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연변대학 교수

김호웅 : 연변대학교 조한문학원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문과 학술위원회 주석 역임.
김호웅 : 연변대학교 조한문학원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문과 학술위원회 주석 역임.

目    次


1. 서론
2. 조선족동포의 “코리안 드림”
3. 상호 몰리해에 의한 갈등과 반목의 양상
4. 동포애의 론리와 인간성의 발견
5. 반성, 자존을 통한 소통과 화합의 가능성
6. 결론

 

 1. 서론
 

조선족동포와 한국국민은 한 뿌리에 자라난 두 가지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일제의 수탈과 봉건학정으로 말미암아 조선족동포들은 고국을 등지고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와 연변을 비롯한 중국의 동북삼성에 정착했다. 1945년 8월 이후 동서 랭전 체제가 고착되고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조인된 후 조선족동포와 한국국민은 대체로 “88서울올림픽”까지 거의 35년간 서로 래왕할수 없었다. 지어는 서로 간에 모든 매스컴이 봉쇄되였고 리산가족들 사이의 소식마저도 전할수 없었다. “88서울올림픽”이후 조선족동포들은 점차 한국을 방문할수 있게 되였다. 그후 약장사, 로무, 결혼, 류학, 취직, 비즈니스 등을 통해 장기 한국에 체류하는 사례가 급증해 2014년 현재 약 40만명이 체류하고있다.
 

이 글에서는 조선족동포와 한국국민의 상봉과 갈등, 소통과 화합의 력사적과정을 알아본 후 이러한 상봉과 갈등, 소통과 화합을 다룬 소설들을 주제 별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상봉 초기의 조선족동포의 상황은 오늘날 조선의 상황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사회주의적 법과 질서, 만민평등의 사상을 내세우면서도 금시 돈맛을 알고 약장사에 불법체류까지 마다하지 않은 조선족동포들, 하지만 점차 자본주의 한국을 랭철하게 인식하고 단순한 동포론리를 빙자한 어리광을 집어던지고 자중, 자애, 자강의 자유인으로 자신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는 조선족동포들. 이들의 행보는 한반도의 통일과 그 후유증을 치유하는데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줄것이다.  

 

  2. 조선족동포의 “코리안 드림”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일시에 붕괴되고 세계 량대세력 간의 랭전구조가 완화된 새로운 세계정세속에서 중국은 사회주의 리념과 체재를 보존하면서도 락후한 경제상태를 탈피하기 위한 경제체재개혁과 대외개방정책을 추진하여 년평균 10%에 달하는 높은 성장률을 지속적으로 기록하여 괄목할만한 경제적성과를 이룩하였다. 특히 중국은 적극적인 문호개방을 단행하고 경제특구와 연해개방도시를 설치, 지정하며 외자, 기술, 설비의 도입 및 직접 투자의 유치, 수출입무역의 확대를 통해 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제교류를 확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랭전체재하의 교전 당사국으로 서로 적대시하던 중, 한 두 나라는 서로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1978년에는 조선족의 방한(訪韓)을 허용하는 등 한국에 대한 태도변화를 보였다.”

이에 앞서 1974년 한국정부가 북한과 월맹(越盟)을 제외한 모든 공산권 국가와의 서신교환 허용조치를 발표한 뒤, 대한적십자사와 KBS를 통한 가족 찾기 편지거래를 시작하였다. KBS는 1974년 3월 7일부터 “공산권동포에게”라는 프로와 “망향의 편지”라는 프로를 통해 한국의 리산가족이 중국의 조선족동포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들이 한국의 친족들에게 보내온 편지를 방송하였다. 또 대한적십자사는 확인된 조선족동포들에게 한국내 리산가족의 초청장과 항공권 및 려행경비를 보내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콩을 통한 상호 래왕의 막이 서서히 열리게 되였고 급증하는 인적내왕에 대비하여 북경, 천진, 상해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정기 항선은 물론 1990년 9월 15일 위해―인천의 취항을 시작으로 천진―인천, 대련―인천 사이의 항선도 선후로 개통되였다. 길게는 지난 100년간, 짧게는 50년간 침묵과 암흑의 바다였던 서해는 바야흐로 왕래와 교류의 바다로 되였고 장장 반세기나 망향의 서러움을 달래던 조선족동포들은 오매에도 그리던 고국땅을 밟을수 있었으며 친족 간의 상봉을 할수 있었다.

중국에 살다가 한국에 간 조선족동포의 제1호는 1965년, 당시의 한국 농림부장관 차균희(車均禧)의 부모들이라고 한다. 그후 13년간 아무런 교류가 없다가 1978년 중국정부가 한국정부의 입국동의서를 근거로 다시 조선족동포의 방문을 허용하자 그 해 12월 일가족 4명이 영주귀국한것을 시작으로 1983년 이전까지 88명, 1984년에 206명, 1985년에 378명, 1986년에 663명, 1987년에 708명이 영주귀국 또는 일시 귀국해 가족, 친지들과 상봉하였다. 그러다가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1991년에 36147명, 1992년에 31500명, 1993년에 12277명이 입국하였다. 1993년부터 조선족동포의 입국에 대한 한국정부의 규제가 본격화되면서 입국자수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1995년 7월말 현재 불법체류자만 해도 2만여명으로 추산되였다. 

지금까지의 조선족동포의 모국방문을 대체로 네 단계로 나누어볼수 있다.
  첫번째 단계(1988년 이전)는 물론 친척방문이 위주로 되였다. 장장 반세기나 그리던 혈육들을 하루속히 만나보려는 진지한 동경으로 넘치던 시기요, 눈물겨운 상봉의 장이 펼쳐지던 시기다. 쌍방의 반가움과 상봉의 기쁨은 고조에 달했으니 날마다 김포공항은 울음바다를 이루었고“중국교포들”은 이르는 곳마다 모국 친족들의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모국의 친족들은 조선족동포들을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었으니 왕복항공권은 더 말할것 없고 귀한 가전제품에 옷가지, 돈뭉치, 금반지까지도 주었다. 그때 연길 기차역이나 공항에서 멋진 양복에 금반지까지 끼고 돌아오는 이들을 우리는 얼마나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던가?

두번째 단계는 유명한 “약장사”시기(1990년 말까지)이다. 모국 친족들의 반가움과 혈육의 정은 반나마 식었고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모국의 친족들은 끝없이 욕심을 부리는 조선족동포들을 슬그머니 부담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중국에 새롭게 불어치기 시작한 시장경제의 열풍에 휘말려 “나도 한번 돈을 벌어 잘 살아 보겠다”고 벼르던 조선족동포들은 첫 단계의 한국방문을 통해 모국사람들이 록용, 인삼, 웅담과 같은 약재와 동인당의 청심환 같은 중약을 선호하고 고가로 사서 먹는다는 것을 알고 한국나들이를 돈을 벌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판단하고 갖은 수단으로 한국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자연 친척과의 상봉은 뒷자리로 밀려나고 외화벌이가 모든것을 압도하는 촌극이 연출되였다. 연변에서 웅담이 하도 많이 밀수입되니 “연변에는 돼지보다 곰이 더 많지 않느냐?”는 말이 돌게 되었고 속칭 “만남의 광장”으로 일컬어진 서울역구내와 덕수궁의 돌담길은 여기저기 약보따리를 풀어놓고 오가는 길손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리는 얌치없는 연변아줌마들로 부산스러워졌다. 그녀들은 느닷없이 경찰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닭 풍기듯 하면서도 법도 체면도 모르고 돈을 벌려고 바락바락 애를 썼다. 개중에는 가짜 약을 팔고 모국사람들의 등을 쳐 먹던 나머지 약을 팔기 위해 몸까지 파는 족속들도 있었다. 나도 한번 잘 살아 보겠다는 욕심이 낳은 부끄러운 몰골이었다.
  물론 애초에 모국사람들은 한약을 파는 조선족동포들에게 동정어린 눈길로 보냈다. 서울 중구의 송원(松原) 일식집 주인 김병호씨는 차가운 길거리에 난전을 펼쳐놓고 고생하는 조선족동포들을 보고 젊은 시절 일본에서 식당종업원으로 일하던 시절이 떠올라 날마다 도시락 150개씩 무료로 날라다주었으며 동대문시장의 포목상 정영씨는 한겨울 추위에 떨면서 약장사를 하는 조선족동포들을 보고 젊은 시절 로점을 하며 고학하던 시절을 잊지 못해 겨울용 모직원단 850벌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귀국할 로비가 없는 조선족동포들의 애로상황을 감안해 한국정부에서는 시가 17억원어치의 한약을 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족동포들의 약장사는 더욱 극성을 부렸고 가짜 약에 마약까지 밀수입해 들이니 자연 모국사람들은 동정하던데로부터 눈꼴사납게 보기 시작하였다. 또 그만큼 조선족들의 설음은 커만 갔고 “모국 인심 만주의 추위보다 더 쌀쌀하다”고 푸념하게 되였다.

  세번째 단계는 1990년 말부터이다. 한국정부의 강경한 금지령에 의해 약장사는 한풀 꺾기고 연변동포들은 건설현장에서, 식당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성실하게 일해 돈을 벌었다. 또 친척방문자 대신에 로무수출일군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였다. 짧은 몇년 사이에 5천여명의 로무수출일군이 한국에 와 일하였다. 로무수출을 위주로 하는 한국진출이 시작된것이다. 이는 중국정부에서 중국공민의 해외진출을 격려하는 시책을 편것과 직접 관련된다. 하지만 한국은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중동포의 체류기간을 야박하게 제한했으며 노무수출일군들에게 정당한 로동보수를 주지 않았다. 하여 그네들은 고용계약을 무시하고 탈출하여 잠복하게 되였다. 그네들은 불법체류자란 불명예스러운 감투를 쓰고있는것만큼 돌연 나포되여 추방될가봐 밤이나 낮이나 박쥐처럼 숨어살면서 불안에 떨었다. 또 불법체류자인것만큼 임금체불, 산재 심지어 사기를 당해도 속수무책이고 아무런 법적인 보호와 도움도 받을수 없었다. 이러한 조선족동포들의 막부득이한 상황은 1996년 8월 남태평양에서 조업중이던 온두라스 국적의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호에서 조선족동포에 의한 선상반란이 일어나 한국인 선원 7명을 포함한 11명의 선원이 살해된 사건을 빚어내기도 하였다.
  네번째 단계, 물론 2003년 9월 외국인고용허가제 시행으로 조선족동포들이 합법적으로 취업활동을 할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고, 2005년과 2006년에는 조선족동포들이 불법체류자 신분에서 합법적인 로동자신분으로 전환되는 시기를 거치기도 하였다. 특히 2007년 방문취업제 시행 이후, 한국 거주 조선족동포 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에 따르면 2014년 말 조선족동포 체류자는 40만 4천여 명을 기록하였다. 국내 취업자격을 가진 외국인 체류자 56만여 명 중에 51%에 달하는 28만 6천여 명이 조선족동포인 셈이다. 특히 2011년 문화방송의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에서 연변출신의 젊은이 백청강이 우승함으로써 조선족동포의 이미지를 크게 개선했고 따라서 한국국민들도 "인생역전의 스토리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조선족을 향한 선입견에 대한 미안함, 조선족청년의 꿈을 지지해주어야 한다는 정의감"을 가지게 되였다.
 “코리안 드림”을 통해 조선족동포들은 여러 가지 실혜를 보았다.
  첫째로, 적지 않은 조선족동포들을 유족하게 살수 있게 되였다. 조선족동포들은 한국체류 초기에 한국 친척들의 부조, 약장사, 품팔이, 노무수출 등을 통해 외화를 벌어왔다. 한사람이 적게 쳐서 3천 달러를 벌어왔다고 쳐도 2억 4천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온 셈이 된다. 1995년 현재 연길시의 외화저금액은 6천여만 달러로서 조선족인구로 따지면 매인당 3백 달러에 달해 길림성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 무렵 연변이 길림성내에서는 물론 전국의 기타 소수민족지구에 비해 월등하게 부유하게 된 데는 “코리안 드림”의 덕을 크게 입었다고 할수 있다.

 둘째로,“코리안 드림”은 조선족동포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선진적인 기술과 경영방법을 배우게 하였다. 한국 나들이는 심리적인 고뇌와 육체적인 고역으로 점철된 고난의 력정이였지만 어쨌든 선진적인 문화와 생산방식과의 접촉이였다. 조선족동포들은 외화를 벌었을뿐만 아니라 거개가 돈벌이하는 재간을 배워가지고 돌아왔다. 지금 연변에 설렁탕, 삼계탕과 같은 한식집이 많은데 그런 집의 사장들은 거개가 한국나들이를 해서 목돈을 벌고 재간을 배웠다. 그리고 연변에는 사영기업소가 1994년 현재 1055개 소 있는데 그중 70%는 조선족들이 경영하였다. “코리안 드림”이 없었던들 이러한 조선족동포의 현대적인 경영의식이 언제 눈뜰수 있었겠는가? 또 무슨 자금으로 번듯한 가게를 차리고 회사를 앉힐 수 있었겠는가?

 세째로 “코리안 드림”은 이러저러한 몰리해와 갈등을 빚어내기도 하였지만 아무튼 조선족동포들이 우리 민족의 역사, 문화 전통을 보존하고 민족적동질성을 회복하는데 유조했다. 일례로 연변의 일부 연예인들은 한국에 가서 판소리를 배우고 돌아와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되살리고 널리 보급하였다. 특히 한국의 적잖은 민간단체와 지명인사들은 중국 조선족사회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귀중한 도서를 보내주고 문화시설을 앉혀 주었으며 민족문화의 연구와 보급 활동에 자금을 지원하고 가난한 동포자제들을 위해 한국류학을 알선하고 장학금을 주선해주기도 하였다. 일례로 전국 대학교 중에서 가장 멋지고 웅장하게, 또 민족적인 풍격이 짙게 단청을 입혀 세워놓은 연변대학교 정문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의 한국인들이 보내준 성금으로 세운것이다. 역시 모국 지성인들의 지원으로 일어선 연변작가협회청사는 시장경제의 폭풍취우속에서도 조선족작가들의 활동무대로, 민족문화의 요람으로 튼튼히 자리잡고있다.
  그러나 “코리안 드림”은 부정적인 면도 적잖게 로출시켰다. 이를 주로 조선족작가들이 펴낸 소설들을 통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소설들은 “코리안 드림”의 전반 과정을 형상적으로 다루고있는데 조선족동포들의 의식변화과정과 함께 한국 이미지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면서 조선족동포와 한국국민의 소통과 화합의 론리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탐구를 하고 있어 커다란 인식적, 미학적 가치를 가지고있다.

 

3. 상호 몰리해에 의한 갈등과 반목의 양상

 

  조선족동포와 한국국민은 피를 나눈 동족이며 말과 글을 비롯한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공유하고있는 동일한 민족이다. 근 반세기 동안 중국과 한국 사이를 가로지른 장벽을 허물고 서로 만났을 때 쌍방은 재회의 희열과 함께 혈육의 정과 동질성을 확인할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상호 불신과 반목, 원망과 갈등의 갭은 날로 깊어졌다.
  하기에 한국체험을 다룬 소설들은 아름답지 못한 한국인의 이미지를 그림과 아울러 한국을 조선족의 안해를 앗아가고 조선족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간 장본인으로 매도한다. 강호원의 중편소설 ⟪인천부두⟫는 코리안 드림으로 인해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이 어떻게 균열되고 붕괴되고있는가를 리얼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서두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만약 당신이 하늘을 안을 수 있는‘고단수’ 남아라면 서울로 가라. 그 곳은 모든 것을 녹여버릴 수 있는‘초고온용광로’이기 때문. 만약 당신이 대지를 안을 수 있는‘녀강자’라면 서울로 가라. 그 곳은‘고단수’ 남아들이 운집한 곳이기 때문.”

남주인공 성철은 키가 180미터나 되는 억대우 같은 사내이다.그는 건축현장에서 벽돌을 나르고 타일을 붙이는 일을 한다. 일이 고된것은 참을수 있으나 “타일오야지”요,“미장오야지”요 하는 자들이 연변에서 온 아줌마를 마음대로 희롱하는데는 도무지 참을수 없다. 성철은 퇴근하는 연변아줌마를 억지로 끌고가는 “미장오야지”를 한주먹에 때려눕힌다. 하지만 일자리를 떼이고 거리를 헤매게 된다. 어느 날 성철은 양복을 입은 훤칠한 사내의 팔을 끼고 걸어가는 안해 옥자를 발견한다. 그처럼 가정을 사랑하고 내조를 잘하던 옥자가 외간남자와 놀아나다니! 성철은 깊은 고통에 모대기다가 억지로 옥자를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가려 한다.

 헌데 성철이 공항 수용대우에 급급히 짐을 올려놓고 세관검문을 받으려는 순간, 옥자는 큰일이나 난듯이 손에 들었던 핸드백을 성철에게 넘겨주며 “남은 돈 50만원을 달러로 바꾼다는것이 그만 깜빡 잊었네요.” 하고 세관 밖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한식경이나 지나도 옥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공항 확성기에서는 빨리 탑승하라고 재촉을 한다. 성철이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핸드백을 열어보니 쪽지 한 장이 눈에 띈다.“정말 면목이 없어요. 돈과 물건은 돌아가서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절 용서하세요. 앞으로 다시 만날수 있기를 빌어요, 옥자 올림.”이처럼 이 소설은 한국을 인간의 마음을 좀먹고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은 고장으로 락인하고있다.
  정형섭의 ⟪가마우지 와이프⟫는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간 지순의 비극을 통해 조선족녀성들의 등을 쳐서 먹고 사는 한국 남정들의 치사스러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순은 브로커에게 7만 5천 원이란 거금을 주고 위장결혼이란 방법으로 한국에 왔지만 자유로운 몸이 되지 못한다. 한국에서 부부관계가 유지돼야만 무시로 들이닥치는 출입국관리국 요원들의 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합법체류가 보장된다. 그래서 지순은 한국 "남편"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 늘 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와이프" 흉내를 내야 했다. 말하자면 시름을 놓고 한국에 체류하고 장차 영주권까지 따자면 한국 남정과의 관계를 끊을수 없었던것이다. 특히 해마다 외국인등록증 연장수속을 밟아야 했으므로 남편과 같이 법무부 출입국관리소를 다녀와야 하였다. 이러한 지순의 약점을 손에 쥔“남편”은 이 구실 저 구실 대면서 쉽게 나서주지 않았다.“남편”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3,40만원씩 돈을 갈취해갔다.

이 소설은 지순이“남편”과 함께 출입국관리소를 다녀오는 하루의 일을 다루고 있다. 남편은 괜히 호기를 부려 웬 녀자의 자가용을 내서 셋이서 출입국관리소를 찾아간다. 그런데 23만 원의 기름 값과 외국인등록증 관리비와 연장수속비를 합쳐 16만 4천 원을 모두 지순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 그뿐이랴.“남편”은 근사한 식당에 들어가 마치 자기가 한 턱 내기라도 하듯이 귀한 요리를 청해 녀자 친구를 대접하는데 요리 값 21만 3천원은 모두 지순이 내게 한다. 실컷 먹고 난 “남편”은 지순을 식당에 내버린 채 녀자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달아난다. 그야말로 지순은 어부에게 고기를 낚아 바치는 가마우지란 새와 다름이 없다. 핸드폰으로 “ㅡ여보세요! 여보세요! 와이?” 하고 부르던 지순이가 분노에 찬 눈길로 남녀가 사라진 쪽을 쏘아보다가 악에 받쳐“야ㅡ 개새끼야!” 하고 소리를 치는데 여기서 한국인의 이미지는 형편없이 무너지고 만다.

박옥남의 단편소설 ⟪내 이름은 개똥네⟫를 보자. 이 작품은 중국에서의 청소년시절과의 대비속에서 한국에 나가있는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의 슬픔과 고뇌를 다루고 있다.“내 이름은 개똥네”라는 제목 자체가 보여주다시피 이 작품은 역설적인 구조를 가진 작품이다. 스스로 자기 이름을 “개똥네”라고 했으니 지극히 모순되는 진술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히려 진실을 이야기하고있기때문이다.  이 작품은 작자가 한국에 “재외동포문학상”을 수상하러 갔다가 한국체류중인 남편과 동창생들을 만났던 일을 소재로 다루고있다. 며칠간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일들을 쓰고 있는데 비행기가 두 날개로 하늘을 날듯이 한국방문시의 견문을 서술시간으로 처녀시절의 이야기를 편년사시간으로 교차시키면서 의식류수법으로 두 갈래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엮어 플롯을 짜고있다. 전반 이야기의 관찰자, 서술자는“나”인데 처음 외국나들이를 하는지라 절에 온 색시처럼 촌스럽다. 하지만 그녀는 야무지고 사려 깊은 녀성이다. 그녀는 비행기안에서 만난 통배추모양의 헤어스타일을 한 한국사내와의 문화적 마찰을 경험하기도 하고 인천공항에서 통관수속을 밟을 때 외국인들과 한 줄에 서야 하는 서글픔과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은 한국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불청객”임을 느끼게 된다.

특히 그녀는 3년 만에 만난 남편의 초췌한 얼굴과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놀란다. 불법체류자로 숨어사는 남편은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경찰을 보고 초풍하듯 놀라 벌벌 떤다. 그리고 소꿉시절의 친구들인 철수, 연순, 을숙, 금자, 병달, 갑부, 동녀, 광식, 춘화, 진아와 만나는데 그네들은 조상의 나라 한국에 왔지만 하나같이 고된 일에 부대끼고 하나같이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동녀는 한국에 온지 10년째인데 한족(漢族)들의 입국비자가 잘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호구를 한족으로 고쳐가지고 온 까닭에 조선족동포에게는 자진신고에 의한 재입국제도가 도입되였지만 그 혜택을 받을수 없는 몸이라 중국에 돌아갈수도 없다. 영순이는 치매에 걸린 로인을 보살피는 보모노릇을 하면서 갖은 괄시와 수모를 다 받고있고 불고기집에서 불판을 닦고 숯불관리를 하는 병달이는“싸가지 없는 놈들, 너희들 중국에선 이것도 못 봤지? 저것도 첨 보지? 그러면서 시까스르는데, 생각 같으면 불구덕을 들어 그놈의 대갈통에 확 들씌워놓고 싶을 때가 하루에도 열두 번 생긴다.”고 한다. 이들은 그야말로 중국에서도 살길이 없고 한국에서도 설자리가 없는 소외된 인간들이다. 여기서“개똥네”는 계동녀의 별명만을 지칭하지 않는다.“개똥네”, 그것은 의지가지없는 조선족동포의 대명사이며 소외된 이방인의 별칭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이 작품은 “개똥네”라는 메타포를 동원해 “나(또는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중요한 물음을 제기하고있으며 조선족형제들의 민족적정체성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있다.
 

    4. 동포애의 론리와 인간성의 발견

 

  김남현은 가장 이른 시기에 한국체험을 소설화한 작가인데 그의 단편소설 ⟪한신 하이츠⟫와 강호원의 단편소설 ⟪쪽빛⟫(2007)은 조선족동포와 한국 최하층 로동자들의 동포애와 함께 그들의 련대성까지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리동렬의 단편소설 ⟪백정 미스터 리⟫는 한국 보통 서민의 가슴에 숨어있는 깊은 인간성을 발견하고 형상화하고있다. 
 ⟪한신 하이츠⟫는 황석영의 중편소설⟪객지⟫를 련상케 한다. 조선족 출신의 남정 둘과 한국인 남정 셋은 덕홍이라는 오야지 밑에서 일한다. 이들은 건축현장에서 15층까지 시멘트와 벽돌을 올린다. 온종일 시멘트가루를 먹어도 고작 “목캔디” 한 알로 껄껄한 목구멍을 달랠수밖에 없다. 더우기 고층에서 벽돌이 떨어지면 목숨을 잃을수도 있다. 이들 다섯 명의 인부는 25평 되나마나한 덕홍네 집에서 먹고 자는데 화장실이 하나뿐인지라 아침저녁으로 고생이 막심하였다. 날마다 참으로 먹는것은 라면 한그릇에 막걸리 한잔인데, 노가다는 막걸리기운으로 일하는것 같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오야지와 오야붕은 고스톱을 놀아 통닭내기를 하자고 인부들을 못살게 군다. 결국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오야지와 오야붕은 인부들의 돈을 따고 인부들은 하루 품삯을 고스란히 바치는 격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낮에는 뼈 빠지게 일을 시켜먹고 밤에는 투전판에서 긁어가고… 젠장 2중 착취로군, 쥐 같은 놈!”하고 저주한다. 더욱 한심한것은 일이 거의 끝나가지만 로임을 차일피일 미룬다. 그러자 한국인 인부들은 적어도 중국에서 온 동포의 로임만은 제때에 주어야 귀국할것 아니냐고 하면서 덕홍에게 대든다.

 “뭐라능교? 이 자식이 중국사람 고생하는거 눈으로 못 보았능기라? 도와주지는 못하고! 내 돈 띠묵어? 니눔 죽여버린다. 로동청에 가자. 내 돈 띠묵고는 몬 배길기다. 중국사람은 어때, 이눔아! 그 사람들 지 나라 놔두고 좋아서 중국 갔냐? 우리 동포다 우리 동포! 아능기라? 무식한놈! 일본놈 때문에 만주땅에 갔능기라!” 
  
  강호원의 단편소설 ⟪쪽빛⟫도 한국의 어느 한 외딴 섬에 있는 공장에서 벌어진 조선족동포 정호와 한국인 우반장(禹班長)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인간평등주의 사회에서 지내온 조선족동포와 가부장적인 수직논리에 젖은 한국인 사이에는 자연 갈등과 충돌이 생긴다. 정호는 육중한 철판들이 부딪치고 쇠를 갈아내는 소음으로 진동하는 로동현장, 고된 로동과 변덕스러운 기후 때문에 육신은 무너질것 같은데, 설상가상으로 한국인 우반장의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훈계와 욕설을 받아야만 한다. 우반장은 입만 열면 “씨팔, 씨팔”하고 10살 손우인 정호에게 거리낌 없이 반말을 쓴다. 하지만 우반장에게서 “병신”이란 말을 듣는 순간 정호는 천둥같이 노해서 쇠파이프를 들고 길길이 뛴다. 결국 정호는 사장에게 들통이 나서 해고를 당하게 된다. 그제야 우반장이 공장을 떠나는 정호를 붙잡고 “나는 집에 노모도 없구 툭 털면 먼지라카지만두 형님은 연변에 마누라에 자식들까지 두고 온 묌이 아닌겨?”하고 한사코 붙잡는다. 이처럼 이 작품은 적절한 배경을 통해 분위기를 잡고 치열한 갈등과 충돌을 통해 극적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나서 자연스럽게 화해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화해를 가능케 한 것은 물론 두 밑바닥인생의 가슴속에 고여 있는 따뜻한 인간애와 민족적동질성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쪽빛”인데 그것은 바다나 하늘의 색갈인 동시에 핏줄의 색깔이며 격렬한 파란(波蘭)과 충격(衝擊) 뒤에 오는 평온과 순수의 빛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치밀하게 계산한 상징을 내적장치로 깔고있다고 하겠다.
  김남현의 단편소설 ⟪한신 하이츠⟫의 배경은 경상남도 창원이라면 리동렬의 단편소설 ⟪백정 미스터 리⟫의 배경은 경상북도의 고령읍이다. 중국에서 온 “나”는 고등학교 교사출신인데 열흘 동안 건축현장에서 막일을 했더니 옆구리가 켕기고 힘이 들어 죽을 지경이다. 한국인들은 일을 무섭게들 했다. 6시 반에 나가 12시까지, 오후는 1시부터 6시까지 설쳐야 했다. 휴식이란 오전, 오후 각각 반시간씩 참 먹는 시간밖에 없다. 15년 동안 분필을 쥐고 강의나 하던 “내”가 건축현장에서 뛰자니 그야말로 곱게 자란 도련님이 곡괭이자루 드는 격이다. 일터 하나 바꾸자고 했더니 축협의 돼지고기 나르는 일이 생겼다. 거기서 “나”는 3십대중반의 한 사내와 면목을 익히게 된다. 품 너른 자주색바지에다 흰 셔츠를 입은 그는 몸이 꽤 우람지고 배가 불룩하게 나왔다. 우둘우둘 다가와 손을 내미는데 목소리가 조금 쌕쌕했으나 건들건들한 맛이 있었다.

   “성씨를 어떻게 쓰능교? 난 미스터 이씨요.”
    미스터 리? 듣지 않던 영어여서 “나”는 씩 웃었다. 유식한척하는가?
   “미스터 리가 뭐노, 백정이… 이씨먼 이씨라 해라 고만.”
    주인이 퉁을 주자 미스터 리는 뒤통수를 쓱쓱 긁으며 고아대듯 떠들어댔다.
   “아따 흥님, 고등학교선생님한테 유식한 말 한번 써보면 못 쓰우? 그렇찮능교? 흐흥흥.”
그래서 셋은 낄낄낄 웃었다.

   “미스터 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인데 무식한 주제에 유식한체 하는 그의 성격을 눈앞에 보듯이 생동하게 그렸다. 아무튼 “나”는 “미스터 리”를 따라 일을 하게 된다. 그는 “1년 약속 딱 하구 해야지 도중에 스톱하면 나만 낭패라”고 못 박는다. 올해 서른여섯인 그는 장가도 가지 못했다. 그는 집도 있고 차도 있는데 이제 돈을 모아가지고 지식 있고 몸매 고운 처녀를 색시로 맞아들이는게 꿈이란다. 그는 중국에 좋은 색싯감 있으면 소개하란다. 일만 성사되면 후한 보상을 주겠다고 했다. 일단 일이 시작되자 “미스터 리”는 꽥꽥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커피를 갖고 온 다방아가씨와 실없이 롱담을 주고받기도 하면서 번개같이 일을 했다. 하지만 “나”는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꾸어온 보리자루처럼 서있기만 한다. 피비린내, 똥냄새가 진동하는가운데 “미스터 리”는 “자, 이씨, 뭘 우물거리고 있능교? 우리도 시작합시다 의.” 하고 두꺼운 널을 가져다놓고 도끼로 눈 깜박할 새에 내장을 들어낸 돼지를 반쪽으로 갈라서 갈고리가 걸려있는 기둥에 척척 가져다 걸었다. 그의 손에서 칼은 마치 요술을 부리듯 각을 뜯고 척주를 끊어내고 하더니 잠간사이에 돼지 반쪽을 몇 동아리로 분해해서 그릇에다 담았다. 이때 수퇘지 한놈이 암퇘지 등에 올라타겠다고 버둥질하고 있어 “나”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저 눔, 저 눔 봐라… 섹스라도 기껏 해서 소원 풀고 죽자는 겐교 응? 꿀꿀꿀.” “미스터 리”가 걸쭉하게 입담을 늘어놓자 좌우에서 가벼운 웃음들이 튕겼다. 하지만 “나”는 웃음은커녕 몸을 돌려 구토를 하고 말았다. 그 돼지들도 뒷다리를 푸들푸들 떨면서 같은 꼴을 당하고 말았다. 문득 솥에다 돼지를 다루던 “미스터 리”는 함께 일하던 웬 남정과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돼지 각을 뜯던 미스터리는 “젠장!” 하더니 눈을 딱 부릅뜨고 칼을 든 채 흔들거리며 그쪽으로 간다.

   “김씨, 정신있능교 없능교? 사람 몇이 안 되는데 손발 맞춰 같이 데꺽 해치워야지 그래 흑심 부려 살이 찌능교 어쩌능교 응?”
   “아니 자넨 뭔데 버릇없이 굴어 응?”
    그 사내는 사십이 좀 넘었을가? 강기 있고 날파람이 있어보였다. 칼 든 채 손짓을 휘휘 해대는데 칼날이 미스터 리의 눈앞에 섬뜩섬뜩 비껴갔다. 그러자 곁에서 양복을 입은 오십대의 사내가 막아서면서 자기 잘못이라고 양해를 빌었다. 들어보니 큰일도 아니였다. 래일 제사에 쓸 돼지발쪽과 대가리를 가져와 깨끗이 다듬질해달라고 양복 입은 사내가 청탁을 했는가보다. 피차 아는 사이고 해서 잠간 일손을 젖혀놓고 그것부터 손질한것이였다. 한 10여분쯤이면 손질할수 있는데 문제는 손질해준 값으로 삼천원쯤 받게 되는 금액 때문인가 보다.
   “야 이 눔아, 버릇은 개떡 같은 버릇이여, 너 같은 놈들 있기에 대한민국이 안 되는거다. 아니 그래 피 맛 좀 보겠능교, 어쩔라능교 응?”
    하며 미스터 리가 갑자기 칼을 푹 찔러나갔다. 그 사내는 와뜰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선다. 칼과 칼이 쟁그랑 부딪쳤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둘의 허리를 끌어안고 끌어낸다.
  “야— 이 눔아, 썩 꺼져. 그따위로 욕심 채우자구 도살장에 끼어들어? 백정이라두 양심 하나는 밝아야지. 염치없는 눔 같으니라구, 썩 꺼져! 손사장님두 그렇지, 남 일하는데 중간에 끼어들어 불만 질러 놓구, 이라면 이따위 일 뉘 해먹겠능교? 어디 잘 생각해 보소.”

    하지만 정작 다시 일을 시작하자 두 사내는 금세 싱겁게 화해를 하고 만다. 마침내 도살장에서 나와 자동차에 앉은 “나”는 마치 살벌한 지옥을 빠져나온것 같은 기분이다. 아무리 돈이 좋다 한들 이런 일만은 못해낼것 같다. 그러나 “미스터 리”는 금방 무슨 연극이 있었냐는듯이 차를 자전거처럼 익숙하게 몰아대면서 음악볼륨을 쿵작쿵작 잔뜩 높여놓고 어깨를 으쓱으쓱한다. 그날 밤 “나”는 가위에 눌려 몇 번이나 깨여났는지 모른다. 필경 분필이나 끊어먹던 샌님이라 격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그만 혼비백산한것이다. 하지만 1년 약속을 해놓았으니 이 일을 어찌 한담? “나”는 주인을 찾아 “미스터 리”에게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대구로 나가 하루를 놀았다. 저녁에 와보니 “미스터 리”가“나” 대신 삼촌을 붙잡아갔다고 한다. 새 일군을 얻기 전에는 삼촌이라도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럭저럭 한달이 흘러갔다. “내”가 삼촌네 집 안방에 누워 책을 보고있는데 갑자기 “미스터 리”가 찾아왔다. 내가 어쩔줄 몰라 어정쩡해있는데 눈치 빠른 숙모가 나가서 “미스터 리”를 맞았다. 실은 나와 삼촌이 하루씩 나가 일한 품삯을 가지고 왔던것이다. 나는 금시 얼굴이 화끈해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이처럼 이 소설은 한국 서민사회의 세태를 훌륭히 재현하고있을뿐만 아니라 조선족출신 지식인의 시점으로 거칠지만 따뜻한 마음씨를 갖고있는 백정 미스터 리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함으로써 읽는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있다.
  조성희의 단편소설 ⟪조개요리⟫와 허련순의 단편소설 ⟪그 남자의 동굴⟫과 같은 경우에는 한국인에 대한 선입견은 보이지 않고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한국인의 내면에 있는 아픔을 리해하고자 한다. 여기서⟪조개요리⟫만 보기로 하자. 이 작품은 현진건의《B사감과 러브레터》를 연상케 한다. 조성희의 ⟪조개요리⟫의 주인공도 B사감과 같은 타입의 녀성이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연변에서 온 여자가 패션디자이너로 일하는 한국 중년녀성의 식모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패션디자이너는 밤낮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좋아하는지 나빠하는지 그녀의 심중을 알 길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패션디자이너는 괴짜였다. 그녀는 성질머리가 나빠서 동생도, 친정어머니도 다니지 않는다. 그녀는 사람을 싫어하는 독신녀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패션디자이너의 가슴은 조금 불룩한데 가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것 같기도 하다. 그녀의 옷장을 열어보면 긴것과 짧은것, 야한것과 정숙한것, 검은것과 흰것 전부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뿐인데 유독 치마만은 한견지도 없다. 어느 날 밤, 식모가 꿈인지 환청인지 어떤 여자의 혀 꼬부라진 소리에 놀라 깬다. 거실에서 말소리를 들려왔다.
  
   “나 이제 막 들어왔거든… 아니야, 자기 더 마시고 놀다 가. …나 지금 옷이랑 다 벗었단 말이야. 안 돼… 이제 나가면 안 된단 말이야. 나중에 보자. 마담 좀 바꿔봐. …여보세요? 난데, 잘 좀 부탁해. 내 이름으로 뭘 좀 더 드리고… 내일 내가 알아봐 줄테니…그래야죠. 네―에 부탁합니다.”
 
  그녀의 목소리일까? 의심이 갈 정도로 맑고 부드러웠고 지어 아양기가 섞인 목소리다. 밖에서는 여자인 모양이였다. 어느 날, 패션디자이너는 식모를 불러내다가 자장면을 사주기도 하더니 밤중에 식모의 이불속으로 기어들어온다. 식모가 화닥닥 놀라 “사장님, 사장님 방으로 가서 주무세요.”하고 말하자 패션디자이너는 잠꼬대인지 돌아누우면서 식모를 안는다. 식모는 깜짝 놀라 몸을 꼬부린다. 여자들끼리도 안고 잘수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식모는 몸을 빼내려고 애써보지만 그녀의 팔은 쇠사슬처럼 단단하다. 얼마나 외로우면 이럴가 하고 생각하면서 식모는 몸을 내버려둔다. 이튿날 술이 깬 패션디자이너는 자기의 정체를 드러낸다.
 
  “나 어떻게 이만큼 됐는지 알어? 남자들과 겨루어야 된단 말이야. 너처럼 약하면 죽어. 경쟁에서 이겨야 돼. 그래서 난 남자처럼 강하게 된거야. 그러니까 돈두 생기더라. 식구들 먹여 살릴수 있더라. 헌데 그 대신 사람들은 나를 멀리 했어. 괴물처럼 피하더라…식구들이 한술 더 뜨는거 있지?”

  실은 이 패션디자이너는 경쟁사회에서 이질화된 여성에 지나지 않았으며 결국 두 여자는 여성적인 동일성을 느낀다. 패션디자이너가 식모 앞에서 옷을 벗는 장면은 깊은 감동까지 준다.

   “처음에는 와이셔츠를 벗고 부래지어를 벗는다. 그러자 꽉 조였던 가슴이 활 열리며 젖무덤이 꽃송이처럼 피여난다. 마치도 텔레비전 화면에서 꽃봉오리가 막 개화하는 장면을 보는듯하다. 싱싱한 녀자의 가슴이다. 아직 손때가 묻지 않은듯한 생생한 가슴 앞에 녀자는 무의식적으로 제 가슴을 가린다. 긴 목으로부터 좁은 어깨를 지나 가슴께까지 굴곡이 섬세하여 흰 조각상처럼 아름답다. 그녀는 바지 지퍼를 내리고 바지를 벗는다. 아슬아슬하게 작은 삼각팬티가 겨우 국부만 가리고 조금 도톰한 아래배가 드러난다. 배에 가느다란 칼자국이 나있다. 지금 의학이 발달해서 그렇게 굵은 자국이 나타나지 않아 얼핏 보면 주름 같아 보이지만 녀자는 그게 칼자리인 줄을 금방 안다. 녀자는 자신의 몸에 칼자리가 생긴듯이 몸을 부르르 떤다. 그 칼자국사이로 금방이라도 붉은 피가 흘러나올것 같다. 그 피는 샘처럼 끊임없이 흐를것 같다. 어느 때 어떻게 생긴건지 그 자리에 피가 나고 새살이 돋고 이렇게 아물 때까지 얼마나 아팠을까 녀자는 처참히 생각한다. 녀자는 그 칼자국이 마치도 자기 뱃가죽에 난것 같은 동통을 느낀다. …” 

    이 작품은 조개요리를 메타포로 구사하면서 조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녀자는 조개를 그릇에 담아놓았다. 생신한 놈만 골라 샀는데 오는 길에 잘못되였는지 한 놈은 벌써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마치도 창녀와 같다고 녀자는 생각했다. 벌린 입사이로 희고 노랗고 매끌매끌한 속살이 유혹하고있었다.”보다시피 입을 쩍 벌린 조개는 녀성의 음부를 상징하는데 그것은 녀성의 성적 욕망을 대변하는 메타포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패션디자이너로 일하는 40대의 한국인 중년여성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이처럼 이 소설은 한국인의 베일을 벗기고 그 인간적인 본질을 리얼하게 보여주고있다. 하지만 조성희의 ⟪조개요리⟫는 현진건의《B사감과 러브레터》와는 달리 속과 겉이 다른 인간에 대한 야유와 풍자가 아니라 깊은 련민과 동정을 보여준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인의 악마적 이미지 뒤에 숨어있는 인간적인 면을 발굴하고 리해와 화해를 이끌어내고 있는것이다.
   
  

5. 반성, 자존을 통한 소통과 화합의 가능성

 

  최근 들어 조선족소설에는 우리 자신의 람루함과 루추한 모습을 반성하고 자존, 자애, 자강을 통해 인간적인 존엄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돋보인다. 이러한 작품으로 강재희의 《반편들의 잔치》, 허련순의 ⟪푸줏간에 걸린 고기와 말 걸기⟫, 구호준의 ⟪연어들의 걸음걸이⟫, 정호원의 ⟪메이드 인 차이나⟫ 등 단편소설을 들수 있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단순한 피해의식과 약자 콤플렉스를 가지고 한국이나 한국인을 매도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포애의 부활을 통한 조선족동포와 한국국민의 화합이라는 안일한 플롯에 만족하지 않는다. 순수한 인간 대 인간의 입장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자신의 남루하고 누추한 모습을 반성한다. 결과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자존, 자애, 자강에 의해서만 한국사회에서 독립적인 인격체로 살 수 있고 한국인의 긍정을 받고 그들과 평등하게 대화,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강재회의 단편 《반편들의 잔치》는 한국에서 일하는 일부 조선족 로무자들의 허랑방탕한 생활을 꼬집은 작품이다. 추석 련휴에도 오갈 데 없는 조선족 출신의 로무자들은 친구들끼리 모여 추석 련휴를 술을 마시고 계집들과 즐긴다. 결국 사흘에 1인 당 300만 원씩 쓰고 술이 깬 후에야 이를 후회한다.
  허련순의 ⟪푸줏간에 걸린 고기와 말 걸기⟫는 신수정의 평론집 ⟪푸줏간에 걸린 고기⟫에서 힌트를 받아 제목을 단것 같은데 모파상의 ⟪목걸이⟫를 련상시케 하는 수작이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긴장감이 넘치고 심리묘사가 일품이다. 박봉희는 서울의 어느 모텔에서 일하는 조선족동포 아줌마인데 어느 날 방청소를 하다가 욕실에서 우연히 남자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줍게 되었다. 후에 금점에 가서 감정을 받아보니 2천만 원이나 가는 고급반지다. 원래부터 자기것이 아니었지만 열흘쯤 갖고 있으니 마치 자기의 것처럼 생각되였다. 이제 와 임자에게 돌려준다는것은 마치 자기의 물건을 남한테 주어야 하는것처럼 아깝고 억울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반지의 임자가 나타났지만 봉희는 그 반지를 트렁크 안쪽 주머니에 넣고 자물쇠를 놓기도 하고 화분에 파묻기도 하며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베개속에 넣거나 이불속에 넣고 바늘로 꿰매기도 한다. 2천만 원이면 한국에서 2년 동안 벌어야 하는 돈이다. 그래서 봉희는 구실을 대고 중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공항에 와서 가방 안주머니를 열어보니 반지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허련순은 이 작품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지난해 여름, 서울에 갔다가 모텔에서 일하는 큰 올케를 만난 적이 있다. 올케가 나한테 반지를 주면서 남편한테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귤색의 인조보석을 박은 반지였는데 과연 손가락이 견딜수 있을가? 고민이 될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웬 반지냐고 하니 방 청소하다가 주은것인데 남편한테는 일부러 산것이라고 말해달라고 하였다. 여관방에서 주은 반지를 남편한테 선물하는 녀자? 뭔가 모를 기묘한 감정이 전류처럼 등골을 타고 쫙- 흘렀다. 한마디로 말할수없는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애틋하고 씁쓸하고 슬프고 측은하고 비애스러웠다. 그리고 소름이 끼쳤던것은 ‘반지’의 음습한 기운때문이였다. 어떤 남자와 녀자의 불륜장소에서 주은 반지가 선물로 포장되는 과정의 기묘한  감정을 거의 1년 동안이나 남루처럼 이끌고 다니다가 드디어  <푸주칸에 걸린 고기와 말 걸기>로‘반지’의  색깔을 찾게 되였다.” 작가의 말 그대로 이 소설은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동포들의 남루하고 루추한 모습을 꼬집고있다. 그 동안 우리 조선족동포들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 불법체류에 사기행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기본적인 륜리와 도덕도 헌신짝처럼 팽개쳤다.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남루하고 루추한 모습을 보인 조선족동포 자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것이다.

 구호준의 ⟪연어들의 걸음걸이⟫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만신창이 된 한 조선족동포의 인간적인 자각과 동산재기의 의지를 형상화한 철리적인 작품이다. “나”의 모든 재산이라고 할수 있는 돈 500만원을 훔쳐가지고 달아난 안해, 그 대신 나에게 온 몸이 간지러워지는 성병을 남기고 갔다. 결국 나는 서울의 가리봉동이나 대림동에서 쉽게 볼수 있는 빈털터리, 날마다 용역을 뛰는 막벌이군이 되었다. 가끔 그는 대림역 8번 출구에 있는 휴게실에서 노숙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안해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 안해 같아 보이는 녀자를 뒤쫓아 가다가 웬 한국 아가씨와 만나게 되고 후에 낙지집에서 다시 만나 함께 일하게 된다. 실은 이 아가씨는 어느 신문사 기자로 일하다가 다리를 다친 후 허드렛일을 하지만 꽤나 사려 깊은 아가씨였다. 어느 날 둘은 도봉산을 등반하는데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가 굉장히 의미가 있다.

    녀인은 나무에 등을 기대면서 앞에 앉아 여유작작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오빠가 먼저 와서 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저 사람들이 와서 끼어들어 떠든다면 기분이 좋겠어요?”
   “당연히 기분이 잡치지?”
    나는 등산용 수건을 꺼내 녀인에게 건네준다. 한번 물에 적시면 몇 시간이고 물기를 잃지 않는 수건이다.
   “왜 자신도 못하는 일들을 남을 보고 하라고 하나요? 우리가 저기에 끼어들면 저 사람들도 단연히 불쾌해할 것인데.”
    여인은 결국 교포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벽을 찾아주고 있었다.
   “그럼 교포들의 정신이 무너지는 원인은 뭐라고 생각해?”
    다시 천축사로 가는 길을 향해 걸음을 떼면서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만들어 본다.   
   “우선은 자신들의 문제겠지요. 조금 더 긍정적인 사유로 산다면 정신은 쉽게 무너지지 않지만 스스로 피해의식을 갖고 살아가면 어떤 환경에서건 정신이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깐요. 그리고 한국정부도 동포들이 이민해오는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책임이 있고 중국정부에서도 따로 한국으로 진출하는 동포들에게 어떤 배려도 주지 않으니깐 결국 이중으로 버림을 받은 셈이지요.”
    나도 그래서 술을 빙자하면서 살아왔던가?
    한국에서 성공한 동포들도 적잖아요. 그 사람들도 꼭 같이 정신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나요? 생각의 차이가 서로 다른 인생을 만들게 하거든요. 오빠도 그럴거고.“
 
  이렇게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조선족동포 사내와 한국 아가씨는 정상을 바라고 돌층계를 톺아 오르면서 의미 있는 대화를 한다. 등산도 정신력이 있어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듯이 생활도 정신력이 있어야만 난관을 헤쳐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을 두고 장정일은 "몸뚱이가 찌그러져도 맑은 가슴으로 살려는" 정신부활의 시의적절한 주제를 형상적으로 다루었다고 하면서 출구는 찾는 지하철승객, 산을 오르는 등산객,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라는 이미지와 겹치면서 단단한 삶의 지층을 뚫고 건실한 넋을 길러내려는 주인공의 정신력에 상징적인 묘미를 더해주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참으로 적중한 지적이라 하겠다.    
  정호원은 장기간 한국의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이다. 앞에서 본 ⟪쪽빛⟫은 최하층 조선족동포와 한국국민의 모순을 동포애로 풀어나갔다면 단편소설 ⟪메이드 인 차이나⟫는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인다. 조선족동포인“나”는 자그마한 회사에서 용접하는 일을 하는데 취약한 재료로 만든 중국산 홀더 방전 차단제 같은 부품이 쉽게 깨여지고 부수어져서 일을 제대로 할수 없고 손해가 적지 않다. 그때마다 사장은 “니들 중국산은 한결같이 이렇게 부실하냐?”하고 중국산 제품과 “나”를 싸잡아 욕한다. 나는 “값싼 메이드 인 차이나에 인건비 싼 차이니스를 고용하면서도 늘 그것이 불만인 사장의 사고방식에 화가 났지만 꾹 참는다. 하지만 허구한 날 야유와 놀림을 당하던 어느 날 "나"는 끝내 분통을 터뜨린다.

   “그러면 차라리 중국산 빼고 사장님이 선호하는 독일제, 미제, 일제 뭐 그런게 많지 않나요? 왜 하필이면 질 나쁜 중국산만 번번이 사들이고선, 나중에 누구 탓만 같이 구질구질하게 물건 괴롭히고 사람 괴롭혀요?”

  “나”는 한바탕 울분을 쏟아놓고 술자리를 떴고 이튿날 춘천에 있는 친구의 아들 결혼잔치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마음은 후회막심이다. 도대체 왜, 그깟 별 것도 아닌 일 갖고 언감생심 사장과 맞장을 떴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갔다. 그러나 "나"는 금방 이런 생각을 뒤집고 가만히 부르짖는다. "그래 비록 부모님 고향이 여기라도 저 만주대륙에 이민 가서 나를 낳았으니 나는 틀림없는 메이드 인 차이나다, 어쩔래?" 공장 동료의 권유대로 사장한테 "죄송합니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풀릴 일이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이 때 서울 공장에서 막내동료 김씨가 춘천에 있는 "나"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나"는 "나 잘린 거야?" 하고 묻는데 상대방은 "우리 사장님은 가끔씩은 산타할아버지 못지 않게 남을 배려한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내일 직원들 모두 휴가로 춘천에 가서 낚시도 하고 특산도 맛보게 되었으니 하루 춘천에서 묵고 내일 춘천에서 만나자고 한다. 공장에서 6년간 일해 이미 기술자로 자리매김이 된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장의 고육지계를 간파하니“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보다시피 이 소설에서 화해를 이끌어낸것은 동포의 론리가 아니라 경제의 론리이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족동포들이 인간적인 자존을 지키고 스스로 자신의 힘을 키워갈 때 비로소 한국국민과의 평등한 대화와 화합이 가능해지는것이다.        
   
    6. 맺는말

 

조선족소설의 한국형상을 살펴보았다. 대체로 부정적인 한국인상을 다룬 작품이 많았고 한국을 안해를 빼앗아간 나라,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간 장본인으로 보는 작품이 적지 않았으며 코리안 드림은 최종적으로 조선족 개체를 소외의 궁지에 몰리게 했고 조선족사회에 불행을 가져다 준것으로 인식하고있다.

사실 이러한 인식은 많은 한계를 로정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보면 조선족사회는 코리안 드림을 통해 잃은것보다 얻은것이 더 많았다. 그렇다면 왜 한 피를 물고 난 동족인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이러한 갈등이 빚어졌는가? 왜 이러한 “악마적인 한국인상”이 주어졌고 모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하게 된것일가?
  근 반세기에 이르는 조선족과 한국인의 단절, 리념과 체제의 차이에 의한 문화의식의 차이 등을 들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주로 조선족작가의 체험적 한계와 사상적 한계를 들지 않을수 없다. 조선족작가들은 보통 로무자의 신분으로, 지어는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한국에 체류하였고 주로 로동현장에서 한국의 최하층인간들과 접촉하고 마찰을 빚었다. 뿐만 아니라 작가, 지성인의 안목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 리해관계를 가지고 한국인들과 접촉하고 또 그로 인해 갈등과 충돌을 빚어냈다. 다행스러운것은 조선족과 한국인의 갈등을 민족적인 동질성과 인간적인 사랑으로 극복하고자 한 소설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서로의 아픔을 헤아리고자 하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조선족동포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자존, 자강의 모습을 보여야만 한국국민간의 진정한 평등과 대화, 공존과 화합에 이를수 있다는 철리를 형상화함으로써 조선족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있다.

  한국의 소설가 박완서는 리혜선의 장편프로 『코리안 드림』보고 “우리가 때로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억압과 착취자의 위치가 된다는것은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고 하였다. 진솔한 발언이다. 요컨대 조선족소설의 한국인형상은 한국인과 조선족, 한국정부와 중국정부 모두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있다. 특히 한국정부로 놓고 말할 때 조선족을 제대로 인식하는 작업은 향후 조선국민을 제대로 인식하고 민족의 대화합을 이루는 일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한국형상”을 다룬 조선족소설의 문화사적가치가 있다.

-김호웅 문집『경계의 미학과 창조력』, 연변인민출판사, 2019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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