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달래준 손때 묻은 소장본… 너만이라도 고향으로 가렴
내 어린 시절 이야기 고스란히 담긴 책
자신의 책 구경 못한 류원무 선생에 보내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내게 깊은 인상을 준 동화 '해란강의 아이들'의 작가 류원무 선생
무릇 시간이라는 것은 물이 흘러가 듯 흘러가 버린다. 그러나 그 시간의 순간순간이 맛으로 감쳐올 때가 있다. 중학교 시절 대구에서 유학하던 나는 방학이 되어 고향에 가면 그 시간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나로 하여금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리게 하던 고향산천의 풍경, 냄새, 공기, 정다운 사람들…의 총체적 느낌이 곧 '시간의 맛'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연변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시간의 맛이었다. 이미 우리의 고향에서 느낄 수 없는 고향의 맛을 그곳에서 느꼈던 것이다. 그 맛을 자극하는 핵심은 역시 고향사람들 같은 그곳 사람들이었다.

나는 한 스무 해 전에 이미 그 맛을 느끼게 하는 한 권의 동화책을 읽었다.

'해란강의 아이들'.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너무 환상적이고 화려한 서양풍의 동화에 길들여진 나에게 극적 긴장이 없는 순수 소박한 이야기는 강한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책의 표지
어느 봄날 용정의 소학교 4학년 아이들이 여자 선생님과 함께 모아산으로 소풍을 간다. 산 위에 오르니 저 멀리 연길 시내가 보인다. 말썽꾸러기 소년 둘이 아직 가보지 못한 도시 공원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연길까지 간다. 공원 입구에서 시계를 주워서 주인을 찾기 위해 시간을 보내다 날이 저물고 말았다. 한편 아이들을 찾아 산 속을 헤매던 선생님은 제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마침내 아이들이 돌아오자 혼내줄 생각을 잊어버리고, 끌어안고 엉엉 울어버린다.

내 어린 시절의 일들이 마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았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그 시절의 세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우리 사회 또한 그러한 과거의 모습을 살뜰히 지워버렸다. 그러나 그 세계가 두만강 저 너머에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큰 위로였고, 선망이었다.

만주에 갈 때마다 '해란강의 아이들'을 쓴 '류원무'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마침 지난 여름 연길에서 그곳 소설가 우광훈 선생과 함께 그를 만났다. 역시 인정이 많아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벌써 칠순을 넘긴 나이였지만 아직 건강해보였다. 함경남도 신흥 태생의 이민 일세대인 그는 '장백의 소년'과 같은 장편 동화, 소설, 변역까지 많은 책을 남겼다.

나는 만나자마자 '해란강의 아이들'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처음에는 번역 동화를 쓰다가 한족도 몽골족도 자신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민족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창작을 했다고 말했다. 소학교 교사인 부인에게 재미있는 경험들이 많이 있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호'란 학생이 장래희망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다른 아이들이 장군이니, 비행사니 기술자니 등을 말하는데 '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해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책을 구경도 못했다. 그것은 어수선했던 그 시절 한국의 출판사가 해적판으로 출판한 것이었다. 그러니 작가에게 책은커녕 원고료도 지급될 리 없었다. 게다가 그 책을 출판한 '남녘' 출판사는 망해버린 지 오래여서 책마저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는 헤어질 때 나에게 자신이 쓴 책을 여러 권 건네주면서 '해란강의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선뜻 약속했다. 한국에 와서 여기저기 수소문했으나 찾기가 어려웠다.

아, 하는 수 없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손때 묻은 책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나는 그 책을 수없이 읽었고, 가르치는 아이들이나 집의 딸애에게도 읽게 해서 그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했지만, 해란강의 아이들을 내 책장에서 떠나보내기는 정말 싫었다.

하지만 내게 감동을 줬던 그 책을 아직은 시간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고향 해란강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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