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짓누르던 이념 콤플렉스를 하얼빈에서 대면하다
'하루빈'이 '꽃서울'로 바뀐 노랫말
이념과 민족에 밀려난 대륙의 추억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시가지 풍경.
노래하자 하루빈

춤추는 하루빈

아카시아숲 속으로 꽃마차는 달려간다

하늘은 오렌지색 꾸냥의 귀걸이는….


지난 여름 하얼빈의 추억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목단강에서 하얼빈까지는 간간히 해바라기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옥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다소 지루할 수 있는 풍경이었는데 하얼빈에 도착할 무렵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차안 방송에선 우수어린 중국 노래까지 흘러나오고 있어서 내 기분은 제법 들떠 있었다. '~노래하자 하루빈….' 흘러간 가요를 흥얼거리며 저녁 술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른다면 근사할 것 같았다.

도착해서 일단 흑룡강 신문사에 근무하는 소설가 김동규 선생을 찾았다. 그는 모든 것이 컸다. 마치 처용의 탈을 닮은 듯한 그의 커다란 코와 눈 귀 그리고 얼굴, 스스로 가운데 물건도 크다며 농담을 던지는 무척 활달한 북방사내였다.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는데 만나자마자 바로 한탄강이라는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식당에는 신문사 기자와 문인들 몇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점심시간에 도착한다하여 모였다가 늦게 오는 바람에 그들은 가고 2차로 사람을 규합했다고 했다. 그는 이미 일차에 마신 술로 취기가 많이 올라 있었다.

그들의 점심문화는 우리의 저녁만찬보다 더 거나하다.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인사가 술잔을 주고받는 것이다. 웅담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국 돈으로 15만 원이 넘는다며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시간이 늦어 번거롭게 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곁에는 우아한 여성 기자가 있었고, 급한 성격에 목소리까지 괄괄한 그의 겹치기 술잔 돌리기를 거부할 수 없다. 아, 나는 40도가 넘는 독주에 진작 정신이 몽롱해져 버렸다. 택시로 제법 먼 거리로 이동해서 2차 노래방까지 갔다. 같이 어울려 노래도 하고 춤도 춘 것 같았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는 여관방에 곯아떨어지기까지 도대체가 순식간인 것 같았다. '하루빈' 노래를 불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침 늦게 일어나니 하얼빈역 부근 어느 여관이었다.

다음날은 그곳 문인들의 안내로 내몽골이나 러시아 국경까지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연락처를 적어 놓은 수첩을 잃어버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한족 아줌마에게서는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하얼빈에서 애초에 꿈꾸던 그야말로 노래만 하다가 만 셈이다. 하얼빈 일정을 포기하고 다음 목적지인 길림으로 가기 위해 역으로 갔다. 기차를 기다리며 역 광장에서 너무나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잠시 나는 그 주문 같은 노래를 흥얼거려 보았다. 노래하자 하루빈….

1939년에 나왔던 이 노래가 해방 뒤 느닷없이 '노래하자 꽃서울'로 바꿔 다시 불리어지게 되었다. 하루빈(하얼빈)은 음절을 맞추기 위해 '꽃서울'로 송화강은 한강으로 둔갑한 것이다. 서울 풍경과는 거리가 먼 마차가 다니는 울퉁불퉁한 길, 아카시아숲, 오렌지색 하늘, 꿔냥, 손풍금 소리 등은 다분히 이국적이고 대륙적이다. 이렇듯 어울리지 않은 내용들은 비뚤어지고 혼란스러운 우리네 가치관이 그대로 반영된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를 지배했던 가장 큰 콤플렉스 또는 금기는 이념과 민족이다. 그 둘 다 공존하는 공간인 하루빈을 그대로 노래할 수가 없었다. 대륙을 무대로 우리가 꽃마차를 타고 놀았든 어떤 활동을 했든 그것은 일제의 그늘 아래 있었으므로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가 있는 것이고, 더구나 그곳이 지금은 공산당 지배하에 있는 지역이므로 노래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란 현재의 형편에서 끝임 없이 가치가 부여되고 평가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나마 한 시절 공유했던 대륙이라는 저 고구려적 무대에서의 생활 경험은 순식간에 한 장의 꿈으로 화해버린 것이다. 우리가 정말 콤플렉스가 없는 집단이라면, 최소한 지금과 같은 여유만 있었다면, 하찮은 가요 하나라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렇듯 깡그리 지우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서 진정한 발전이란 부정적 경험이라도 소중하게 껴안고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반쪽만 남게 되고 궁극엔 배울 것이 없는 왜소하고 초라한 역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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