹게 하기와 《길림신문》사의 <사랑+릴레이> 글짓기 응모 글 쓰기에서 학생들 이름 불러주기만 이야기 한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시들고 유난히 키도 작은 화초들마냥 내 따스한 손길이 더욱 필요한 애들에게 사랑의 눈길을 돌리며 멋진 이름 석자 불러준다.”라는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글쓴이의 상징과 비유, 유머와 위트, 낯설게 하기 등을 아우르는 문학적 기교를 보여주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런데 글쓴이가 글에서 강민준학생이 왜 점심시간만 되면 숨어버리는지에 대한 의혹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독자들에게 전혀 제공해주지 않고 있다는 점은 무리가 아니지 않을 수 없다.

 

강민준학생의 집이 가난해 점심도시락을 싸올수 없어 점심을 굶는데 선생님(글쓴이)이 대신 도시락을 싸와서 숨어버리는 민준이를 찾아와 먹게 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점심밥은 민준이가 갖고 왔거나 학교에서 제공해 주는데 강민준의 말대로 “선생님들이 하루에도 몇번씩 성림이를 부를 때마다 나는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선생님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장난도 쳐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강민준, 집중하세요.”라고 하시더니 어느 때인가부터는 그러려니했는지 아예 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점심마다 스무번도 넘게 내 이름을 부르”게 하기 위해 숨었다는 말인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만약 첫 번째 경우라면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 대한 선생님(글쓴이)의 아름다운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라면 도리어 글쓴이가 왜 평시에 강민준학생의 존재를 무시했는지를 반성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독자들을 향한 글쓴이의 “숨박곡질”은 결코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작품보기

▶ 응모글 제20편  숟가락에 비친 사랑의 미소 (김춘녀) ◀

 

 

응모글 제21편 방금숙 <희비로 반죽된 어머님의 80 성상> 심사평

김학송 시인 국가1급작가

 

방금숙씨의 응모글 “희비로 반죽된 어머님의 80성상”은 어머니의 곡절 많은 인생사를 그려낸 작품이다.

 

남편의 때 이른 사망, 세 자식의 요절… 교통사고를 당한 아들, 불치병에 걸린 며느리… 연해연송 덮치는 온갖 재난을 초인간적인 힘으로 이겨내신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덕분에  한 가족에서 태여난 세 명의 박사!

 

희비로 점철된 어머니의 인생스토리가 글의 갈피마다에 잘 무르녹아 있다.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할줄 모르고 오직 자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신 어머니의 생애를 한편의 영화처럼 생동하게 담아냈기에 그 감동의 파문이 독자의 마음을 젖게 한다.

 

“천붕지통”, “단애지통” 등 사자성어를 잘 활용한 것이 강점으로 작용한다. 당나라시인 시교의 “추석날밤”을 인용하여 글의 피날레를 장식한것이 작품의 문학성을 높이는데 좋은 역할을 하고있다.

 

글의 흐름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독자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느끼도록 만든 섬세한 표현력이 놀랍다. 세련된 언어감각, 사색과 정서를 동시에 거느리는 탄탄한 문장력을 충분히 인정하고 싶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 글이 애심녀성컵 제6회 생활수기 입선작에 오른 작자 본인의 작품과 내용상 비슷한 점이 많고 어떤 대목은 그대로 옮겨온것이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응모작은 어디까지나 온전한 새 창작물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금후 글짓기에서 이 방면의 특별한 주의가 요청된다.

 

작품보기

▶ 응모글 제21편  희비로 반죽된 어머님의 80 성상 (방금숙) ◀

 

편자주: 전체 응모작품과 심사위원들의 구체적인 프로필은 여기를 클릭하면 볼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