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나는 왜 그 섬에 이끌려 가는가」의 표현예술수법에 대하여

호림 : 연변대학 일본언어문학부 강사. 북경일본학연구중심 연구원. 일본츠쿠바대학 지역연구과 언어문예연구과에서 연구. 현재 일본 주식회사 삼문당 CEO.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홍보국장. 韓中日 3개국에 논문, 수필, 칼럼 다수 발표. 저서 출판.
호림 : 연변대학 일본언어문학부 강사. 북경일본학연구중심 연구원. 일본츠쿠바대학 지역연구과 언어문예연구과에서 연구. 현재 일본 주식회사 삼문당 CEO.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홍보국장. 韓中日 3개국에 논문, 수필, 칼럼 다수 발표. 저서 출판.

시인 김정권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일본 도쿄의 호텔 회의실에서였다. 김정권 시인은 재일조선족 각단체가 공동주최한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창립대회와 재일본조선족문화절 행사로 일본에 왔던 것이다. 조선족예술축제의 주제가를 지은 분의 이름이라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 성립대회를 마치고 두시간 후 그 길로 중국에 들어가야 해서 그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작년(2020) 년말에 코로나가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릴 때 연변향음시랑송예술센터가 성립되고 그 그룹에서 다시 시인 김정권을 만나게 되였다. 그리고 그 그룹방에서 김정권 시인의 시 <<나는 왜 그 섬에 이끌려 가는가>>를 읽게 되였다. 미발표 작품인데 향음시낭송예술그룹과 다른 계정그룹방에서 연이어 영상낭송작품으로 재 창작하여 배부하고 있었다. 말그대로 인구(人口)에 회재膾炙하는 작품인 것이다. 나도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을 정도로 평이로운 언어였고 4련 15행 157자로 된 짤막한 시였다.

 

그섬에는 구름도 하얗다

목련도 하얗다

구름하얀 땅이 어디엔들 없으며

목련이 꽃피는 곳이 어디엔들 없으랴마

내사 무슨 꽃물에

빠진 가슴이기에

이리도 허우적이고 싶은가

저 푸른하늘과

저 푸른 바다와

그리고 그리고 바람부는 언덕쯤에

민들레 꽃으로

혹은 진달래 향기로 있을

저녁이슬같은 너는

어쩌자고 나를 이 한겨울에도

푸른 보리밭으로 이끄는 것인가.

-<<나는 왜 그 섬에 이끌려 가는가> >전문

 

시적 화자 외에는 그 어떤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고향을 쓰면서 고향이란 말도 없고 떠나가는 고향을 그리면서 그립다는 말도 없고 섬에 대하여 영탄법도 쓰지 않앟다, 진달래를 떠나가는 님한테 드리겠소(김소월/진달래), 봄의 선구자요(박팔양/진달래) 등 말도 쓰지 않았기에 그와 완전히 다른 수법으로 자연스러우며 겸손하며 남들이 미달한 언어예술로 화자의 무가내하無可奈何를 표현한 무가내하無可奈何가 아닌, 호소를 나타낸 시이다.

제1련과 제2련에 걸쳐 첫 4행은 구름과 목련으로 흰색이 많은 섬으로 백의 동포들이 사는 곳이라고 암시했다. 제2련을 구성하는 제3행과 제4행은 흰색을 다시 강조하면서 기승전결로서 문장연결의 구조적 역할도 겸함과 동시에 또 거기에 다른 백의 동포들이 사는 곳과는 다른 특수한 곳이라고 자신의 고향에 대한 자부감을 나타냈다. 제3련을 구성하는 제5행, 6행, 7행에서는 아름다움에 젖어본 사람만 아는 그 고향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제8행에서 제15행으로 이어지는 제4련에서는 현실속과 마음속에 보이는 고향의 부름을 표현했다.

시 전체구조를 보면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지는 센텐스를 시의 운률을 위하여 자연스럽게 끊어 놓은 듯이 의미적 연결도 너무 순통하고 미끈하다. 하나의 센텐스로 하기에는 문장이 길어지니 설문과 해답을 넣고 그 시적 표현의 함축을 위하여 아주 정교한 어휘적 혹은 문법적인 설계를 진행했다는 것을 대뜸 알아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그 섬의 “저녁이슬 같은 너는 어쩌자고 나를” 이끌어 가는가 하는 한개의 단일문을 골격으로 시인의 사상을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아래에 시인의 표현 기법을 살펴보기로 하자.

어휘의 묘용.

섬,보리밭. 이슬, 섬은 물에 빠진 사람한테 생명의 은인이고 영원한 피난처이고 보금자리이다. 조선족들이 자신의 힘으로 개척하고 또 민족정책의 따사로운 빛발아래 자기언어를 고수하고 지키며 960만 평방 킬로미터 땅에서 56개민족 15억의 인구속에서 떳떳이 자신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면 살아가는 특수한 지리적 또는 역사적 특성을 강조하였다

보리밭은 우리민족에게는 항상 희망의 보금자리로 형상화 되어있다. 리상화의 시에서도 나오다시피 뺴앗긴 남의 땅에서도 희망의 상징으로 나온다.

시인 김정권은 조선어로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극본을 쓰면서 국가 일급작가로 된 자신의 성장과정과 그 환경을 회고(懐古)적인 정서로 표현하기 위해서 고향을 보리밭으로 이미지화 했다.

방언의 묘용

제3련에 “내사 무슨 꽃물에”하고 연결어미 <사>가 등장한다. “내사”의 <사>는 연변방언이다. 명사의 뒤에 붙어서 <야말로>의 뜻을 나타내지만 <야말로>뜻 외에 연변방언 <사>는 겸양의 뜻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내사 모르지> 혹은 <그 비싼 맨션을 우리사 못 사지>등 자신의 차원을 낮춰 말할 때 쓰는 연결 어미이다. 시에서 나같은 것도 아름다운 고향에 이끌려가는데 독자인 당신은 더 이를 데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부사적인 용법의 묘용

제14행에 <어쩌자고>라는 동사적부사가 나온다. <왜서> 혹은 <왜>로 영문을 물어보는 부사인데 <어쩌자고>는 아주 큰 일을 예견했을 때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추궁할 수도 있다는 강한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 원형은<어찌하려고>이기에 동사가 들어간 동기를 묻는 특수 의문법이다. Yes, No로 회답할 수 없고 간단하게 답할 수 없게 하는 동기에 무게를 주는 많은 의미를 응축시킨 부사이다.

색채와 빛깔의 묘용

흰색을 네 번 등장시켜 백의 동포의 고향을 이미지화 하는 데 성공했다. 14행의 “한겨울”도 흰색이다. 여기에서는 엄동설한의 흰삧과 푸른 보리밭과 대조하면서 살기가 전혀 없는 엄동설한과 계춘季春, 맹하孟夏의 따스한 바람에 하느작거리는 보리밭을 비교하는 것을 통하여 행복과 꿈을 상징하며 강조하는 데에 사용했다. 리상화도 <<뺴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희망, 광복의 상징으로 “고맙게 자란 보리밭”을 등장시켰다. 시인의 고향에는 목란이 없다. 여기서 목란은 대체적인 명사로 의미지화한 흰색의 대체일뿐 꼭 목련꼿의 실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문법적기능의 묘용, 피동형 자동사

마지막 행인 15행과 제목에 걸쳐서 <이끌다> <이끌리다>라는 피동형 자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섬은 이끌고 나는 이끌려가는데 불가항력적인 힘을 나타내는 <이끌리다>피동형자동사를 씀으로써 물을 흐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흐르듯 불가항력적인 자동사, 즉 피동형자동사를 써서 고향에로 어쩔 수 없이 끝려감을 나타냈다. 정지용은 그 유명한 대표작 <<향수>> 에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에돌아가는 그 곳이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했다. 그 <잊힐리야>가 바로 이 피동형 자동사인것이다. 자연의 물이 흐르듯 불가항력적인 법칙이라고 따를 수밖에, 따르지 않을수 없다고 고향이 주는 마력을 강조했다.

시공의 묘용

시인은 계절을 한겨울로 설정함으로써 시간적으로 봄이라는 공간을 멀리 떠나온 겨울이라고 공간적인 상상을 부여시켰다. 다시말하면 그가 그리는 고향은 맹하孟夏의 푸른 보리밭이 상징하는 행복의 요람인 고향이지만 지금은 거기서 많이 떠나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반문법의 묘용.

설문과 반문의 반복으로 문장의 구조를 튼튼히 함과 동시에 무가내함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작용을 했다.

지시 대명사의 묘용

제1행 “그 섬에는 구름도 하얗다”에는 지시대명사 <그>가 등장한다. 보이지 않는 먼 섬을 나타내서 시적화자가 먼 곳에서 조망하는, 알기 쉽게 말하면 고향에 있는 시적화자가 자아 관조적인 수법으로 시각을 멀리서 관찰하게 설정해서 넓디넓은 지구속의 유일한 에덴동산으로 묘사한 것이다.

제8행과 제9행에 “저 푸른바다 저 푸른 하늘아래”하고 가시적인 지칭대명사를 손으로 가리키며 보듯이 씀으로써 그다음에 오는 <바람부는 언덕쯤>이라고 비가시적인 상상의 세계 혹은 맘의 세계로 고향을 승화시켰다

그리고 시적화자에게 있어서 독자는 이인칭이 된다. 고향을 <그>와<저>를 반복하며 고향을 3인칭으로 지칭하다가 제일 마감 단계인 13행에서 고향을 <너는> 하고 지칭하면서 워낙 이인칭으로 존재하던 독자도 포기하고 고향을 덥석 당겨다가 포옹하는 수법을 썼다. 먼데서 부터 가까운 곳으로 시각을 돌렸다고 하기 보다 인식의 단계인 시각과 청각의 간접적인 감성단계로부터 촉각의 직접적인 리성단계로 발전시킨 것이다.

 

고향을 섬에 비유하고 이슬 같은 것에 비교했다. 바다가 아니고 산도 아닌 금방 사라지는 이슬로, 그것도 아침이슬이 아니고 저녁이슬로 오늘저녁에는 사라진다는 불안감과 급박감을 시에 인입引入시킴으로써 나를 고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어쩌면 사리지는 고향이기에 더욱 다급히 다가가려고 설정했는지 모른다. 그 반면에 다급히 독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작품속에는 진달래가 등장한다. 박팔양의 <진달래>같은 선구자로 등장하거나 김소월의 <진달래>같이 역설적인 수법으로 님아 가지말라고 절규하는 진달래의 실체로 진달래를 등장시키지 않았고 진달래향기로、 그것도 <진달래 향기로 있을> 즉 불확실한 추량형으로, 저녁이슬의 수식어로 등장한다. 진달래 향기로 등장시키고 이야기하듯이 시적화자는 조선족인구의 류실과 감소 또는 소자고령화少子高齡化로 하여 조직이 해체되어가고 언어사용도 소실되어가는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한 무가내함을 표현함과 동시에 워낙 있었던 그 행복한 고향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만가로서 시를 썼을 것이다. 시인의 최근 시를 바라보면 <<훈민정음>>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훈민정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고 있다. 당의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조선문화를 마음껏 발전시키고 조선어만으로도 교수가 되고 국가 일급작가가 되여 존중받는 그런 고향이 이제 위태로우니 나마저 끌려가는 그 섬으로 겨레들이 돌아와서 함께 고향을 건설하자는 절절한 호소가 시의 저의에 깔려 있음이 분명하다.

시인은 축소화 되는 조선족사회를 우려하면서도 그 실체를 심종문(沈从文)작품처럼 아름답게 쓰고 윤동주처럼 그 쓰러져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 같다.

시속에 그 어떤 동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순 자연 경물이 등장하고 또 그 어떤 의지, 염원, 욕망, 타산 등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그런 것을 나타내는 동사들도 없다, 어쩌다 시적화자가 자기를 <나>라고 할 뿐 다른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그 단순한 자연 경물만 가지고 위축되어 가는 고향에 대한 서정을 천재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그 변화에 무가내함과 무가내함속에 동포들에게 선명히 뭔가를 호소하고 있다. 그 호소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분명히 뚜렷하고 아름다웠다.

시속에서 시인은 계절을 한겨울이라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과 회고懐古의 상징으로 푸른 보리밭을 선명히 이끌어내기위한 배경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겨울이 왔으니 봄이 멀겠냐 하는 엄동설한이 아니고 오히려 냉혹한 겨울의 도래를 걱정하는 만추晩秋이고 그의 서정은 만추의 우수憂愁라 함이 더 적절할것 같다.

시인의 시에는 두보의 “나라는 허물어져도 산하는 그대로 있어 무너진 성터에 봄은 찾아와 초목만 무성하더라”처럼 의연히 산하 초목은 그대로 아름답지만 아름다움이 냥패狼狈와 낭자狼藉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심경 또는 최호의 “해지고 날저무니 내 고향은 어드메냐 강위의 물안개 나를 수심케 하네”와 같이 절절한 망향望鄕의 정서가 동시에 깔려 있다.

시인 김정권은 사실주의적 관찰방법과 낭만주의 표현예술수법으로 고향에 있으며 고향을 그리고 있는,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그리워하는 진짜 그리움을 예술적 형상으로 승화시켰다. 시 <<나는 왜 그 섬에 이끌려 가는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담은 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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