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햇살 아래 멱감는 아이들로 기억되는 금단의 장소
두만강 내려다 보이는 북한의 관문
'김하기 월북 사건' 일어난 곳이기도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지금도 그때처럼 한 무리의 아이들이 두만강에서 멱을 감고 있다.
조선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고 다시 험준한 고개를 넘어가면 비로소 넓은 오랑캐의 땅이 나왔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언제부터 그 고개를 오랑캐 고개라 했다. 상대(만주 쪽 사람들)를 비하하는 말인데도, 아니 이미 오랑캐의 나라가가 된 현재까지도 오랑캐 고개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이 아이러니다.

나는 오랑캐 고개를 두 번이나 넘었다. 옛날 조선 사람들이 넘은 것과는 반대로 넘어간 것이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1996년 사상 처음으로 부산소설가협회와 부산작가회 합동으로 연변작가협회와 교류를 가졌다. 명분은 '두만강 여울소리, 낙동강 갈대소리'라는 합동문집 출판기념회였지만 사실상 만주유람 여행이었다. 당시는 해외여행이 아직 생소했기도 했지만 공산주의 국가이면서 우리 역사의 무대이기도 했던 만주에 간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심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선지 문인들 여행사상 전무후무한 9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같이 떠났다. 자유분방한 작가들인지라 처음부터 곳곳에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해 연길에 도착한 날 저녁에 이르러서는 거의 통제가 불가능했다. 결국 그날 저 유명한 '김하기 월북'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김하기는 낮에 용정과 윤동주 생가까지 왔다가 거기서 오랑캐 고개를 넘으면 두만강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날 저녁 술김에 택시를 타고 그 고개를 넘고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고 말았다.

그때 그 여행의 기획자였던 나는 혼자 남아 이곳 사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오랑캐 고개를 처음으로 넘어갔었다. 한 여름 낮의 삼합은 조용하기가 그지없었다. 일행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은 나에게는 그 조용함이 공포로 다가왔다. 그가 건너간 강변으로 갔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국경의 경계도 없이 멱을 감고 있었다. 정오 무렵이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투명한 강물 위로 내리쬐는 햇살은 참으로 정갈했다. 그 평화로운 분위기가 오히려 내게는 엄청난 공포와 외로움으로 엄습해왔다.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그리고도 나는 엄청난 사건의 뒤처리(사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도 불사한 채 보름을 더 만주 땅을 헤매고 다녔었다. 귀국하는 그날 밤 9시 뉴스에서는 아직도 그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그것이 벌써 10년보다 긴 세월이 흘렀다. 그때 월북한 그는 중국으로 추방되었다가 국내에서 일년 반 감옥 생활을 했고, 몇 년 전에는 작가회의 남북교류단 일원으로 정식 북한을 방문하기까지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2003년 여름에도 오랑캐 고개를 넘어갔다. 용정에 갔을 때 마침 부산의 민족미학연구소에서 용정시 후원으로 삼합에서 탈춤공연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오랑캐 고개를 다시 넘었다. 망강대(望江臺)에 오르니 회령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두만강이 굽이쳐 흐르는 회령은 산수가 수려한 곳이었다. 마을에서는 풍성한 잔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귀해서 입에 대기도 어려운, 그쪽 특산물인 송이버섯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공연 뒤 함께 음식과 술을 나누어먹고 노래도 부르며, 잔치는 진행되었다. 거기도 젊은이들은 도시나 한국으로 빠져나가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인정으로 자꾸 들이미는 술잔이 고통스러워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와 두만강변으로 갔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십여 년 전이나 다름없이 국경 경계도 없이 강물에 멱을 감고 있었다. 그때도 정오 무렵이었다. 햇살이 머리 위에서 투명한 강물 위로 쏟아지고 있었고, 아이들은 여전히 멱을 감고 있었다. 공포와 외로움이 뱀허물처럼 벗겨진 강변은 한층 투명했고, 한층 평화스러웠고 한가해 보였다. 그 사이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생각하면 억울한 것은 그저 강물처럼 무심히 흘러가버리는 세월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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